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아침에 찍은 사진이다. 자목련이었다. 사진을 좀 더 잘 찍을 걸 후회가 된다. 세상에 여름에 자목련이 꽃을 피우나? 이건 꽃이 아닌가. 혼란스럽고 반가웠다. 내가 모르는 자목련의 세계라고 할까. 여하튼 그랬다. 사실 봄이 지나면 자목련을 잊는다. 꽃이 필 때에 다시 바라본다. 자목련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지만 꽃 그 자체를 생각하는 건 봄이라는 계절뿐이다. 그러다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를 보다가 화면 속 자목련을 담아둔 게 생각났다.



1회의 장면인데 나는 이 장면이 좋아서 자꾸 멈췄다가 돌려보기를 반복했다. 꽃보다 아름다운 이들이었다. 그 환한 웃음이 행복해 보였다. 연기가 아닌 실제처럼 여겨졌다. 방영 당시 계절이 봄이었구나 싶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역시 좋은 드라마다. 사랑, 죽음, 우정이라는 진부한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어서 좋고, 서로의 상처에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분노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노년의 삶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생각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 노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같이 늙어가는 친구가 있다는 것, 자식 흉을 보며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아픈 몸에 대해 한탄할 수 이를 곁에 두었다는 것, 정말 축복이다.






이렇게 느닷없는 자목련을 보고 즐거운 마음도 축복이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남부 지방에는 폭우로 피해가 많은 듯하다. 출근길, 마스트를 써야 하는 일상에 피로도는 커지겠지만 그래도 이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이 있으니 이 또한 기쁘다. 자귀나무가 한창인 날들, 그 한 귀퉁이에 자목련이 있다. 여름엔 자귀나무와 배롱나무인데 올해는 자목련도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름에 마주하는 봄이라고 할까. 드라마 때문에, 우연하게 만난 자목련 때문이다.

여름이니까 한 권쯤은 제목에 여름이 들어간 책을 만나야겠지.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 오랜만에 시집도 한 권 검색한다. 허연의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김하나의 『말하기를 말하기』. 그리고 정용준의 장편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 도 궁금하다. 


읽고 있는 책은 아니 에르노의 『빈 옷장』인데 너무 솔직해서, 너무 신랄해서, 너무 거침이 없어서 놀라면서 읽고 있다. 아니 에르노의 글을 읽은 적이 있지만 이런 느낌을 받는 적이 있던가 싶다. 아니 에르노의 데뷔작이라는데,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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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7-15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오랜만이죠. 다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고 그저 잘 지내시길요.
아니 에르노의 책 담아갑니다. 여름에 만난 자목련 특이하고도 반갑네요. 계절이 따로 없는 것 같은 요즘.

자목련 2020-07-16 09:3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깁니다.
아니 에르노의 책을 함께 읽는 7월의 날들이겠네요.
프레이야 님, 건강하고 시원한 여름 보내세요^^

stella.K 2020-07-15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자목련님 얘긴 줄 알았습니다.ㅋ
재작년까지만 해도 저희 집도 마당에 목련 나무가 있었죠.
흰색, 자색 둘 다. 그런데 무슨 공사를 하면서 베어버렸습니다.
공동주택 마당에 있는 거라 우리만 사는 것 같으면 결코 베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많이 아쉽더군요.

노희경 작가의 <디어 마이 프렌즈>가 몇년도 작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3, 4년된 작품 아닌가요? 노배우들이 대거 등장해 과연 재밌을까
싶었는데 확실히 노희경은 뭐가 달라도 다르더군요.
무엇보다 저는 오랜만에 노배우들이 나와서 좋았습니다.
옛날에 정말 브라운관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배우들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잘 안 나와서 아쉬웠거든요.
그런 걸 보면 저도 나이 들었다 싶어요.ㅋㅋ

자목련 2020-07-16 09:36   좋아요 0 | URL
자리를 지키던 나무가 사라지면 무척 서운할 것 같아요. 돌아보면 그 자리에 있던 거라서요.
노희경 작가의 이 드라마가 방영될 때는 못 봤어요.
고현정과 조인성이 아닌 김혜자, 고두심, 나문희, 윤여정의 연기가 너무 좋았어요.
주현, 신구 배우도 그렇고요.
<거짓말>부터 좋아했는데 점점 더 믿음이 가는 작가에요.
 

휴대전화를 바꿨다.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나는 그동안 2G를 사용했다. 요금이나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미루고 있었던 것도 맞다. 하지만 필요한 부분만 사용하는 것, 그것도 나의 권리가 아니던가. 스마트폰은 인터넷 검색만 했고 그 옆에 작은 휴대폰을 사용했다. 그러니 당연히 번호도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아니었다. 종종 아직도 그 번호를 사용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불편하지 않냐는 질문과 함께 말이다. 최근에 재난문자를 받지 못하는 걸 제외하고는 불편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이건 진심이다. 전화를 하고 문자를 받는 것, 내게는 그게 가장 중요했고 필요했다. 메일을 확인하는 것, 정보를 검새하는 건 개통하지 않은 스마트폰으로 대신했다. 배달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그것으로 사용했다.

