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0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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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을 잃어버린 것 같다. 시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내 안에 있는데 그 마음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딘가에 흘리고 주워 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훑어보기가 아니라 천천히 시집의 책장을 넘기며 나는 그런 생각을 붙잡고 있었다. 이병률의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를 읽으면서 나는 유독 ‘사람’이란 시어에 끌리고 있는 나를 보았다. 좋고 나쁨이 아니라 나는 사람을 노래한, 사람을 위로한, 사람을 말하는 시에 자꾸만 눈길이 머물렀다.

 

 이병률의 시를 많이 읽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의 시인들, 그 안에 그는 없었다. 여행 에세이 『끌림』을 만났을 뿐, 시는 잘 알지 도 못했다. 어쩌면 이번 시집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방송에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좋은 시는 무엇일까, 다시 생각한다. 자꾸만 읽게 되는 시,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시, 그런 시가 좋은 시 일지도 모른다. 우연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선인장을 이 시집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죽으면

 선인장이 하나 생겨나요


 그 선인장이 죽으면

 사람 하나 태어나지요


 원래 선인장은 널따란 이파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이 가시가 되었지요

 찌르려는지 막으려는지

 선인장은 가시를 내밀고 사람만큼을 살지요


 아픈 데가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 손을 올리는 성자도 아니면서

 세상 모든 가시들은 스며서 사람을 아프게 하지요


 할 일이 있겠으나 할 일을 하지 못한 선인장처럼

 사람은 죽어서 무엇이 될지를 생각하지요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살지요

 실패하지 않으려 가시가 되지요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죽지요

 그리하여 사막은 자꾸 넓어지지요 (「사람」전문)

 


  사람과 선인장이라니. 누구나 자신만의 가시를 가지고 살아간다. 가시로 방어를 하거나 가시로 존재를 증명하거나. 오래전 선인장을 보면서 나도 선인장처럼 가시를 꽃으로 피우기를 바랐던 마음의 한 조각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번엔 이런 시다.


 

 바람이 커튼을 밀어서 커튼이 집 안쪽을 차지할 때나

 많은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늘어져

 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을 때

 사람이 있다고 느끼면서 잠시 놀라는 건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들리는 흐르는 물소리

 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지진의 진동


 밤길에서 마주치는 눈이 멀 것 같은 빛은 또 어떤가

 마치 그 빛이 사람한테 뿜어나오는 광채 같다면

 때마침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


 잠시 비운 탁자 위에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거나

 멀쩡한 하날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

 누가 왔나 하고 느끼는 건

 누군가가 왔기 때문이다


 팔목에 실을 묶는 사람들은

 팔목에 중요한 운명의 길목이

 지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겠다


 인생이라는 잎들을 매단 큰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내 손에 굵은 실을 매어줄 사람 하나

 저 나무 뒤에서 오고 있다


 실이 끊어질 듯 손목이 끊어질 듯

 단단히 실을 묶어줄 사람 위해

 이 저녁을 퍼다가 밥을 차려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온다」 전문)


 

 「사람이 온다는 제목의 시를 읽으면서 정현종의 시 「방문객」을 떠올린다. 닮은 듯 다른 시.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란 마지막 연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이 시집에서 마주한다. 어떤 시는 혼잣말처럼 들리고, 어떤 시는 안부처럼 들리고, 어떤 시는 편지처럼 도착한다. 스치듯 지나가는 당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손을 꼭 잡은 것 같은 당신, 특정한 날에, 어떤 계절에 나를 기억하고 생각해 줄 것만 같은 당신.

