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윌북 클래식 첫사랑 컬렉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강명순 옮김 / 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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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 강명순 (옮김) | 윌북 (펴냄)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로테 없이는 아무짝에도 소용없어.

-젊은 베르베르의 슬픔 본문 157페이지

첫사랑.

사랑의 열병을 앓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랑이 이루어졌든 이루어지지 않았든 '첫사랑'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설렘을 마음 한 켠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매번 다른 사랑에 빠질때마다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이 마지막 사랑이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고, 지난 사랑을 부정하며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첫사랑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사랑만이 전부인 사람도 있을테고 말이다. 로테만이 전부라고 얘기하는 베르테르처럼.

짝사랑을 얘기하면서, 오직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랑을 얘기하면서 베르테르를 연관지어 말하고들 한다. 무엇이 이 젊은 청년 베르테르를 사랑밖에 모르는 남자로 만들었을까? 하급 관리여서 신분 높은 귀족들에게 보이지 않는 따돌림을 당하고, 행정적인 일처리를 하면서 자신의 뜻과는 달랐던 공사와의 불화로 사직을 하는 베르테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좋은게 좋은거'라는 처세술에 익숙하지 못했던 그가 로테만은 자신의 내면을 이해한다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베르테르를 가까이 두고 지켜봐야하는 알베르토의 마음도 그리 편하지는 않았으리라.

로테를 향한 자신의 사랑은 오누이와 같은 순수한 사랑이라 말하면서도 그녀와의 스치는 가벼운 스킨쉽에도 두근거리고, 끝내는 강제로 입맞춤을 한 베르테르의 다소 무절제한 행동은 내가 보기엔 그다지 순수해 보이지는 않았다. 여주인을 흠모해 그 여주인이 결혼하려던 새 하인을 살해했던 하인을 구명하고자 끝까지 힘썼던 베르테르의 진심은 아마도 자신의 변호였었지 않을까? 그 하인을 끝내 구하지 못했다는 좌절은 자신의 사랑 또한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구제받지 못하리라는 고통을 주었다. 자살은 나약함이라며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던 알베르토와 죽음에 대한 시각이 달랐던 베르테르의 마지막 선택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만큼 이미 결론이 정해져있던 것은 아니었을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을 두고 흔히들 죽을 용기로 살았어야 했다고 쉽게 말하지만, 사실 살아가는 데에도 죽을 만큼 어쩌면 그 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알베르토와 결혼하여 남은 동생들을 자식처럼 돌보라는 어머니의 유언은 효심 가득한 로테로서는 거역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알베르토를 향한 자신의 마음도 사랑이라 믿고 있었지만 의무와 책임, 감사함과 아내로서의 순종이 더 컸던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대화가 통했던 베르테르에게 끌렸고 그를 곁에 두고 싶어했던 걸까. 남편도 사랑하고 베르테르도 사랑했던 로테의(욕심이랄까 우유부단함이랄까) 단호하지 못했던 행동이 나로서는 끝내 이해되지 않는다. 베르테르에게 묻고 싶다.

죽음에 이르는 방법이 꼭 그것 뿐이었어야 했느냐고. 사랑하는 이가 건네준 총으로 했어야만 했느냐고. 사랑했다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을 그 죄책감을 어찌하라고... 사랑이 전부여서, 그 사랑을 가질 수 없어서, 사랑이 전부였던 그 자신, '나'를 버린 베르테르.

사랑을 알지 못했던 십대에 처음 만났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3번 하고도 절반의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 지나 다시 읽게 된 베르테르의 사랑. 흐릿해진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려보고 싶다면 여름밤에 읽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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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 과학, 어둠 속의 촛불 사이언스 클래식 38
칼 세이건 지음, 이상헌 옮김, 앤 드루얀 기획 / 사이언스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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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칼 세이건 (지음) | 이상헌 (옮김) | 사이언스북스 (펴냄)

