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언니 - 언니들 앞에서라면 나는 마냥 철부지가 되어도 괜찮다 아무튼 시리즈 32
원도 지음 / 제철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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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었던 여성이 하나의 공통점으로 ‘우리’가 되자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11쪽)


‘아무튼 시리즈를 만나 건 잘한 일이다. 시리즈 전체를 다 만난 건 아니지만 내가 읽은 책들은 나쁘지 않았다. 어떤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아무튼 그냥 좋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는 사물과 존재들. 그런 대상이 내게도 있는지 읽을 때마다 생각한다. 원도의 『아무튼, 언니』를 읽으면서 나의 언니들, 나의 동생들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언니가 된다는 것, 언니로 불리는 관계가 맺어진다는 건 친밀, 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그런 언니들이 있다. 혈연으로 맺어진 두 명의 언니를 포함한 나의 언니들. 또 나를 언니라 부르는 동생들. ‘언니’라는 말이 이렇게 달콤한 말이었던가. 


여느 에세이와 다르지 않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아무튼, 언니』는 저자가 만난 언니들의 이야기다. 자신을 이끌어주고 지탱하며 함께 살아가는 언니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글이다. 경찰관인 저자가 중앙경찰학교에서 만난 세 명의 언니 (수홍, 시벨, 대장) 들과 함께 보낸 순간들, 그 순간들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신나게 수다를 떠는 듯 호쾌하고 유쾌한 문장에 빠져 어느 순간 함께 맥주를 마시고 어느 순간 함께 절망하고 행복해한다. 


경찰관으로 일하면서 경험한 것들, 자신을 향한 세상의 시선들을 향한 솔직한 마음을 말한다. 같은 일을 하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는 사이, 서로에 대한 진심을 담은 격려와 응원이 저자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곳곳에서 전해진다. 세 명의 언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책이라 할 수도 있다. 아, 이런 동생을 둔 언니들은 얼마나 뿌듯할까. 바쁜 스케줄을 맞춰 떠난 유럽 여행부터 힘들고 고단할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준 언니들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그런 언니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부러움이 절로 생긴다. 여자 경찰관 언니들이라니. 드라마 <라이브>가 생각나기도 했다. 


세 명의 언니들의 이야기가 다는 아니다. 친언니와의 관계, 경찰공무원 공부를 하면서 만난 언니, 학창 시절 우상이었던 언니, 엄마의 언니인 이모도 만날 수 있다. 그러니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언니들. 모두 좋은 언니가 될 수는 없지만 인생의 일부를 차지했던 언니들이다. 아픈 오빠로 인해 항상 힘들었던 엄마를 든든하게 지켜준 이모에 대한 이야기는 먹먹함을 몰고 온다. 돌아가신 나의 엄마와 이모는 어떤 사이였을까, 나는 알지 못하는 그녀들의 유년시절이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나의 자매들. 오빠와 남동생과는 다른 남다른 유대감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경찰관이라는 직업의 세계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여성 경찰관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걸까. 경험할 수 없는 일이라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경찰관이 되려면 1종 보통과 그 이상의 대형 면허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어쩌면 이 책은 여자 경찰관이 되려는 이들에게 진짜 좋은 책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부분이다. 현장에 대한 이야기, 여자 경찰관에 대한 사회적 시선,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 사건 현장에서 만난 언니들에 대한 부분을 읽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죽음으로 마주한 언니들, 그녀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말해주는 현장. 모든 잘못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인 여성에게 돌리고 운이 없어 그렇다고 말하는 세상을 향한 분노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완전히 돌아버려야만 똑바로 설 수 있는 팽이와 같은 세상에서 성실과 진심의 가치 따위, 씨알도 안 먹힐지 모른다. 이렇게 살아질 바엔 그냥 사라지는 게 낫다는 생각이 치밀어 오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 쓰러지지 말자. 우리가 맞잡은 손이 끝없이 이어져 언젠가는 기쁨의 원을 그릴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의 운이 되어주자. 세상이 심어준 혐오와 수치 대신 서로의 용기를 양분 삶아 앞으로 나가갈 우리는 설렁탕을 먹지 않아도 충분히 운수 좋은 날을 맞이할 것이다. (158쪽)


