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집짓기 - 마흔 넘은 딸과 예순 넘은 엄마의 난생처음 인문학적 집짓기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내 것이 되는 순간,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렇다. 이전의 그것이 지닌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 내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존재가 된다. 그러니 직접 만든 집은 어떨까? 땅을 사고, 공간을 계획하고, 물건을 들이는 일은 얼마나 두근거리는 일일까. 그 떨림은 집을 짓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기존의 것이 아니라 순수한 창작물처럼, 생명이 깃든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엄마와 집짓기』란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엄마와 집짓기’ 라니, 나는 그저 속이 상하고 부럽다.

 

 그렇다. 이 책은 엄마와 함께 집을 짓는 이야기다. 아니다. 집을 짓는 과정이 아니라 삶을 사는 이야기다. 엄마와 딸이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을 사랑하는 법을 들려준다. 그러니까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비루하고 지친 삶을 안아주는 엄마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 책을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바로 엄마 때문이다. 엄마, 아이를 잉태하는 순간 자신이 아닌 엄마로 살아가는 여자를 기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면서 화가 나기도 했다. 나만의 엄마가 떠올라서, 엄마라는 이름밖에 없었던 한 여자가 생각나서.

 

 ‘처음엔 엄마에게 창은 바깥으로 뚫린 통로의 의미였겠지만 이제는 점차 바깥이 들어오는 소통의 의미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차경(借景)이다. 엄마의 창은 바깥 세계의 풍경을 빌려주는 도구이다. 엄마는 창으로 보이는 소나무가 제일 좋다 하신다. 나는 엄마의 밭이 제일 좋다. 엄마가 낸 창으로 보이는 엄마의 성실한 밭과 그 밭 위로 펼쳐지는 넓고 깊은 하늘이 나를 감격스럽게 만든다.’ 156쪽

 

 엄마의 밭이라는 건 없었다. 그냥 밭이었다. 노동이 삶의 여유가 아닌 삶의 필수였던 나의 엄마에게 집은 어떤 존재였을까. 소박한 화장대는 고사하고 거울 하나 놓일 공간 대신 아버지의 양복이 곱게 걸렸던, 엄마의 방이 내 앞에 펼쳐진다. 엄마의 냄새가 있어서 좋았다. 저자는 엄마의 부재를 견디며 사는 모든 딸들에게 엄마를 불러온다. 집을 지으면서  점점 가까워지고 서로를 더욱 존중하고 사랑하는 엄마와 딸, 가족을 통해서 말이다.

 

 ‘집은 나의 것과 가족의 것이 섞여 있는 곳이다. 간혹 아이 옷 틈에 내 옷을 보거나, 내 양말서랍장에서 튀어나온 아들의 양말 한 짝을 보고 웃음 지을 때가 있다. 특히 아들이 아기였을 때 신었던 아주 작은 양말을 보면, 한순간에 시간은 내가 새댁이었던 때로 돌아간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던 그때, 서랍장은 고요하게 과거의 시간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202쪽

 

 집을 짓는 과정은 여타의 책들과 비교해 색다른 점은 발견할 정도는 아니다. 저마다 집에 대한 생각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책에서는 엄마의 의견을 가장 존중한다. 엄마의 집이므로, 창을 많이 내고, 튼튼하고 따뜻하게 몇 겹의 자재를 두르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지어진다. 집을 짓고 사용할 물건들을 준비하며 엄마와 딸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엄마가 되고 4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되는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건 한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는 저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엄마에게 그림을 드리면서, 엄마의 물건 중 내가 좋아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려받고 싶은 것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슬픔이 밀려왔다. 내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내가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은 엄마가 그동안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57쪽

 

 현재의 삶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은 고단했던 지난 삶을 추억하고 여미는 힘이 된다. 아무것도 없던 땅 위에 우뚝 선 집처럼 말이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이의 글이기 때문에 집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포옹해주는 유기체로 새롭게 보인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놓치고 몰랐던 부분을 일깨워주고 각인시켜 기억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삶을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다짐하게 만든다. 내가 ‘한귀은’ 이란 저자를 좋아하는 이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잘라 2014-01-17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와 함께 텃밭 가꾸고 김치 담그고 하는 일은 얼마든지 하겠지만 집을 짓는 일 만큼은 절대로 엄마와 함께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지라 건너 뛴 책인데요, 집을 짓네 마네 하는 거랑 상관없이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리뷰입니다. 감사합니다.

