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클래식 - 우리 시대 지식인 101명이 뽑은 인생을 바꾼 고전
정민 외 36명 지음, 어수웅 엮음 / 민음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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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은 어렵고 지루하다는 편견이 있다. 모든 고전에 해당되는 말은 아니지만 일부 맞는 말이다. 고전을 읽는다는 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끝까지 읽어내는 끈기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고전을 향한 애정이 식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속에 삶에 대한 웅숭깊은 지혜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대신 읽어주고 친절하게 해설까지 해주는 책『파워 클래식』이 반가운 이유다.

 

 책은 101명의 지성인이 한 지면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 고전을 추천한 책들 중 37명이 선택한 38권을 엮은 것이다. 고전을 추천한 이들은 소설가 김연수, 영화감독 김대우, 문학평론가 김형중, 한문학자 정민, 사회학자 송호근, 화가 김병종 등 문화의 선구자 역할을 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추천한 책은 인생의 책으로 빠지지 않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 인 조르바』, 카뮈의 『이방인』과 같이 익숙한 책들과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박경리의 『토지』 같은 한국문학과 내게는 다소  생소한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까지 다양하다.

 

 37명의 저자들은 저마다 한 권의 책이 흔들리는 삶을 어떻게 붙잡아 단단하게 만들었는지 들려준다. 좋아하는 저자가 선택한 고전을 먼저 읽거나, 내가 읽는 고전을 저자는 어떻게 읽었는지 비교하며 읽어도 좋겠다. 같은 부분에서 밑줄을 그었다면 얼마나 짜릿하겠는가. 그들이 모두 학창시절에 고전을 만난 건 아니었다. 책이라는 게 어떤 시점에 읽느냐에 따라 전달되는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고전이라 해도 누구에게나 다 좋은 느낌으로 남는 건 아니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특별한 고전이 존재한다. 시인 김경주가 겨울이면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읽고, 청소년기에 『데미안』을 통해 아무런 깨달음을 얻지 못한 심윤경이 엄마가 된 현재 새로운 데미안과 마주하는 것이다.  

 

 이 책이 특별한 점은 37명이 지닌 고유한 글을 만나는 즐거움과 해당 고전에 대한 어수웅의 설명이다. 작가의 이력과 작품에 대한 설명이 고전에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아직 읽지 못한 고전에 대한 책은 더더욱.  김형중이 소개한 <당신들의 천국>은 앞 부분을 읽다가 멈춘 책인데, 어수웅의 이런 글이 인상적이다.

 

 ‘1970년대 개발 독재 한국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가 『당신들의 천국』을 읽는 첫 번째 키워드지만, 작가 이청준이 묻는 자유와 권력, 개인과 집단, 자아와 세계, 그리고 사랑과 공동체에 대한 희망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아직 펄펄 끓는 키워드다. 『당신들의 천국』이 지닌 문제의식은 여전히 젊다.’ (184~185쪽, 잃어버린 사유와 성찰의 시간 중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고전을 읽는다는 건 삶이라는 게 되돌이표와 같다는 걸 인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욕망으로 쌍둥이처럼 닮은 잔인한 역사가 이어지고 있으니까. 그 역사의 고리를 끊기 위해 우리는 고전을 읽는다.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인생의 미로 앞에서 우리가 주저앉지 않을 힘을 얻기 위해서. 안톤 체호프의 『세 자매』속 대사처럼.