누군가의 언니에게, 언니의 동생들에게 힘들어도 지치지 말고 함께 살아가자고 손을 내미는 책이다. 언니가 있어 든든하고 좋다고, 나도 그런 언니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고 건네고 싶다. 공감과 연대로 하나가 되어 단단해진 우리를 기대하는 일이 신나고 기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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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핍 윌리엄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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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어원이 궁금할 때가 있다. 아주 어렸을 적 처음 글을 배울 때 새로운 단어에 대해 하나씩 그 뜻을 외우고 기억하던 것처럼. 내가 사용하는 뜻과 다른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신기하고 놀라웠다. 소리로 익히는 말이 아닌 단어, 그러니까 글자로 적어 익히는 건 뭔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소리는 금방 사라질 것 같고 글자로 기록하면 영원할 것 같다고 할까. 아마도 사전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통용되는 말, 같은 뜻으로 정의할 수 있는 말,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실리적인 말들 말이다. 하지만 ‘핍 윌리엄스’의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을 읽으면서 시대가 원하는 단어가 다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아니, 재확인했다. 어떤 사회가 특정 단어에 얼마나 민감하고 불편해할 수 있는지 말이다. 누구에 의해 사전이 만들어지는지, 누가 그 사회의 주류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빅토리아 시대의 <옥스퍼드 영어 사전> 제작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은 내게 다양한 의미를 안겨주었다. 자신을 낳고 죽은 엄마 릴리를 그리워하며 아빠와 단둘이 살아가는 에즈미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성장소설이자, 사전을 만드는 과정은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이며 여성의 삶을 다루는 페미니즘 소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시녀, 노예가 존재하던 시절, 어떤 계급이 여전히 관습으로 남았던 시대.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삶을 보여주는 날것 그대로의 단어가 상징하는 것들이 현재 우리 시대의 ‘혐오’나 차별’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


소설은 1887년 2월 에즈미가 아빠와 함께 단어 공부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빠는 사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에즈미는 아빠를 따라 사전을 만드는 ‘스크립토리엄’에서 시간을 보낸다. 머리 박사를 중심으로 아빠와 많은 조수들이 그를 도와 각지에서 도착한 단어에 대한 수많은 쪽지들, 그것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을 한다. 사용할 수 없는(사전에 등재할 수 없는) 단어들은 바로 버려진다. 그러나 에즈미에게 그 단어는 다른 의미다. 처음 에즈미에게 온 단어는 ‘여자 노예(Bond-Maid)’였다. 머리 박사님 댁에서 살림을 하며 자신을 돌봐주는 ‘리지’였다. 모두가 다 아는 단어인데 존재하는 단어인데, 사전에는 들어갈 수 없는 단어. 어린 에즈미는 충격을 받았고 그 쪽지를 트렁크에 소중하게 담았다.


그렇게 에즈미는 자신만의 단어, 아닌 여성들의 잃어버린 단어를 수집하는 일을 시작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지는 단어들이 하나씩 트렁크 속에 쌓였다. 하지만 사전을 만드는 이들에게는 알릴 수 없었다. 그들에겐 의미 없는 일이라 여겨질 게 뻔했으니까. 단어들을 모으는 일은 흥미로움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일이었고 주변을 둘러보며 성장하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에즈미가 만난 메이블, 틸다, 빌은 그녀의 삶을 뒤흔들었다. 어떤 선택(고통과 슬픔을 동반한)과 그에 따른 책임과 결과는 에즈미를 성장하게 만든다.


