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비처네 (양장) - 목성균 수필전집
목성균 지음 / 연암서가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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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중한 것들은 사라진 후에야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알게 된다. 언제나 내 손에 닿을 것 같은 사물,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 언젠가는 모두 다 소멸되고 사라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건 불변의 진리지만 때로 부정하고 싶은 순간과 마주한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생이 주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사라지는 것들은 제외하고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는 사물과 사람도 종내엔 그리움이란 틀 속에 갇히고 만다.

 

 목성균의 수필집 『누비처네』를 읽으면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비가 오면 요란한 빗소리를 들려주던 양철 지붕과 흙집을 부수기 전까지 불을 지피던 아궁이, 작은 마당 입구를 지키던 두 그루의 나무를 꺼내온다. 지나온 삶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는 엄마의 부자연스러운 미소가 함께 한다. 한때는 매초롬한 얼굴을 지녔을 엄마.

 

 글이란 이렇게 놀랍다. 형식에 구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쓴 글이라는 수필이라서 그렇까. 모든 수필이 다 감동적인 것은 아닐 터. 목성균의 시선으로 바라본 평범한 일상 속에 우리네 삶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나는 글을 통해 내 어린 시절 속 나를 불러올 수 있었다. 「고개」란 글에서 목성균이 그랬듯 누군가를 기다리던 고개가 우리 동네에도 있었다. 읍내로 통하는 길,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기 위해 그 고개에 서 있던 사람들, 장에 나갔던 엄마를 기다리며 한 곳을 응시하던 아이들.

 

 목성균의 글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을 지닌 물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고백하자면 제목으로 쓰인 ‘누비처네’도 무슨 뜻인지 바로 알지 못했다. 한때 누구에게나 소중했을 물건이다. 표지의 그림처럼 아이를 업는 누비로 된 이불이다. 손자가 태어나자 객지에 나간 아들에게 아기의 누비처네 사 올 값을 보낸 아버지의 마음이 애틋하다. 어디 누비처네뿐인가.  전깃불에 반해 버렸던 등잔에선 심지를 가는 방법을 알려주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또한 「기둥시계」란 글은 내게 할머니를 추억하게 만든다. 태엽을 감아 생명을 이어가던 촌스러운 괘종시계로 이어진다. 추억을 선물하며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아주 아름다운 문장에 반하고 만다. 꾸미지 않은 글이 갖는 힘은 정말 위대한 것이다.

 

 ‘우리 기둥시계 바늘이 시간을 돌리는 일은 꼭 소가 연자매를 돌리는 일과 같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되새김질을 하면서 꾸준히 연자매의 멍에를 지고 확을 도는 소의 끝없는 노역과, 고삐를 잡고 그 노역 뒤를 따라 도는 방아 찧는 사람의 시간에 초연함 같아서 경외스러웠다. 내 선대 어른들, 아버지 · 할머니 · 증조부 등등 저 청산의 일각의 무덤 아래 드신 생전의 삶들처럼.’ <기둥시계, 149쪽>

 

 우리는 삶이 끝날 때까지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빈손으로 태어나 쥐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게 삶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좀 더 좋은 것을 바라고, 좀 더 높은 자리를 원한다. 맑고 순수했던 어린아이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나이가 들수록 넓은 아량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데 참 어렵다.

 

 ‘나는 하찮은 내 자리에서 꽃을 피우려 하지 않고 꽃을 피운 남의 자리만 선망한다. 사회 구성 밀도만 차지한 응집력 없는 사람에게 꽃이 필 자리가 아닌 자리에서 화사하게 핀 꽃이 시사하는 바가 가혹하다.’ <꽃이 핀 자리, 550쪽>

 

 먹고 사는 일이 참 쉽지 않은 세상이다. 비싸고 좋은 음식을 먹으려 하는 게 아닌데 그렇다. 내 몸 하나 누울 자리가 없어 비탄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않는 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은 아닐까. 오랜만에 만난 따뜻하고 편안한 글이다. 수필 읽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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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직전의 우리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4
김나정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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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 주는 가장 큰 고통은 남겨진 이들의 삶이다. 삶은 어떻게든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고되지 않은 죽음의 경우 남겨진 삶이 예전의 그것으로 회복될 수 있는 확률은 낮다. 죽음을 인정할 수 없기에 슬픔과 분노로 채워진 삶을 살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죽음은 생과 동시에 생성되어 자란다. 우리는 죽음과 함께 사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어떤 말로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니 어렵게 얻은 딸이 열두 살에 같은 반 아이가 찌른 칼에 숨졌다면 부모의 삶은 그 순간 사라진 것이다.

