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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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 우리 생은 무한대로 발생하는 경우의 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경우의 수의 시작은 두려움과 불안이 아닐까 싶다. 따지고 보면 살면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들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보호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예후가 달라질 뿐이다. 저마다 일정의 보호망을 준비하고 살아가겠지만 기관, 사회, 국가가 그것이 되어야 할 때가 있다. 삶은 혼자만 살아가는 게 아닌 공동체라는 걸. 그럼에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나 아닌 누군가의 삶을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한적으로 관계된 이들을 제외한 모든 삶에 대해서. 구병모는 지속적으로 이것에 대해 말한다. 그렇다고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삶을 옹호하거나 섣불리 위로하지도 않는다.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에 따라 그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보여준다. 하여 때로 지루한 장면이 이어지고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 계속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누군가의 삶이고 그에게는 아주 치열하고 처절한 일상이다. 간혹 극단적인 경우의 수를 선택하는 건 누구라도 그 주인공이 될 수 있어서다. 불운과 불행이 특정한 이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에 수록된 8편의 이야기가 소설에 그치지 않고 현실과의 연결고리가 되는 이유다. 그리하여 구병모의 소설은 현실과 환상으로 만들어진 뫼비우스 띠가 된다.

 

 현실을 생각하면 과감하게 지도교수의 심부름에서 벗어나 ‘나’로 살아야 하는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화자는 환상(미래)을 놓을 수 없다. 그 앞에 맨손으로 건물을 오르던 친구 하이의 죽음은 생존과 소멸에 대해, 그리고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성공으로 모든 게 행복한 결말을 맺을 거라 믿었지만 그것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부질없는 환상인지 알고 있다. 가족, 친구와의 내밀한 관계를 뒤로 한 채 벽을 무너뜨리듯 앞으로 전진한다고 믿었던 화자와 더 높은 건물을 오르며 상실을 극복했을 하이. 죽음이라는 경우의 수를 통해서만 결국 현실을 돌아보게 되는 삶을 보여준다. 혼자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삶의 내면에는  하이의 말처럼 혼자가 아니기를 바란 염원이 있었다.

 

 ‘간격을 확정 짓는다는 건 곧 서로에게 다가갈 가능성도 내포한 것인 만큼 우리의 관계는 비로소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토해내도 내 인식과 감각은 달라지지 않았어. 그 사람이 실망하면서 떠나버린 뒤에야 나는 얼마나 그쪽에 가까이 다다르고 싶었는지, 아니 밀착되고 싶었는지를 알았지.’ (「여기 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 32쪽)

 

 결국 하이는 상황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남편과 미친 시누이와 아이를 돌봐야 하는 미온이 그림이라는 자신의 꿈을 찾아 유모차에 아이를 놓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관통貫通」과 우연하게 목격한 아동 폭력의 현장을 고발하려는 「이창(異窓」의 화자도 그랬다. 변화를 원했다. 현실을 벗어나려는 갈망과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욕망이었다. 둘의 욕망은 같은 듯 다르다.

 

 미온의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라면 「이창(異窓」의 화자에겐 정의의 실현과 같았다. 그러나 그래 봤자 어설프고 서투른 시도뿐이다. 가장 가까운 남편을 시작으로 우리 사회는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으니까.’ (「이창(異窓)」, 124쪽)란 말로 치부해버린다. 이 역시 하나의 경우의 수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부식 성질을 지닌 무서운 비가 내리는 「식우(蝕雨)」, 반대로 비가 내리지 않아 고통을 받는 「파르마코스」덩굴식물로 변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제거하는 사람들을 묘하게 대치시킨 「덩굴손증후군의 내력」가 우리가 모르는 어느 곳의 일상은 아닐까 무서운 상상을 하고 만다. 그들의 삶이 나와는 상관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털뭉치를 향한 「이물(異物」 속 화자의 간곡한 마음과 같다. 

 

 ‘내 밖에 있는 나 아닌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침입자이기 때문이며 그것의 내면에 무엇이 들었거나 말았거나 어떤 사연이 얽혀 있는지는 물론 어떤 경로를 통해 여기 도달했는지도 관심 가질 까닭은 없었고, 문제라면 그것이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물러주면서 가능한 한 내게 고통과 불편을 덜 줄 것인지의 여부일 뿐이다.’  (「이물(異物」, 210쪽)

 

 구병모는 선명한 결말을 제시하거나 대책을 요구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가혹하고 잔인한 상황을 전달한다. 소설은 우리가 사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불운과 불행을 피해 살고 싶은 욕망과 함께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는 게 삶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어떤 경우의 수가 펼쳐질지 모르는 채 살아간다.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아간다. 예측 불가능한 경우의 수를 온몸으로 막으며 말이다. 언젠가 그것을 막아줄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란 믿음의 싹을 키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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