시류에 따라야 해서, 번호를 변경했다. 아니, 다른 통신사의 2G를 가입할 수 있었으니 강제는 아니었다. 지금은 사용하는 번호와 부여받은 번호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사실 크게 달라진 것 없다. 더 좋은 기기로 더 좋은 서비스를 받는 일이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에 내가 사용했던 시스템, 알람, 일정 관리가 달라져서 많이 불편하다. 그래서 지금은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전화 통화와 문자는 스마트폰으로 사용하고 일정이나 알람은 2G로 사용한다. 나는 이 2G가 좋다. 그러니 한동안은 그대로 사용할 것 같다.






7월부터 달라진 일상이다. 통화를 하는 일이나 알림, 문자를 받는 일, 스마트폰에 익숙해지는 것. 사소한 것 같지만 사소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전화번호를 검색하면서 일부는 삭제를 했고, 일부는 스팸으로 분류를 했다. 잘 한 일이라 생각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 이들을 연락처를 정리한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오가며 연결된 그들과의 이별은 쉽지 않다. 1년 동안 입지 않는 옷을 정리하는 것처럼. 멈춤 상태의 관계와 이별을 고하는 일이다. 누군가는 나와의 관계에 이별을 말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새로운 시작, 7월에는 적극적으로 책도 읽어야 한다. 말 그대로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미치 앨봄의 <다 괜찮아요, 천국이 말했다>, 장석주의 <예술가와 사물들>, 전이수의 <소중한 사람에게>를 펼친다. 더위와 조금 더 친하게 지내면서, 여름 속으로 직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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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7-06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얼마 전까지 2G폰 썼는데...
지난 봄 재난 지원금 받아서 일시불로 스마트폰 샀는데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카톡이 전 좀 귀찮고 싫더군요.
카톡을 나가고 싶긴한데 오해 받을까 봐
아침에 일어나면 삭제하기 바쁩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 쓰기 시작하면 옛날로 못 돌아간다고 하는데
지금으로선 스마트폰 고장나면 어르신들 쓰는 효도폰 쓰지 않을까 싶어요.
전 정말 전화 송수 기능과 문자만 있으면 되는데.
스마트폰에서 댓글 달고 검색하는 것도 어깨와 고개가 꽤 경직되더군요.
정말 오래하면 거북목 되겠어요.ㅠ

얄라알라 2020-07-06 14:15   좋아요 0 | URL
정말 동감합니다. 불가역인것 같아요.
저도 지금 폰 액정이 깨져서 볼쌍 사납지만 정작 저는 별로 폰을 안 써서 별 신경 안쓰는데 주위에서 빨리 바꾸라고들 하시네요. 환경 생각하면 1개 사면 6.8년 오래오래 써야하는데 말이죠....저부터도 주기가 2-3년이니 반성합니다.

자목련 2020-07-07 14:23   좋아요 0 | URL
2G를 쓰셨다니 더 반갑습니다!
스마트폰의 기능이 넘 좋다서 문제더라고요. ㅎ
최소한 필요한 앱만 깔고 사용하는데도 수시로 알림 안내를 받아요.
지금은 조금 친해져야 해서 곁에 둔 시간이 늘어나고 있어요. ㅠ.ㅠ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여니 향긋한 냄사가 가득하다. 지난주부터 집 안으로 들어온 향기는 밤나무 꽃이었다. 어느새 밤꽃이 피는 날들이 되었다. 다른 지역에 있는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도 밤꽃 이야기를 했다. 다른 곳에서 우리는 같은 냄새를 맡는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상이다. 코로나19의 확산이 무섭다고 말하기도 했다. 출근을 해야 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하는 일이 무섭게 다가오는 일상이라니.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요즘 느끼는 두려움은 타인에 대한 믿음의 부족 때문은 아닐까 싶다. 물건을 주문하고 택배를 받던 보통의 일상도 걱정이 늘고 가전제품이 고장  기사님의 방문을 기다리면서도 마스크를 착용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하던 즐거움이 이제는 멀리 달아났다. 더위에 마스크를 쓰는 일은 힘겹다. 2장에서 3장, 이제는 10장을 구매할 수 있다고 해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하루 종일 마스크를 사용해야 하는 일상에 적응한다. 