 

 김나정의 장편소설 『멸종 직전의 우리』는 이십 년 전에 딸 나림을 잃은 부모가 나림을 죽은 선주의 아이를 유괴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얼핏 복수에 관한 소설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복수에 대한 소설이 아니다. 하나의 죽음으로 연결된 삶에 대한 이야기다. 하루아침에 딸을 잃은 권희자는 울부짖는다. 열두 살 김선주는 왜 나림을 죽였는지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세상은 잠시 나림의 죽음에 주목할 뿐 점점 잊힌다. 권희자의 눈에 비친 남편도 다르지 않았다. 직장에 나가고 다시 일상을 이어간다. 결국 이혼의 수순을 밟았다. 정말 남편은 자신의 궤도로 돌아간 것일까? 

 

 소설은 나림의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의 삶을 차례로 들려준다. 나림을 죽인 김선주, 나림의 엄마와 아빠, 김선주의 부모, 그리고 나림의 목소리로 이십 년 전 상황을 재현하고 현재의 삶을 보여준다. 아무리 자식이지만 어떻게 그 속을 알겠냐고 선주 엄마는 항변한다. 그러다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 해외를 선택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사만다가 된 선주는 여전히 두려웠고 외로웠다.

 

 ‘휘파람을 불면 개는 달려와 꼬리를 살랑거렸다. 사만다는 개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들여다보았다. 밤에 악몽을 꾸면 사만다는 한 손을 뻗어 개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개는 언제나, 거기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살덩어리, 살아 있는 것의 감촉.’ 139쪽

 

 부모도 형제도 선주의 아픔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수차례 이름과 신분을 바꿔 김선주가 아닌 윤수인(囚人)이 삶에는 아들 안도(安堵)가 전부였다. 수인과 안도라는 이름이 주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런 수인에게 권희자는 이십 년 전 자신이 느꼈던 공포를 전하며 왜 나림을 죽였는지 묻는다. 선주는 나림의 피아노 소리가 좋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 나림은 친구들을 선동해 자신을 왕따시켰다. 선주의 눈에 나림은 정말 행복한 아이처럼 보였지만 엄마의 강요에 피아노를 쳐야 하는 나림은 인형 같은 생활이 싫었다. 나림은 다른 삶을 원했고 죽음이 그 길을 인도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눈앞이 가물거렸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어둠 속에 밝음이, 밝음 속에 어둠이 띄엄띄엄 섞여 들어갔다. 운동장이 저편 멀리로 사라졌다. 천사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다시 눈을 뜨면 나는 분명 다른 세상에 있을 것이다. 빰에 닿는 바닥이 차가웠다. 음표가 끝나고 긴 쉼표가 이어졌다. 꽃잎 한 장이 사뿐, 건반에 내려앉았다. 꽃잎은 소리 없이 건반 위로 굴러갔다. 악보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평화로운 침묵이 이어졌다.’ (195쪽)

 

 평생을 분노와 증오로 살아온 권희자와 알 수 없는 형체에 쫓기듯 살아온 김선주는 고통과 불행을 등에 진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림의 죽음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것이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과 자식을 잃을지도 몰라 절박한 어미의 마음이 전해진다. 지난 사건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화해할 수 시간은 끝내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들. 한때 우리 곁에서 머물러주었던 모든 것들. 빗방울이 흔들어 놓은 꽃잎들, 젖은 흙냄새와 나무 그들에서 젖은 날개를 말리는 나비들, 구름의 틈새로 보이는 햇발. 소란한 침묵. 멀리서 가까이로, 가까이서 멀리까지. 멀리서 들리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는 누군가에게는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256쪽)

 

 언제 어디서든 죽음은 발생한다. 어떤 죽음은 외롭고 쓸쓸하다. 어떤 죽음은 호상(好喪)이라 불리기도 한다. 복수, 용서, 화해가 아닌 죽음을 축복할 수 있는 몫을 지닌 자의 남겨진 삶은 평온할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복수, 혹은 애도는 그저 놓아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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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기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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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삶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삶의 주체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삶이 풍경처럼 보이기를 바라면서 사는지도 모른다. 하여 때때로 감정을 숨긴 채 살아간다. 그런 일상에 익숙해지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아니, 부럽다는 게 맞다. 기준영의 『연애소설』엔 그런 두 종류의 삶이 등장한다. 조금은 뻔뻔할 정도로 솔직한 사람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삶은 풍경이라는 틀 속에 있기 마련이므로.