자목련 2014-01-19 14:09   좋아요 0 | URL
텃밭을 가꾸고, 밥을 먹고, 서로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엄마가 계시니 메리포핀스 님은 얼마나 좋을까요.
집 짓는 이야기와는 별개로 엄마와 딸의 삶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는 책이 아닐까 싶어요. 하여, 개인적으로 추천합니다^^

키치 2014-01-18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참 좋았어요.

자목련 2014-01-19 14:07   좋아요 0 | URL
키치 님도 행복한 책읽기를 하셨겠네요^^
 
식물은 알고 있다
대니얼 샤모비츠 지음, 이지윤 옮김, 류충민 감수 / 다른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생명체는 경이롭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인간은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생활한다. 하지만 그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면 세상은 달리 보인다. 어쩌면 식물의 감각에 대한 연구도 이런 사소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물론 과학자에겐 우리와 다른 무언가가 있겠지만 말이다. 주디스 콜의 『떡갈나무 바라보기』가 개미, 벌, 꽃, 나무 등 자연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를 다룬 책이라면 『식물은 알고 있다』는 식물이 주체가 된 책이다. 그러니까 식물은 인식한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땅의 고정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물이 어떻게 사물을 보고, 냄새를 맡고, 느끼고, 듣는지에 대해 인간의 그것과 비교하여 쉽게 설명한다. 빛이 있는 쪽으로 혹 그 반대로 식물이 움직인다는 건(이를 굴광성이라고 한다)은 식물을 키워본 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한데 이것이 식물의 시각이라고 한다. 인간이 볼 수 있는 빛과 색과는 다르지만 식물은 생존을 위해 주변의 시각적 환경은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만 식물은 우리가 감지하는 것보다 더 짧고 긴 파장을 감지한다고 한다. 실험을 통해 식물이 어느 부위로 빛을 보는지에 따라 우리는 인공의 빛을 통해 인위적으로 꽃을 피우게 할 수도 있으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빛을 인식하는 것이 시각이라면 냄새를 맡는 후각은 식물의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재미있는 건 식물의 후각에 대해 과학적 증명이 있기 전 고대부터 인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집트인이 무화과나무 열매 전체를 익히기 위해 몇 개를 칼로 반으로 자르고, 중국인은 배가 익도록 행을 피웠다고 한다. 대부분의 과일에서 방출되는 에틸렌 가스가 과일을 숙성을 돕는 것이다. 즉 다른 과일의 냄새를 맡으므로 익는 현상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또 있다. 동물이 소리를 통해 위험을 감지하는 것처럼 식물은 후각을 보호를 위한 기능이라고 설명한다.

 

 ‘식물에게 있어 살리실산은 식물의 면역체계를 강력하게 만드는 ‘방어 호르몬’ 이다. 식물은 박테리아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았을 때 살리실산을 생성한다. 살리실산은 식물 체내에서 녹아 세균에 감염된 부위에서 정확하게 퍼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잎맥을 통해 식물의 나머지 부위에 신호를 퍼뜨려 세균이 아직 공격하지 않은 부위에 위험을 알린다.’ (63쪽)

 

 촉각에 대해서는 미모사나, 파리지옥풀을 통해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잎사귀를 건드리기만 하면 재빨리 닫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위험을 감지하고 생존을 위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식물은 촉각을 느끼지만 통증은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이 느끼는 촉각과 통증은 저마다 그 크기가 다르지만 식물은 뇌가 없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것이다.

 

 청각에 대해서 우리는 식물이 음악에 반응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실험 데이터는 없다고 한다. 저자는 식물은 움직일 수 없기에 바람 소리와 나뭇가지 소리에 대한 반응이 무의미한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서식지를 정복하고 확장하니 식물은 대단한 존재다.

 

 책은 식물의 자기수용감각과 기억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인간의 전정기관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눈을 감고 코를 만지고 던진 야구공을 받는 행위가 식물에게도 있을까? 식물이 위아래를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원래 뿌리는 아래를 향하고 싹은 하늘을 향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게 중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식물이 위아래를 구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18~19세기에 걸쳐 놀라울 정도로 진전을 보였다. 처음으로 뒤아멜은 모종들이 뿌리는 아래로, 싹은 위로 자라도록 스스로 성장 방향을 되잡는다는 것을 밝혀냈고, 다음으로 나이트는 위아래 성장의 이유가 중력임을 입증했다. 그다음 다윈 부자는 뿌리 끝에 중력을 감지하는 기작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134쪽)

 

 식물이 기억을 한다고? 맞다, 기억한다. 식물의 떡잎에 상처를 가했을 때 그것을 기억해 그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더 많이 자란다는 것이다. 또한 추운 겨울의 기후를 경험해야 개화하는 밀은 따뜻한 겨울이 지나서는 개화하지 않는다. 이 밀의 기억을 이용해 냉장고에 넣었다 심었더니 싹이 낳다고 한다.

