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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평점 :
좋아하는 작가들이 한데 모였다. 그 중심엔 고 박완서 작가가 있다. 강화길, 권지예, 김숨, 김성중, 백수린, 백가흠, 윤고은, 윤이형,
정용준, 이기호, 이장욱, 정세랑, 한유주 등 29명의 작가가 『멜랑콜리 해피엔딩』속 짧은 소설로 박완서를 추모한다. 덕분에 책 한 귄에
담긴 29개의 짧은 단편을 만나는 즐거움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29편의 소설은 일상의 소소함을 소재로 삼았다. 그래서 어떤 소설이 아닌
수필처럼 다가오기도 했고 어떤 소설은 작가의 일상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나는 눈에 들어오는 작가, 그러니까 29명 가운데 그래도 먼저 읽고
싶은 작가의 소설부터 펼쳤다. 공교롭게도 모두 여성 작가였고 그들의 소설 속 인물은 우리 주변의 누군가와 닮아 그들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20대 청춘의
불안과 두려움을 담담하게 묘사한 백수린의 「언제나 해피엔딩」은 조카나 내가 지나온 그 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하고 싶은 일들과 되고 싶었던
미래가 있었지만 어느 순간 현실에 만족하고 이마저도 잃어버릴까 내색하지 못하는 마음을 소설 속 조교로 일하는 민주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 정말 재미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중년의 여교수 박 선생과 짧은 대화를 나눈다. 과거 박 선생이 영화관에서 검표하고 안내하는 아르바이트를
한 이야기를 들으며 민주는 위로를 받는다.
“……괜찮아지나요?”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민주의
질문에 박 선생은 아무런 말 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다시 영화가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백수린,
「언제나
해피엔딩」)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지만 언제나 불안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인생은 길고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은데 왜 우리는 불행을 걱정하고 사는 것일까. 괜찮다는 말 한
마디가 필요한 우리를 가만히 안아주는 걸 느꼈다. 동시에 마음속에서 뭔가 몽글몽글 피어나고 있었다. 경력단절의 주부 지혜가 재취업을 하면서
경험하는 분노와 좌절을, 그리고 전업주부 슬기에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섬세하게 그린 「여성의 신비」는 동시대를 살아내는 엄마라는 이름에
매달린 무게를 실감한다. 어쩔 수 없는 서로의 사정을 무시한 채 현재의 단면만 보고 서로를 오해한 지혜와 슬기는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며 커지는 상실감을 요리로 채우려 했던 슬기는 당당하게 재취업에 성공한 지혜가 부러웠다. 반대로 지혜는 완벽하게 살림과
육아를 해내는 슬기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마음이란
얼마나 허약한지. 한 몸으로 여러 개의 역할을 하며 살아내야 하는 처지도 같고, 능력만큼 대접받지 못하는 것도, 언제나 시간이 부족해 발을
구르는 것도 똑같은데. 너의 과거가 내 현재이고, 내 현재가 다시 너의 미래가 될 수도 있으며, 그런 서로에게 굳은 의리를 느끼는 것도
사실인데. 그런데 끝없이 서로의 현재를 비교하고 다른 점을 찾아내려 한다. (윤이형, 「여성의
신비」)
엄마의 역할은
무엇일까. 가정에서 여성의 일은 누가 지정하는가. 오랜만에 만난 조경란의 「수부 이모」는 형제를 위해 희생하는 수부 이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혼자서 악착같이 모은 재산을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고 나눠주다 암에 걸린 수부 이모. 살만하니까 이런 일이 생긴다는 수부 이모의 말에 나는
목메어 울고 말았다. 큰언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수부 이모와 같은 상황이 아니었는데. 자매를 잃은 슬픔이 터져 나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다. 소설은 이처럼 수많은 감정을 불러온다. 그런가 하면 소설이기에 만날 수 있는 기이한 상상도 있다. 전날 마신 술로 인해 안경을 어디다
벗어놓은지 모른 채 거래처 직원을 만나러 나가는 임현의 「분실물」엔 화자뿐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이 안경을 잃어버린 이들이다. 술자리에서 점을
봐주는 할머니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아서 정말 연기로 변해버리는 기이한 일을 그린 정용준의 「연기가 되어」도 인상적이다. 만약 내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떨까, 상상조차 하기 싫지만 말이다.
심하게 다툰
부부가 화해하는 방법이 일곱 장에 만 원하는 돈가스를 사 오란 문자를 주고받는 일이라는 김성중의 「둥신, 안심」, 고3 수험생 딸을 둔
엄마가 입시 전형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다룬 「어떤 전형」, 술기운에 카드로 29만 9천 원을 주고 산 레고를 다음 날 아들과 함께 환불하러
가는 부자의 모습을 그린 이기호의 「다시 봄」은 일일 드라마 속 주인공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우리네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콩트 같은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웃기도 하고 짠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29명의 작가들이 모두 박완서 작가를 생각하고 소설을 썼듯 독자의 마음도 그러할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에서 만났던 이들이 『멜랑콜리 해피엔딩』에 여전히 살고 있었다. 달라진 듯 달라지지 않은 우리의 일상이 속상하면서도 기쁘기도
했다. 복잡다단한 인생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