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잔상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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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로로 작가 장혜령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녀의 글을 읽었고 종종 장혜령 시인을 검색해보았다. 시인의 첫 시집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마주한 그녀의 글은 시가 아닌 산문이었다. 그것도 사랑에 관한 이미지들. 내 안에 간직된 사랑의 이미지는 너무도 흐릿하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에 내가 원하는 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의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은 삶이며 글이었고 고독이었으며 열망이었다.


그저 쓰고 고친 것들, 사랑에 대해 쓰기 시작했지만 막상 마침표를 찍고 읽었을 때에는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를 것들은 아닐까, 내게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모든 글이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향한 기억과 몸짓이라 해도 맞았고, 기억해야 하는 순간을 기록함으로 간직하는 당연한 수순 같다고 할까. 하지만 그 안에 서린 어둡고 추운 절망의 기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쓰고자 했으나 쓸 수 없고 쓰고 있지만 만족하지 않았고 자꾸만 길을 잃은 것 같은 두려움이 전해졌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쓰는 걸 멈추지 않았고 보통의 날에 마주한 이들의 사랑을 포착했다. 그 사랑의 아픔을 목격하고 때로 미래를 예측한다. 때로는 사랑이 온 줄도 모르고 떠난 뒤에야 발견하기도 했다.

그녀의 글은 사랑을 꺼내기에 충분하다. 사랑으로 인해 눈부셨던 과거의 순간, 사랑이 전해준 고통과 상실에 대해 아파했던 밤들이 펼쳐지는 건 당연하다. 그러다 다른 선택과 결정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한 상상하기 하고 만다. 처음 사랑이라고 맹신했던 나의 몸짓이 선명한 사진처럼 내게 달려든다. 그러니 이런 문장을 만났을 때 반갑고 신기하면서도 씁쓸했다. 아무렇지 않는 문자 하나에 설레던 일, 문자 하나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던 시절이 떠올랐기에. 아직 폐기하지 못한 연인의 편지를 읽는 것만 같았다.

안부를 묻는 일.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 똑똑, 문을 두드리고 세계로의 진입을 간청하는 일. (62쪽)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은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 사랑하는 사람, 그는 사랑받는 사람이 자기 안의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일 뿐임을 아는 사람이다. 무수한 사랑과 이별 끝에도 자기 내면에 결코 사라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67쪽)

시나 소설과는 다르게 산문에서는 작가의 숨결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나만의 언어로 전하고 싶은 욕망, 세상과 닿고 싶은 간절함이 보인다고 할까.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지만 수없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는 걸 안다. 하나의 이미지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글로 쓴다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불투명한 희망을 보고 글을 쓴다는 건 고통이다. 아니다, 쓴다는 게 희망일 수도 있다. 그녀가 오랜 시간 쓴 글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왔지만 사랑이 아니라 그녀 본연의 모습은 아닐까. 그녀가 쓴 글을 통해 우리는 그녀를 만난다. 그녀가 본 영화와 그림을 상상하고 그녀가 찍은 사진을 통해 그녀의 일부를 인식한다. 그리고 기억 저편에서 걸어오는 나를 만난다.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던 삶을 생각한다. 같은 방에서 잠이 들고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지금 서로를 기억할까. 세상의 끝에 서 있는 것 같았던 시절, 고요만이 나를 어루만지던 시절과 포옹한다. 이제는 가만히 등을 두드리며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었다는 말을 들려준다. 

 

낯선 사람과 한방을 쓰고, 또 다른 방으로 옮겨가며 이 삶을 어디까지 전진시킬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았던 방들을 연결하면 그건 얼마나 긴 길이일까. (81쪽)

사각의 방 한 모서리에 우두커니 웅크려앉아 있던 적이 있었다. 오후 두시의 햇빛이 얼굴에 쏟아질 때까지 엎드려 잠을 잔 적이 있다. 빛 외에는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시간에 따라 기울어지고 방을 가득 채웠다가 이윽고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125쪽)

그런 시절을 통과했고 여러 사랑을 지나왔다. 사랑이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다른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우리는 이제 안다. 어쩌면 이런 글을 통해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저마다의 사랑이 품었던 빛과 향기를 우리는 잊고 살아왔다고. 끊임없이 사랑을 원하고 말하지만 사랑은 여전히 어렵다. 안다고 믿었지만 점점 더 멀어지는 심연처럼,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는 제대로 볼 수 없는 당신의 표정처럼. 온통 사랑을 쓰고 말하고 외치고 쏟아내는 세상에서 사랑하며 사는 삶은 더욱 고단한 일이다.

이 세상에는 인간인 내가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사랑이 있으며, 당신이 있으며, 운명이 있다. 그러므로 비밀로 남겨둬야 하는 것이 있다. 다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비밀을 지킴으로써 당신이 내 안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어쩌면 씁쓸하겠지만,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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