 

 정말 신선하고 흥미로운 책이다. 다윈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실험과 연구 결과가 아니었다면 밝혀내지 못 했을 식물의 감각이다. 계절마다 같은 자리에서 꽃을 피워내는 게 자신의 모든 감각을 이용한 결과라니, 봄이 되면 제일 먼저 꽃을 피울 목련을 보면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올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 일에서든, 사랑에서든, 인간관계에서든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관계 심리학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1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두행숙 옮김 / 걷는나무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나의 행동과 말이 상대방을 아프게 만든다. 그로 인해 관계는 엉망이 된다. 이전의 좋은 감정은 사라지고 만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상처받는 나는 나만 생각한다. 상처는 점점 커지고 깊어진다. 어떻게든 빨리 상처를 치유할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띠귀 맞은 영혼>으로 만난 배르벨 바르데츠키의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그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나의 옛 상처까지 치유해 줄 수는 없다. 우리의 감정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우리 자신이지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자신은 물론 상대방을 이해하고 노력해야 한다.’ 83쪽

 

 물론 아무리 훌륭한 상담가와 의사를 만나더라도 내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모든 감정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책을 통해 만나는 사례들은 어느 특정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서 자라는 상처, 슬픔, 자괴감, 분노인 것이다. 어떤 이는 더 많이 사랑받고 싶을 뿐인데 그 마음을 몰라주는 연인에게 상처를 받고, 어떤 이는 헤어졌거나 이미 죽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한다.

 

 때로는 상처의 원인이 전부 상대방(가족, 친구, 연인, 동료, 상사)에게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관계는 상호적이므로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는지 상대가 모를 수도 있으니 표현해야 한다. 사랑하는이라고 해서 내 마음의 우물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이는 없으니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저마다 가슴속에 아직 성장하지 못한 아이가 있다. 잊었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의 아픈 감정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힘들더라도 그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고 말이다. 힘겨웠던 순간을 꺼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 하지만 평생 그것과 함께 살면서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상처가 끔찍할수록 꽁꽁 감추는 일은 위험하다. 억눌린 상처가 인생 전체를 파괴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설사 고통을 다시 겪게 되더라도 한 번은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 유배된 상처가 저절로 낫는 일은 없다.’ 148쪽

 

 다양한 사람들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언제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확신은 자존감에서 온다. 그러니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 더불어 상처를 인정하고 어리석은 복수를 꿈꾸거나 마음의 문을 닫지 말아야 한다.

 

 ‘자존감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과 숨기고 싶은 단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할 수 있는 것, 적어도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뒤떨어지지 않는 점에 자부심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장단점이 모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 를 받아들이고, 열등감을 극복하면서 원하는 이상을 추구할 때 자존감은 강화된다.’ (231, 232쪽)

 

 사소한 말 한마디에 자주 속상하고 화를 어느 시절의 나를 돌아본다. 지금은 어떤 상황, 어떤 상처에도 의연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배르벨 바르데츠키의 책으 통해 많은 도움을 받은 건 맞다. 그래서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 상처로 너덜너덜해진 마음과 관계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당신에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폐허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걸을 때마다 절망과 고통에 부딪히는 시대다. 하여 많은 이들이 환멸의 삶을 살고 있다. 길을 잃을 양처럼 목자를 찾는다. 불안과 허무로 채워진 삶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인문학과 철학을 향한 급증된 관심을 보면 그곳에 무언가 해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백하자면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어쩌다 읽게 된 책이다. 그러니 나는 에밀 시오랑의 철학이나 사상에 대해 알지 못한다. 때문에 그의 사색에 더 쉽게 흡수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에 쫓기는 듯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사유를 선물하는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한 긍정이나 행복에 대해 말하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죽음, 고통, 허무, 슬픔, 우울로 가득하다. 그것이 모두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고통에 대해 생각하고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에밀 시오랑은 ‘유’가 아닌 ‘무’ 를 통해 존재를 말하는 듯하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던 시절, 살아내기 위해 살았던 시절에는 죽음을 두려워했을까? 이런 구절을 마주하면서 죽음은 삶의 동의어구나 생각한다.