허기진 기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 다시 보기를 한다. <빨간 머리 앤>을 본다. 매일 1회씩만 보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이 쉽지 않다. 늦은 밤까지 자꾸만 보고 싶다. 이선균의 대사를 메모하거나 중얼거린다. 주근깨 빼빼 마른 앤의 다양한 표정을 보면서 초록지붕을 상상한다. 이런 드라마가 있어서 참 좋다고,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다고, 볼 때마다 새롭고 볼 때마다 반갑고 볼 때마다 따뜻하다고. 


하지였던 어제의 개기일식은 못 봤지만 하지가 지났으니 여름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감자를 먹어야 하는데 아직이다. 감자와 자두를 기다린다. 여름의 맛이다. 그리고 7월에는 김연수의 소설이 도착한다. 주문하고 기다리는 마음이 둥글다. 모났던 마음이 둥글게 변화한다고 할까. 계절과 함께 찾아오는 소설 보다 시리즈는 즐거움이다. 여름이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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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6-22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아저씨 같은 작품은 책으로 나와주면 좋겠는데...
그러면 저도 둥근 마음으로 기다릴 것 같은데 그걸 못하네요.ㅠㅎ

자목련 2020-06-23 15:59   좋아요 0 | URL
나의 아저씨 같은 소설, 저도 언제든 환영이에요.
프로필 이미지 넘 좋아요. 청량하면서도 편안한 모습^^

blanca 2020-06-22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저도 드라마 하루에 일회씩 만 보려 해요. 지금 길모어 걸스 끝나가서 너무 슬퍼요. 하루에 일 회는 커녕 삼십 분만 보려 합니다. 그래도 끝나버리네요. 코로나 시대, 모든 일에 어떤 우려, 걱정이 따라다며 너무 피곤합니다. 힘든 사람들도 너무 많고요. 이게 언젠가 끝난다는 약속만 있으면 버티겠는데 그것도 아니니 더 우울해집니다. 김연수의 소설 기다리는 마음 저도 같아요!

자목련 2020-06-23 16:02   좋아요 0 | URL
드라마 보면서 자꾸 시간을 클릭해요. ㅎ 처음 보는 드라마도 아닌데도 아쉬움만 남아요. 근데 TV가 갑자기 고장 나서 멈춤이에요. ㅠ,ㅠ 코로나 확진자를 확인하고 뉴스를 챙겨보면서 점점 피로해집니다. 그럼에도 수고하는 분들이 계시니 저도 힘내여겠지 생각해요. 7월의 어느 시간엔 함께 김연수의 소설을 읽겠네요^^*
 


할머니는 살아계실 때 잔소리가 무척 심한 분이셨다. 학교를 가기 전 단정한 옷차림에 대한 훈계를 들어야 했다. 그 기준을 정한 건 모두 할머니였다. 그때는 그 말에 담긴 애정을 몰랐다. 왜 이렇게 나를 귀찮게 하는 말을 하는지 화가 날 정도였다. 남에게 잔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다. 그 대상은 가족, 후배, 친구로 국한된다. 일본 영화배우 키키 키린의 120가지 말을 엮은 『키키 키린』을 읽으면서 할머니가 생각났다. 할머니의 잔소리가 모두 옳은 말이었거나 울림을 주는 말은 아니었지만 손주 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을 테니까.


나도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다 하다 지쳐서 요즘은 안 하는 상태가 될 정도다. 나이를 먹을수록 조바심이 커지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걱정이 늘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금은 현명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바람을 줄이지 못한다. 대중에게 사랑을 받는 배우로 살면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키키 키린은 그런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수긍하고 즐기며 최선을 다한 사람 같았다. 암으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이 책에서 만난 그녀의 말은 때로 웃음을 불러오고 때로 울컥하게 만들고 때로 반복해서 생각하게 했다.


키키 키린이 결혼 초부터 영화 시사회, TV나 잡지 인터뷰를 통해 남긴 말을 들려준다. 암으로 죽기 직전까지 말이다. 인생에 대해, 일과 책임에 대해, 암과 질병에 대해, 생과 사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배우로서 엄마로서 한 사람의 여자로서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진솔하게 들려주는 그녀의 얼굴은 인자하고 편안해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속 엄마의 얼굴은 아니었을까. 조금 더 먼저 경험한 것들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나눠주고 싶은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들려주는 것 같았다.


누구나 똑같은 시간을 산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만들고 가꾸느냐에 따라 그 시간은 달라진다. 키키 키린의 이런 말은 지나간 것들에 대해 미련을 과감하게 버리고 실수를 인정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종종 만약에, 그 때로 돌아가면 더 잘할 거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오지 않다는 걸 다 안다. 실패한 순간,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시작하라는 말, 왠지 위안이 된다.


