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시 - 그 어떤 위로보다
박형준 지음 / 사흘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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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지러운 마음으로 가득할 때 듣고 싶은 목소리가 있다. 불현듯 전화를 걸어도 반가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줄 사람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 사람에게는 전화를 걸지 못한다. 내 작은 상처와 아픔에 나보다 더 아파할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럴 땐 속울음을 쏟는다. 그러다 시를 읽기도 한다. 소리를 내어 시를 읽다 보면 신기하게도 괜찮아지는 듯하다. 물론 시를 읽다 끝내 참았던 울음이 터지기도 한다. 이상한 일이다.

 

 계절마다, 달마다 생각나는 시도 있다. 비가 오면 읽고 싶은, 눈이 오면 꺼내고 싶은 시집도 있다. 시 전부를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다시 찾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럼에도 세상에 존재하는 시의 세계는 넓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시는 여전히 많다. 그래서, 나는 시집을 산다. 박형준이 엮은 『그 어떤 위로보다 당신에게 시』을 읽으면서도 몇 권의 시집을 메모한다.

 

 박형준이 소개한 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부터 황동규, 허수경, 문태준, 이정록, 정현종, 김기택, 함민복, 이제니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진 시인과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인들이다. 언제나 그렇듯 처음 만나는 시도 많았다. 한 편의 시와 함께 박형준의 글이 있다. 박형준이 고른 시는 힘겨운 삶에 위로가 되어주는 시다. 그러니까 어떤 시는 밥이고, 어떤 시는 뜨거운 포옹이 고, 어떤 시는 가만히 당신을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시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고운 손이 되기도 한다. 봄을 품었지만 유난히 추워 마음까지 옹송그리게 만드는 이 겨울, 이런 시는 이 시대의 모든 어른에게 위로가 된다.

 

 「코코로지(CocoRosie)의 유령」

 

 지금은 거울 속의 수염을 들여다보며 비밀을 가질 시기

 지붕 위의 새끼 고양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슬픔을 가지고 있다

 희고 작은 깨끗한 물고기들이 죽어가는 겨울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 위로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나는 어른으로서 이 시간을 견뎌야 한다 어른으로서

 봄이 되면 지붕 위가 조금 시끄러워질 것이고

 죽은 물고기들을 닮은 예쁜 꽃들을 볼 수가 있어

 봄이 되면 또 나는 비밀을 가진 세상의 여느 아이들처럼

 소리치며 공원을 숲길을 달릴 수 있겠지

 하지만 보시다시피, 지금은 겨울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부끄러움을 가질 시기 (56쪽)

 

 황병승의 시에 박형준 시인은 이런 글을 덧붙혔다. ‘어른들의 슬픔은 신문에서, 방송에서, 회사 사무실에서 떠들어대며 객관화되어야  비로소 알게 되는 슬픔이다. 그들은 슬픔을 나누고 곱하고 빼고 더하며 슬픔의 양을 잰다. 거울을 비춰보면 수염이 가득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자신만의 슬픔을 비밀스럽게 간직하려는 어린이다. 어린이들의 슬픔을 유리창을 맑게 닦아내는 세상의 창이다.’ (57쪽) 겨울이 지나고 나면 분명 봄은 올 것이다. 저마다 기다리는 봄의 풍경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우리 생이 올라탄 롤러코스터는 절망만 있는 건 아니다. 분명 희망도 있을 터. 이성복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의 롤러코스터가 어디쯤 와 있을까, 생각한다.

 

 「강」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조각이

 미지(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100쪽)

 

 ‘우리는 사소한 존재이지만 언제나 인생이란 강물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쓸쓸하고 아프더라도 그 기척은 아름답다’(101쪽)고 전하는 박형준의 글처럼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존귀하고 아름다운 건지도 모른다. 시가 지닌 힘이 정말 놀랍지 않은가.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 정호승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읽은 때마다 아릿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니 말이다.

 

1년 단위로 매듭지는 생인 양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은 괜히 더 심란하기도 하다. 도망치듯 떠나온 1월을 향해 다시 나아간다. 새로 세워질 계획들을 생각하며 1년이라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낸 게 아닌가 스스로를 책망하게 되는 날들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졌을 1년, 천양희 시인의 시를 읽으며 절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1년」

 

 작년의 낙엽들 벌써 거름 되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작년의 씨앗들 벌써 꽃 되었다

 후딱, 1년이 지나갔다

 돌아서서 나는

 고개를 팍, 꺾었다 (216쪽)

 

 겨울에 마주한 까닭인지 기형도의 시 「겨울. 눈(雪). 나무. 숲」의 이런 시구를 여러 번 읽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가면(假面)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우리는/ 서로 닮은 아픔을 향(向)하여/ 불을 지피었다./ 창(窓) 너무 숲 속의 밤은/ 더욱 깊은 고요를 위하여 몸을 뒤채인다. (138,139쪽)

 

 ‘시는 우리의 정신이 필요로 하는 숨통 같은 것이다. 숨을 잘 쉬면 육신이 맑아지고, 육신이 맑아지면 숨결이 맑아진다.’ (6쪽)는 박형준 시인의 말처럼 고단한 영혼에 위안을 줄 시들이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번지는 당신의 슬픔을 시가 위로한다. 감히 짐작할 수 없었던 크기의 맹렬한 위로와 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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