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모든 글은 하나의 소설이며 하나의 귀중한 기록 일지도 모른다. 단지 형식만 다를 뿐. 때때로 삶은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어떤 소설은 너무도 평이하고 단조롭게 흐른다. 마치 소설 속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처럼. 지금 내 곁에는 한 권의 소설과 한 권의 에세이가 있다. 각각 다른 작가의 글이다. 두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다. 어느 쪽으로 무게를 둘 수 없을 정도로 균등한 애정을 보낼 수 있다.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황정은이 첫 에세이를 냈다. 제목도 의미심장한 일기日記다. 하루를 기록하는 일그건 단순하면서도 어렵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은 평범으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하루는 어떤 이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며 어떤 이에게는 변곡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그런 마음이 커진다. 코로나 시대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날들을 살아가면서 하루하루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게 당연하면서도 그 변화에 어떻게든 반응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건 낯설게만 느껴진다. 반응의 시차가 너무 큰 것일까. 어쩌면 나에게만 해당되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어제는 실시간으로 영국의 모습을 중계하는 뉴스를 봤다. 그곳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을 찾는 게 어려웠고 마치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2020과 2021년의 두 계절이 머나먼 과거처럼 보인 것이다. 일기를 쓴다는 것, 나를 기록한다는 것, 어제와 다른 나, 과거와 다른 나를 마주하는 일, 그 안에서 조금씩 성장하는 기쁨을 발견하는 일은 가장 중대한 일은 아닐까.


황정은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의 소설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어 좋다. 나의 성장이 그의 성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좁고 작겠지만. 그러니 이런 문장을 따라 읽으며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려도 좋다. 순도 높은 애정을 고백하고 싶을 만큼. 황정은의 글에서 앤을 만날 거라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내게 특히 좋았던 부분은 마릴라가 내면의 혼란을 드러낸 순간들이었다. 앤은 과거에 마릴라가 가져보지 못한 질문과 표현해 보지 못한 분노로 마릴라와 충돌하곤 하는데 마릴라는 그때마다 당혹스럽게 자신의 과거를 돌이킨다. 그가 자기도 모르게 앤에게 날카로운 태도를 보이는 몇몇 순간들은 거의 질투로도 보였는데, 나는 그런 순간들이 좋았다. 마릴라가 마냥 완성된 어른이 아니라서 좋았고 그에게도 욕망과 원망이 있었다는 걸 생각할 수 있어 좋았다. 마릴라에게 그런 순간을 마련해 준 드라마 제작자들에게 고마웠다. 그들은 앤의 첫 등장 장면을 미래만 상상하며 그린 게이블즈로 오는 중인 앤이 아니라 그린 게이블즈에 당도하기 전의 앤으로 그려냈다. (46쪽)


한강의 소설은 이상하게 항상 신중함이 느껴진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을 고르고 선택하는 일에 있어 무척 많은 시간을 들여 공들여 쓴 것 같다는 뜻이다. 어느 작가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겠냐만 특히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는다. 겹겹이 쌓인 비밀의 겹을 하나하나 벗기고 마침내 그 비밀을 마주하는 순간의 슬픔이나 분노를 토해낸다고 할까. 조심스럽지만 할 말은 다 하고야 마는 그런 소설.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에 이어 이번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 · 3 사건을 말한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쓰는 일은 더욱 조심스러울 것이다. 그런 마음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전해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최근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눈雪의 은유와 상징에 대해 가만히 생각한다.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강풍이 먼바다의 먹구름을 흩을 때마다 햇빛이 수평선으로 떨어진다. 수천수만의 새떼 같은 눈송이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나 바다 위를 쓸려 다니다 빛과 함께 홀연히 사라진다. 내가 이마를 대고 있는 차가운 차창에도, 두 개의 와이퍼가 끼익, 끽 소리를 내며 닦아내는 버스 앞 유리에도 커다란 눈송이들이 쉼 없이 부딪혔다 사라지고 있다. (67~68쪽)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가 내 손등에 내려앉는다. 구름에서부터 천 미터 이상의 거리를 떨어져내린 눈이다. 그사이 얼마나 여러 차례 결속했기에 이렇게 커졌을까? 그런데도 이토록 가벼울까. 이십 그램의 눈송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커다랗게 펼쳐진 형상일까. (111쪽)


글을 읽는 일은 쉽고 단순하다. 그러나 글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고 복잡하다. 이해하려는 마음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이해하려는 마음은 다가가는 마음이고 애쓰는 일이다. 황정은의 에세이와 한강의 소설을 이해하는 순간은 내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믿으면 괜찮다. 읽는 일은 중요하다. 쓰지 않아도 이해하지 않아도 우선 읽어야 한다. 읽는 게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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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0-14 18: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말 깊이 동감하게 되네요.^^

자목련 2021-10-15 17:12   좋아요 0 | URL
^^*
스텔라 님, 비가 오고 스산하네요.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21-10-14 19: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황정은이 빨간머리 앤에 대해???
황정은과 한강의 신간들 사야지...하면서 까먹고 있었어요.
이해하려는 마음읏 다가가는 마음이고 애쓰는 일!!! 저도 자목련님의 말씀에 고개 끄덕끄덕 했네요^^

자목련 2021-10-15 17:13   좋아요 1 | URL
그쵸? ㅎ
너무 반갑고 좋았어요.
책읽는나무 님, 향기로운 가을 이어가세요^^

공쟝쟝 2021-10-25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또 이글 참 좋아요🥺 마지막 문단에서 너무 뭉클했어요!!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해하려는 마음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용기가 되요. 결국 나의 오해로 가득한 이해라할 지라도. 제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존중이 이해하려는 노력이기에.

자목련 2021-10-26 09:50   좋아요 1 | URL
저야말로 공쟝쟝 님의 페이퍼, 넘 좋았어요!!!
같은 책을 읽는 것도 넘 반가운데, 어쩌면 우리는 같은 부분을 오래 읽고 오래 바라보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습어요. 달아나는 가을, 그 안에서 건강하고 평온한 시간 이어가세요^^

공쟝쟝 2021-10-26 10:12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좋은 책들 사이를 오가며 평온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