모두가 그러하듯 에즈미도 주변의 도움으로 그 시간을 견디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스크립토리엄에서 머리 박사의 심부름을 하면서 사전 제작에 힘쓴다. 하루 종일 단어를 설명하는 쪽지를 분류하고 기록하는 일은 단조롭고 지루할 것이다. 그 일에 대한 책임과 사랑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에즈미를 비롯한 사전에 들어간 단어를 결정하고 그 뜻을 조율하고 인쇄를 하는 그 일련의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


하나의 단어를 발견하고 그 뜻을 기록하기 위해 쪽지와 연필을 가지고 다니는 에즈미,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지 문장으로 담아, 누구의 말인지 기록한다.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말들, 누군가에게는 좋은 말로, 누군가에는 나쁜 말로 남는 말들. 사전을 만드는 과정도 무척 재미있지만 에즈미가 아이에서 소녀를 거쳐 여자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느낌도 무척 감동적이다. 에즈미와 함께 나도 성장하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에즈미를 응원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이 소설에서 중요하다. 영원한 지원군인 아빠와 디토 고모와 리즈, 여성 운동에 대해 토론하고 실천하는 틸다, 에즈미가 만든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을 책으로 만들어 청혼한 인쇄 조판원 개러스.


한 권을 사전을 만드는 시간이 지루하고 긴 것처럼 한 사람의 인생도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들과 협력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하나의 단어를 놓고 그 뜻을 토론하듯 서로의 단어를 수용하고 품어주는 것이다. 이 소설이 특히 좋았던 건 단어의 확장이었다. 에즈미는 처음에 수집했던 여성들의 단어에서 시작해 누군가의 고유한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들을 채집한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후의 감정, 전쟁으로 인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을 경험하며 감당해야 하는 상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단어가 존재하며 그것들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년의 에즈미가 엄마를 떠오릴 수 있었던 단어에 대해 디토 고모가 한 말과 개러스의 말은 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


“단어들은 부활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란다.” (47쪽)

“진짜 단어들은 소리 내어 말해지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죠.”(137쪽)


사전을 만드는 일은 얼마나 방대한 일인지 상상한 적이 없다. 어떤 과정으로 어떤 말들이 어떻게 하나로 규정되고 사전에 등재될 수 있는지 그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지. 사전을 만들고 기획하던 사람들에게는 그 당시의 사회상과 문화가 가장 중요했다. 여성의 말, 여성의 단어는 사전에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나를 존재하는 말과 단어가 존중받지 못한다면 몹시 화가 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무척 남다르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수많은 단어들은 사라지고 어느 순간 완전하게 소멸될 것이다. 살아 움직이다 끝내 소멸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건 단어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부의 권력과 통치로 인해 갇혀 있다 사장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의 단어는 자유롭게 바람을 쐬고 날아다닐 권리가 있어야 한다. 에즈미의 트렁크 속 단어가 그랬던 것처럼. 단어로 상징된 존재하는 모든 삶에게도.


“이 단어들 말이에요.” 트렁크 속으로 손을 뻗어 쪽지를 한 움큼 꺼내며 내가 말했다. “이것들은 숨어들려고 나한테 온 게 아니었어요. 이 단어들은 바람을 쐬어야 돼요. 읽히고, 공유되고, 이해되어야 해요. 어쩌면 거부당할 수도 있겠지만, 기회가 주어져야 된다고요. 스크립토리엄에 있는 다른 단어들처럼요.” (353쪽)


아마도 존경받는 책의 리스트가 있다면 이 소설이 포함되지 않을까. 존재하는 모든 삶이 존엄하고 거룩하다는 걸 말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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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05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 저도 정말 궁금했어요. 아직 구매전인데, 별 다섯 주신 거 보고 구매 결심합니다. ㅎㅎ

자목련 2021-03-05 11:34   좋아요 2 | URL
저는 무척 좋았어요. 단어를 선별하고 사전을 만드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에즈미가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모습이 더욱 좋았어요. 연대하며 성장하는 모습, 언제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멋진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이요!