 

 “우리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살아야 해! 음악이 저렇게 기쁘게 연주되는 걸 들으니, 조금만 있으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살고 왜 고통을 당하는지 알게 될 것 같아. …… 그걸 알 수만 있다면, 그걸 알 수만 있다면!”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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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브렌델 피아노를 듣는 시간
알프레트 브렌델 지음, 홍은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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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눈을 감은 채 음악에 나 자신을 맡길 수도 있고, 아무런 성찰 없이 단순히 음악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음악을 체계화할 수도 있고, 음악을 지적인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고, 음악을 심리적으로 형상화할 수도 있고, 음악을 시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10쪽, 들어가는 말 중에서>

 

 우리 삶에 음악이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할 일이다. 음악은 건조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고 상처 받은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런 음악에 더 가까이 닿고자 직접 연주를 하거나 공부를 한다. 수많은 악기 중에 피아노는 가장 대중적인 악기다. 하지만 피아노에 대해 잘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의 피아노를 듣는 시간은 피아노에 대해 말한다. 그러니까 이 책엔 피아노를 위한 책이자 피아노와 음악이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긴 것이다.

 

 책은 독특한 구성으로 피아노를 들려준다. A의 Akkord(화음)부터 Z의 Zusammenhang(연관성)까지의 키워드로 음악, 피아노 연주 기법, 유명 작곡가의 작품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때문에 피아노를 비롯한 다른 악기를 연주하거나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반갑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같은 이유로 단순히 피아노 연주를 듣는 일반 독자에게는 음악 전문 용어는 생소하며 어렵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무척 매력적이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연주가로서 어떻게 연주를 해야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며 전달할 수 있는지 글을 통해 그의 진심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노래하는 인간의 목소리로 변할 수도 있고, 다른 악기들의 음색을 모방할 수도 있으며, 오케스트라가 될 수도 있고, 무지개가 우주의 음향으로 변할 수도 있지요. 이 변화의 가능성, 연금술은 피아노의 풍요로운 재산이랍니다.’ <91~92쪽, 피아노 중에서>

 

 책에서 만나는 바흐,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쇼팽 등 유명 작곡가들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쇼팽은 다른 악기들을 끌어들이지 않고 오직 피아노라는 악기에 헌신했으며, 모차르트의 소나타는 아이들에게는 쉽고 연주자에게는 너무 어렵고, 피아노 연주시 페달을 신경 써서 밟아야 할 작곡가는 슈베르트라고 알려준다.

 

 ‘우리가 연주하는 작품에 대한 사랑은 음악적 형식이나 구조에 매몰되지 말고 그 틀을 뛰어넘어도 됩니다. 아니, 그래야만 하죠. 색감, 온기, 열정, 감각미가 더해지면 사랑의 대상은 살아있는 존재로 깨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손끝에서 탄생한 생명체에 우리 손으로 피를 흘리게 하거나 멍들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죠.’ <107쪽, 사랑 중에서>

 

 피아노 연주를 들을 때마다 이 책이 떠오를 것이다. 특별히 좋아하는 작곡가의 작품을 들을 때 알프레드 브렌델이 소개한 부분을 읽고 듣는다면 분명 전과는 다르게 들릴 터. 작품에 대한 사랑이 연주자의 손끝에서 어떻게 피어나는지 귀를 기울이고 마음으로 들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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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월드 - 가장 도발적이고 창의적인 예술가 피카소의 삶과 예술 이야기
존 핀레이 지음, 정무정 옮김 / 미술문화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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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대중은 예술가의 삶에는 일반인의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때문에 그들의 작품 속에 숨겨진 어떤 의미를 찾으려 애쓴다. 그것이 그림이라면, 그림 속 인물과의 관계는 무엇이며, 그림이 상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슨 생각을 하며 작품을 만들었을까, 궁금증은 끝이 없다. 평론가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천재 화가 피카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피카소 월드』는 피카소의 제목 그대로 피카소에 대한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까 작품, 친구, 연인, 그의 의식까지 말이다.  

 

 이 책은 피카소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연대순으로 따라가며 그의 미술에 영향을 미친 친구와 협력자를 소개하며 그에 대한 접근으로 피카소를 말한다.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에서 교사이자 화가인 아버지와 강한 신앙심을 가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화가였던 아버지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열네 살에 그린 그림은 그를 기억하는 수많은 작품과는 아주 다른 느낌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은 무척 생경하게 다가온다.