 

 

 도시는 불빛이 많으니까 스스로의 빛도 필요하다

 바깥 불빛보다는 안쪽의 불빛에 의지해야 하므로

 감정도 필요하다

 

 지탱하려고 지탱하려고 감정은 한 방향으로 돌고 도는 것으로 스스로의 힘을 모은다 (「생활이라는 감정의 궤도」부분)


 

 바깥의 일은 어쩔 수 있어도 내부는 그럴 수 없어서

 나는 계속해서 감당하기로 합니다

 나는 계속해서 아이슬란드에 남습니다


 눈보라가 칩니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만이 혼자만큼의 서로를 잊게 될 것입니다 (「이별의 원심력」부분)

 

 숱한 날들을 꺼내 놓지 않아도 이 시집으로 다 전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랄까. 한 번도 말하지 못한 감정을 꺼내어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구겨지고 너덜너덜해진 감정을 말이다. 한 번쯤은 다시 만나고 싶은 당신이 생각나는 시집이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우습게도 그런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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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혹된 사상들 - 인류를 사로잡은 32가지 이즘, 개정증보판
안광복 지음 / 사계절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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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시대든 유행이 있다. 지난 유행은 세월이 흘러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사상이나 철학도 그런 게 아닐까. 안광복의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스쳤다. 하나의 시대를 이끄는 사상, 철학. 완벽한 사상은 존재하지 않기에 시대에 맞게 보완과 수정을 거쳐 새로운 사상으로 재탄생되기도 하니까.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시대에 따라 가장 대표적인 사상이 있었다. 그것을 토대로 인류는 발전하고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사상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다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저자 안광복은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32가지 사상(이즘)을 소개한다. 사상으로 시대를 읽는다고 할까.

 

 책은 정치, 철학 예술, 국가, 경제, 사회로 나누어 32가지 사상을 설명한다. 각 사상에 대해 시대에 맞춰 사상이 발생한 사회적 배경과 더불어 어떻게 활용하면 좋은지 현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러니까 독자는 32가지 질문을 받는 셈이다.

 

 공화주의, 계몽주의, 민주주의, 보수주의, 자유 민주주의, 사회 민주주의, 아나키즘, 포플리즘이란 사상을 통해 정치의 권력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준다.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하나씩 잘 정리된 사상을 통해 우리는 현 시대와 접목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살피게 된다. ‘모두를 위한 나라’를 지향하던 고대 아테네의 공화주의는 지금 우리가 갈구하는 목표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정치권에서 보수와 진보의 구도를 자유 민주주의와 사회 민주주의의 대립으로 정리하는 부분은 인상적이다.

 

 사회 민주주의자들에게는 정해진 정답이 없다.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평등, 더 많은 정의를 위해 연대하여 끊임없이 나아갈 뿐이다. 이를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손을 내미는 열린 자세와 가장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려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하다. (72쪽)

 

 철학 예술에 영향을 미친 사상은 무엇일까. 저자는 불안한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매달렸던 사상들, 낭만주의, 니힐리즘, 실존주의, 구조주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차례로 소개한다. 예술로 가장 활발하게 보여줬던 낭만주의, 니체로 대표되는 니힐리즘, 20세기 가장 뜨거웠던 포스트모더니즘은 학창시절의 기억을 불러온다. 우리가 끊임없이 니체의 철학을 공부하는 건 이런 글과 맞닿은 게 아닐까 싶다.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한 세상,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간절한 다짐과 투쟁처럼 보여 안쓰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죽음으로 끝날 우리 인생은 허무하다. 그러나 허무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무엇이건 될 수 있다. 세상은 허무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할지, 어떤 인생을 살지는 오롯이 우리의 자유에 달렸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더 나아지려는 내 안의 욕망을 충실하게 사는 삶,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긍정의 니힐리즘이다. (115쪽)

 

