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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 라이프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행복의 기준이 천차만별이겠지만 궁극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한 인생을 추구하는 마음은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인생의 출발점이 다른 탓에 누군가는 처음부터 평탄하고 풍족한 삶을 살아가지만 누군가는 끊임없이 찾아오는 불행에 좌절하고 절망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이 책의 영문 제목에 사용된, '풍요로운'과 '술 취한 사람'이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lush'라는 단어는 이러한 상반된 두 개의 삶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각 장마다 등장인물의 특징(?)을 형상화 한 작은 그림으로 이번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일지 알아보게 해둔 점도 특색 있다.
<러시 라이프>는 등장인물들이 겪는 상황을 분리하여 각각의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각각 다른 화면으로 분할하여 보여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책의 표지에 사용된 에셔의 그림은 이 작품의 이야기 구성 방식의 특징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올라가기와 내려가기(Ascending and Descending)에 나오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게 만들어진 계단처럼 각각의 등장인물들에게 생기는 일들이 결국 모두 연결되어 있으나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구분하기 어렵게 공간과 시점을 교묘하게 휘둘러 놓고 있다. 책을 읽어나가다가 어느 순간 인물들 간의 연결점을 발견하고 앞으로 돌아가 다시 확인하면서 이 모든 인과관계를 작품 전반에 걸쳐 잘 배합해 놓은 작자의 솜씨에 찬탄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센다이 역 근처를 지나며 '어떤 특별한 날에'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린 전망대와 '에셔 전' 포스터, '당신이 좋아하는 일본어를 가르쳐 주세요'라고 쓴 스케치북을 들고 서 있는 백인 아가씨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늙은 떠돌이 개를 본다. 센다이 역을 지나쳐 간 깔끔한(?) 프로의식을 가진 좀도둑 구로사와, 교단의 교주를 살아있는 신이라 여기는 청년 가와라자키, 이혼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부(아오야마)의 아내를 죽이려는 교코, 구조조정의 여파로 20여년을 다닌 회사에서 해고당한 뒤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실업자 도요타 등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다. 바로 이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떠돌이 개를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각하고 맺은 인간관계 외에도 생각지도 못한 시간과 공간과 사람을 통해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고 있다. 가끔 다른 경로로 알게 된 각각의 사람들이 서로 인간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될 때가 있는데 이 작품은 그런 순간에 느끼는 신기함과 놀라움을 경험하게 해주고 있다. 또한 이사카 고타로는 이 작품을 통해 정의나 악 등이 관점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신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날마다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 등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내 인생은 과연 "It's All Right!"일까? 책을 덮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나란 존재, 내 인생, 내 삶의 방식, 내 글이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음에 생각이 미친다.
책표지의 그림을 보며 잠시 생각해 봤다. 과연 나는 계단 위를 끊임없이 돌고 있는 사람일까,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계단에 앉아 있는 사람일까?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밤을 새워 이 책을 읽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맞물리며 돌아가는 인생을 작품 속에 너무도 절묘하게 구현해 놓은 작가의 글 솜씨에 매료되어버렸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이런 묘미와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특별한 재미를 추구하는 분들에 추천할만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