 

 

<첫 영성체. 1896년>

 

 

 프랑스 파리에서 본격적인 작업에 몰두한 피카소의 작품에는 당시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거나 시작된 것이 많다. 책은 피카소의 작품을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어떤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피카소의 상황(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거나,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누구와 교류를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비뇽의 아가씨들. 1907년>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분명 앙리 마티스의 <삶의 행복>에 보이는 쾌락적 원시주의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시도였다. 이 작품은 일종의 상실한 낙원의 그림, 즉 화려한 색채에 황홀경으로 몸을 뒤틀거나 원시적 자유분방함 속에서 춤을 추는 그룹과 고상한 개인들로 가득한 행복하고 관능적인 회화다.’ 40쪽

 

 피카소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스케치를 한 습작을 많이 볼 수 있다. 연대순으로 수록된 작품을 통해 그의 작품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눈에 볼 수 있다.  또한 그가 파리에서 연극 무대를 맡고 발레가 그의 창작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아폴리네르의 동물우화집삽화를 위한 습작. 1907년>

 

 

 책엔 친구들과 교류한 흔적인 편지나 사진을 만날 수 있어 더욱 흥미롭다. 피카소가 존경한 세잔, 함께 작업한 조르주 브라크, 좋아했던 친구 에릭 사티에 대한 이야기도 전한다. 전시회나 박물관에서도 볼 수 없는 기록이니 책을 통해서만 피카소를 만나는 이들에게는 반갑다. 회화, 조각, 석판화, 도자기 등 다양한 작품이 수록된 점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림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작은 글씨를 따라 읽는 일은 쉽지 않다. 이 한 권의 책으로 피카소를 안다고 말할 수 없지만 피카소를 배울 수 있는 책이다.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프랑스와즈의 초상. 1946년>

 

 <피카소가 가비 레스피나스에게 보낸 편지. 1916년>

 

 

  ‘미술가로서 오랜 생애를 거치며 피카소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양식과 매체를 탐구하였다. 대개 그는 어떤 특별한 의도 없이 그가 존경하고 부러워한 대가들에게 단지 도전하기 위해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미술을 차용하였다. 이것이 아마도 그의 생애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었고 알찬 결실을 맺은 부분일 것이다.’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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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순간의 인문학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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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이라는 말은 어렵다. 매 순간 철학적 사유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건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잘 몰라서, 혹은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한귀은은 이런 마음을 알아차린 듯 일상에 스며든 인문학에 대해 말한다. 그러니까 이 책 모든 순간의 인문학 은 철학적이거나 지루하지 않다. 물론 아주 재미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저 누구나 한 번쯤 맞닥들인 감정들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그로 인해 깊게 파인 마음의 구덩이를 채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힘을 키워 관계까지 확장시킨다면 삶은 달라질 거라 말한다. 그게 바로 인문학이라는 거다.

 

 ‘어쩌면 사는 일은 자신을 긍정하는 일이다. 우리 시대에 자신을 긍정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일터에서, 학교에서, 하물며 운전을 하거나 길을 걷다가도 비난을 받는다. 미니홈피나 어쩌다 단 댓글에 대해서도 비판을 당한다. 그런 비난과 비판은 이 세계 전체가 경쟁체제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러니 비난은 다반사고 자기 긍정은 힘겹다. 그러므로 칭찬이 필요하다. 이 시대의 칭찬은 단지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한 일시적인 처방이 아니라 우리를 존재에 대해 긍정으로 이끌고 특별한 관계를 만드는 힘이 있는 언어다.’ 121쪽

 

