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작업 전, 차를 마시는 시간은 나에게 기도의 시간이다. 그저 하얀 사각 종이를 사랑했던, 쓰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황홀했던 청순한 마음을 다시금 불러오는 시간,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소설을 쓰기 전에 책상을 치우고, 차를 우리고, 마들렌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접시를 골라 책상 위에 올려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의 말이 타인을 함부로 왜곡하거나 재단하지 않기를.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말하는 무시무시함에 압도되지 않기를. 나의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기를. 나의 글이 조금 더 가볍고 자유롭기를.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나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서 당신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105쪽)


날씨가 추워지면서 따뜻한 걸 찾는다. 뜨거운 커피, 생강차, 녹차, 따뜻한 보리 차까지. 고구마, 떡, 빵, 다양한 주전부리를 곁들인다. 그리고 때때로 책을 함께 읽기도 한다. 이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춘 에세이가 있다. 소설가 백수린의 『다정한 매일매일』이다. ‘빵과 책을 굽는 마음’이란 부제처럼 책은 작가가 들려주는 빵과 소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한 권의 책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따라오는 하나의 빵 이야기, 반대로 빵을 먹으면서 생각나는 한 권의 책. 빵과 책이라니, 그 조합만으로도 달콤하고 다정하다. 다채로운 책과 빵에 대한 추억과 기억이 갓 구워진 빵 냄새를 풍기며 다가온다.


작가가 읽은 책 이야기를 실은 책은 많지만 빵과 책이라는 점에서 신선하고 색다르다. 이 책은 내내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읽었다. 그래서 작가가 소개하는 빵의 모양과 맛을 상상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당장 주방에 나가 뭐라도 찾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스마트 폰으로 검색을 해서 눈으로 먹거나 직접 배를 채우는 대신 정성 가득한 한 문장 한 문장이 내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익숙한 빵과 좋아하는 빵이 나오면 괜히 더 신났다. 내가 읽은 책을 만나는 일은 여전히 반갑고 그 책에 어울리는 빵 이야기를 듣는 건 즐겁다.


백수린 작가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를 통해 천천히 재독하는 기분이랄까. 가장 흔하게 먹는 샌드위치지만 정확한 이름을 몰랐던 파스트라미 샌드위치와 필립 로스의 『울분』은 내게 청춘, 성장, 아픔으로 기억되는 소설이다.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와 그 관심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싶은 자녀. 그 갈등은 여전하다. 부모에게 자식은 언제나 걱정되는 존재인가 보다. 그런 면에서 부모는 무조건 단단하다 여긴 생각이 부족했구나 싶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람에게 누구나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과 불행, 성공과 좌절, 자유와 책임이 있음을 깨닫고 존중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48~49쪽)


빵에 대한 애틋하고 아련한 개인적인 기억을 듣노라면 생면부지의 작가와 알 수 없는 뭔가로 이어진 것 같고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 것만 같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직접 만든 초코칩 머핀을 건넨 기억과 조카를 낳기 전 만삭의 동생과 옛날씩 꽈배기를 먹으러 갔다 팔려서 먹지 못한 기억, 독일의 대표적인 빵 프레철에 대한 이야기는 열 살 소녀가 만난 할아버지의 죽음과 어른이 되어 겪은 할머니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타인의 죽음을 끊임없이 살아 내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타인의 죽음은 결코 온전히 극복되지 않는 상실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직 그런 상실을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그럴듯한 거짓말쟁이일 뿐일 것이다. (185~186쪽)


소설가가 선택한 책이라서 그럴까. 제목만 듣고도 흐뭇한 책들을 만나는 순간 나는 괜히 으쓱해진다. 나도 손쉽게 굽을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팬케이크의 맛을 연상시킨다는 켄트 하루프의 『축복』을 읽으면서 그의 다른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을 백수린 작가가 읽었을지 알고 싶다. 제목도 처음 듣는 책인데 당장이라도 검색해서 읽고 싶은 책도 있고 읽어야지 하다 시기를 놓친 책들도 다시 궁금해진다. 읽고 싶은 책 하나를 꼽자면 맛보다는 건강을 위해 선택할 것 같은 호밀빵 샌드위치와 나무를 연결하는 페터 볼레벤의 『나무 수업』. 같은 숲의 너무밤나무들이 뿌리를 통해 영양소를 공유한다는 습성은 정말 경이롭다. 공생과 연대를 아는 너도밤나무라니. 인간이 배워야 할 모든 게 숲에 있는 건 아닐까.


서른여섯 가지의 책과 서른여섯 가지의 빵을 만나면서 친구가 생각났다.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함께 다닌 친구는 나를 만나러 올 때마다 빵을 사가지고 온다. 올 때마다 다른 종류의 빵을 사 오는데 언제나 모카빵이 있다. 벤치에서 카페에서, 서로의 자취집에서 커피와 모카빵을 먹은 기억. 가물가물한 그 기억이 새롭게 피어난다. 맛있는 빵을 만나면 떠오르는 이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좋은 책을 만나 가까운 이에게 괜찮은 책이라 소개할 수 있다면 그 역시 행복하다. 백수린의 산문집은 그런 책이다. 편하게 읽을 수 있고 쉽게 읽히지만 가만히 와닿는 문장은 깊고 진하게 스며다.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를 소개하는 이런 부분도 그렇다.


사는 것이 힘들고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는 어느 날, 온기가 남은 오븐 곁에 둘러앉아 누군가와 단팥빵을 나누어 먹는 상상을 해본다. 긴 시간 정성껏 졸여 만든 달콤하고 따뜻한 앙금이 들어 있는 단팥빵을. 그것은 틀림없이 행복한 장면이겠지만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고독할 것이라는 걸 나는 이제는 안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에게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상처와 자기모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충동을 감당하며 사는 존재들이니까. (227쪽)


누구나 할 것 없이 지치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즘.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정한 위로가 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이다. 고맙다는 말 대신, 건네도 좋을. 그러니까 빵으로 소개하자면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부드럽고 달콤한 식빵 같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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