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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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투명한 풍경화 같은 표지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곳이 어디든 모든 게 평온할 것 같다. 매섭게 바람이 부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모든 게 그렇지 않은가. 순간의 장면, 순간의 기분으로 전부를 다 안다고 믿기도 하고 그로 인해 섣부른 판단으로 오해는 깊어지니까. 오해가 이해가 되는 순간은 때로 너무 멀고 때로 오지 않는다. 백수린의 단편집 『여름의 빌라』를 읽으면서 나의 오해가 단절로 이어진 관계는 없었을까 생각하니 두려워졌다. 소설집 전체가 관계나 단절을 주제로 한 건 아니지만.


표제작 「여름의 빌라」는 제목에서 기대했던 휴가지의 풍경이나 휴식과는 다른 고요한 슬픔을 안겨준다. 서로 좋았던 기억만 간직했던 ‘주아’와 ‘베레나’ 부부가 재회하면서 함께 보낸 여름의 시간들이 새로운 기억으로 남는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상처를 마주하면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타인의 삶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생의 터전인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관광지가 되는 아니러니한 일상.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아픈 역사.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여름의 빌라」 중에서)


섣부르게 짐작하고 판단하는 대신 상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일, 그 역시 이해의 시작일 것이다. 더 가까이 다가서 자세히 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 일처럼 쉬운 일도 없을 텐데. 우리는 무슨 이유로 그런 일상을 외면하는 것일까. 거대한 역사 속 진실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기억을 바로잡는 일, 혹은 그때 감정을 차분히 떠올려보면 서운함보다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더 컸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국인 프랑스에서 이전과는 다른 삶을 꿈꿨던 ‘나’와 파리 주재원이었던 언니가 함께 보낸 시간을 그린 「시간의 궤적」에서도 그런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서로의 과거를 모르고 오직 주어진 현재만 알기에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가까워졌기에 현재의 불안, 고민, 걱정을 보여주지만 그 모든 걸 품기엔 그들의 시간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한 편의 영화처럼 싱그러운 추억만 남긴 채.


어쩌면 좋을지 망설이는 사이, 언니가 먼저 우산을 펼쳐 들고 빗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우산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비였다. 언니는 이내 우산을 접더니 비를 쫄딱 맞은 채 나에게 빗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우리는 폭우 속을 달렸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머지않아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날 거라는 사실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처럼. (시간의 궤적 중에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더라도 이처럼 서로가 간직하는 감정은 다르다. 낯선 곳으로의 이사는 설레기도 하지만 적응해야 하는 불안을 떨칠 수 없다. 「고요한 사건」 에서 화자는 재개발 지역으로 이사를 왔지만 그 동네의 분위기가 낯설다. 정착이 아닌 잠깐의 거주라서 그랬을까. 혼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가운 겨울밤, 이런 문장을 읽노라면 마치 화자인 ‘나’와 독자인 내가 하나가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다. 외로움, 고독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창밖에는 커다란 눈송이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눈송이가. 역청 빛 어둠을 덧칠한 이웃집의 지붕 위에도, 옥상 위의 장독대와 비탈 아래쪽의 앙상한 나무초리 위에도, 고요하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것은 정말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커다란 눈송이였다. 마른 눈. 자국눈. 가랑눈. 국어사전에서 내가 발견했던 무수한 단어로도 형용하기가 충분치 않던 눈송이. 그토록 숨 막히는 광경을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고요한 사건」 중에서)


그런가 하면 이전의 백수린의 소설에서 만나지 못한 색다른 분위기, 응원하고 싶은 당돌함이라 말하고 싶은 단편도 실렸다. 보통의 엄마와는 다른 특별한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 「폭설」, 평범하게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화자에게 찾아온 욕망을 그려낸 「아직은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할머니를 추억하는 방식이지만 결국엔 할머니에게 소중했을 시간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흑설탕 캔디」, 풋풋하고 첫사랑과 반항과 방황을 아름답게 들려주는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이 그러하다.