 책은 크게 5가지 <사랑이 사유로 반짝이는 순간>, <나에게서 낯선 행복을 발견하는 순간>, <고독이 명랑해지는 순간>, <상처가 이야기로 피어나는 순간>, <우리가 기꺼이 환대할 순간>로 나눠 우리의 삶을 들여다본다. 사랑, 행복, 고독, 상처, 죽음(늙음)이란 주제로 대신할 수 있겠다. 저자는 자신이 읽은 책, 감상한 드라마와 영화, 음악을 우리의 삶에 대입한다. 그녀가 소개하는 그것들이 모두 인문학에 관련된 건 아니다. 『고독한 군중』 , 욕망 이론, 시간과 타자란 책처럼 제목도 생소하지만  친절한 금자씨, 러브 액츄얼리, 거짓말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책엔 밥 먹고, 일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자괴감에 빠지고, 한 번씩 악몽에 빠지거나 늙음을 두려워하는 누구나의 일상이 담겼다. 일상의 기록이나 나열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막장 드라마나, 로맨틱한 영화를 보는 일, 목욕탕에서 익명의 누군가를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일이, 수다가 아니라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은 신선하다. 그런 일들로 인해 인문학은 일상으로 스며들 것이다.

 

 ‘나는 아줌마들이 ‘드라마 폐인’ 에서 ‘드라마 - 인문 - 폐인’ 이 되기를 바란다. 찜질방이나 찻집에서 드라마에 대한 담론을 펼치면서 삶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여주인공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주위의 남자들을 품평하는 즐거움도 누리면서, 은밀하게 자기 자신의 욕망과 콤플렉스와 사랑을 떠올려보았으면 좋겠다.’ 194쪽

 

 책이 어렵지 않게 다가오는 건 저자의 솔직함에 있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 가족, 상처, 실패 등 사적인 감정들을 들려준다. 장녀로서의 부담감, 똑똑하지도 잘나지도 못해서 겪는 좌절감, 술로 견뎠던 시절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는 책과 더 가까워진다. 우리의 삶이 거대한 사건으로만 이뤄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스로가 봉인했던 어떤 기억이나, 순간을 떠올리고 생각하게 만든다.

 

 삶은 어떤 감정들이 발생하여 상쇄되는 과정의 반복이다. 다른 듯하지만 같은 감정에 상처 받고, 관계는 힘들다. 그 감정에 매몰된다면 삶을 지루하고 불행할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 말하듯 다른 시선에서 마주 보기, 인문학적으로 접근한다면 삶은 다른 얼굴로 빛날지도 모른다.  ‘젊다’ 를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로 정의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새롭게 정의한다면 어떨까?

 

 ‘서른에도, 마흔이 넘어도, 예순이 되어도, 사랑이란 건 언제나 젊다. ‘젊다’는 어떤 형태를 나타내는 형용사가 아니다. 젊다는 것은 설렘과 실수의 반복으로 구성되는 동사다. 끊임없는 행동과 그 행동에 맞먹는 적극적인 후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려들 수밖에 없는 근성으로 이루어진, 움직이는 동사인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젊음’이고‘ 청춘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청춘’이다.’ 35~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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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 노재희 소설집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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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존재함과 동시에 누군가와 마주한다. 혼자가 아닌 세상에 합류한 것이다. 나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고독을 갈망한다. 부모와 지낸 어린 시절에도, 친구가 제일이었던 학창 시절에도, 사랑하는 이를 만났어도 혼자 만의 시간을 꿈꾼다. 우리가 꿈꾸는 궁극적인 고독은 나와 마주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노재희의 소설집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에는 고독을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가족과 지인과의 단절이 아닌 진정한 고독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고독의 발명>은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엄복태의 이야기다. 그는 든든한 직장에 다니고 아내와 아이가 있는 누가 봐도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시를 쓸 수 없다. 그에게 시라는 고독와 마주할 시간과 공간이 없다. 그 애타는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 둘째를 임신한 아내, 해고를 앞둔 친구, 기러기 아빠로 회사에서 야근을 일 삼는 직장 상사, 그들에게 시를 쓰지 못하는 자신의 고통을 말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대학 시동아리 모임에서 시집을 팔아 풍류를 즐겼던 선배를 만나고 그를 통해 시잡지를 출판하는 대표를 만난다. 엄복태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잡지는 나오지 않고 출판사 사정을 빌미로 돈까지 빌려간 대표는 연락이 끊긴다. 엄복태에게 시는 무엇이었을까? 시를 쓰기 위해 몸부림치는 순간, 그는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바랐던 건 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은 가족이 아닌 자신을 선택한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멕시코 지사로 발령을 받아 떠나면서 연락이 끊긴다. 20여 년 만에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무엇 때문에 가족을 버렸는지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농자를 짓고 음식 배달일을 하며 혼자 자유롭게 사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질문이나 답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만이 느낄 수 있는 우주, 그 고요한 눈에서 말이다.