 

 표제작인 「연애소설」은 화자인 나와 친구 수아가 만난 하루의 이야기다. 수아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친구였다. 수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으로 나를 만났다며 스물세 살 많은 남자와 살고 있다는 말을 꺼낸다. 그 나이 많은 남자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른 친구들이 수아는 미쳤다고 말한다. 수아는 친구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거부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수아의 이야기를 듣고 그 남자와 살고 있는 집까지 동행한다. 그러는 사이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나에게도 풍경이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풍경 같았던 아닌 풍경이었던 삶 말이다. 기준영은 나에게 다가오는 변화의 조짐을 황홀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보여준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오늘의 이 기운은 저 달 때문인가. 나는 내 방 창가로 조금씩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커다란 보름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구름은 보름달의 빛과 그 밖의 어둠과의 경계를 덮쳤다. 흐렸다, 지웠다가, 아지랑이처럼 다시 피어올랐다. 달은 뭔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서운, 무서운, 무서운, 무서운 허무로부터 달음질치는, 도망가는, 숨이 차는 찰나들을 비추며.’ (「연애소설」, 26쪽)

 

 헤어진 남자 친구의 남동생 유성과 만나는 여자 혜리의 이야기 「시네마」도 다르지 않다. 영화 시나리오를 위해 여자 얘기를 듣고 싶다며 유성은 혜리에게 연락한다. 혜리는 형과 헤어졌다고 말하지 못하고 어색한 시간을 이어간다. 함께 걷으며 사람들을 관찰한다. 유성은 혜리에게 아델과 트래비스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아델과 트래비스의 이야기였다. 석재와 사귄 육 년의 시간도 그러했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사랑으로 빛나기도 했다. 석재와 혜리도 아델과 트래비스였지만 그들만의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유성 때문에 혜리는 하마터면 놓칠 뻔한 사랑을 붙잡을 수 있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이처럼 아주 미세한 감정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결핵에 걸려 요양 차 부산에 내려온 나와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 모델 나희와의 만남을 그린 「아마도 악마가」,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대해 불안을 안고 살며 대형할인마트에서 1+1 물건을 파는 제니의 삶을 다룬 「제니」, 파티용 소품들을 팔고 있지만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회사에 다니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사람들의 이야기 「파티 피플」속 인물들은 소망이나 희망을 표현하지 못한다. 복학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현실과 미혼모의 사생아라는 존재는 행복과 멀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운은 불행이 아니라는 걸 믿어야 하는 게 삶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아마도 악마가」 의 주인공처럼 주문을 외워서라도 말이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좋은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좋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를테면, 나는 날개가 아주 커다란 새이고, 내 이마에는 노란 털이 별 모양으로 나 있어 제3의 눈처럼 보이는 게 아주 근사하다고 생각해본다. 또 다리가 긴 황새가 되어 풀밭 위를 천천히 걸어 다니면 무척 우아할 거고, 세상은 두 배로 아름다워 보일 거라는 생각. 의사가 처방해준 약 속에 뭔가 좋은 성분이 있어서 내가 다른 꿈을 꿀 수 있다는 생각.’ (「아마도 악마가」, 61쪽)

 

 기준영의 소설은 하나하나가 영화처럼 다가온다. 담백하고 솔직한 묘사로 주변 환경을 스케치하듯 보여주고 인물의 내면을 파고든다. 독특한 건 단 한 명의 주연이 아니라 다수의 조연이 등장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기준영은 소설을 통해 특별한 누군가의 삶이 아니라 보통의 그것에 대해 말한다. 보잘 것 없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말이다.

 

 꿈꾸던 풍경 밖에서 풍경을 보는 일은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로 본다면 우리는 모두 풍경이다. 우리의 삶에서 누군가가 메인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수많은 카메라와 수많은 연출자가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결정적인 그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찰나의 꿈처럼 마주할 그때를 기다린다.