 이제는 다양한 사상을 토대로 만들어진 국가는 좋은 나라로 성장하고 발전한 것인지 살펴봐야 할 차례다. 제국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프런티어 정신, 대동아 공영권, 마오이즘, 주체사상을 통해 과거 한 나라를 지배하고 통치했던 사상이 현재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말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제국주의는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제국주의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다국적 기업, 세계적인 기업의 횡포, 자본주의와 겹쳐 보인다. 같은 민족을 외치며 뭉치고 애국으로 이어졌던 민족주의는 파시즘이라는 괴물을 만들었다. 파시즘, 마오이즘, 주체사상은 강력한 독재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지난 시절 그들만의 사상으로 세상을 지배하고자 했던 이들, 어떤 사상이 가장 훌륭했다고 할 수 있을까. 가장 적합한 사상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정치가 안정되었다 해서 좋은 국가가 완성되는 건 아니다. 경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니 경제활동을 위한 다양한 이념들이 등장하는 건 당연하다. 물건을 생산하고 수익을 남기고 투자를 하는 자본주의,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분배하자는 공산주의, 우선을 잘 살아야 한다는 목표로 개발만 외치는 과거 우리의 모습인 개발 독재, 충과 효를 중시하던 유교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는 신유교 윤리, 규제가 완화된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창조적 혁신의 기업가 정신은 경제의 흐름을 정리한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걸 상기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자인하기도 하다. 돈만 된다면 온갖 못된 짓을 서슴지 않고 벌인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중노동을 시키는 잔혹한 짓이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돈 앞에서는 가치와 양심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모습이다. (247쪽)

 

 신자유주의는 빈부 격차를 벌려 놓았다. 반면에 실업자는 늘고 복지 정책은 줄었다. 힘센 기업 몇몇이 시장을 휩쓰는 독과점도 늘어나는 중이다. (290쪽)

 

 이토록 치열한 세상,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할까? 저자가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사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직시하게 만든다. 다문화 다민족의 시대를 살면서 뽑아내지 못한 오리엔탈리즘,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를 위한 페미니즘, 환경을 생각하고 다음 세대와 공존해야 할 것을 기억하라는 생태주의, 가장 이상적인 체제를 꿈꾸는 관료주의.

 

 성의 차이는 오랫동안 차별의 근거가 되어 왔다. 이제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에 대한 차별을 넘어,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324쪽)

 

 이 한 권의 책으로 마주하는 32가지 사상(이즘)으로 역사와 사회를 전부 읽을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와 맞춰 철학과 사상을 접목시킨 부분은 내용은 무척 유용하다. 가장 좋은 사상, 최고의 사상은 어디에도 없다. 단숨에 더 나은 세상으로 도약할 수 없다. 그 사상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시키는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사상에 대한 이해와 가치를 알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렵고 재미없다고 생각한 철학과 사상에 대한 입문서로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은 만족스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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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02-16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것이든 다 좋은 것만 있지 않겠지요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를 알고 무엇이 좋은지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삶이 덧없기에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다니 좋은 말이네요 덧없다고 막 살면 안 되겠지요 문제가 있는 것도 고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것도 빨리 되지 않고 천천히 되겠지요 조금씩이라도 좋아진다면 좋겠습니다


희선

자목련 2019-02-21 14:42   좋아요 0 | URL
네, 덕분에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사상을 접할 수 있었어요. 이러한 사상들로 인해 좀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하지 않을까 기대도 하고요.
 