우리의 맨 종아리를 간지럽히던 싱그러운 연초록빛의 풀들. 햇살에 투명하게 반짝이던 나비들. 유속이 느린 수면 가까이에서 천천히 날다가 순식간에 저만치 솟구치던 작은 새들. 다미의 말에 얼마만큼의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미가 들려주는 것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로 이루어진 매혹적인 서사였으니까.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중에서)


하나의 계절이 지나고 다른 계절이 왔을 때 그 계절의 선명함이 잘 보이는 것처럼 누군가의 상처, 상실, 관계도 그렇게 알게 된다. 그래서 좀 억지스럽지만 『여름의 빌라』는 여름이라는 계절보다는 오히려 차갑고 냉랭한 겨울에 더 잘 어울린다.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평온해져 어떤 기억, 어떤 감정과 조우할 수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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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0-12-10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고,
항상 행복과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자목련 2020-12-11 10:3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항상 먼저 챙겨주시고 인사를 전해주시네요.
어제보다는 조금 따뜻하네요. 건강 잘 챙기세요.
 
소설 보다 : 가을 2020 소설 보다
서장원.신종원.우다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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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의 계절이라는 걸 알고 있다. 소설을 쓰는 이들에게 이 계절은 힘겹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어떤 기대와 설렘과 동시에 절망도 맛보는 순간이 이어질 테니까. 올해 초에 나는 분명히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그러니까 신춘문예 당선작이었다. 이름도 기억했다. 그리고 그 소설이 좋아서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고 싶다고 여겼다. 그런데 내 기억은 오래가지 않았다. 『소설 보다 : 가을 2020』을 두고 나는 서장원이란 작가의 이름을 처음 마주한 것 같았다. 그러다 소설을 읽으면서 뭔가 닮은 분위기가 생각났다. 검색을 하니 역시나 올 초에 인상 깊게 읽은 소설의 작가였다.


가족에 대해, 관계에 대해, 아니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그 안에서 관습처럼 행해진 차별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들과 딸, 부모에게 그들은 어떻게 다른가. 물론 소설 속에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들이 아팠고, 우선적으로 돌봄과 정성은 아들에게 기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니까.


노영의 오빠가 3년의 투병 끝에 사망하자 노영의 어머니는 절에 발길을 끊었다. 노영의 아버지는 그전에, 병원에서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다고 한 시점에 염주며 휴대용 반야심경 따위를 내다 버렸다. 두 사람은 아들이 아프기 전부터 아들만을 위해 기도했으므로 다른 자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인용 게임」


노영과 함께 노영의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에 가는 길, 화자인 ‘나’는 과거 노영과 사귄 사이였다. 둘은 호주에서 만났다. 이미 헤어진 연인과 친구처럼 만나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에 남은 건 무엇일까. 그러니 이 소설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처음에는 조금 묘했다. 연인에 대한 이야기인가. 깊은 상처와 속내는 천천히 다가온다. 노영에게 오빠가 있었다는 것, 병에 걸려 투병을 했지만 죽었다는 사실, 아픈 오빠 때문에 부모에게 노영은 언제나 관심 밖이었다. 오빠가 아프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빠가 떠난 후에도 어머니는 노영을 바라보지 않았다. 어머니의 모든 감각은 아들만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나는 눈이 오는 풍경을 보고 싶다고 했다. 호주에서는 흰 눈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영은 그러면 언젠가 함께 눈을 보자고 내게 말했다. 그건 고백에 가까운 말이었는데, 나는 물론 받아들였다. 언젠가 함께 흰 눈이 덮인 풍경을 보자고, 어느 여름날에 우리는 그런 약속을 했었다. 「이 인용 게임」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가 아닌 멀리 누군가에게 전하는 듯하다. 서장원의 스타일일까. 아직은 모르겠다. 그래도 기대가 된다. 그녀의 소설을 더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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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0-12-07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낌이 비슷해서 보니, 역시 서장원 작가의 글이었다는 말씀이시네요^^ 이런 경험, 뭔지 상상이 됩니다. 마치 저도 겪어본 것처럼. 다음에 소설 고를 때는 기억했다가 서장원 작가님을

자목련 2020-12-08 11:33   좋아요 0 | URL
네, 다음에는 이름으로도 바로 기억하려고요. ㅎ
얄랴 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blanca 2020-12-07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반가우셨겠어요. 저도 신춘문예 작품 중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란 작품이 있어요. 2020년 경향신문 당선작 <빨간열매>라고 정말 놀라울 정도로 좋더라고요. 자목련님도 한번 읽어보시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음에 작품집을 냈나 찾아볼 정도로 좋았어요. 아직 나이도 젊어 좋은 작가가 될 자질이 보인다 생각했어요.