얄라알라 2021-03-05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읽어도, 굉장히 독창적인 책이라는 걸 알겠어요. bond-maid라니, 유대, 결속을 뜻하는 단어가 왜 앞에 오는 걸까...그리고 존재하지만 사전에는 올릴 수 없는 지칭어들이 얼마나 더 많을까, 돌아보게 되네요^^ 저는 사지는 않고 빌려 읽어야겠어요^^

자목련 2021-03-08 10:09   좋아요 0 | URL
수많은 말과 단어 가운데 우리가 선택하는 것들은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도서관의 책 가운데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얄라 님, 즐겁게 만나세요. 제게 좋은 느낌이 전해지면 좋겠어요. 활기찬 한 주 시작하세요^^

hnine 2021-03-05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말을 소재로 이런 내용의 소설은 없을까요?
흥미있는 내용이어요.

자목련 2021-03-08 10:12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면서 사라지는 사투리가 생각났어요. 말씀처럼 우리말도 분명 있겠지 싶어요.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싶어요. 나인 님, 환한 봄날 이어가세요^^

stella.K 2021-03-17 16:47   좋아요 0 | URL
영화 <말모이>가 <우리말의 탄생>을 원작으로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긴하지만요.
아님 우리 말을 소재로 한 건 아니지만, 김탁환의 <대소설의 시대>는
조선시대 책읽는 여자들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걸 작년에 사 놓고 아직도 안 읽고 매일 눈길만 주고 있습니다.ㅠ

이거 원 너무 늦게 봤군요.ㅋㅋ


바람돌이 2021-03-05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단어가 없어질때는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가 함께 없어지는거겠죠. 전에 어디선가 지금도 소수 언어들이 계속 사라지고 있으며 이는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삶과 철학이 없어지면서 세계의 다양성이 점점 없우지고 있다는 얘기를 읽었는데 이 책도 비슷한 맥락일것같네요. 자목련님 리뷰덕분에 또 하나 좋은 책을 담아갑니다

그레이스 2021-03-06 00:01   좋아요 0 | URL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가 생각납니다. 사라져가는 언어들의 이야기. 이 책을 모티브로 김애란작가가 쓴 단편이 있는데, 거기서 소개받고 두꺼운 책을 사서 읽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자목련 2021-03-08 10:1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영원한 건 없겠지만 보존되어야 할 것들이 많겠지요. 하나로 통일되는 편리함도 있겠지만 말씀처럼 다양성과 존중에 대한 논의도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바람돌이 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1-03-08 10:15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 님이 언급하신 김애란의 단편, 저도 기억해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는다는 건 너무 슬픈 것 같아요. 어쩌면 우리 곁의 많은 것들이 그러하겠지요.
 
키키 키린의 편지 - 삶을 긍정하는 유연한 어른의 말 키키 키린의 말과 편지
NHK <클로즈업 현대+>·<시루신> 제작부 지음, 현선 옮김 / 항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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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편지를 받는 일은 정말 기쁘다. 손 편지의 수고로움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문자, 전화, 이메일이 전할 수 없는 온기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할까. 그런데도 정작 손 편지로 답장을 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손글씨가 엉망이라는 어이없는 핑계를 대지 않더라도 말이다. 귀찮기도 하고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특정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오롯이 그를 생각하며 글을 쓴다는 일. 그건 어렵고도 즐겁다. 나에게서 시작해 당신이라는 단 한 사람에게 닿은 글이라니. 그런 점에서 배우 키키 키린이 쓴 편지는 더욱 남다르다. 유명 배우가 단순한 팬에게 형식적으로 고마움을 전하는 편지가 아닌 고민을 들어주고 그것을 함께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편지였기 때문이다.