열살이 채 되기 전이었을까? 내 나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만큼 어렸던 그 때, 유독 강렬하게 각인된 기억이 있다. 대한민국 전 국민을 티비 앞에 불러모아 집 안에 있던 숟가락 한 두개쯤 구부리게 만들었던 대대적인 이슈. 삼삼오오 입만 모이면 "네 숟가락은 구부러지더냐?"고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서로 물으며 굉장한 이슈를 몰고왔던 화제의 인물 유리겔라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 유리겔라의 근황을 조사했다던 모잡지(어릴때라 기억나진 않지만 여성잡지였다)에서 그가 미국 NASA의 비밀 직원이 되었다고 기사를 냈지만 또 그리 오랜시간이 지나지 않아 유리겔러의 초능력은 사기극이었다는 뉴스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원인을 밝히지 못한 현상과 능력에 공포심을 갖거나 열광하는 극과 그의 반응을 보여왔다. 보편적인 지식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신의 영역으로 돌리고, 벌을 받았다는 죄의식과 공포에 더 많은 죄를 범하는 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마녀, 외계인, 주술사, 귀신 등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스터리는 사람들의 공포심과 더불어 호기심도 자극한다. 모습을 달리한채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학의 발전'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우주'와 '의학'이다. 달 착륙으로 우주를 향한 과학의 발전은 절정을 이루었고, 인간 수명의 연장으로 의학의 발달도 꽃을 피웠다. 미신적인 얘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들 달로 우주선도 쏘는 시대에 그런 얘기는 어불성설이라며 일축해버린다. 저자 칼 세이건의 주장도 거기에 부합한다. 우리가 미스터리 서클로 알고있는 크롭서클의 진실과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UFO의 존재에 대한 뜨거운 논의들을 조목조목 사실로 밝혀진 증거와 고백들로 실례를 들고 있다. 부정하고 싶은 기억,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경험 등이 반복된 주입과 왜곡된 기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과학은 국가차원에서도 지원된다. 빈곤과 후진성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해줄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나라에 국비지원 유학생들이 있었듯 현재의 여러 개발도상국가에서도 같은 이유로 인재를 양성하는 이유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과학은 유사과학과 사이비종교의 이익을 위해서도 이용당한다. 이성적인 증거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과학이지만 과학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 것도 있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가 악으로 규정되고 신에 대한 도전과 모독으로 재판에 서야 했던 때가 있었듯이 지금도 지금의 과학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칼 세이건 스스로도 어느정도 인정하였듯이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과학을 신봉하지만 과학이 미처 밝혀내지 못한 것들이 분명히 있으리라 본다. 얼마만큼의 과학의 발전이 더 이루어져야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 끝이 날까?

생각보다 쉽게 씌여져 접근과 이해가 쉬웠던 과학과 유사과학의 이야기 <악령이출몰하는세상>. 주변에 꼭 추천하고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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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행성 1~2 - 전2권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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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를 두고 프랑스가 낳고 한국이 키운 작가라고 말하고들 한다.

신간이 나오면 한국어판이 동시 출간되거나 가장 먼저 번역판이 나올 정도로 그의 팬도 판매부수도 엄청나다는 뜻일테다. 고양이 시리즈의 완결편인 <행성>을 읽으면서 왜들 그렇게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몇해전 고양이를 읽은 상태에서 문명을 읽지 못하고 곧바로 행성을 읽었는데 문명을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무르가 왜 그렇게 인간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는지, "쥐"라는 동물이 주는 특유의 혐오감이 아니라면 티무르에게 약간의 동정심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인류의 전쟁에서도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과 학살이 얼마나 많이 있어왔나 말이다. 특히나 우리에게는 731부대의 마루타라는 아픈 역사가 있지 않은가.

<행성>은 "책임과 면피", "용기와 비겁", "행동하는 자와 목소리만 높이는 자", 인간세상의 축소판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였다. 소통과 화합이라는 메세지를 준 바스테트.

그랜트 장군을 의장으로 뽑은 인간들은 그 교훈을 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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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받고 있다는 착각 - 온라인 검열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질리안 요크 지음, 방진이 옮김 / 책세상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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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받고 있다는 착각

질리언 요크 (지음) | 방진이 (옮김) | 책세상 (펴냄)

온라인 검열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제는 인터넷이 없는 세상은 잠시도 상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생활 속 깊숙히 광범위한 영역에 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제한되기 전, 우리나라로 입국하는 중국인들의 여행 이유 중 하나는 인터넷의 자유로운 활동과 와이파이만 제공되면 인터넷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부담없는 접근의 용이성이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공산국가라는 정치적 색깔까지 더해진 그들에게는 국가가 허용하지 않는 사이트는 연결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군부독재 정권이었던 우리에게도 검열과 감시가 일상이던 시절이 있었다. 공중파의 뉴스와 신문은 물론이고 예술 문화 분야에 이르기까지 정권의 비위를 거스리거나 그럴 기미라도 보일라치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감시와 도청도 안보라는 이유로 합법적이던 시대였다. 이제 그 검열과 감시의 대상은 더 대중화되었고 감시자 또한 권력을 가진 정부와 최고 권력자, 집단, 거대 기업 등으로 폭넓어졌다.

