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푸라기 여자
카트린 아를레 지음, 홍은주 옮김 / 북하우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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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원하고 더 여유로운 삶을 갈망한다. 한 단계 높은 그곳에 행복이 존재할 거라 믿는다. 물론 그곳에 도착했을 때 다른 곳을 보고 만다. 그러니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그 끝이 절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한 번의 기회로 인생역전이 가능하다는 제안을 단칼에 자르지 못하고 주저한다.

 

 힐데가르트에게 그런 기회가 온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 아니 감히 거부해서는 안 되는 제안이었다. 가족과 친구도 없이 번역으로 겨우 살아가는 힐데가르트에게 신부를 구한다는 백만장자의 공고를 확인하고 당장 편지를 쓴다.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행복의 조건은 사랑이 아닌 돈이었다.

 

 ‘저는 서른네 살입니다. 키가 크고 금발이며, 감히 말씀드리자면 예쁜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 형제도 없고 남편도 아이도 없고, 일체의 감상적, 인습적 욕심도 없습니다. 제게는 아무 계획도 없습니다. 다만 잘 살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당신의 공고를 보고 저는 이내 사랑에 빠졌습니다. 저는 벌써 당신의 돈, 그리고 당신이 제공할 생활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12쪽)

 

 놀랍게도 억만장자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칸으로의 초대였다. 다시 돌아오면 되니까 우선은 그를 만나는 게 맞았다. 힐데가르트 앞에 나타난 남자는 억만장자의 안톤 코르프라는 비서였다. 그는 힐데가르트에게 병에 걸려 늙고 괴팍한 억만장자와 결혼할 수 있는 계획과 그 후로 받을 수 있는 유산에 대해 설명한다. 이미 칸에 도착했을 때 힐데가르트의 인생은 달라졌다. 직접 만난 칼 리치먼드는 예상외로 재미있는 노인이었다. 어쩌면 그와의 결혼생활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자신과 한 편인 안톤 코르프가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다. 얼핏 미녀와 야수나 신데렐라처럼 진정한 사랑을 찾는 뻔한 결말이 아닐까 짐작했다. 안타깝게도 힐데가르트의 유리구두는 단단하지 않았다.

 

 갑자기 죽어버린 남편과 유산 상속을 위해 안톤 코르프가 자리를 비운 사이 힐데가르트는 살인 용의자로 전락한다. 세상은 돈을 노리고 결혼한 천박하고 비정한 여자라고 비난한다. 설사 진범이 존재한다 해도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사태를 해결한 사람은 오직 안톤 코르프 밖에 없었다. 힐데가르트는 그를 의지했다. 그러나 안톤 코르프가 신겨준 유리구두는 사라졌고 그는 오히려 그녀를 조롱한다.

 

 “당신은 애초에 날 믿지 말았어야 했소. 난 당신이 어떤 여자인지 정확하게 판단했던 게 아니겠소? 당신은 날 실망시키지 않았소. 그건 인정하오…… 인간은 저마다 고유한 도덕의 레일 위에서 전진하는 법이오. 아무리 굳센 의지를 품어도 거기서 이탈하지 못하오. 난 당신이 어떤 레일을 달리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도 알고 있소. 당신은 건드리기만 해도 깨지는 보잘것없는 단지에 불과하오. 반면 나는 당신과 똑같은 점토로 빚어진 단지가 아니오.” (239쪽)

 

 힐데가르트는 안톤 코르프의 설계도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지우고 수정하면 그만이었다. 지푸라기처럼 말이다. 힐데가르트는 세상은 너무 쉽게 봤던 것일까. 지긋지긋한 가난의 삶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데, 무엇이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을까. 힐데가르트의 삶은 안타깝지만 색다른 로맨스와 추리의 빠른 전개와 신선한 결말까지 재미있는 소설이다.

 

