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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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투명한 풍경화 같은 표지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곳이 어디든 모든 게 평온할 것 같다. 매섭게 바람이 부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모든 게 그렇지 않은가. 순간의 장면, 순간의 기분으로 전부를 다 안다고 믿기도 하고 그로 인해 섣부른 판단으로 오해는 깊어지니까. 오해가 이해가 되는 순간은 때로 너무 멀고 때로 오지 않는다. 백수린의 단편집 『여름의 빌라』를 읽으면서 나의 오해가 단절로 이어진 관계는 없었을까 생각하니 두려워졌다. 소설집 전체가 관계나 단절을 주제로 한 건 아니지만.


표제작 「여름의 빌라」는 제목에서 기대했던 휴가지의 풍경이나 휴식과는 다른 고요한 슬픔을 안겨준다. 서로 좋았던 기억만 간직했던 ‘주아’와 ‘베레나’ 부부가 재회하면서 함께 보낸 여름의 시간들이 새로운 기억으로 남는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상처를 마주하면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타인의 삶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생의 터전인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관광지가 되는 아니러니한 일상.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아픈 역사.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여름의 빌라」 중에서)


섣부르게 짐작하고 판단하는 대신 상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일, 그 역시 이해의 시작일 것이다. 더 가까이 다가서 자세히 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 일처럼 쉬운 일도 없을 텐데. 우리는 무슨 이유로 그런 일상을 외면하는 것일까. 거대한 역사 속 진실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기억을 바로잡는 일, 혹은 그때 감정을 차분히 떠올려보면 서운함보다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더 컸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국인 프랑스에서 이전과는 다른 삶을 꿈꿨던 ‘나’와 파리 주재원이었던 언니가 함께 보낸 시간을 그린 「시간의 궤적」에서도 그런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서로의 과거를 모르고 오직 주어진 현재만 알기에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가까워졌기에 현재의 불안, 고민, 걱정을 보여주지만 그 모든 걸 품기엔 그들의 시간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한 편의 영화처럼 싱그러운 추억만 남긴 채.


어쩌면 좋을지 망설이는 사이, 언니가 먼저 우산을 펼쳐 들고 빗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우산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비였다. 언니는 이내 우산을 접더니 비를 쫄딱 맞은 채 나에게 빗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우리는 폭우 속을 달렸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머지않아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날 거라는 사실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처럼. (시간의 궤적 중에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더라도 이처럼 서로가 간직하는 감정은 다르다. 낯선 곳으로의 이사는 설레기도 하지만 적응해야 하는 불안을 떨칠 수 없다. 「고요한 사건」 에서 화자는 재개발 지역으로 이사를 왔지만 그 동네의 분위기가 낯설다. 정착이 아닌 잠깐의 거주라서 그랬을까. 혼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가운 겨울밤, 이런 문장을 읽노라면 마치 화자인 ‘나’와 독자인 내가 하나가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다. 외로움, 고독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창밖에는 커다란 눈송이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눈송이가. 역청 빛 어둠을 덧칠한 이웃집의 지붕 위에도, 옥상 위의 장독대와 비탈 아래쪽의 앙상한 나무초리 위에도, 고요하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것은 정말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커다란 눈송이였다. 마른 눈. 자국눈. 가랑눈. 국어사전에서 내가 발견했던 무수한 단어로도 형용하기가 충분치 않던 눈송이. 그토록 숨 막히는 광경을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고요한 사건」 중에서)


그런가 하면 이전의 백수린의 소설에서 만나지 못한 색다른 분위기, 응원하고 싶은 당돌함이라 말하고 싶은 단편도 실렸다. 보통의 엄마와는 다른 특별한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 「폭설」, 평범하게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화자에게 찾아온 욕망을 그려낸 「아직은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할머니를 추억하는 방식이지만 결국엔 할머니에게 소중했을 시간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흑설탕 캔디」, 풋풋하고 첫사랑과 반항과 방황을 아름답게 들려주는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이 그러하다.


우리의 맨 종아리를 간지럽히던 싱그러운 연초록빛의 풀들. 햇살에 투명하게 반짝이던 나비들. 유속이 느린 수면 가까이에서 천천히 날다가 순식간에 저만치 솟구치던 작은 새들. 다미의 말에 얼마만큼의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미가 들려주는 것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로 이루어진 매혹적인 서사였으니까.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중에서)


하나의 계절이 지나고 다른 계절이 왔을 때 그 계절의 선명함이 잘 보이는 것처럼 누군가의 상처, 상실, 관계도 그렇게 알게 된다. 그래서 좀 억지스럽지만 『여름의 빌라』는 여름이라는 계절보다는 오히려 차갑고 냉랭한 겨울에 더 잘 어울린다.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평온해져 어떤 기억, 어떤 감정과 조우할 수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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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0-12-10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고,
항상 행복과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자목련 2020-12-11 10:3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항상 먼저 챙겨주시고 인사를 전해주시네요.
어제보다는 조금 따뜻하네요. 건강 잘 챙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