핸드폰으로도 인터넷이 쉽게 가능해지면서 각종 포털 사이트와 소셜미디어의 접근도 수시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정보의 홍수 속에 가짜 뉴스와 악플로 큰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사용자의 실명화와 소셜 미디어 자체의 검열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그러나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행해지는 검열이 반대로 누군가를 고립시키고 인터넷 활동을 차단시키기 위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아니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는 없다. 주로 국가간의 이해관계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이 그러하다. 인터넷에 올린 동영상 하나가 집단 행동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기도 하기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권력집단에서는 이런 활동과 활동가들을 싹부터 도려내고 싶은 것이다.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미투도 인터넷이 그 시작이 아니었는가 말이다.

관리라는 이름으로 감시하며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진실의 은폐는 보호라는 허울좋은 명목으로 삭제, 검열되는 셀 수 없이 많은 예들이 <보호받고 있다는 착각>에 수록되어 있다. '언론의 자유'. 새로운 정부가 집권을 하면 언론부터 장악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집권당이 바뀌면 포털사이트의 뉴스도 분위기가 달라진다. 정말 언론의 자유는 가능한가?

급진주의자들과 알카에다도 이용하는 소셜미디어의 관리, 검열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도덕성은 믿을만 한가?

검열하는 자들의 표현은 누가 검열하는가? 서로가 서로를 감시, 견제하는 구도에서 힘의 무게 중심은 권력을 가진 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인종, 성별, 연령, 종교와 관련된 혐오와 포르노의 노출도 표현의 자유로 인정해야 할까? 이러한 것들 때문에라도 최소한의 검열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무엇보다 보호받고 있다는 의심없는 무조건적 믿음보다는 의식이 깨어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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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2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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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2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펴냄)

엄청난 번식력에 지능까지 갖춘 티무르가 우두머리가 되어 쥐떼가 지구 곳곳을 점령한다는 설정은 단지 소설 속 허구만은 아닐 것이다. 전쟁보다 더 많은 죽음을 만들었던 쥐를 통한 질병인 페스트는 실제 역사에도 존재했으니 말이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일상이 제한되고 아무리 조심해도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은 인간의 이기심이 과학의 발전과 편의를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자연의 파괴에서 비룟되었다. 자업자득, 자승자박이 되어 더 큰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세계적인 위기에 각국의 지도자와 국민들이 보여준 행동들은 달랐다. 사람의 진가는 위기에서 드러나고 빛난다고 했던가.

<행성1>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에 감탄하며 그의 첫 소설인 <개미>를 줄곧 떠올리게 했었다. 하지만 <행성2>는 바스테트를 통해 던지는 메세지가 깊은 울림을 주며 더 깊은 몰입감을 주었다. 위기와 혼란 그리고 이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여러 모습과 반응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02명의 대표단을 두어 겉으로는 민주적인 형태를 띈 의결집단이 있었지만 개인의 권력욕은 위기를 기회삼고 투표수를 유도하는 등의 편법이 있었다. 위기와 혼란의 상황에서도 차별과 배척이 존재했으며 성공은 내 덕이고 실패는 네 탓이라는 비겁함도 있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필요에 의해서만 이용하고 버려지는 관계, 위험한 작전은 도맡아 하면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행동하지 않으면서 목소리만 드높이고 비난을 멈출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 하면서도 모든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려 드는 사람 역시도 현실에 존재한다.

외계인의 침공에 무참한 패배만을 경험하던 지구인들이 감기 바이러스에 뜻하지 않게 너무 쉽게 승리를 했던 영화가 있었다. 핵폭탄을 쓰려고 했었을 만큼 쥐떼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이던 인간들과 바스테트 일행에게 승리를 안겨준 것도 역시 바이러스 였다. 이들의 승리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스테트의 아이디어와 인간들의 연구와 과학기술이 콜라보된 협동과 화합의 결과물이란 것이 다른점 이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만의 유머가 배어있었지만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며 모인 이들에게서 정치판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행하던 일이 실패하면 다른 방법을 찾기보다 책임을 전가시킬 희생양을 먼저 찾고 꼬리를 자르는 이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없는 꼬리를 희생시켰을까.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 오늘의 적이 내일이 동지가 될 지 알 수 없는 정치판. 선과 악의 구분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쥐떼들은 정말 절대 악이고 인간들은 피해자이기만 했을까?

골치 아픈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꼬집은 <행성>. 역시 베르나르 베르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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