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를 잘 모르지만 좋아하는 지라, 맘에 드는 시집이 나타나면 잘 사서 읽는 편인데 그동안 고전 한시는 읽어볼 생각을 안 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매창시집』을 읽게 되고 또 지난 번에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를 읽으며 만난 이규보의 시들에 반해 시집을 샀다. 이규보에 관해선 학교 다닐 때 배운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어쨌든 그의 시를 읽게 된 것이 중요. 내가 구입한 책은『욕심을 잊으면 새들의 친구가 되네』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이규보는, 

스물네 살 되던 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개성 북쪽 근방의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한동안 지내게 된다. 그는 내키는 대로 술을 마시고 자유분방하게 노니는 습성 탓에, 과거에 급제한 후에도 벼슬아치들에게 밉보여 이렇다 할 자리를 얻지 못하고 신산(辛酸)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처럼 불우한 처지에 아버지까지 잃게 된 그에게 천마산의 아름다운 자연은 큰 정신적 위안을 주었던 것 같다. 이규보는 천마산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서 느끼는 충만함, 마음의 평온에 대해 여러 차례 읊었다.
또한 그가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를 스스로 지은 것도 이 무렵이다. 이 호는 무심히 천마산 산등성이의 구름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뭉게뭉게 피어나 한가롭게 떠다니고, 산에도 머물지 않고 하늘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비를 내려 메마른 초목을 살리며, 변함없이 순수한 빛깔을 지닌' 흰 구름이 좋아 이런 호를 붙이게 되었다고 「백운거사 어록」(白雲居士語錄)에서 말하고 있는데, 이 '흰 구름'이야말로 자유롭고 거침없는 상상력과 타자(他者)에 대한 꾸밈없는 연민을 지닌 이규보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당한 형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일흔넷이 되던 해 가을 '이제는 눈이 아파서 더는 시를 쓸 수 없다'고 고백하는 시를 남긴 후 며칠 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평생을 시인으로 살았기에 남긴 시가 많단다. 또한 그 세월만큼 구현하는 작품 속 세계관은 다채롭다고. 

그의 시를 읽으며 내가 왜 이규보에게 반했나 했더니 그의 호처럼 여유로운 마음과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타자를 대할 때의 따듯한 심성과 호탕함 그리고 편역한 김하라 님의 말처럼 "진리를 드러내되 대상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이며, 갈등과 분란을 낳지 않으면서 진실을 길어낼 수 있는 것" 을 나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며 훌륭한 시인"이라고 일컫는 이규보에게 쏙 빠져든 것.  

감성적인 시들을 좋아하는 내가 좋아할 만한 그의 시 몇 편을 올려보면,

이규보가 술자리에서 쓴 시라고 하는 「오늘이 가면」"내 평생에 슬픈 일은/오늘이 흘러 어제가 되는 것/어제가 모이면 곧 옛날이 되어/즐거웠던 오늘을 그리워하리/훗날 오늘을 잊지 않으려거든/오늘을 한껏 즐기자꾸나" 내 삶의 모토와 어찌나 비슷한지-.-;; 

그리고 그의 낙천적인 성격이 드러나 있는 「비 오는 날의 낮잠」도 참 좋다. 재미있다. "주룩주룩 낙숫물 소리/낮잠을 방해할 것도 같은데/어째서 빗소리 들릴 땐/유독 잠이 달콤한 걸까?/맑은 날엔 문 닫고 있으려 해도/나가고 싶은 생각 끊이지 않지/그러니 잠도 깊이 들기 어렵고/언뜻 잠이 들었다가 화들짝 깨지/그런데 지금은 장마철이라/길이 온통 물바다 됐네/아무리 친구를 찾아가려 한들/코앞도 천 리처럼 멀기만 한걸/문 두드리는 소리 들리지 않고/뜰엔 발소리도 나지 않누나/그러니 잠을 잘 수가 있어/드렁드렁 천둥 치듯 코를 곤다네/이 맛을 말로 하긴 정말 어렵지/임금인들 어찌 쉽게 알겠나?/임금이 잠 못 자는 건 아니지만/아침마다 신하들과 회의가 있으니" 불행한 상황 속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찾으려는 노력. 이런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 시에 드러나 있다. 좋아할 수밖에 없음. 