 

 ‘삶의 구조 자체에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의 구성 속에 없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죽음을 없음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삶을 삶의 부정이라는 원칙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곧 없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은 ‘없음’ 이 결국 삶을 누르고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없음을 향하는 도정을 현재화한다.’ (「죽음에 대한 소고 」중에서, 45쪽)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나의 삶을 생각하니 말이다. 아니, 슬픔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는 여지없이 죽음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 다만 그것을 누가 알아차릴까 두려울 뿐이다. 하지만 슬픔의 얼굴은 표가 난다. 점점 깊어지고 넓어지는 슬픔에 표정은 잠식당하고 만다. 그리하여 결국엔 슬픔의 주제를 잃어버리고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슬픔은 신비로 교체된다. 아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는 슬픔이라니...  

 

 ‘깊은 슬픔으로 충격을 받은 사람의 얼굴에서는 너무도 많은 외로움과 체념을 읽을 수 있어, 슬픔에 찬 얼굴은 곧 죽음이 밖으로 드러난 형상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슬픔은 신비로 향하게 된다. 그 신비는 너무도 깊어 슬픔을 수수께끼로 남긴다. 만일 신비의 등급을 매긴다면 슬픔은 무한하고 끝없는 신비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슬픔에 대하여 」중에서, 73쪽)

 

 어제와 다르지 않는 오늘을 살면서 우리는 때로 수많은 어제를 그리워한다. 그때는 좋았는데, 그때가 행복했는데,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에 속한 삶이 아니라 오늘을 느껴야 한다고 에밀 시오랑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순간은 오늘인 것이다. 현재를 기억하고 현재의 나를 사랑하는 말이다. 쉬운 말처럼 보이지만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의 상처가 남긴 환부를 지켜보며 살기 때문이다. 그는 이별했던 순간, 무시당했던 순간, 부끄러웠던 순간을 현재의 순간으로 채울 수 있어야만 충만해질 수 있다는 걸 각인시켜 준다.

 

 ‘영원한 현재는 실존이다. 영원한 현재를 경험하면서 실존은 자명해지고 확실해진다. 순간의 연속에서 떨어져 나온 현재는 없음을 벗어나 존재를 생산한다. 순간의 기쁨 그리고 사물의 온전한 있음이 주는 매력에만 관심을 쏟는 사람, 순간 속에 살 수 있고, 현재를 빈틈없이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순간 속의 절대」중에서, 155쪽)

 

 모든 구절에 밑줄을 긋고 싶다. 아마도 이 책을 만나는 모든 이가 그럴 것이다. 주제마다 우울과 허무가 산재해 있지만 분명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왜 나만 불행할까, 왜 나만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절망하는 이에게 나의 심연과 마주하게 만든다. 산다는 건, 그 자체가 고행이다.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지만 내가 느끼는 고통은 세상의 전부가 당연하다. 그럼에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감당해야 할 고통의 몫이 줄어든다. 안다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에밀 시오랑은 그것을 아는 사람이다.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외로움이 아무리 깊더라도,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는 세상을 더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객관적 의미나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목표를 찾을 수 없지만, 존재의 다양한 형태들은 내게 언제나 슬픔과 희열의 원천이다. 한 송이 꽃의 아름다움이 우주의 궁극적 목적을 충분히 보상해주듯, 청명한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구름 조각이 나의 우울한 염세주의를 즐겁게 해주는 순간들을 경험했었다. 내면에 깊이 빠진 사람들은 지극히 미미한 자연의 광경에서도 상징적 의미를 발견한다.’ (「고통의 저주스러운 원칙」중에서, 198쪽)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는 제목처럼 곧 해가 뜬다는 명징한 사실을 잊고 살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만 살아갈 것이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어둠이 길어질수록 마주할 빛은 크고 눈부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고통과 절망의 삶에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삶을 지배하고 이끌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에게 시 - 그 어떤 위로보다
박형준 지음 / 사흘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지러운 마음으로 가득할 때 듣고 싶은 목소리가 있다. 불현듯 전화를 걸어도 반가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줄 사람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에게는 전화를 걸지 못한다. 내 작은 상처와 아픔에 나보다 더 아파할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럴 땐 속울음을 쏟는다. 그러다 시를 읽기도 한다. 소리를 내어 시를 읽다 보면 신기하게도 괜찮아지는 듯하다. 물론 시를 읽다 끝내 참았던 울음이 터지기도 한다. 이상한 일이다.