『키키 키린의 편지』는 키키 키린이 타계 후 그녀를 추모하는 방송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키키 키린이 많은 일반인에게 많은 편지를 남겼다는 걸 알고 편지를 받은 이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하면서 그녀의 편지를 모은 글이다. 유명 배우가 일반인에게 편지를 쓰게 된 과정은 무엇일까. 편지를 받은 이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암 투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노년의 배우, 그녀의 보낸 편지의 내용은 어떨까. 만약 내가 연예인에게 편지를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책을 읽기 전에는 막연하게 이런 점들이 궁금했다.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배우 키키 키린이 아니라 인간 키키 키린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졌다.


방송 제작진이 만난 이들은 무척 다양했다. 그만큼 키키 키린이 교류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왕따 근절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부터 영화의 모델이 된 한센병 환자인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 성년의 날을 맞은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개인적인 친분과 업무에 관련된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쓴 내용이 없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뻔한 글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담긴 진솔한 것이었다.

책에는 청년들에게 보낸 편지가 가장 많았는데 그 가운데 이런 편지가 특히 좋았다. 취재 과정에서 편지를 받은 당사자는 키키 키린의 편지에 대해 잊어버리고 있다가 편지를 찾아 읽었는데 현재 자신의 상황과 잘 맞는 내용이었다. 장래 희망이 없는 청년에게 “장래 희망이 비어 있더군요. 나는 우연히 열여덟에 배우가 되었는데 육십이 넘어서야 겨우, 앞으로 연기자를 목표로 삼기로 했어요. 난 좀처럼 입을 잘 열지 않는 아이여서 말하는 게 익숙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타인의 말을 듣는 귀를 키워줬어요. 단점을 장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제 특기죠.” (본문 중에서)

그리고 늦게나마 청년이 키키 키린에게 보낸 답장도 같은 맥락이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그녀의 의도와 진심을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 알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꿈이나 목표는 자주 바꾸면 안 되고 늘 그것을 향해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읽으며 꼭 평생을 걸 만한 꿈이나 목표가 없더도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유연한 태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표가 작거나 꿈이 좀 엉뚱해도 괜찮다는 걸 알아서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본문 중에서)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이처럼 마음이 오가는 것이다. 키키 키린의 편지를 받은 이들이 그녀와의 짧은 만남을 추억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도 키키 키린에게 보내는 답장이자 세상을 향한 내밀한 고백이었다. 영화 <앙> 촬영을 위해 키키 키린이 모델로 한 한센병 환자인 여성이 취재진에게 들려준 이 말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니 특별히 뭐가 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거야.” 은 그래서 아름다운 여운과 진한 감동으로 남는다.

키키 키린이 마직막으로 쓴 편지라 할 수 있는 짧은 글도 마찬가지다. 병원에 입원한 상황에서 일 관계자에게 보낸 편지다. “가느다란 실 하나로 겨우 이어져 있네요. 말 한마디 안 나와서 힘들고 곤란한 노파입니다. K.KIKI” 인생의 끝을 곁에 두고 자신이 직접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그녀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녀는 진짜 어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막연하게 내가 되고 싶었던 대범한 어른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닐까. 그러니 그녀를 아는 모두가 그녀를 사랑하고 기억할 것이다. 그저 배우로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도 그녀와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친근하다.


“죽는다는 건 타인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떠난 사람을 내 안에서 계속 살아가게 하는 일” (키키 키린 지인의 말,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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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3-04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편지 쓰는 사람을 주변에서 본 적 없는데, 문방구가면 여전히 편지지 매대가 있어서 그래도 누군가는 여전히 손글씨로 전하는구나 궁금해하거든요. 키키 키린같은 ˝연결되려는˝ 분들이신가봐요^^

자목련 2021-03-05 11:1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는 잊고 있던 물건들을 보면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사용하는 소중한 것이구나 싶어요. 연결되려는, 이 말 좋으네요. 얄라 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친구에게
이해인 지음, 이규태 그림 / 샘터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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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너는 나의 책, 나는 너의 책.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직 읽을 게 너무 많아 행복하다.