뒤에 실린 산문 중에 「귀찮음 병」이라고 있는데 굉장히 위트 있고 재미있다. 대략 이런 내용. 

백운거사에게는 귀찮음 병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손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빨리 변해 가는데 귀찮음 병은 꼼짝 않고 머물러 있고, 이리 보잘것없는 몸인데도 귀찮음 병은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네. 집 하나 있는데 풀이 우거져도 베기 귀찮고, 책 일 천 권이 있는데 좀이 슬도록 펴 보기도 귀찮고, 머리가 헝크러져도 빗기 귀찮고(…)남들과 웃고 노는 일도 귀찮고(…)걷기도 귀찮고(…)세상에 무슨 일이든 귀찮지 않은 게 없는데 이런 병을 무슨 수로 고칠꼬?"
손님은 아무 대답도 없이 물러가더니 이 귀찮음 병을 고칠 방법을 찾아 열흘 뒤에 다시 찾아왔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오래 못 보았더니 퍽 그립더구먼. 한번 보고 싶어 왔네."
그러나 거사는 귀찮음 병이 도져 만나기를 꺼렸다. 그러자 손님은 굳이 나오라 하여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좋은 술을 빚었는데 바야흐로 잘 익어 향기가 그득하다네(…)자네 아니면 누구랑 마시겠어? 게다가 우리 집에 시종드는 계집아이가 있는데 노래도 잘하고 생황도 잘 불고 아쟁도 잘 탄다네(…)자네를 대접하고 싶은데 같이 가기 싫어할까 봐 걱정일세(…)" 

그 말에 거사는 좋아라 옷을 떨치며 일어났단다. 그에 손님은 거사를 보고 처음엔 말하기도 귀찮아하더니 지금은 서둘러 말하고, 걷기도 귀찮아하더니 지금은 걸음도 빠르다면 핀잔을 준다. 그러면서 "사람의 품성을 도끼처럼 찍어 망가뜨리기로는 예쁜 여인을 따라갈 것도 없고, 창자를 썩게 하는 약이 바로 술이라"며 그것들에 망가지는 거사의 모습을 보는 것이 왠지 귀찮을 것 같고, 그러다보니 거사와 얘기하는 것도 귀찮아지고, 앉아있기도 귀찮아지는 걸 보니 거사에게 귀찮음 병이 옮은 것 같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러자 부끄러워 얼굴이 벌개진 거사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사과하였단다. "(…)내가 이제 마음을 바꿔 어질고 의로운 일에 힘써서, 귀찮다는 생각은 버리고 부지런히 살아 보려는데 자네는 어떤가? 나를 비웃지 말고 조금 기다려 보게나" 훗, 그러니 어쨌든 술이나 마시러 가자는 말?! 아무튼 아무리 귀찮아도 남자들은 술과 여자, 흥겨운 놀이엔 약한 법인 듯-.-;; 

그리고 마지막, 이규보가 어째서 그토록 술을 사랑하였는지 나오는 글, 

"술병아, 술병아! 너에게 술 두 말을 담는다. 기울여 마시고 또 담아 두니 언제인들 취하지 못하겠는가. 너는 나의 몸을 우뚝 하게 하고 나의 마음을 확 트이게 하는구나. 때로는 춤을 추고 때로는 노래하니 모두 네가 시킨 것이다. 내가 너를 따라다니는 것은 다만 네가 바닥나지 않기 때문이다." 

낙천적 성격, 귀찮음 병, 오늘을 즐겁게 그리고 요즘 부쩍 술 많이 마시는 내가, 이규보에게 빠진 이유 중 하나. 술! 아 멋져멋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