자목련 2020-12-08 11:32   좋아요 0 | URL
아, 말씀하신 작품 검색해서 읽었어요. 정말 좋으네요. 이유리 작가 기억하겠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또 새로운 작가의 소설을 만나니 1년이라는 시간이 참 빠르다 싶어요.
블랑카 님, 따뜻하고 다정한 12월 보내세요^^

희선 2020-12-08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라고 모든 자식을 다 사랑하지는 않는 듯해요 모든 자식한테 마음 쓰는 부모가 더 많다고 믿고 싶지만... 아픈 손가락에 더 마음이 간다고 하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것도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그게 나을지도 모르죠


희선

자목련 2020-12-08 11:30   좋아요 1 | URL
그쵸? 아픈 손가락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래도 편애는 아니었으면 싶어요.
희선 님, 이 겨울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 바라요.
 
다큐하는 마음 일하는 마음 3
양희 지음 / 제철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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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에서 울컥하고 만다. 삶이라는 게 평탄하지 않다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힘겹다는 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지나온 삶의 궤적이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해서다. 내가 볼 수 있는 삶과 나는 전혀 알 수 없는 삶을 보게 되는 것, 그게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단순하게 보면 현실을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일이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는 언제나 울림과 감동을 안겨준다. 다큐멘터리의 원동력은 어디서 발생하는 걸까. 양희의 인터뷰집 『다큐하는 마음』에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한때는 다큐멘터리는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지루했고 때로는 평범해서 매력이 없다고 느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EBS 국제다큐영화제’를 시청하면서 달라졌고 매년 기다렸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다큐멘터리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제작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감독이 촬영을 하고 섭외를 하고 모든 걸 다 한다고 여겼다. 배급사가 있고 홍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협회나 단체에서 지원을 받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얼마나 부족한가 이 책을 통해 조금 알게 되었다.


다큐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무엇을 그들을 다큐멘터리로 이끈 것일까. 양희가 만난 9명(감독, 프로듀서, 촬영감독, 편집감독, 비평가, 홍보마케터, 수입배급자, 영화제 사무국장, 영화제 집행위원장) 전해주는 그 마음을 알 수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무엇이 그들을 지탱하는지 알 것 같다.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시작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촬영하는지 몰랐다. 짧은 상영시간을 위해 몇 년을 찍는다는 게 놀라웠고 담아낸 그 모든 시간을 집약하고 촬영을 편집해서 세상에 내놓는다는 작업이 얼마나 지난할까 생각했다. 상영할 수 있는 극장도 많지 않고 여전히 사람들에겐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인식되고 있으니까. 그런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그들이었다. 다큐멘터리는 내가 아닌 우리, 그리고 그 너머의 삶을 살피는 일이라고 느껴졌다. 인터뷰하는 이들에게 다큐멘터리는 직업이 될 수 없음에도 그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직업이라고 하면 그 일을 통해 생계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아요. 대신 제가 좋아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도록 다른 일을 해가면서 하죠.” 맞다. 시인이 전업작가로 살기 어려운 것처럼, 다큐멘터리스트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의 온갖 여린 것, 보드라운 것, 나약한 것, 힘없는 것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173쪽)


9명 각각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내며 다큐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이런 부분이 특히 더 좋았다. 강유가람 감독의 시선, 이태원에서 세 명의 여성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곳으로 작업실을 옮기고 그들이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는 마음. 잘 보이지 않는 이들의 삶을 곁에서 바라보는 일이 다큐가 시작되는 순간이구나 느꼈다.


