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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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경험에 의한 이야기가 아닐까 궁금할 때가 있다. 소설이라는 것이 허구의 세계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현실처럼 너무 완벽할 때, 경험치가 없다면 알 수 없는 구체적인 장면을 마주할 때 그런 생각을 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 작가나 지인의 경험이 소설에 녹아들었을 것이다. 소설이란 게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낯선 세계를 그리는 건 아니니까. 요즘엔 SF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종종 받는다. 그래서 소설과 현실을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다.

 

한 권의 소설을 읽는 일은 그저 재밌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소설을 읽는 일은 세상을 읽는 일이 되었고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되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사유가 그곳에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독자는 소설을 통해 세상과 접속하고 소통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를 생각할 때 고 박완서 작가는 소설은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나는 작가의 소설을 전부 읽지는 못했다. 겨우 몇 권 읽었고 곁에 두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시대의 풍경과 그것을 살아내는 이들의 마음을 소설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만나지 못한 글들을『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로 만난다. 자신이 쓴 소설과 산문, 동화, 여행기를 소개하는 글이다. 때로 아쉽고 안타까운 심정을 솔직하게 들려준다. 글을 쓸 때의 상황과 출판 당시의 복잡한 마음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제목만으로도 소설과 산문집은 익숙한데 동화집은 잘 몰랐다. 67편의 작가의 말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이 책을 통해서야 이렇게 많은 글을 쓰고 책으로 냈다는 걸 알았다.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그의 글을 읽고 기다리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작가의 말은 뭔가 사적인 영역에 초대받은 기분이다. 한 권의 소설을 압축하여 들려줄 때도 있고 개인적인 일상을 소개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은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기분을 안겨준다. 정확하게 그 형체를 설명할 수 없지만 말이다.

마흔이라는 나이에 등단을 하고 책을 내는 일이 작가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겠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꾸준하게 글을 쓰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글이 도무지 안 써지고 절망스러운 때에 『나목』을 펴보는 버릇이 있다는 작가의 말은 첫 소설에 대한 깊은 애정과 함께 어떤 고단함이 전해졌다. 그런가 하면 이런 글은 지금 문학에 속한 이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지 않을까 싶다. 끊임없이 쓰고 고치고 또 써야 하는 작가에게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듯하다. 어디 문학뿐일까. 누구나 살면서 절망하고 한계를 느끼는 순간에도 자신을 다잡을 수 있는 글로 다가온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억누르는 온갖 드러난 힘과 드러나지 않은 음모와의 싸움은 문학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의 싸움을 걸 상대의 힘이 터무니없이 커졌을 때라든가 종잡을 수없이 간교해졌을 때도 그런 싸움을 중단하거나 후퇴시켰던 적은 없고, 그럼으로써 문학한다는 게 본인이게만 보이는 훈장처럼 스스로 자랑스러울 수 있지 않나 싶다. 52쪽, 『살아 있는 날의 시작』발문에서

전쟁이라는 시대의 수난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일상을 담담하게 전하는 작가의 산문을 읽으면서 편안하고 포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흙을 만지고 손자의 밥을 챙기고 계절의 기록하는 일상들. 선명하지 기억을 소설로 복원해 꼭 세상에 내놓고 싶었던 소망, 그런 작고 소소한 모든 것들은 작가의 말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어쩌면 독자가 원하는 건 문학평론가의 어려운 해설이 아닌 허심탄회하게 내뱉는 그런 말들이 아닐까 싶다. 출판사를 바꾸어 낸 소설과 개정 보정판을 내면서 자신의 소설을 읽고 지난 시절을 가만히 떠올렸을 그를 상상해본다.

 

한때는 글의 힘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것처럼 치열하게 산 적도 있었나 본데 이제 와 생각하니 겨우 문틈으로 엿본 한정된 세상을 증언했을 뿐이라는 걸 알겠다. 138쪽, 『그 여자네 집』서문에서

한 권의 책을 시작할 때 만나는 작가의 말은 책에 대한 기대를 안겨주고 마지막에 만나는 그것은 짙은 여운을 남긴다. 한 평생 쓴 책들의 시작과 끝을 모아 이렇게 책을 낼 수 있다는 기쁨을 독자인 우리만 누려서 안타깝다. 고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정리하고 표지를 정리해 한눈에 볼 수 있는 즐거움도 안겨주는 책이다. 자신의 책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일이 작가의 말이라고 한다면 정성을 들이지 않은 책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래도 67편의 말 중에서 지금 소개하고 싶은 걸 하나만 꼽자면 『살아 있는 날의 소망』의 서문이다.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사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같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89쪽, 『살아 있는 날의 소망』책머리에서

 

문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도 같다고 생각한다. 문학으로 이어진 우리가 공감하고 연대하는 순간 세상은 좀 더 선한 쪽으로 흘러가 단단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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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2-05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책 앞과 뒤에 담긴 글만 모아서 책 한권을 만들다니, 그것도 괜찮네요 저는 동화 예전에 만났어요 보기는 했지만 다 잊어버렸군요 예전에 전쟁이 배경인 소설을 보면서 한 사람 이름이 자꾸 나오는구나 하면서 본 게 생각나네요 이제는 그런 게 연작소설이라는 걸 알고, 박완서 님 경험이 담겼다는 걸 아는군요 그때는 거의 몰랐습니다 소설에 자기 경험을 많이 쓰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요 그렇다 해도 그걸 보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도 하는군요


희선

자목련 2020-02-06 09:40   좋아요 1 | URL
희선 님은 동화를 만나셨군요. 저는 소설과 산문만 만나서 동화를 많이 쓰신 줄 몰랐어요. 말씀처럼 작가의 말로만 엮인 구성도 흥미로웠어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심난한 일상입니다. 희선 님, 건강 잘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