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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Lemon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거울 앞에 가서 서면 나와 너무나 똑같이 생긴 존재가 반대편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나와 똑같은 형상을 앞에 두고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거울 속에 나를 복사기로 뽑아놓은 것 같은 형상이 있어도 그것은 그저 나에게서 나온 하나의 형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거울 속의 그 형상이 갑자기 나와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말을 건네거나 혹은 나와 똑같은 존재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는 타인과는 다른 인격을 지닌 고유한 존재로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오직 단 하나뿐이기에 그 존재 가치가 특별한 것이다. 책에 쓰인 문구- "시인 셸리는 호숫가에서 자신의 분신을 만난 다음 날 죽었다."고 한다. 분신, 나의 분신...
이 책은 가족의 의미와 개별적인 인간의 존재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가족이라는 형태를 구성하고 어느 순간, 어느 공간에서 그들의 유전인자를 지닌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여 또 하나의 생명체로 탄생한다. 그리고 부모는 자신의 유전자를 지녔으며 자신과 닮은 외모와 유사한 습관이나 버릇을 드러내는 자식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는다. 흔히 자식을 자신의 분신이라고들 표현하는데 이는 자식이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또 하나의 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분명 마리코는 열 달 동안 엄마의 뱃속에서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자라고, 엄마에게 몇 시간의 산고를 겪게 하며 태어나,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평범한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전혀 닮지 않은 외모의 차이는 모녀간에 건널 수 없는 벽을 만들고, 비극적인 죽음을 양산한다.
한편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후타바는 자신의 방송출연이 어머니의 죽음을 야기했으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의도적으로 살해되었으리라 여겨지는 어머니의 비밀에 대해 조사해 보기로 한다. 너무도 닮은 외모를 지닌 마리코와 후타바. 이 책의 제목으로 등장한 '레몬'은 같은 방법으로 레몬을 먹는 둘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물이다.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에는 아무리 똑같이 닮았다 하더라고 미세한, 또는 개별적으로 구분되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이 책에서 가정하는 분신의 경우에는 그러한 차이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복사판이다. 비유가 될지 모르겠으나 일란성 쌍둥이는 한 사람을 모델로 두고 똑같은 형태로 그린, 그러나 미세한 차이가 있는 그림이라면 분신은 한마디로 복사기에서 찍어내어 한 점의 차이도 없는 것이라고나 할까... 같은 외모와 같은 습관을 지닌 이 둘이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각기 다른 가정에서 자라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도 아니면서 외모 면에서 나와 닮은 사람을 보게 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과연 나와 똑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런 존재와 조우한다면 어떤 느낌이, 어떤 생각이 들지 상상해보느라-솔직히 소름 돋는 일이다.@@- 온갖 생각들이 난무하였다. 각기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나 자라온 마리코와 후타바가 자신의 근원으로 접근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생명의 시작과 한 개인의 특성이 갖는 의미,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나만의 존재 가치 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라벤더 꽃밭에서 이루어지는 결말은 그 색채만큼이나 몽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