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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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로 성공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을 남긴 것일까? 그렇다면 <절규>를 그림 화가 뭉크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절규’란 단어를 듣자마자 떠올리는 건 그의 그림이니까. 노르웨이의 국민작가 뭉크를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로 만났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무엇이 그를 불안으로 이끌었는지 유성혜가 들려주는 뭉크의 삶과 사랑, 그리고 인생.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기억이란 감정과 생각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기억을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이 화가의 뜻대로 ‘해석’되고 ‘편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뭉크의 그림이 바로 그러했다. <절규>에서 배와 난간, 후경의 두 사람이 단순히 ‘보이는 것’이라면, 역동적으로 빠르게 휘몰아치는 듯한 자연 풍경과 공포에 떠는 중심인물은 자신이 보고 경험했던 강렬한 기억을 시각화 한 것이었다. 화가로서 그는 한발 물러선 관찰자가 아니라 주인공이자 화자話者였다. (13~14쪽)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란 말은 뭉크의 그림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 소개된 작품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 그것은 뭉크가 무엇을 본 것일까, 상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다섯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한 뭉크에게 죽음은 언제나 두려운 것이었다. 아내를 잃은 상실감으로 인해 뭉크의 아버지 크리스티안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병약했던 뭉크는 학교를 그만두고 방에서 혼자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이때 정물이나 창밖 풍경을 그렸다. 어쩌면 이때 느꼈던 고독과 외로움이 그의 작품의 바탕이 된 건 아닐까 싶다. 뭉크의 예술을 완성시킨 노르웨이의 자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어둠이 일찍 찾아오는 노르웨이, 그 차가움 속에서 뭉크를 만나는 일은 그곳을 여행하는 일이기도 했다. 저자 유성혜는 뭉크가 살았던 노르웨이의 도시를 이동하면서 뭉크가 영향을 받은 이들을 언급하고 그가 사랑한 여인에 대해 들려준다. 점점 화가로 인정받고 성장하는 뭉크의 예술의 세계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하나의 작품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했을 때 달라지는 모습, 그림을 그릴 당시 뭉크의 심리적 상황까지 말이. 독자는 뭉크의 그림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림과 함께 뭉크가 노트에 기록한 글을 소개하고 있어 더욱더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무슨 본질을 신경 써야 하나, 내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그리고자 한 것은 힘없는 움직임이다. 떨리는 눈꺼풀, 속삭이는 듯한 입술, 그녀는 숨을 들이쉰다. 마치 살고 싶다고 말하듯. -뭉크의 노트(MM T 2771, 1890~1891)

 

 뭉크가 살던 시대에는 화가들이 그림에 담을 모티브, 주제, 화풍, 기법에 집중했을 뿐 그림을 어떻게 전시하고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뭉크는 그림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림 하나하나가 모여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어떻게 배치해야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이도를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뭉크는 그림에서뿐만 아니라 전시 기획과 디자인에서도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였다. (223쪽)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그림들을 그릴 때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나는 그 그림들을 모아보았을 때, 각각의 그림들이 내용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그림들이 전시되자 그림들 사이에서 하나의 울림이 터져 나왔고, 그림들이 따로따로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교향곡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생의 프리즈’를 그리게 되었다. -뭉크의 노트(MM N 46, 1930~1931)

 

 뭉크의 그림과 인생에 대해 읽노라니 자꾸만 고흐가 어른거렸다.(저자도 언급했지만) 비슷한 세대에 활동한 화가라 그랬을까. 사랑에 대한 갈증, 연인에 대한 상처, 고독, 그림에 대한 열정이 닮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뭉크가 어머니와 일찍 이별하지 않았다면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그랬다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림을 그렸을까. 화가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의사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를 통해 뭉크의 많은 그림를 마주할 수 있어 즐겁고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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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02-15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뭉크 하면 절규밖에 떠오르지 않아요 그것 말고도 많은 그림을 그렸을 텐데... 절규는 참 어두운 느낌이에요 제목부터 그렇군요 어머니가 일찍 죽고 아버지는 자기 슬픔에만 빠졌다니... 아버지라도 뭉크와 다른 아이를 잘 돌봤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군요 어머니가 일찍 죽지 않았다 해도... 벌써 일어난 일은 바뀌지 않지요 어린시절에는 그림을 그리고 쓸쓸함을 달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희선

자목련 2019-02-15 17:14   좋아요 1 | URL
사실 저도 그랬어요. 이 책을 통해 뭉크의 다야한 작품을 만날 수 있어 좋았어요. 불우한 가정환경이 예술로 확장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무척 안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 감정 오작동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실천 인문학
오찬호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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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멀리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고 수군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숨 쉬고 살아가는 지금 여기가 얼토당토않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사회는 좋아진다. (218쪽) 


 어떤 일이든 그 일의 주체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대체로 나쁜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타인의 경우 동요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거나 그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자세히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뉴스에 나온 대로 믿거나 내게 일어나지 않은 것에 조용히 안도할 뿐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벌어지면 격하게 감정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내 경우를 예로 들자면 이렇다.