 

 나머지 다른 소설 속 인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독립된 무언가를 갈망한다. 어느 날 갑자기 아픈 무릎에서 꽃이 피는 기이한 일을 경험하면서 두려움 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어 기뻐하는 <누구 무릎에 꽃이 피나>의 춘복 씨. 그녀는 꽃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둔다. 손녀를 돌보는 피곤함에서 잠시 멀어지고 싶었다. 부모의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인지 자신을 떠난 여자를 잊지 못하는 <시간의 속>의 화자가 원하는 건 시간이다. 아니 과거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 징글징글한 생일파티에 초대되어 문 앞에서 하나씩 받은 고깔모자를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언젠가 그녀가 말했다. 고깔모자에는 차곡차곡 지나간 시간이 쌓이고 있으며 우리 각자의 현재 좌표는 뒤집어놓은 고깔모자의 꼭짓점이라는 거였다. 현재가 늘 괴로운 건 과거로 가득 찬 고깔모자의 꼭짓점에 집중되는 하중 때문이었다. 나는 고깔모자 인생론이 꽤 그럴듯하다고 그녀를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버린 그때, 그녀와의 과거로 가득한 고깔모자의 꼭짓점에서 나는 압사할 지경이었다.’ (187쪽, <시간의 속> 중에서)

 

 철학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공무원인 아내를 대신하여 살림을 하는 <생활의 기술>의 주인공은 현실을 탈피하고 싶다. 집 안을 청소하고 아이를 돌보고 장을 보는 일상이 아닌 다른 삶을 꿈꾸지만 실천하지 못한다. 안주하고 싶은 현실과 벗어나고 싶은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다. 어쩌면 그는 주변 어디서나 마주하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내가 겪어보지 않는 일까지 통제하고 싶은 거야.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 걸 견디지 못하니까. 모든 것이 자신이 아는 질서 속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겠지.’ (284쪽, <생활의 기술> 중에서)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는 책에 매료된 어머니를 추억하는 소영의 이야기다. 소영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언제나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의 무엇이 어머니를 빠져들게 하는지 그녀는 나중에야 알게 된다. 소영은 이혼을 하고 아들을 키우면서 교정교열 서재장식일을 한다. 읽기 위한 서재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서재를 갖기를 원하는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고급의 양서와 함께 낡고 오래된 책을 장식하면서 사람들의 결핍을 본다. 지식이 아닌 무언가를 채우기 위한 그들을 통해 소영은 어머니를 기억한다. 

 

 ‘무엇보다 세상 의 별별 이야기 속에 쏙 빠져드는 것이 굉장했지. 그런데 말야,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걸 싫어한다는 것은 참, 견디기 어려운 일이야.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러면서도 계속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도. 있잖아, 우리가 인생의 어느 순간, 빛나는 걸 보게 되면 나머지 인생 동안에 그 그림자에 붙들려 살아야 하는 것 같아. 일단 어떤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우리는 평생 그 아름다움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337쪽,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 중에서

 

 우리 삶의 결핍을 채우는 게 어디 책 뿐일까. 그것을 채우려는 모든 행위가 고독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떤 이에게는 시가, 어떤 이에게는 추억이, 어떤 이에게는 돈이,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 고독이다. 그러니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란 제목처럼 삶은 자신만의 고독 속으로 달아날 때 충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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