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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작은 늪
스티븐 킹 / 글밭 / 1994년 6월
평점 :
절판
소원을 빌면 이루어 준다는 내용의<원숭이의 손>이라는 단편(키플링의 작품?)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첫번째 소원으로 돈을 바라지만 그 소원은 자식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고, 어머니는 두번째 소원으로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오길 바란다는 소원을 빈다. 그러나 이미 죽음의 강을 건너 버린 아들이 되살아와 문을 두드리자 그들은 세 번째 소원으로 자식이 아닌 이미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린 그것이 사라져 버리길 빈다.
누군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을 슬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일찍 죽은 자식이나 아내, 그리고 동물을 되살리는 것이 과연 기쁨만을 가져다 줄까? 위의 짤막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죽은 이의 환생'을 소재로 한 스티븐 킹의 소설은 죽음과 환생이 가져다 주는 공포를 담고 있다. 언뜻 언뜻 스쳐가는 섬뜩한 느낌을 작품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미크맥 인디언 종족의 성지였으나 더럽혀져 버린, 아이들이 만든 <애완동물묘지> 너머에 존재하는 땅(신의 작은 늪)에 묻힌 동물과 사람들은 되살아나 돌아오긴 하지만 이미 예전의 본성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주드 노인은 단지 앨리의 고양이인 처치가 죽었을 때 왜 루이스에게 고양이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일까? 그는 이미 오래 전에 되살아난 동물(자신의 개를 비롯하여)과 사람이 어떤 특성을 보였는지를 알면서도 루이스를 공.범.자.로 만든다. 그러나 주드노인도 루이스도 "신세지면 빚지는 것이고 빚진 건 조만간에 돌아오기 마련"인 것을 생각했어야 한다.
또 한가지는 루이스의 아내 레이첼을 통해 내비치는 '죽은 이에 대한 죄책감'에 관한 것이다. 어린 나이에 불치의 병에 걸린 언니를 간호해야 했던 레이첼은 오랜 고통으로 주위 사람들을 증오하게 된 언니의 비틀린 모습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이후 죽은 언니가 살아 돌아와 자신마저 괴물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버릴까봐 두려움에 떨고,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그 공포는 잠재해 있게 된다. 영화속의 '처키'처럼 외과용 메스를 치켜 든 게이지에게서 언니의 모습을 발견한 레이첼이 느꼈을 공포를 생각해 보라.. 마지막으로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죽음은 신의 영역이고, 매장은 인간이 감추고 있는 비밀일 뿐이다"라는 글에서 보이듯 죽음은 이미 인간의 손을 떠난 영역"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