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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는 아프다 ㅣ 푸른도서관 13
이용포 지음 / 푸른책들 / 2006년 3월
평점 :
느티나무... 어떻게 생긴 나무였더라... 내가 느티나무를 본 적이 있던가? 하늘조차 창문으로만 보며 살아가는 날들이 많아진 탓인지 나무를 보는 날이 드물어 예전에 보았을 나무들조차 쉽게 떠오르질 않는다... 집에 있는 수목도감을 찾아보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마을 정자나무의 역할을 해 온 느티나무는 수명이 길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영복, 귀목, 신목"으로 여겨져 왔으며 봄에 트는 싹의 모양을 보고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순호가 살고 있는 너브대 마을 입구에 죽어가는 나무 한 그루, 200년쯤 되었으리라 짐작되는 이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나무에 목을 매고 죽은 사람이 많아 '자살 나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까지 한다.
소중한 존재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버린 느티나무가 그나마 쓸모 있는 나무로 여겨지게 된 것은 나무에 갓등을 달아 공터를 밝히는 가로등 역할을 하면서부터이다. 그런 느티가 아프다. 느티가 마음이 아픈 것은 사람들이 아프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의 증오도, 슬픔도, 고통도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느티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이 청소년을 위한 성장소설임을 감안하자면 등장인물들 중 '순호'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으나 주변 인물들 또한 고루 개성을 지니고 있다. 새벽마다 "누꼬오오오~~"하고 괴성을 질러대는 욕쟁이 할머니를 비롯한 몇몇 인물들이 질펀하게 쏟아내는 사투리들이 작품에 활기를 불어 넣으며 내용과 어우러져 읽는 재미를 제공해 주고 있다.
너브대에 속한 사람들과 순호의 삶은 작품 속에서 조금씩 언급되는 도로 하나 건너에 있는 아파트 단지와 순호네 반의 반장과 대비를 이룬다. 아침마다 신문을 돌리는 중학교 2학년인 순호는 노름에 빠져 전세금과 정신이 온전치 않은 누이가 인형 눈알을 붙여 번 돈마저 탕진해버리는 아버지와 가난한 삶을 증오한다. 순호에게는 느티나무 근처 벤치에 머물러 살아가는 가로등지기 또한 실패한 인생을 살아가는 패배자로 비친다. 작가는 자신이 속한 환경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순호를 통해 빈부의 격차와 학업의 상관관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순호가 아버지와 대비된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은 순호네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인 공팔봉 씨이다. 그러나 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 온 공팔봉 씨에게 닥친 불행을 통해 돈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느티나무가 한 곳에 서서 묵묵히 너브대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가로등지기는 느티나무처럼 묵묵히 나무 곁에 머물며 너브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이어간다. 욕쟁이 할머니에게는 서낭당지기로, 느티나무를 자신의 나무라고 여겼던 순호에게는 방해꾼이나 다름없었으나 나중에 순호가 가출을 해서 방황할 때 도움을 준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법이 없이 복화술로 인형을 통해 말을 하는 그가 단비가 엄마를 기다리며 슬퍼할 때 자신의 목소리나 다름없는 인형을 내어주기도 한다. 그런 그가 가장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아버지와 순호에게 밥 차려주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며 인형에 눈 붙이는 일거리를 손에 들고 다니는 순심이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순심이를 사모하는 그는 순심이 마음을 열고 가져다 준 신문지를 소중한 선물로 여긴다.
어깨에 드리워진 아침 햇살에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너브대 사람들을 보며 명상에 잠기기도 하는 느티는 그들이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부짖으며 아픔을 공유한다. 욕쟁이 할머니에게는 자신의 넋두리에 귀를 기울여 주는 존재이기도 하였던 느티... 순호의 손에 의해 갓등이 깨진 날부터 너브대 사람들에게 찾아왔던 불행의 흔적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잦아들고 등장인물들에게도 조금씩의 변화가 찾아 든다. 고된 삶의 와중 속에서 좌절을 겪고 성장하며 조금씩 꿈과 희망을 키워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내 주변에도 묵묵히 나를 지켜보는 느티같은 존재, 수다스럽게 말 건네와 웃음을 안겨주는 재채기 인형같은 친구가 있는지 잠시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