“다큐멘터리는 계속해서 공부하고 생각하게 해요. ‘나는 배우지 않으면 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좀 더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또 그게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요. 그게 제가 다큐멘터리를 계속하는 마음이에요.” (74쪽, 감독 강유가람의 인터뷰 내용 중에서)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도 관객과 만나는 창구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를 소개하고 비평하는 비평가의 역할도 꼭 필요하다.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닮은 점을 찾고 다른 걸 공감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인터뷰어 양희의 말처럼 비평가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다.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각자의 자리뿐 아니라, 감독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함께 바라보고 대화할 때 우리는 타인의 삶을 내 삶으로 치환시킬 수 있다. 어쩌면 비평가는 다큐멘터리와 관객을 이어주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세상과 현실에 다리를 놓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182쪽)


가장 최근에 내가 본 다큐멘터리는 세월호의 기억을 다룬 「부재의 기억」으로 그 잔상이 오래 남았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작품이다. 방송사에서 편성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작품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되어 무척 남다르게 다가온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그럴 것이다. <우리 학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같은 작품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에 담긴 수많은 이들의 수고를 생각하며 그들에게 다큐멘터리가 직업이 될 수 있는 환경이 빨리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이제까지 몰랐던 다큐의 세계와 다큐하는 마음이 내게로 전해졌다. 이곳이 아닌 그곳의 삶,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야 할 진실과 기록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많은 이들의 수고와 노력이 모여 하나의 다큐멘터리가 완성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도 그러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만드는 힘, 그게 다큐멘터리의 힘이다. 다큐하는 마음에 나 같은 독자의 마음까지 합쳐진다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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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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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키의 소설이나 산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기회가 되면 그냥 읽는 사람이다. 손꼽아 그의 작품을 기다리지 않는다. 『고양이를 버리다』도 아무런 기대 없이 읽었다. 얇고 작은 책이었다. 첫 페이지를 읽고 끝나는 순간까지 복잡한 마음을 거둘 수 없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러니까 거창하게 말하자면 나의 존재와 우리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할까.


책은 하루키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버리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분명 해변에 고양이를 버리러 가는 장면인데,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길,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고양이라는 하나의 풍경처럼 담아낸다. 이상한 건 집에 돌아오니 그 고양이가 먼저 도착한 것이다. 산책을 다녀온 것처럼. 운명처럼 받아들였을까. 고양이는 하루키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책을 읽는 나도 무척 신기한데 당사자인 아버지와 하루키는 어땠을까.






놀라운 기억을 시작으로 하루키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매일 아침 불단에서 오랫동안 경을 읽었다는 그의 아버지. 하루를 여는 습관이었다고 한다. 누구를 위한 독경이냐고 묻는 하루키의 물음에 아버지는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전쟁을 아는 사람,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삶에서 전쟁은 어떤 의미일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남은 삶을 지배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이후로 아버지가 들려준 전쟁의 기억은 하루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은 글을 읽는 나에게도 너무나 무섭고도 두렵게 전해진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리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51쪽)


얼핏 이런 기억과 추억은 하루키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가 친밀했나 싶을 착각을 불러온다. 정작 하루키가 고백하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반대였다. 아버지와 그는 거의 이십 년 이상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를 하지 않았다. 모든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상과는 다른 길로 가는 아들과의 갈등은 컸다. 두 사람이 화해를 한 것도 아버지의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다. 나와 형제들도 그랬다. 아버지와 우리는 극심하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좋은 것도 아니어서 그냥 데면데면 한 사이였다. 중환자실에서 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눈으로 대화를 이어가던 순간.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말이 전부였다. 그 짧은 대화가 지금 나를 위로한다. 무기력하고 책임감이 없다고 여겼던 아버지. 그가 살아온 생에 대해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던 내가 원망스럽고 부끄럽다. 하루키의 아버지가 경험한 전쟁과 그것의 기억을 견디며 살아왔을 삶은 나의 아버지의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아버지의 시간과 그들이 살아온 시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건 다르지 않다. 


