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0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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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을 잃어버린 것 같다. 시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내 안에 있는데 그 마음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딘가에 흘리고 주워 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훑어보기가 아니라 천천히 시집의 책장을 넘기며 나는 그런 생각을 붙잡고 있었다. 이병률의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를 읽으면서 나는 유독 ‘사람’이란 시어에 끌리고 있는 나를 보았다. 좋고 나쁨이 아니라 나는 사람을 노래한, 사람을 위로한, 사람을 말하는 시에 자꾸만 눈길이 머물렀다.

 

 이병률의 시를 많이 읽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의 시인들, 그 안에 그는 없었다. 여행 에세이 『끌림』을 만났을 뿐, 시는 잘 알지 도 못했다. 어쩌면 이번 시집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방송에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좋은 시는 무엇일까, 다시 생각한다. 자꾸만 읽게 되는 시,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시, 그런 시가 좋은 시 일지도 모른다. 우연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선인장을 이 시집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죽으면

 선인장이 하나 생겨나요


 그 선인장이 죽으면

 사람 하나 태어나지요


 원래 선인장은 널따란 이파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이 가시가 되었지요

 찌르려는지 막으려는지

 선인장은 가시를 내밀고 사람만큼을 살지요


 아픈 데가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 손을 올리는 성자도 아니면서

 세상 모든 가시들은 스며서 사람을 아프게 하지요


 할 일이 있겠으나 할 일을 하지 못한 선인장처럼

 사람은 죽어서 무엇이 될지를 생각하지요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살지요

 실패하지 않으려 가시가 되지요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죽지요

 그리하여 사막은 자꾸 넓어지지요 (「사람」전문)

 


  사람과 선인장이라니. 누구나 자신만의 가시를 가지고 살아간다. 가시로 방어를 하거나 가시로 존재를 증명하거나. 오래전 선인장을 보면서 나도 선인장처럼 가시를 꽃으로 피우기를 바랐던 마음의 한 조각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번엔 이런 시다.


 

 바람이 커튼을 밀어서 커튼이 집 안쪽을 차지할 때나

 많은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늘어져

 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을 때

 사람이 있다고 느끼면서 잠시 놀라는 건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들리는 흐르는 물소리

 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지진의 진동


 밤길에서 마주치는 눈이 멀 것 같은 빛은 또 어떤가

 마치 그 빛이 사람한테 뿜어나오는 광채 같다면

 때마침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


 잠시 비운 탁자 위에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거나

 멀쩡한 하날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

 누가 왔나 하고 느끼는 건

 누군가가 왔기 때문이다


 팔목에 실을 묶는 사람들은

 팔목에 중요한 운명의 길목이

 지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겠다


 인생이라는 잎들을 매단 큰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내 손에 굵은 실을 매어줄 사람 하나

 저 나무 뒤에서 오고 있다


 실이 끊어질 듯 손목이 끊어질 듯

 단단히 실을 묶어줄 사람 위해

 이 저녁을 퍼다가 밥을 차려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온다」 전문)


 

 「사람이 온다는 제목의 시를 읽으면서 정현종의 시 「방문객」을 떠올린다. 닮은 듯 다른 시.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란 마지막 연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이 시집에서 마주한다. 어떤 시는 혼잣말처럼 들리고, 어떤 시는 안부처럼 들리고, 어떤 시는 편지처럼 도착한다. 스치듯 지나가는 당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손을 꼭 잡은 것 같은 당신, 특정한 날에, 어떤 계절에 나를 기억하고 생각해 줄 것만 같은 당신.

 

 

 도시는 불빛이 많으니까 스스로의 빛도 필요하다

 바깥 불빛보다는 안쪽의 불빛에 의지해야 하므로

 감정도 필요하다

 

 지탱하려고 지탱하려고 감정은 한 방향으로 돌고 도는 것으로 스스로의 힘을 모은다 (「생활이라는 감정의 궤도」부분)


 

 바깥의 일은 어쩔 수 있어도 내부는 그럴 수 없어서

 나는 계속해서 감당하기로 합니다

 나는 계속해서 아이슬란드에 남습니다


 눈보라가 칩니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만이 혼자만큼의 서로를 잊게 될 것입니다 (「이별의 원심력」부분)

 

 숱한 날들을 꺼내 놓지 않아도 이 시집으로 다 전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랄까. 한 번도 말하지 못한 감정을 꺼내어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구겨지고 너덜너덜해진 감정을 말이다. 한 번쯤은 다시 만나고 싶은 당신이 생각나는 시집이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우습게도 그런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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