 

 ‘A캠이 메인이다. 카메라 한 대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연출자가 손짓을 한다. 다른 장소, 다른 상황, 다른 각도, 혹은 다른 정서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B캠은 움직인다.’ (「B캠」,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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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외 김지원 소설 선집 1
김지원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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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 발견하고 알려주는 건 타인이다. 친구나 지인을 통해 혹은 처음 만난 이들을 통해 습관이나 성향에 대해 듣게 된다. 어쩌면 객관적인 그들의 시선이 정확한지도 모른다. 그러니 소설 속 인물은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고 해도 될 것이다. 때문에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속마음 또는 꼭 한 번은 해 보고 싶었던 일탈과 욕망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평범과는 대척점에 있는 듯한 일탈은 모두의 꿈이다. 반대로 일탈이 일상인 삶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삶을 갈망하고 부러워한다. 김지원의 소설 <폭설>과 <잠과 꿈>에 등장하는 이들이 그렇다. 그러니까 타인이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이들은 또다른 누군가의 삶을 흠모하는 것이다. 좀 더 과감한 삶과 사랑, 도덕과 윤리에서 벗어난 삶을 말이다. 그것은 한국이 아닌 뉴욕이라는 공간이기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79년에 쓴 <폭설>이나 87년에 쓴 <잠과 꿈>은 모두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이민자, 뉴욕 주재원, 유학생 등의 일상이다. 그들은 쉽게 관계를 맺지만 쉽게 단절되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관계가 아닌 소모적 관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왔지만 누군가는 도피처였으므로.

 

 <폭설>엔 딸만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어머니와 사는 진주가 등장한다. 유학생 시절 꿈과 사랑을 나눴던 정섭과 결혼을 했지만 점차 옅어진 그들의 사랑은 이별로 끝났다. 무기력한 진주의 삶은 직장, 어머니, 어울리는 미스 오가 전부다. 그런 진주 앞에 나타난 남자 기(起)는 그녀를 변화시킨다. 언제나 당당하고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기와 사랑에 빠지고 어머니는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기와 진주는 같은 곳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진주는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원했다. 계획을 세우고 아이를 낳고 뿌리를 내리고 싶었지만 기는 여러 여자와 친구 이상의 관계를 유지했고 진주에게도 그런 삶을 권한다.

 

 뉴욕이라는 공간은 자유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뉴욕에선 결혼생활에 속박되지 않고 각자의 사랑을 즐기자는 기의 태도가 이해받을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소설 속 기의 바람과 불륜은 진주에게 질투와 동시에 욕망을 불러온다. 진주는 기의 무의미한 사랑과 방황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돌아본다. 진정 진주가 원했던 삶은 어디에 있는가. 진주의 흔들리는 내면을 잡아 줄 단단한 버팀목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잠과 꿈> 속 혜기도 다르지 않다. 한국엔 친정 엄마가 있고 남편 순구와 아들 완이가 있다.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를 키우는 일상은 단조롭다. 공원에서 옛 친구 서윤을 만나면서 건조한 삶에 약간의 활기가 들어온다. 한국에서 결혼에 실패한 서윤은 선생님이라 부르는 남자와 살고 있다. 서윤이 직장에 나간 후 그는 제자라는 이유로 많은 여자를 유혹하고 만난다. 남편과는 다르게 자신을 알아보고 긴장시키는 그에게 혜기 역시 다른 여자들처럼 빠져든다. 거기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다른 여자가 있다고 통보하듯 고백한다. 혜기는 순구의 불륜을 견딜 뿐 어디에도 말하지 못한다. 끓어오르는 열망을 뻔뻔하게 터트릴 수 없었던 혜기는 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김지원의 두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평범의 범주에서 벗어난 듯 보인다. 그들은 사랑과 삶,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며 흘러간다. 하여 답답하고 애처롭다. 불확실한 일상에 대한 불안과 위태로움을 안고 사는 수많은 진주와 혜기가 떠오른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결핍 덩어리인 삶, 우리네 인생은 왜 이리 가여운가.

 

 ‘창밖으로 가로수의 헐벗은 가지가 온천지에 구원의 손길을 청하는 듯 바람에 휘청휘청 아무 데나 절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나무와 같아, 뿌리가 땅에 박혀 움직이지 못해. 엄마, 전 무게로 내게 기대지 말아요, 나는 엄마가 생각하듯 행복하고 젊지가 않아, 기력도 없고 생기도 없어. 엄마, 다시 한 번 내게 엄마가 되어줘요, 어린 나를 큰 날개로 봄볕같이 안아줬듯.’ <잠과 꿈,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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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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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때로 충동적인 판단이 옳다고 믿는다. 아주 짧은 순간에 내린 결정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지 알면서도 말이다. 전체가 아닌 한 부분을 통해 전부를 안다고 말하기도 한다. 설령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건 나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엔 그 모든 걸 인정하고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올지라도 미루고 싶어 한다. 앨리스 먼로의 『런어웨이』속 그녀들도 그렇다. 이곳의 삶이 그곳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곳을 꿈꾼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곳엔 분명 아주 특별한 삶이 존재할 거라 소망한다. 어쩌면 그런 바람이 없었더라면 보잘 것 없는 일상을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설사 신기루라 할지라도 바람은 존재해야만 한다.