 ‘그녀는 정말로 살았던가? 그 모든 것이 꿈이었거나, 그녀의 욕망과 후회가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따금 지난날의 몇몇 편린이 보일 때도 있었다. 그것들은 냄새와 몇 마디 말과 풍경의 일부 따위를 통해 간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러나 기억 속에 떠오른 과거의 일들은 희미해지거나 잊힌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것을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두 번 죽지 않는가. 한 번은 생명이 몸을 떠남으로써, 또 한 번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힘으로써.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이미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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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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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 우리 생은 무한대로 발생하는 경우의 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경우의 수의 시작은 두려움과 불안이 아닐까 싶다. 따지고 보면 살면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들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보호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예후가 달라질 뿐이다. 저마다 일정의 보호망을 준비하고 살아가겠지만 기관, 사회, 국가가 그것이 되어야 할 때가 있다. 삶은 혼자만 살아가는 게 아닌 공동체라는 걸. 그럼에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나 아닌 누군가의 삶을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한적으로 관계된 이들을 제외한 모든 삶에 대해서. 구병모는 지속적으로 이것에 대해 말한다. 그렇다고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삶을 옹호하거나 섣불리 위로하지도 않는다.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에 따라 그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보여준다. 하여 때로 지루한 장면이 이어지고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 계속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누군가의 삶이고 그에게는 아주 치열하고 처절한 일상이다. 간혹 극단적인 경우의 수를 선택하는 건 누구라도 그 주인공이 될 수 있어서다. 불운과 불행이 특정한 이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에 수록된 8편의 이야기가 소설에 그치지 않고 현실과의 연결고리가 되는 이유다. 그리하여 구병모의 소설은 현실과 환상으로 만들어진 뫼비우스 띠가 된다.

 

 현실을 생각하면 과감하게 지도교수의 심부름에서 벗어나 ‘나’로 살아야 하는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화자는 환상(미래)을 놓을 수 없다. 그 앞에 맨손으로 건물을 오르던 친구 하이의 죽음은 생존과 소멸에 대해, 그리고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성공으로 모든 게 행복한 결말을 맺을 거라 믿었지만 그것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부질없는 환상인지 알고 있다. 가족, 친구와의 내밀한 관계를 뒤로 한 채 벽을 무너뜨리듯 앞으로 전진한다고 믿었던 화자와 더 높은 건물을 오르며 상실을 극복했을 하이. 죽음이라는 경우의 수를 통해서만 결국 현실을 돌아보게 되는 삶을 보여준다. 혼자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삶의 내면에는  하이의 말처럼 혼자가 아니기를 바란 염원이 있었다.

 

 ‘간격을 확정 짓는다는 건 곧 서로에게 다가갈 가능성도 내포한 것인 만큼 우리의 관계는 비로소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토해내도 내 인식과 감각은 달라지지 않았어. 그 사람이 실망하면서 떠나버린 뒤에야 나는 얼마나 그쪽에 가까이 다다르고 싶었는지, 아니 밀착되고 싶었는지를 알았지.’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32쪽)

 

 결국 하이는 상황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남편과 미친 시누이와 아이를 돌봐야 하는 미온이 그림이라는 자신의 꿈을 찾아 유모차에 아이를 놓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관통貫通」과 우연하게 목격한 아동 폭력의 현장을 고발하려는 「이창(異窓」의 화자도 그랬다. 변화를 원했다. 현실을 벗어나려는 갈망과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욕망이었다. 둘의 욕망은 같은 듯 다르다.

 

 미온의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이창(異窓」의 화자에겐 정의의 실현과 같았다. 그러나 그래 봤자 어설프고 서투른 시도뿐이다. 가장 가까운 남편을 시작으로 우리 사회는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으니까.’ (「이창(異窓)」, 124쪽)란 말로 치부해버린다. 이 역시 하나의 경우의 수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부식 성질을 지닌 무서운 비가 내리는 「식우(蝕雨)」, 반대로 비가 내리지 않아 고통을 받는 「파르마코스」덩굴식물로 변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제거하는 사람들을 묘하게 대치시킨 「덩굴손증후군의 내력」가 우리가 모르는 어느 곳의 일상은 아닐까 무서운 상상을 하고 만다. 그들의 삶이 나와는 상관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털뭉치를 향한 「이물(異物」 속 화자의 간곡한 마음과 같다. 

 

 ‘내 밖에 있는 나 아닌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침입자이기 때문이며 그것의 내면에 무엇이 들었거나 말았거나 어떤 사연이 얽혀 있는지는 물론 어떤 경로를 통해 여기 도달했는지도 관심 가질 까닭은 없었고, 문제라면 그것이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러주면서 가능한 한 내게 고통과 불편을 덜 줄 것인지의 여부일 뿐이다.’  (「이물(異物」, 210쪽)

 