 층간 소음에 대해 한 번도 걱정하지 않았고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밤늦게 쿵쿵거리면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래층에서 층간 소음 때문에 벨을 눌렀을 때 너무도 화가 났다. 우선 죄송하다고 조심하겠다고 인사를 하고 소음 발생 시간을 물었다. 돌아오는 답변은 이랬다. 항상 그렇다는 것이다. 뛰는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피아노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답을 할 수 있을까.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 민원이 들어온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답은 더욱 놀라웠다. 아래층에서 관리실에 전화를 했고 괸리실은 그것을 전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아래층 사람이 올라온 것이다. 항상 층간 소음으로 힘들다는 아래층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제대로 일을 하지 않은 관리사무소에 더욱 화가 났다.

 

 사회학자 오찬호의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읽으면서 불쑥 그때 일이 떠올라 글이 길어졌다. 층간 소음에 대해 내 집에서 내 맘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사람들의 인식에 놀라웠다. 아파트는 공동주택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약자에게는 강하게 강자에게는 약하게, 대한민국의 인식이 아닐까 싶다. 최저임금의 인상으로 직장을 잃은 이들의 점거 현장을 다룬 뉴스를 보면서 씁쓸했다. 평창 동계 올림픽 국회의원의 특혜 응원 논란도 그러했다. 지켜야 하는 규칙을 무시하고 최저임금 인상으로 꼼수를 부리는 기업.

 

 오찬호의 글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우리 사회의 병폐, 그러니까  권력과 힘을 내세워 여전히 이어지는 차별, 곳곳에 만연한 혐오, 걷잡을 수 없는 폭력, 예외적이라는 말로 무시하는 기준.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는 현상이니 그 대책을 이야기하라고 제안할지도 모른다. 알고 있다고 해서 그냥 그대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고쳐야 할 것은 고치고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할 것이다. 단 한 번에 좋아질 수는 없다. 살아오면서 우리는 다 경험했다. 틀렸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바로 그것을 표현해야 하며 경청해야 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좋은 책이며 알찬 책이다. 많은 이들이 읽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돌아보면 좋겠다. 우리 사회를 제대로 읽고 공부하는 방법, 어렵지 않다. 쉽고 친근하게 말하는 사회학자 오찬호의 책으로도 충분하다.

 

 공감의 시작은 타인의 상황에서 쉽사리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공감의 실천은 “나도 네 마음 안다”는 기만적인 사람이 되길 거부하고, 아픈 것도 서러운 사람에게 “어쩌다가 그랬어?”라고 묻는 황당한 사람이 되지 않는 거다. “내가 감히 너의 슬픔을 알 순 없겠지만, 노력할게”라고 말하면서 상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성찰적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지, 입으로만 ‘공감’을 말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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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02-15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사람이 잘못된 것을 알고 고치려고 해야 할 텐데 그게 쉽지 않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어떤지를 더 잘 알면 좋겠네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많아야 좋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의 잘못만 보려 하지 않아야겠네요

밑에 층에서 늘 소리가 들렸다고 하다니, 소리가 난다고 해서 꼭 바로 위층에서 나는 건 아닐지도 모를 텐데... 저도 잘 모르지만 그럴 것도 같아요 그 뒤로는 어땠는지...


희선

자목련 2019-02-15 17:15   좋아요 1 | URL
우선은 나부터 고치려고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소음에 대한 민원으로 밤에는 세탁기를 돌리거나 하는 일을 하지 않아요. 이사를 간 것 같기도 하고요. ㅎ
 