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에 공기를 숨 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성장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마치 요즘 젊은 세대 사람들이 부모 세대의 신경을 일일이 곤두서게 하는 것처럼. (62쪽)


하루키가 아버지에 대해 문장으로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책으로 나올 때까지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가 살아온 삶을 찾아보고 그를 아는 이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흐릿한 기억으로 아버지를 말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군 이력을 조사하면서 그의 삶을 관통하는 전쟁이라는 역사가 너무도 아프게 다가왔을 것이다. 죽을 수도 있었던 군대, 전쟁에서 그의 아버지는 살아왔다 어쩌면 그는 죽은 이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빚을 갚는 게 매일매일 그들을 위해 경을 읽는 것일지라도.


하루키는 아버지에 대해 아픔과 상처만 기억하는 게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야구 경기를 보러 가고 영화를 자주 보러 간 기억도 선명하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한 일이 없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낡은 자전거가 떠오른다. 자전거를 타고 일을 하러 간 아버지.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그 자전거는 정말 골치거리였다. 누군가 그 자전거를 가지고 와야 했으니까. 나와는 다른 기억으로 남은 하루키의 자전거가 조금은 다정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우리는 그 여름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줄무늬 암고양이를 버리러 고로엔 해변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고양이에게 추월당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해안의 파도 소리를, 소나무 방풍림을 스쳐 가는 바람의 향기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그런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87쪽)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이전의 많은 소설과 산문 가운데 하루키의 『고양이를 버리다』는 다르게 남을 것 같다. 내가 읽은 하루키의 책 가운데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아들의 따뜻한 화해라 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의 생에 대해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 아버지의 생과 자신의 생이 결국엔 하나로 포개어진다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그건 하루키와 그의 아버지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 있을 뿐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니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의 책무가 있다. (93쪽)


하루키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평범한 인간이다. 평범하지만 고유한 존재. 그래서 소중하고 귀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부모 세대와 그 이전의 세대도 그러한 존재였다. 하루키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모두 그런 존재라는 걸 느낀다. 그들 개개인의 역사가 내게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애틋하고 경이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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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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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업 전, 차를 마시는 시간은 나에게 기도의 시간이다. 그저 하얀 사각 종이를 사랑했던, 쓰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황홀했던 청순한 마음을 다시금 불러오는 시간,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소설을 쓰기 전에 책상을 치우고, 차를 우리고, 마들렌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접시를 골라 책상 위에 올려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의 말이 타인을 함부로 왜곡하거나 재단하지 않기를.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말하는 무시무시함에 압도되지 않기를. 나의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기를. 나의 글이 조금 더 가볍고 자유롭기를.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나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서 당신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105쪽)


날씨가 추워지면서 따뜻한 걸 찾는다. 뜨거운 커피, 생강차, 녹차, 따뜻한 보리 차까지. 고구마, 떡, 빵, 다양한 주전부리를 곁들인다. 그리고 때때로 책을 함께 읽기도 한다. 이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춘 에세이가 있다. 소설가 백수린의 『다정한 매일매일』이다. ‘빵과 책을 굽는 마음’이란 부제처럼 책은 작가가 들려주는 빵과 소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한 권의 책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따라오는 하나의 빵 이야기, 반대로 빵을 먹으면서 생각나는 한 권의 책. 빵과 책이라니, 그 조합만으로도 달콤하고 다정하다. 다채로운 책과 빵에 대한 추억과 기억이 갓 구워진 빵 냄새를 풍기며 다가온다.


작가가 읽은 책 이야기를 실은 책은 많지만 빵과 책이라는 점에서 신선하고 색다르다. 이 책은 내내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읽었다. 그래서 작가가 소개하는 빵의 모양과 맛을 상상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당장 주방에 나가 뭐라도 찾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스마트 폰으로 검색을 해서 눈으로 먹거나 직접 배를 채우는 대신 정성 가득한 한 문장 한 문장이 내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익숙한 빵과 좋아하는 빵이 나오면 괜히 더 신났다. 내가 읽은 책을 만나는 일은 여전히 반갑고 그 책에 어울리는 빵 이야기를 듣는 건 즐겁다.


