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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집짓기 - 마흔 넘은 딸과 예순 넘은 엄마의 난생처음 인문학적 집짓기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내 것이 되는 순간,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렇다. 이전의 그것이 지닌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 내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존재가 된다. 그러니 직접 만든 집은 어떨까? 땅을 사고, 공간을 계획하고, 물건을 들이는 일은 얼마나 두근거리는 일일까. 그 떨림은 집을 짓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기존의 것이 아니라 순수한 창작물처럼, 생명이 깃든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엄마와 집짓기』란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엄마와 집짓기’ 라니, 나는 그저 속이 상하고 부럽다.
그렇다. 이 책은 엄마와 함께 집을 짓는 이야기다. 아니다. 집을 짓는 과정이 아니라 삶을 사는 이야기다. 엄마와 딸이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을 사랑하는 법을 들려준다. 그러니까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비루하고 지친 삶을 안아주는 엄마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 책을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바로 엄마 때문이다. 엄마, 아이를 잉태하는 순간 자신이 아닌 엄마로 살아가는 여자를 기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면서 화가 나기도 했다. 나만의 엄마가 떠올라서, 엄마라는 이름밖에 없었던 한 여자가 생각나서.
‘처음엔 엄마에게 창은 바깥으로 뚫린 통로의 의미였겠지만 이제는 점차 바깥이 들어오는 소통의 의미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차경(借景)이다. 엄마의 창은 바깥 세계의 풍경을 빌려주는 도구이다. 엄마는 창으로 보이는 소나무가 제일 좋다 하신다. 나는 엄마의 밭이 제일 좋다. 엄마가 낸 창으로 보이는 엄마의 성실한 밭과 그 밭 위로 펼쳐지는 넓고 깊은 하늘이 나를 감격스럽게 만든다.’ 156쪽
엄마의 밭이라는 건 없었다. 그냥 밭이었다. 노동이 삶의 여유가 아닌 삶의 필수였던 나의 엄마에게 집은 어떤 존재였을까. 소박한 화장대는 고사하고 거울 하나 놓일 공간 대신 아버지의 양복이 곱게 걸렸던, 엄마의 방이 내 앞에 펼쳐진다. 엄마의 냄새가 있어서 좋았다. 저자는 엄마의 부재를 견디며 사는 모든 딸들에게 엄마를 불러온다. 집을 지으면서 점점 가까워지고 서로를 더욱 존중하고 사랑하는 엄마와 딸, 가족을 통해서 말이다.
‘집은 나의 것과 가족의 것이 섞여 있는 곳이다. 간혹 아이 옷 틈에 내 옷을 보거나, 내 양말서랍장에서 튀어나온 아들의 양말 한 짝을 보고 웃음 지을 때가 있다. 특히 아들이 아기였을 때 신었던 아주 작은 양말을 보면, 한순간에 시간은 내가 새댁이었던 때로 돌아간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던 그때, 서랍장은 고요하게 과거의 시간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202쪽
집을 짓는 과정은 여타의 책들과 비교해 색다른 점은 발견할 정도는 아니다. 저마다 집에 대한 생각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책에서는 엄마의 의견을 가장 존중한다. 엄마의 집이므로, 창을 많이 내고, 튼튼하고 따뜻하게 몇 겹의 자재를 두르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지어진다. 집을 짓고 사용할 물건들을 준비하며 엄마와 딸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엄마가 되고 4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되는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그건 한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는 저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엄마에게 그림을 드리면서, 엄마의 물건 중 내가 좋아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려받고 싶은 것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슬픔이 밀려왔다. 내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내가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은 엄마가 그동안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57쪽
현재의 삶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은 고단했던 지난 삶을 추억하고 여미는 힘이 된다. 아무것도 없던 땅 위에 우뚝 선 집처럼 말이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이의 글이기 때문에 집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포옹해주는 유기체로 새롭게 보인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놓치고 몰랐던 부분을 일깨워주고 각인시켜 기억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삶을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고 다짐하게 만든다. 내가 ‘한귀은’ 이란 저자를 좋아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