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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18 ㅣ 소설 보다
박상영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평점 :
품절
계절마다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봄에는 불쑥 윤대녕의 단편 「보리」와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생각난다. 소설의 내용보다는 제목이 주는 이미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이 아닌 어딘가에 대설주의보가 발령된 이 계절에는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를 다시 펼치고 싶다. 소설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장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로맨틱한 일이다. 우리의 일상이 소설처럼 펼쳐지는 건 아닐지라도 말이다.
박상영, 정영수, 최은영의 단편을 만날 수 있는 『소설 보다 : 가을 2018 』은 합쳐진 계절을 불러온다. 함께 계절을 보내고 맞이하며 즐겼던 이들을 말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죽이 맞아 잘 어울리던 동기, 단순한 만남에서 맺어진 다정한 사람, 안부 문자를 보내지만 답을 보내지 않는 친구. 그들과 보낸 시절이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세 편의 소설 속 인물들이 어떤 공통점을 지닌 건 아닌데도 마치 소설 그들이 하나의 인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박상영의 「재희」는 재기 발랄하며 지나치게 명랑한 소설이었다. 바로 내 앞에서 소설의 제목이자 화자의 친구인 재희에 대해 들려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게이인 화자와 여자 동기 재희가 동성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는 이야기. 막역함은 동거를 할 정도다. 둘 사이에는 어떤 비밀로 존재하지 않고 아무런 사건(?)도 발생할 수 없는 진한 우정이 존재한다. 수많은 연애의 종지부를 찍고 결혼하는 재희를 바라보는 화자가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며 눈물을 흐리는 장면은 묘한 감정을 불러온다. 이상한 건 내가 그들을 잘 모르는데고 그 감정을 알 것 같다는 거다. 이것이 소설의 힘은 아닐는지.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것을 복기하는 일은 과거를 기억하거나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일이니까. 그것은 과거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 아니 과거를 새로 살아내는 것과 같으니까. ( 정영수, 「우리들」중에서)
‘나’와 ‘너’가 아니라 ‘우리들’이 되어 보낸 시간들을 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혹은 관계의 깊이에 대해 돌아보게 만드는 정영수의 「우리들」은 여운을 남겼다. 화자인 나는 연인인 현수와 정은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일에 동참한다. 둘 사이에 흐르는 믿음과 사랑에 반하게 된다. 그들이 얼마나 멋진 이들인지,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단단하지 그들을 지켜보는 일만으로도 즐겁다. 하지만 둘 사이가 불륜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작업은 중단되고 나는 혼란에 빠진다. 정은과 현수를 통해 나는 헤어진 연인 연경을 떠올린다. 현수와 정은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과 둘 사이의 진실을 알았을 때 감정은 분명 같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과 만난 나눈 이야기는 사라질 수 없고 변할 수 없다. 우리가 되었던 시간들, 우리는 이제 우리가 될 수 없기에 서글프고 아프다. 너와 나의 관계가 무너질 때 우리로 속했던 누군가와의 관계도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기에.
어쩌면 최은영의 「몫」의 정윤과 희영, 해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90년대 대학의 편집부에서 만난 정윤 선배와 희영과 해진의 관계 말이다. 함께 토론하고 글을 쓰고 고치고 취재를 하면서 서로를 응원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시대를 읽고 해석하는 방법은 달랐다. 그러니 같은 길을 갈 수 없었고 우리들로 남을 수도 없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방향을 보았던 시간만이 남았을 뿐이다. 대단해 보였던 정윤은 결혼을 해서 유학을 떠나고 희영은 활동가 되었고 해진만이 글을 쓰는 삶을 산다.
글 쓰는 일이 쉬웠다면, 타고난 재주가 있어 공들이지 않고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당신은 쉽게 흥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럽고 때때로 제대로 쓰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 시기를 쓰는 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어갈 수 있다는 행복을 알기 전으로 당신은 돌아갈 수 없었다. (최은영, 「몫」 중에서)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을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최은영, 「몫」중에서) - 희영의 말
쓰는 삶은 기록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쓴다(기록한다)는 건 쉽고도 어렵다. 「몫」이란 한 글자에 담긴 의미처럼 말이다. 이 소설에 대해 조금 더 쓰고 욕심을 느낀다. 욕심만큼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는 한계를 절실히 느낀다. 안타깝게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