 

 계절마다, 달마다 생각나는 시도 있다. 비가 오면 읽고 싶은, 눈이 오면 꺼내고 싶은 시집도 있다. 시 전부를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다시 찾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럼에도 세상에 존재하는 시의 세계는 넓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시는 여전히 많다. 그래서, 나는 시집을 산다. 박형준이 엮은 『그 어떤 위로보다 당신에게 시』을 읽으면서도 몇 권의 시집을 메모한다.

 

 박형준이 소개한 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부터 황동규, 허수경, 문태준, 이정록, 정현종, 김기택, 함민복, 이제니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진 시인과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인들이다. 언제나 그렇듯 처음 만나는 시도 많았다. 한 편의 시와 함께 박형준의 글이 있다. 박형준이 고른 시는 힘겨운 삶에 위로가 되어주는 시다. 그러니까 어떤 시는 밥이고, 어떤 시는 뜨거운 포옹이 고, 어떤 시는 가만히 당신을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시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고운 손이 되기도 한다. 봄을 품었지만 유난히 추워 마음까지 옹송그리게 만드는 이 겨울, 이런 시는 이 시대의 모든 어른에게 위로가 된다.

 

 「코코로지(CocoRosie)의 유령」

 

 지금은 거울 속의 수염을 들여다보며 비밀을 가질 시기

 지붕 위의 새끼 고양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희고 작은 깨끗한 물고기들이 죽어가는 겨울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 위로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나는 어른으로서 이 시간을 견뎌야 한다 어른으로서

 봄이 되면 지붕 위가 조금 시끄러워질 것이고

 죽은 물고기들을 닮은 예쁜 꽃들을 볼 수가 있어

 봄이 되면 또 나는 비밀을 가진 세상의 여느 아이들처럼

 소리치며 공원을 숲길을 달릴 수 있겠지

 하지만 보시다시피, 지금은 겨울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부끄러움을 가질 시기 (56쪽)

 

 황병승의 시에 박형준 시인은 이런 글을 덧붙혔다. ‘어른들의 슬픔은 신문에서, 방송에서, 회사 사무실에서 떠들어대며 객관화되어야  비로소 알게 되는 슬픔이다. 그들은 슬픔을 나누고 곱하고 빼고 더하며 슬픔의 양을 잰다. 거울을 비춰보면 수염이 가득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자신만의 슬픔을 비밀스럽게 간직하려는 어린이다. 어린이들의 슬픔을 유리창을 맑게 닦아내는 세상의 창이다.’ (57쪽) 겨울이 지나고 나면 분명 봄은 올 것이다. 저마다 기다리는 봄의 풍경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우리 생이 올라탄 롤러코스터는 절망만 있는 건 아니다. 분명 희망도 있을 터. 이성복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의 롤러코스터가 어디쯤 와 있을까, 생각한다.

 

 「강」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조각이

 미지(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100쪽)

 

 ‘우리는 사소한 존재이지만 언제나 인생이란 강물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쓸쓸하고 아프더라도 그 기척은 아름답다’(101쪽)고 전하는 박형준의 글처럼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존귀하고 아름다운 건지도 모른다. 시가 지닌 힘이 정말 놀랍지 않은가.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 정호승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읽은 때마다 아릿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니 말이다.

 

1년 단위로 매듭지는 생인 양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은 괜히 더 심란하기도 하다. 도망치듯 떠나온 1월을 향해 다시 나아간다. 새로 세워질 계획들을 생각하며 1년이라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낸 게 아닌가 스스로를 책망하게 되는 날들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졌을 1년,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으며 절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1년」

 

 작년의 낙엽들 벌써 거름 되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작년의 씨앗들 벌써 꽃 되었다

 후딱, 1년이 지나갔다

 돌아서서 나는

 고개를 팍, 꺾었다 (216쪽)

 

 겨울에 마주한 까닭인지 기형도의 시 「겨울. 눈(雪). 나무. 숲」의 이런 시구를 여러 번 읽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가면(假面)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우리는/ 서로 닮은 아픔을 향(向)하여/ 불을 지피었다./ 창(窓) 너무 숲 속의 밤은/ 더욱 깊은 고요를 위하여 몸을 뒤채인다. (138,139쪽)

 

 ‘시는 우리의 정신이 필요로 하는 숨통 같은 것이다. 숨을 잘 쉬면 육신이 맑아지고, 육신이 맑아지면 숨결이 맑아진다.’ (6쪽)는 박형준 시인의 말처럼 고단한 영혼에 위안을 줄 시들이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번지는 당신의 슬픔을 시가 위로한다. 감히 짐작할 수 없었던 크기의 맹렬한 위로와 마주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