콜센터 - 2018 제6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김의경 지음 / 광화문글방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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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상대의 감정을 읽은 일은 어렵다. 표정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를 제외하고는 웃는 얼굴로도 화를 내는 이가 있으니까. 그럼 얼굴을 전화기 뒤에 숨기고 목소리로만 전달되는 감정은 읽기가 수월할까?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에게 막말을 하고 화를 내는 이들은 너무나 많다. 목소리를 상대하는 일을 하는 이, 우리는 그들을 감정노동자라 부른다. 김의경의 『콜센터』는 제목 그대로 콜센터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 소설이다. 프랜차이즈 피자 콜센터에서 주문을 받는 일, 명료하고도 단순한 일처럼 보이지만, 콜센터의 세계는 최악의 고객, 진상을 상대하는 일이다. 소설은 스물다섯 동갑내기 다섯 명(용희, 주리, 시현, 형조, 동민) 각자의 시선으로 그곳의 민낯을 보여준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기다리고 유학 자금과 창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곳을 선택했다. 업무시간을 조정할 수 있고, 원하는 일을 준비하는 동안 말 그대로 잠깐의 아르바이트로 콜센터는 나쁘지 않았다. 콜센터의 상담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들의 업무는 피자에 관한 모든 억지를 상대하는 일이었다. 쉴 틈 없이 걸려오는 전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들의 비위를 맞추고 실장의 잔소리를 피할 수 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진다. 잠깐 쉬는 시간에 옥상에 올라와 담배를 태우고 커피를 마시며 서로에게 농담 한 마디를 건네는 게 위로라면 위로다.

 

 하지만 진짜 속마음은 털어놓지 않는다. 자꾸만 면접에서 떨어지는 용희는 취직한 남자친구와의 연애가 속상하고 대출까지 받아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시현은 이제 그만 포기해야 하나 불안하다. 자신만 바라보는 엄마가 부담스러운 형조는 공부를 하면서 자꾸만 주리에게 신경이 쓰인다. 콜센터를 그만두고 배달 일을 하는 동민은 시현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고 주리는 콜센터에서도 서로를 경쟁하며 비교하는 게 너무나 화가 난다. 모두 잠깐만 하고 그만두리라 마음먹었지만 콜센터에서 발을 빼기란 쉽지 않았다. 그곳을 벗어나야만 꿈을 향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다만 나와 같은 처지의 친구들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청춘 파산』을 통해 만난 작가는 이번에도 적나라하게 콜센터의 실상을 그려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고민을 들려준다. 작가의 경험에서 시작된 소설, 독자는 깊게 빠져든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저마다의 꿈을 위해 애쓰는 모든 청춘들의 마음, 때때로 무너지고 때때로 좌절하면서도 뭔가 해내고 싶은 그들의 열망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어디 콜센터뿐일까? 그곳이 어디든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들에게 모두 정착역이 아닌 정류장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어떤 이는 이곳의 정류장에서 다른 곳의 정류장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얼마나 많은 정류장을 거쳐야 하는지 알 수 없기에 안타깝다.

 

 형조에게 콜센터는 정류장이었다. 다른 곳에 닿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곳. 다른 곳이란 ‘더 좋은 곳’이었다. 더 좋은 곳에 가려면 정류장에서 머무적거려서는 안 된다. (152쪽)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자존감이 무너졌고 알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아마도 나는 그들을 통해 어느 시절의 나를 발견했던 것 같다. 콜센터와는 반대로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신문 구독에 대한 안내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화를 내는 이들이 많았고 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사생활 침해였다. 방학 동안만 하는 일이었지만 정말 하기 싫었다. 소설 속 다섯 명의 청춘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에게 묻는다.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야 하는지, 꿈을 향해 나가야 하는지 말이다.

 

 현실과 이상의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을 놓아버리면 고단함이 사라질까. 아니다. 언제 그곳에 닿을지 알 수 없어도 목표가 사라지지 않는 한,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계속해서 나갈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청춘의 힘은 아닐까. 그 시절의 지나 온 나는 청춘의 나날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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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02-09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화로는 얼굴을 안 봐서 이런저런 말을 쉽게 할까요 전화 받는 사람을 생각하고 안 좋은 말은 안 하면 좋을 텐데... 그런 일 하는 사람 힘들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힘들더라도 살아가야 하겠지요 살다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다고 하지만, 뜻밖의 일이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어요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일이 없다 해도 그저 자기대로 사는 것만 해도 괜찮지요


희선

자목련 2019-02-12 14:22   좋아요 1 | URL
눈 앞에 상대가 없으니 그런가 싶다가도 소설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할까 싶었어요.
희선 님, 명절은 잘 보내셨나요?
가까운 곳이 봄의 기운이 있는 듯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