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살아계실 때 잔소리가 무척 심한 분이셨다. 학교를 가기 전 단정한 옷차림에 대한 훈계를 들어야 했다. 그 기준을 정한 건 모두 할머니였다. 그때는 그 말에 담긴 애정을 몰랐다. 왜 이렇게 나를 귀찮게 하는 말을 하는지 화가 날 정도였다. 남에게 잔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다. 그 대상은 가족, 후배, 친구로 국한된다. 일본 영화배우 키키 키린의 120가지 말을 엮은 『키키 키린』을 읽으면서 할머니가 생각났다. 할머니의 잔소리가 모두 옳은 말이었거나 울림을 주는 말은 아니었지만 손주 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을 테니까.


나도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다 하다 지쳐서 요즘은 안 하는 상태가 될 정도다. 나이를 먹을수록 조바심이 커지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걱정이 늘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금은 현명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바람을 줄이지 못한다. 대중에게 사랑을 받는 배우로 살면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키키 키린은 그런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수긍하고 즐기며 최선을 다한 사람 같았다. 암으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이 책에서 만난 그녀의 말은 때로 웃음을 불러오고 때로 울컥하게 만들고 때로 반복해서 생각하게 했다.


키키 키린이 결혼 초부터 영화 시사회, TV나 잡지 인터뷰를 통해 남긴 말을 들려준다. 암으로 죽기 직전까지 말이다. 인생에 대해, 일과 책임에 대해, 암과 질병에 대해, 생과 사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배우로서 엄마로서 한 사람의 여자로서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진솔하게 들려주는 그녀의 얼굴은 인자하고 편안해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속 엄마의 얼굴은 아니었을까. 조금 더 먼저 경험한 것들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나눠주고 싶은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들려주는 것 같았다.


누구나 똑같은 시간을 산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만들고 가꾸느냐에 따라 그 시간은 달라진다. 키키 키린의 이런 말은 지나간 것들에 대해 미련을 과감하게 버리고 실수를 인정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종종 만약에, 그 때로 돌아가면 더 잘할 거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오지 않다는 걸 다 안다. 실패한 순간,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시작하라는 말, 왠지 위안이 된다.


나는 처음으로는 안 돌아가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지 않고, 넘어진 데서 다시 시작하죠. 처음으로 돌아갈 시간도 없다고 느끼니까요. 그러니까 실패하면, 실패한 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요. (39쪽)


나는 이런 말이 특히 좋았다. 그녀가 아픔을 아는 사람, 상처를 아는 사람, 절망을 아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승승장구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삶의 가치, 타인에 대한 배려를 아는 사람이라고. 물론 슬픔을 원하거나 좌절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런 일과 마주쳤을 때 그것을 헤치고 나왔을 때 이전보다 더 성숙하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


나는 사람도, 한 번 망가져본 사람이 좋더군요. 한 번은 자기의 밑바닥을 본 사람이 좋다는 거죠. 그런 사람은 아픔이 뭔지 알기 때문에 대화의 폭도 넓고, 동시에 넘어진 자리에서 변화할 수도 있거든요. (127쪽)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 하는 게 아닌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배우라는 특수한 직업 덕분에 다양한 역할을 통해 체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키키 키린의 말을 읽으면서 정호승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구절, 키키 키린이 이 시를 알았다면 무척 좋아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도 들었다.


늙고 병드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지혜롭게 늙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주름이 아름다운 사람, 느리게 걷는 게 여유로운 사람.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녀처럼 변화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까. 살아온 대로 죽는다는 것도 축복이겠구나 싶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꽤 흥미롭습니다. 젊을 때 당연하게 하던 일을 할 수 없게 되거든요. 그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이런 변화가 재미있습니다. 나이는 누구나 먹는 거라 아무도 멈출 수가 없어요. 살아온 모습대로 죽는 거 아닐까 싶네요. (89쪽)


아등바등하고 보기 흉한 모습도, 자식들한테 그대로 보여줄 거예요. 그런 삶의 모습을 물려주고 싶달까. 손자에게도 할머니가 이렇게 살다가 죽었다는 걸 보여주려고요. 맨날 그렇게 싫은 소리만 하더니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게. 그 또한 깨달음이라고 봅니다. (241쪽)


키키 키린의 말과 함께 그녀가 쓴 편지를 엮은 『키키 키린의 편지』 도 다감하다. 유명인의 편지가 아닌 그냥 보통의 할머니, 인생 선배가 속상한 이들을 달래주는 그런 편지. 뭔가 뜻대로 흘러가지 않은 일상이, 구져진 마음이 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거리두기가 필수가 된 요즘 편지는 보내지 못하더라도 자주 안부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중한 이들의 다정한 말 한마디와 짧은 문자가 이 시기를 견딜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걸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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