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6일에 김태정 시인이 돌아가셨단다. 오늘이 발인.
작년 말에 암에 걸리고 해남에서 홀로 투병 생활하시다가...
아직 젊은데...그녀의 두 번째 시집 나오길 기다렸는데,
갑작스러운 소식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지난 봄에 친구들과 섬 여행을 갈 때 친구가 들고 온 시집이었다.
그 섬에도 동백나무가 많았는데
우연히 들고온 시집을 읽겠다고 펼친 친구가 이 시집에도 동백나무 이야기가 있다며 들려주었고
우린 동백나무 아래에서 설정샷을 찍고, 시를 읽으며, 이 시집 정말 좋다며, 좋다며,...
집으로 와서 바로 주문을 해서 읽었다.
문단 데뷔 13년 만에 겨우 낸 첫 시집이라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은
그렇게 내 앞으로 왔고 시를 잘 모르지만 시를 좋아하는 내게 이 시집은 정말 멋졌다.
첫 시집 나온지 좀 되었으니 어디에선가 두 번째 시집을 짓고 있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
어느 생엔가 문득 세상에 홀로 던져져
월광을 듣는 밤은
미칠 수 있어서
미칠 수 있어서 아름답네
오랜만에 상처가 나를 깨우니
나는 다시 세상 속에서 살고 싶어라
(...)
_월광(月光), 월광(月狂)
술을 마시며 베토벤의 월광을 듣다가 이 시가 생각났고,
살면서 때로는 너도/부러 들키고픈 상처가 있었을까/이 세상 어디쯤/나를 세우기가 그리도 버거웠었네/때로는 사는 일로 눈시울도 붉히고/사는 것 내 맘 같지 않아 비틀거리다/위태로운 마음으로 허방을 짚으면/휘이청 저 산 위에 기울어진 불빛들/빗장 속의 안부를 묻고 싶었네/모두들 어디에 기대어 사는지/너는 또 무엇으로 세상을 견디는지/너에게 이르는 길은/너를 넘어가는 것보다 더욱 숨이 찼었네/상처도 삭으면 향기를 이루리라/노을에 지친 어깨는 또 그렇게 일러주지만/문득, 대궁밥만큼 비어 있는 산그림자
_북한산
문득 산이 그리워지면 _북한산이란 시를 읽었다.
어디 그뿐인가, 무언가에 화가 났을 때는 시인의 시를 빗대어 욕을 했다.
속이 시원했다.
시가 안될 때/요렇게 한번 해보렷다/개새끼!/그래도 안될 때/죽어도 안될 때/쫌스럽게 하지 말고/
똑 요렇게/씹새끼!/설사가 나오지?/후련하지?//욕이라는 것은 그래서 좋은가/사람들은 그래서 사는가(…)
_시의 힘, 욕의 힘
김태정 시인은 '민중서정시인'이다.
첫 시집내고 "시만 빼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며 해남 어느 시골마을로 내려갔단다.
그곳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TV도 없이 라디오를 벗 삼아 작은 마당에 야채를 가꾸며 살았다.
그런 그녀가 작년에 암 선고를 받았고, 병원에선 겨우 3개월의 기한을 주었단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그것은 어쩌면/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또 어쩌면/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어쩌면 나에겐/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가난한 연인들이/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_물푸레나무
한동안 그녀의 시에 빠져 지냈다.
그리고 늦은 여름, 휴가를 가기 위해 고민을 하다가 그녀의 시집이 생각났다.
그래, 미황사.
봄에 읽었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의 시집 속 미황사가 생각났고,
동백나무가 떠올랐다.
그렇게 찾아갔던 미황사.
그녀의 시에 나오던 그대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새처럼 날아간 거라고/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_미황사(美黃寺)
그리고 돌아와 내내
미황사와 김태정의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시들을 생각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아름다운 그녀의 시,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겠다.
'한 생애가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그녀의 길지 않은 생을 생각하며.
십년 묵이 낡은 책장을 열다가 그만/목구멍이 싸아하니 아파왔네/아침이슬 1, 어머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때문이 아니라/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수염이 텁수룩한 도이치 사내를 펼쳐 보더거/그만 재채기를 했네/자본론, 실천론, 클라라 쩨트킨,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묘지/때문이 아니라/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던/네루다 시집 속엔/오래 삭힌 멍처럼 빛바랜 쑥이파리 한점/매캐한 이 콧물과 재채기는/먼지 때문에/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그 말/때문이 아니라/다만 먼지 때문에//바람이 꽃가루 날려보내듯/먼지가 울컥, 눈물을 불러일으켰나//청소할 때면 으레 나오던 재채기도/재채기 뒤에 오는 피로도/피로 뒤에 오는 무기력도/무기력함으로 인한 단절과 해체도/그 쓸쓸함도, 그 황폐함도 다만/먼지 때문이라고 해두자/먼지보다 소심한 눈물 때문이라고 해두자//그 사소한 콧물과 재채기 뒤에/저토록 수상한 배후가 있었다니//꽃도 십자가도 없는/해묵은 먼지의 무덤을 열어보다가/그만 눈물이 나왔네/최루가스 마신 듯 매캐한 눈물이/먼지 때문에, 다만 먼지 때문에
_눈물의 배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