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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때로 충동적인 판단이 옳다고 믿는다. 아주 짧은 순간에 내린 결정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 알면서도 말이다. 전체가 아닌 한 부분을 통해 전부를 안다고 말하기도 한다. 설령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건 나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엔 그 모든 걸 인정하고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올지라도 미루고 싶어 한다. 앨리스 먼로의 『런어웨이』속 그녀들도 그렇다. 이곳의 삶이 그곳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곳을 꿈꾼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곳엔 분명 아주 특별한 삶이 존재할 거라 소망한다. 어쩌면 그런 바람이 없었더라면 보잘 것 없는 일상을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설사 신기루라 할지라도 바람은 존재해야만 한다.
여덟 편의 소설은 모두 여자들의 시선에서 삶을 말한다. 그녀들은 주변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러니까 평범한 주부, 직장 여성, 누군가의 딸, 어머니, 아내다. 그러나 때로 누군가에겐 특별한 사람처럼 보인다. 사랑에 빠졌거나, 남들과는 다른 공부를 하거나, 독특한 취미를 가졌을 때, 세상은 그들이 달라졌음을 알아챈다. 어느 순간 그들의 눈빛, 목소리, 몸짓이 변화한다.
표제작 <런어웨이>의 칼라에게서 실비아가 본 것도 그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매사에 화가 난 듯한 남편 클라크를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원하는 칼라는 본 것이다. 하지만 칼라는 지금의 상황에 아주 작은 변화가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실비아가 빌려준 옷을 입고 토론토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지만 결국 그녀는 클라크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녀의 선택은 옳은 것일까. 어떤 이는 떠나야 했을 거라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답은 오직 칼라만이 알고 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지만 어제와 오늘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칼라가 어느 순간 카펫의 무늬를 발견한 것처럼.
‘카펫에는 갈색의 작은 사각형 무늬가 있었는데 각각의 사각형 안에는 또다시 짙은 갈색과 적갈색 그리고 황갈색의 곡선과 도형 무늬가 들어가 있었다. 오랫동안 칼라는 각 사각형 안에는 곡선과 도형의 배열 방식이 똑같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시간이 남아돌 때 무늬를 자세히 살펴보니, 네 가지 패턴이 합쳐져 커다란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열을 쉽게 알아볼 때도 있었고 뚫어져라 쳐다봐야만 알아볼 때도 있었다.’ <런어웨이, 17~18쪽>
칼라와 달리 연작소설 <우연>, <머지않아>, <침묵>의 줄리엣은 변화를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고전문학을 전공한 줄리엣은 주목받지 않는 학생이었다. 박사 준비 중 여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쳤고 기차 여행에서 에릭을 만난다. 아내가 있던 에릭에게 연락이 왔고 그를 만나러 떠난다. 에릭의 아내가 죽었고 딸 퍼넬러피를 낳았지만 온전한 부부라고 할 수 없다. 줄리엣의 선택은 놀라운 것이었다. 적어도 그녀를 기억하는 모든 이에게 말이다. 하지만 그 삶이 항상 행복한 건 아니다. 갑자기 에릭은 죽고 퍼넬러피는 줄리엣을 떠나 소식을 끊는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게 우리네 삶이듯 줄리엣은 혼자서 살아간다.
줄리엣의 삶이 그렇듯, 가족이라 해도 서로를 다 알지 못한다. <반전>의 주인공 로빈을 언니의 조앤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차를 타고 연극을 보러 가는 로빈이 이상할 뿐이다. 그러나 로빈에겐 그 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 몇 시간으로 그녀는 자신이 돌아가려는 보잘 것 없고 불만족스러운 삶이 일시적인 것일 뿐이고, 그런 삶을 견디는 것도 전보다 덜 힘들 거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 그런 인생, 모든 것 뒤에는 기차 창밖을 통해 보이는 햇빛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광채가 있었다. 여름 들판을 비추는 햇빛과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연극의 여운 같았다.’ <반전, 358쪽>
대단한 무언가를 바란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운명 같은 남자 다닐로를 만났지만 그게 끝이었다. 오해로 마무리된 운명은 먼 훗날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래도 오해가 풀리고 진실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므로,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그러므로 지난 삶을 낸시, 올리, 테서가 각자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단편 <힘>에서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인지 확인하려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낸시가 올리에게 하는 말처럼 인생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니까.
“그래도 인생은 흘러간다는 걸 너도 알았겠지.” <힘, 489쪽>
앨리스 먼로는 여덟 편의 소설을 통해 너무 애쓰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돌아보면 모든 삶이 애처롭고 뼈아픈 것이라고. 거대한 상처로 남은 일도 사소한 오해로 시작된 경우가 많고, 내가 본 것이 전부라고 믿는 일도 누구나 저지르는 실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