이런 글귀로 시작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친구에게』는 다정하게 나에게 말을 건넨다. 정말 그런 것 같다. 내 친구에 대해서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많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사랑하는 친구를 생각하고 조용히 나를 집중시킨다. 진짜 친한 친구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귀를 기울인다. 나의 친구, 사랑하는 내 친구, 보고 싶은 내 친구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책 속의 친구, ‘너’는 온전히 내 친구 같아서 마음이 벅차고 신난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까지 가득하다. 문자처럼, 편지처럼, 짧은 글 안에서 나를 걱정하고 생각하는 친구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는 걸 느낀다고 할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와 조금씩 멀어지는 걸 느끼는 순간, 얼마나 속상하고 슬펐는지 모른다. 수업 시간에, 자율학습시간에 쪽지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군것질을 하면서 좋아하는 선생님이나 남학생 이야기에 수줍고 부끄러웠던 순간들. 지금과는 다른 시절이기에 가능했다. 그 존재만으로도 너무 든든했다. 한 번도 표현하지 못했던 고마운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너는 늘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고, 나는 늘 괜찮다 괜찮다 하고,

그러는 동안 시간은 잘도 흐르는구나.

세월과 함께 우리도 조금씩 늙어가는구나. (26쪽)


함께 보낸 시간보다 이제는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온 시간이 훨씬 많지만 우리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낀다. 정말 세월과 함께 늘어가는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건강을 걱정하는 사이가 되었다. 갑자기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에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그냥 아무 바람도 기대도 없이 뭐든 말할 수 있는 존재. 친구가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오늘은 호숫가에서 너를 생각해.

호수는 고요하게 하늘과 산을 안고 있고,

내 마음은 고요하게 너를 향한 그리움을 안고 있어.

물소리 하나 없는 침묵의 호수처럼

나도 너를 위해 고요를 배울게, 친구야. (56쪽)


어떤 일이 있어도, 설령 그것이 나쁜 일, 잘못된 일이라도 우선은 내 편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가. 이해인 수녀님의 목소리로 만나는 친구는 온유하고 인자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었다. 이 작은 책을 읽다 보면 나는 어떤 친구일까 곰곰이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 고집만 피우는 친구는 아니었을까. 내 형편만 봐 달라고 한 건 아닐까. 친구를 만나면 슬쩍 물어봐야겠다.


무엇을 부탁하기 전에 미리 챙겨주고

미리 배려하고, 미리 기도해 주는 너의 정성을

나는 따라가지 못하지만 조금씩 배워보도록 할게.

당연한 듯 받기만 해서 미안해.

늘 앞서가는 사랑 고마워. (62쪽)


봄을 기다리는 날들, 고맙고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만나고 싶어도 만남을 미뤄야만 했던 시간들.  다음에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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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내 맘대로 살겠습니다 - 행복한 삶을 만드는 17가지 질문들
미리안 골덴베르그 지음, 박미경 옮김 / 청미래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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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더 행복해지지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남자들이 누리는 자유가 부러울까? 왜 다른 여자들과 나를 비교할까? 싫다고 말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울까? 어떻게 하면 가볍고 유쾌하게 살 수 있을까? 감정을 빨아먹는 흡혈귀에게서 벗어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나이 드는 것이 왜 두려울까? 나이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이 되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일까? (11쪽)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렇게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 시간이 없어서, 부모의 기대 때문에, 남들 다 그렇게 사니까, 용기가 없어서. 핑계를 찾자면 끝도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번쩍하는 때를 만난다. 죽을 고비를 넘겼거나 시한부 생을 선고받았거나 가족의 죽음이 그러하다. 이제는 과거의 나와 이별하고 새로운 나를 맞이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불행하기 위해 사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불행을 걷어차지 못하는가. 행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따져 물으며 답을 하기가 애매하다. 나를 위한 삶, 나를 돌아보는 질문들에서 한 번 찾아보면 어떨까? 『오늘부터 내 맘대로 살겠습니다』란 유쾌하고 통쾌한 제목의 책에서 그런 질문에 답을 해보자.