백수린 작가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를 통해 천천히 재독하는 기분이랄까. 가장 흔하게 먹는 샌드위치지만 정확한 이름을 몰랐던 파스트라미 샌드위치와 필립 로스의 『울분』은 내게 청춘, 성장, 아픔으로 기억되는 소설이다.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와 그 관심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싶은 자녀. 그 갈등은 여전하다. 부모에게 자식은 언제나 걱정되는 존재인가 보다. 그런 면에서 부모는 무조건 단단하다 여긴 생각이 부족했구나 싶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람에게 누구나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과 불행, 성공과 좌절, 자유와 책임이 있음을 깨닫고 존중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48~49쪽)


빵에 대한 애틋하고 아련한 개인적인 기억을 듣노라면 생면부지의 작가와 알 수 없는 뭔가로 이어진 것 같고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 것만 같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직접 만든 초코칩 머핀을 건넨 기억과 조카를 낳기 전 만삭의 동생과 옛날씩 꽈배기를 먹으러 갔다 팔려서 먹지 못한 기억, 독일의 대표적인 빵 프레철에 대한 이야기는 열 살 소녀가 만난 할아버지의 죽음과 어른이 되어 겪은 할머니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타인의 죽음을 끊임없이 살아 내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타인의 죽음은 결코 온전히 극복되지 않는 상실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직 그런 상실을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그럴듯한 거짓말쟁이일 뿐일 것이다. (185~186쪽)


소설가가 선택한 책이라서 그럴까. 제목만 듣고도 흐뭇한 책들을 만나는 순간 나는 괜히 으쓱해진다. 나도 손쉽게 굽을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팬케이크의 맛을 연상시킨다는 켄트 하루프의 『축복』을 읽으면서 그의 다른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을 백수린 작가가 읽었을지 알고 싶다. 제목도 처음 듣는 책인데 당장이라도 검색해서 읽고 싶은 책도 있고 읽어야지 하다 시기를 놓친 책들도 다시 궁금해진다. 읽고 싶은 책 하나를 꼽자면 맛보다는 건강을 위해 선택할 것 같은 호밀빵 샌드위치와 나무를 연결하는 페터 볼레벤의 『나무 수업』. 같은 숲의 너무밤나무들이 뿌리를 통해 영양소를 공유한다는 습성은 정말 경이롭다. 공생과 연대를 아는 너도밤나무라니. 인간이 배워야 할 모든 게 숲에 있는 건 아닐까.


서른여섯 가지의 책과 서른여섯 가지의 빵을 만나면서 친구가 생각났다.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함께 다닌 친구는 나를 만나러 올 때마다 빵을 사가지고 온다. 올 때마다 다른 종류의 빵을 사 오는데 언제나 모카빵이 있다. 벤치에서 카페에서, 서로의 자취집에서 커피와 모카빵을 먹은 기억. 가물가물한 그 기억이 새롭게 피어난다. 맛있는 빵을 만나면 떠오르는 이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좋은 책을 만나 가까운 이에게 괜찮은 책이라 소개할 수 있다면 그 역시 행복하다. 백수린의 산문집은 그런 책이다. 편하게 읽을 수 있고 쉽게 읽히지만 가만히 와닿는 문장은 깊고 진하게 스며다.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를 소개하는 이런 부분도 그렇다.


사는 것이 힘들고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는 어느 날, 온기가 남은 오븐 곁에 둘러앉아 누군가와 단팥빵을 나누어 먹는 상상을 해본다. 긴 시간 정성껏 졸여 만든 달콤하고 따뜻한 앙금이 들어 있는 단팥빵을. 그것은 틀림없이 행복한 장면이겠지만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고독할 것이라는 걸 나는 이제는 안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에게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상처와 자기모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충동을 감당하며 사는 존재들이니까. (227쪽)


누구나 할 것 없이 지치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즘.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정한 위로가 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이다. 고맙다는 말 대신, 건네도 좋을. 그러니까 빵으로 소개하자면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부드럽고 달콤한 식빵 같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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