 구병모는 선명한 결말을 제시하거나 대책을 요구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가혹하고 잔인한 상황을 전달한다. 소설은 우리가 사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불운과 불행을 피해 살고 싶은 욕망과 함께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는 게 삶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어떤 경우의 수가 펼쳐질지 모르는 채 살아간다.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아간다. 예측 불가능한 경우의 수를 온몸으로 막으며 말이다. 언젠가 그것을 막아줄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란 믿음의 싹을 키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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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 - 호스피스에서 보낸 1년의 기록, 영화 [목숨]이 던지는 삶의 질문들
이창재 지음 / 수오서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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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두 죽음을 산다. 삶은 죽음이라는 문을 열기 위한 여정이다. 이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아무도 먼저 말하지 하지 않을 뿐이다. 잘 죽어야 한다는 말을 쉽게 내뱉지만 정작 그것에 대해 차근차근 준비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곧 잊고 만다. 자만과 오만으로 나에게는 결코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라 외면하며 살기도 한다. 그만큼 죽음은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이 아니면 대체 언제 할 것인가. 실상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내일이란 그저 달력에만 존재할 뿐이다. 오늘, 이 순간의 호흡에 다음 호흡이 닫히면 삶은 뚝 끊어지고 만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걸 망각하고 자꾸만 내일, 내일로 미룬다.’ (36쪽)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낸 1년을 고스란히 담은 이창재 감독의 『후회 없이 살고 있나요?』는 죽음을 말한다. 아니, 삶을 말한다. 이미 다큐멘터리 <목숨>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준 이야기다. 직접적으로 죽음과 대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국의 호스피스 병원을 방문하고 6개월이라는 시간을 기다려 모현 호스피스에서 촬영 허락을 받은 후 1년 동안 죽음과 동행하는 삶을 지켜본 기록은 그 자체만으로도 숭고한 울림을 준다.

 

 저마다의 사연은 아프고 가슴이 시리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슬픔은 책을 잠시 멈추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 두고 떠나야 하는 비통함, 행복이라는 걸 만져볼 시간에 닥친 암 선고, 삶의 절반의 병마와 싸워온 외로운 삶, 혼자만의 골방에서 문을 닫고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견뎌야 하는 시간, 밤이 무서워 밤새 병동을 서성이다 새벽이 올 때 안도하며 잠에 빠져드는 두려움, 평온해진 영혼 때문에 육체도 나을 거라는 희망에 반하는 사실을 전해야 하는 의료진. 남은 시간을 고통과 절망이 아닌 기쁨과 즐거움으로 채울 수 있다는 걸 말하는 사람들을 통해 나의 삶을 생각한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 살아갈 시간을 허투루 살지 말고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삶이란 내게 잠깐 맡겨진 선물이라고 한다. 이 말처럼 우리는 유한한 생을 살아간다. 언젠가 이 선물을 되돌려줘야 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선물을 얼마나 소중히 가꾸고 있는가? 질문하는 것조차 머뭇거리면 너무 늦을지도 모른다.’ (145쪽)

 

 어떤 삶을 살았든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잘 사는 것만큼 잘 죽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이제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마주할 때다. 어쩌면 많이 늦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빠르다는 말과 같다. 이 한 권의 책이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가슴에 새기게 만들 것이다. 징글징글한 삶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이라는 걸 말이다.

 

 ‘삶이라는 여행은 한 번에 끝이 나는 단속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이어지는 영적 여행이다. 낮에서 밤으로 밤에서 낮으로, 현세에서 내세로 다시 내세에서 현세로 반복하는 여행. 그 여행을 하며 우리의 영혼은 점점 성숙해진다.’ (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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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병 - 가장 가깝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하다
시모주 아키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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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크게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가족에 관한 것이다. 가족이니까 다 알아야 하고 안다고 생각한다. 가족 구성원이 좋아하는 색깔, 싫어하는 음식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때로 의사를 묻지 않고 임의대로 결정하기도 한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함께 참여하게 만들고 어떤 의무감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겉모습만 단란한 가족이 늘어나고 가족 간 분쟁과 폭력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돌아보면 부모나 형제를 탓할 일이 아닌데 그들 탓으로 돌리고 화풀이를 한 적이 있다. 가족이니까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다.

 

 ‘기대는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얼마든지 기대를 해도 좋다. 이런 경우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자기 탓이요, 그  책임은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러니 다음에는 다른 방법으로 도전할 수도 있다.’ (48쪽)

 

 그렇다면 우리는 가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저 처음부터 내 곁에 존재하는 사람들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엄마, 아빠, 언니, 할머니 개인이란 단위가 아닌 가족이란 단위로 말이다. 희생을 강요하고 적당하게 필요한 거리의 존재를 무시하고 쉽게 상처를 준다. 상처받았다는 걸 알아도 가족끼리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무시해버린다. 책은 이런 가족은 진정한 가족이 아니며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저자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면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가족을 말한다. 저자의 경우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크게 실망하고 관계를 단절했다. 암 투병을 할 때에도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다. 딸을 향한 어머니의 애정이 부담스러워 거리를 두었다. 대화의 주제가 가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과는 관계를 지속하지 않았고 결혼을 했지만 남편을 반려자라 부르며 독립적인 생활을 이어간다. 결속의 관계가 아닌 동행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보통의 부모 세대가 부모와 형제를 무조건 이해하라고 한다면 저자는 단호하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하는 현대 사회에서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춰 가족도 변하는 게 당연하다.