저자 미리안 골덴베르그는 브라질의 행복을 연구한 인류학자로 18~98세의 남녀 5000여 명을 인터뷰하고 연구한 결과로 ‘행복 곡선’에 대해 설명한다. 그녀에 따르면 인간은 어린 시절 행복했다가 점점 불행해지고 소위 인생의 바닥을 찍고 다시 나이가 들면서 행복해진다고 한다. 우리가 흔이 말하는 인생의 롤러코스터가 아닐까 싶다. 그녀의 연구는 테드(TED) 강연을 통해 유명해졌고 그로 인해 이 책을 우리가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디나 사람 사는 건 비슷하다. 처음엔 브라질 여성 인류학자의 글이라 브라질 문화와 사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지만 그들의 고민과 행복을 향한 마음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책을 통해 던지는 17가지 질문은 행복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부터 인간관계로 인한 피로감, 배우자와 결혼생활,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 우리가 한 번쯤 맞닥뜨린 고민과 문제들이다. 목차를 살피다가 가장 눈에 들어온 건 ‘“신경 꺼!” 버튼을 아직도 안 눌렀다고?’란 질문이다.


타인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보는 것 같았다. 주변을 의식하느라, 상대의 감정을 배려하느라 피곤한 관계를 이어온 시간들과의 이별을 위한 처방전이라고 할까. 57세의 한 교사는 남편과 헤어지고 작은 버튼 모양의 문신을 새겼다고 한다. 진짜 신경 꺼, 버튼을 느끼고 경험한 것이다. 살면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신경 꺼 버튼을 이제 맘껏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누군가 듣는 상대가 있지 않아도 혼잣말이라도 신경 꺼, 란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후련한 기분이 든다. 저자가 만난 다양한 세대가 느끼는 행복과 감정에 대한 솔직한 인터뷰도 무척 인상적이다.


말끔한 인생 정리는 삶의 모든 영역을 싹 정리해서, 더는 원하지 않는 사람과 물건을 실제의 혹은 가상의 쓰레기통에 버리겠다고 결정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불쾌하고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며 해롭고 과도하고 무익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죄다 없애겠다는 뜻이다. 사람과 물건의 중요도를 평가해서 우리의 행복에 꼭 필요한 사람과 물건만 간직하겠다는 뜻이다. (49쪽)


혈연과 지연으로 채워진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어려운 문제다. 저자의 비유대로 우리의 감정을 빨아먹는 흡혈귀가 너무도 많다. 만날 때마다 신세한탄을 하며 부정적인 기운을 전달하는 지인, 필요할 때마다 연락을 하는 친척과 가족,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배우자. 이 글을 읽을 때 누군가 떠오른다면 그가 바로 기생충(흡혈귀)일지도 모른다. 완전하게 단절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면 65세의 의사처럼 무시하고 웃어넘기는 게 최선일지도. 


우리는 행복을 좇느라 진짜 행복을 놓치는 건 아닐까.‘더 행복해지려면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란 질문에서 많은 사람들은 욕망을 표현한다. 독립할 수 있는 자금, 돈 많은 배우자, 성형수술 등 다양하다. 그것들이 충족되었을 때 정말 행복할까. 아마도 다른 욕구가 분출될 것이다.  저자는 행복에 대한 질문으로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물었는데 그 답은 아주 소소한 것이었다. 일을 끝내고 집에서 가족들을 볼 때, 친구들과 축구 후 마시는 맥주 한 잔의 순간, 친구들과 있을 때가 행복하다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나만의 기준을 마련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다. 


100세 시대가 되면서 우리는 나이를 먹고 늙는 일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늙고 병든 삶을 어떻게 견딜까 걱정을 하는 거다. 하지만 걱정과 근심만 할 수는 없다. 하루하루 주어진 날들을 긍정적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내 맘대로 살아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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