나는 처음으로는 안 돌아가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지 않고, 넘어진 데서 다시 시작하죠. 처음으로 돌아갈 시간도 없다고 느끼니까요. 그러니까 실패하면, 실패한 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요. (39쪽)


나는 이런 말이 특히 좋았다. 그녀가 아픔을 아는 사람, 상처를 아는 사람, 절망을 아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승승장구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삶의 가치, 타인에 대한 배려를 아는 사람이라고. 물론 슬픔을 원하거나 좌절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런 일과 마주쳤을 때 그것을 헤치고 나왔을 때 이전보다 더 성숙하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


나는 사람도, 한 번 망가져본 사람이 좋더군요. 한 번은 자기의 밑바닥을 본 사람이 좋다는 거죠. 그런 사람은 아픔이 뭔지 알기 때문에 대화의 폭도 넓고, 동시에 넘어진 자리에서 변화할 수도 있거든요. (127쪽)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 하는 게 아닌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배우라는 특수한 직업 덕분에 다양한 역할을 통해 체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키키 키린의 말을 읽으면서 정호승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구절, 키키 키린이 이 시를 알았다면 무척 좋아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도 들었다.


늙고 병드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지혜롭게 늙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주름이 아름다운 사람, 느리게 걷는 게 여유로운 사람.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녀처럼 변화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까. 살아온 대로 죽는다는 것도 축복이겠구나 싶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꽤 흥미롭습니다. 젊을 때 당연하게 하던 일을 할 수 없게 되거든요. 그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이런 변화가 재미있습니다. 나이는 누구나 먹는 거라 아무도 멈출 수가 없어요. 살아온 모습대로 죽는 거 아닐까 싶네요. (89쪽)


아등바등하고 보기 흉한 모습도, 자식들한테 그대로 보여줄 거예요. 그런 삶의 모습을 물려주고 싶달까. 손자에게도 할머니가 이렇게 살다가 죽었다는 걸 보여주려고요. 맨날 그렇게 싫은 소리만 하더니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게. 그 또한 깨달음이라고 봅니다. (241쪽)


키키 키린의 말과 함께 그녀가 쓴 편지를 엮은 『키키 키린의 편지』 도 다감하다. 유명인의 편지가 아닌 그냥 보통의 할머니, 인생 선배가 속상한 이들을 달래주는 그런 편지. 뭔가 뜻대로 흘러가지 않은 일상이, 구져진 마음이 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거리두기가 필수가 된 요즘 편지는 보내지 못하더라도 자주 안부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중한 이들의 다정한 말 한마디와 짧은 문자가 이 시기를 견딜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걸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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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자란다. 푸성귀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한다. 그 안에서 아이들도 자란다. 아파트 복도와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정겹다. 때로 엄마의 화난 목소리와 이중주를 이룬다. 여름은 무르던 열매를 단단하게 채운다.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모습을 바꾼다. 여름 바람은 가장 멀리 달린다. 태풍을 몰고 오고 장마와 함께 한다. 여름은 무더위와 장마를 무기로 일상을 삼킨다.


여름의 하루, 냉동실에는 얼음이 늘어나고 뜨거운 커피와는 이별을 고한다. 피어오르는 짜증을 확인한다. 나의 짜증과 당신의 짜증이 합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도 여름은 싱그럽다. 그래서 여름은 빛난다. 단단해진 열매를 맛보기 시작하는 계절. 이토록 정갈하고 고운 빛깔은 어디서 왔을까. 볼 때마다 감탄한다.




앵두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담장 아래로 앵두나무가 있었다. 비탈이라서 알이 굵은 열매를 찾으려 아래로 내려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그 맛은 아닌 것 같다. 할머니는 외지에서 공부하는 큰언니의 몫을 남겨두라 호통을 쳤지만 그건 너무 서운한 말이었다. 그 반짝이는 알들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완두 콩의 연두는 또 어떤가. 꼬투리를 열자 가지런하게 잠든 완두 콩이 인사를 한다. 수고한 이의 마음을 생각하며 한 알도 놓치지 않는다. 이 콩으로 밥을 하면 얼마나 맛있을까. 이러니 식탐이 줄어들지 않는다. 여름은 이렇게 나를 살찌운다. 여름은 이렇게 나를 웃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책들이 나를 웃게 한다. 생각은 던진다. 다양한 삶의 풍경과 그 안에서 놓치는 것들을 주워 담는다. 『내 인생은 열린 책』이라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영롱하고 다채로운 단편들이 가득하다. 『배려의 말들』은 우리 주변을 돌보게 한다. 배려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었던가. 나와 당신의 배려가 진정한 배렸는지, 어쩌면 가짜는 아니었는지.


이른 장마는 어떤 얼굴을 보여줄까. 더위에 지치지 않는 그런 여름을 기대한다. 여름을 살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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