 

 ‘마음이 먼저 있고, 그다음 가족이라는 틀을 만들어가야 진정한 가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DNA 따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111쪽)

 

 머리로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여전히 복잡하다. 나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을까. 가족에 대해 더 많은 걸 알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저자 역시 그런 생각을 피할 수 없지 않았을까 싶다. 책의 말미에 고인이 된 아버지, 어머니, 오빠에게 긴 편지를 통해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독립적 자아로 서로를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언과 함께 부모와 형제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있느냐는 물음을 던지는 책이다.

 

 ‘고독을 견디지 못하면 가족을 이해할 수 없다. 혼자임을 즐길 수 없으면 가족이 있어도 고독은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늘 혼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고독을 즐길 수 있어야 비로소 상대의 기분을 가늠하고 이해할 수 있다. 가족이나 사회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가족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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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8-13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어려운 주제입니다, 가족은

자목련 2015-08-13 17:32   좋아요 0 | URL
네, 힘겨운 주제입니다. 가족이 늘어날수록 더 어려워요. ㅠ.ㅠ
 
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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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읽는 인간에 속한다. 그건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겠다. 이런 이유로 독서 에세이를 외면하기라 참 어렵다. 한 사람의 인생을 지배한 책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매력적이다. 사람들이 진심으로 인생의 책이라 추천하는 책은 어떤 책인지, 그것들과 겹치는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과 맞닿는다. 왜 책을 읽는가? 

 

 나는 왜 책을 읽는 걸까? 무엇을 위해 책을 읽는 걸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장애인 아들을 둔 아버지란 수식어로 익숙한 오에 겐자부로의 책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혼란스럽다. 그에게 책은 인생의 목표를 제시해주었고 친구였고 유일한 안식처였다. 누구나 살면서 체념과 비탄의 시기를 지나지만 그것을 어떻게 뚫고 나오느냐에 따라 생은 달라진다. 오에 겐자부로는 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단순히 그가 추천하는 책에 대한 궁금증은 책을 덮고 난 후 내게 남은 건 열여덟 살에 의식하고 시를 읽기 시작했다는 문장과 비탄(탄식, 절망)이란 단어였다.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은 단순한 독서 에세이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소설 강의이자 문학 강의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영국 시인이자 화자였던 월리엄 브레이크가 어떤 의미였는지 명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이해하지 못하면 통째로 외우고 번역서, 비평서를 찾아 읽었다고 한다. 읽는 것은 곧 쓰는 것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하나의 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읽고 치열하게 매달렸는지 놀랍고 감탄한다.

 

 ‘외국어와 일본어 사이를 오가면서요. 이렇게 언어의 정복, 감수성의 정복, 지적인 것의 정복을 끊임없이 맛보는 작업이,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문체를 가져다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은 번역을 하게 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소설을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 소설의 세계가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67쪽)

 

 책과 더불어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와 닮은 사람, 그러니까 나를 이해하고 나를 알아줄 수 있는 친구를 만난다는 건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 할 수 있으니까. 오에 겐자부로에겐 영화감독 이타미 주조가 있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속에서 작가의 분신과 함께 ‘수상한 2인조’가 되었던 사람. 오에 겐자부로에게 ‘랭보의 시를 프랑스 원문으로 소개하고 번역이 아닌 원문으로 느낄 수 있는 언어의 느낌에 대해 알려준다. 하나의 시와 시인을 주제로 밤새도록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 정말 완벽한 일이다. 그런 존재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오에 겐자부로는 아나 자신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감히 이 한 권의 책으로 오에 겐자부로를 읽었다고 말하고 싶다.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여전히 왜 책을 읽는지 설명할 수 없지만 비틀거리는 삶을 바로 세워줄 수 있는 책이 존재한다는 명확한 사실을 전한다. 대단한 책이다. 그것을 고스란히 전할 수 없는 글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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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탑 2015-08-12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 놓고 못 읽고 있는데 빨리 읽어봐야 겠습니다.

자목련 2015-08-13 10:05   좋아요 0 | URL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치료탑 님 즐겁게 만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