 

 여덟 편의 소설은 모두 여자들의 시선에서 삶을 말한다. 그녀들은 주변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러니까 평범한 주부, 직장 여성, 누군가의 딸, 어머니, 아내다. 그러나 때로 누군가에겐 특별한 사람처럼 보인다. 사랑에 빠졌거나, 남들과는 다른 공부를 하거나, 독특한 취미를 가졌을 때, 세상은 그들이 달라졌음을 알아챈다. 어느 순간 그들의 눈빛, 목소리, 몸짓이 변화한다.

 

 표제작 <런어웨이>의 칼라에게서 실비아가 본 것도 그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매사에 화가 난 듯한 남편 클라크를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원하는 칼라는 본 것이다. 하지만 칼라는 지금의 상황에 아주 작은 변화가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실비아가 빌려준 옷을 입고 토론토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지만 결국 그녀는 클라크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녀의 선택은 옳은 것일까. 어떤 이는 떠나야 했을 거라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답은 오직 칼라만이 알고 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반복된 일상을 살아가지만  어제와 오늘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칼라가 어느 순간 카펫의 무늬를 발견한 것처럼.

 

 ‘카펫에는 갈색의 작은 사각형 무늬가 있었는데 각각의 사각형 안에는 또다시 짙은 갈색과 적갈색 그리고 황갈색의 곡선과 도형 무늬가 들어가 있었다. 오랫동안 칼라는 각 사각형 안에는 곡선과 도형의 배열 방식이 똑같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시간이 남아돌 때 무늬를 자세히 살펴보니, 네 가지 패턴이 합쳐져 커다란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열을 쉽게 알아볼 때도 있었고 뚫어져라 쳐다봐야만 알아볼 때도 있었다.’ <런어웨이, 17~18쪽>

 

 칼라와 달리 연작소설 <우연>, <머지않아>, <침묵>의 줄리엣은 변화를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고전문학을 전공한 줄리엣은 주목받지 않는 학생이었다. 박사 준비 중 여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쳤고 기차 여행에서 에릭을 만난다. 아내가 있던 에릭에게 연락이 왔고 그를 만나러 떠난다. 에릭의 아내가 죽었고 딸 퍼넬러피를 낳았지만 온전한 부부라고 할 수 없다. 줄리엣의 선택은 놀라운 것이었다. 적어도 그녀를 기억하는 모든 이에게 말이다. 하지만 그 삶이 항상 행복한 건 아니다. 갑자기 에릭은 죽고 퍼넬러피는 줄리엣을 떠나 소식을 끊는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게 우리네 삶이듯 줄리엣은 혼자서 살아간다.

 

 줄리엣의 삶이 그렇듯, 가족이라 해도 서로를 다 알지 못한다. <반전>의 주인공 로빈을 언니의 조앤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차를 타고 연극을 보러 가는 로빈이 이상할 뿐이다. 그러나 로빈에겐 그 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 몇 시간으로 그녀는 자신이 돌아가려는 보잘 것 없고 불만족스러운 삶이 일시적인 것일 뿐이고, 그런 삶을 견디는 것도 전보다 덜 힘들 거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 그런 인생, 모든 것 뒤에는 기차 창밖을 통해 보이는 햇빛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광채가 있었다. 여름 들판을 비추는 햇빛과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연극의 여운 같았다.’ <반전, 358쪽>

 

 대단한 무언가를 바란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운명 같은 남자 다닐로를 만났지만 그게 끝이었다. 오해로 마무리된 운명은 먼 훗날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래도 오해가 풀리고 진실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므로,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그러므로 지난 삶을 낸시, 올리, 테서가 각자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단편 <힘>에서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인지 확인하려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낸시가 올리에게 하는 말처럼 인생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니까.

 

 “그래도 인생은 흘러간다는 걸 너도 알았겠지.” <힘, 489쪽>

 

 앨리스 먼로는 여덟 편의 소설을 통해 너무 애쓰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돌아보면 모든 삶이 애처롭고 뼈아픈 것이라고. 거대한 상처로 남은 일도 사소한 오해로 시작된 경우가 많고, 내가 본 것이 전부라고 믿는 일도 누구나 저지르는 실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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