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한 시도를 했다. 홍무제는 고려의 쿠데타와 이후 진행된 정치적 변화를 바라보며 매우 놀랐고,
한반도의 상황에 점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고려는 명나라의 봉신국이었다. 어떻게 한반도인이 명의 허락 없이 구질서를 일방적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홍무제는 건국 10년이 넘어가는 명나라 역시 ‘구질서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예禮의 위반 문제를 두고 우려와 실망을 표시했다. 결국,
홍무제는 신하의 조언을 받아들여 한반도의 새로운 국가를 사실상 승인하기로 마지못해 동의했다. 이는 동의하지 않으면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홍무제는 명나라의 안정뿐 아니라 북쪽과 서쪽 지역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조선과의 전쟁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대신에 홍무제는 태조에게 다음과 같이 서신을 보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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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국경 북쪽의 여진족과 바다 건너의 일본을 견제할 때 명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진족과 일본을 상대하는 조선의 대외 관계‘는 명나라와의 봉신 관계보다 상당히복잡했다. 15세기 내내 조선은 여진족 그리고 명나라의 영향이 닿지 않는 다른 부족들을 다루는 데 명나라와 경쟁을 벌였다. 영락제水樂帝(재위1402~1424)가 접경지대를 모두 명나라에 편입하여 관리하려고 하자, 조선은 이에 경계심을 표했다. 태종은 조정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우리 황제(옮긴이 영락제)가 본래 큰 것을 좋아하고 공功을 기뻐하니, 만일 우리나라가 조금이라도 사대의 예를 잃는다면, 황제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죄를물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한편으로는 지극 정성至誠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무라고여긴다. 55) 영락제가 서쪽으로 해양 팽창을 하고, 베트남을 명나라의 한지방으로 복속시키려고 하자 조선은 명나라가 조선에도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조선은 북쪽 국경 너머를 향한 개입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 지도자들은 명 제국과 조선 사이의 만주를 일종의 완충 지대로 만드는 일이 조선의 안보를 전반적으로 확보할 수있는 길이라 생각한 듯하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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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나큰 힘의 차이를 고려할 때 청이 왜 조선을 팽창하는 제국에 완전히편입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가능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하나는 만주족과 그 동맹 세력은 훨씬 더 중요한 명나라와의 전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적을 돕는 일을 포기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사실상의 강요였다. 홍타이지는 먹어야 할 더 큰 떡이 있었고, 그래서 조선을 내버려둘 정도로 현명했다. 

그러나 조선의 생존은 정해진 선례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청은 명나라를 대신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이미 존재하는 명 제국 대신에 제국이 되기를 원했다. 어떤 학자들은 청나라가 중국이 되고 싶었을 뿐 아니라 중국 이상의 무엇이 되기를 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명나라가 정한 대부분의 전례에 순응해야 했고, 동시에 이 전례를 그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노력했다. 청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작동했다. 청 제국은 중국인동시에 중국을 넘어선 존재였다. 이들은 만주족 황실을 중심으로 하고 광활한 영토를 통치하는 제국인 동시에, 명나라와 명나라 이전의 모든 것을상속받은 중화中華 제국이었다. 이는 청나라가 1644년 명나라의 수도였던 북경을 점령한 이후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79)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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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은 13세에 성균관 시험에 합격하고 26세에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의 회시(2차 시험)와 전시(황제 앞에서 보는 최종 시험)에 연거푸 1등, 2등으로 합격했으니 흔치 않은 국제적 천재였다.

이색이 개경에서 문하생들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원에서 유학과 벼슬살이를 마치고 귀국한 1356년경부터일 것이다. 당시 신진사대부 계열의신세대 인재들은 원에서 선진 성리학을 흡수하고 막 귀국한 젊은 천재이색에게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결과 ‘이색 학당‘은 당대 최고의 명문 엘리트 사학으로 각광받았으며, 

고려 말 개혁파유신 대부분이 ‘이색 학당‘ 출신이었다 할 정도로 개혁파 선비들을 다수 배출했다. 정도전을 비롯해 정몽주 · 이숭인 · 권근 - 이존오(李存吾) ·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 뒷날에 여말선초의 중앙 정계를 주름잡은 개혁파 정치가들이 대부분 이색 문하였으니, ‘이색 학당‘은 개혁파의 정치학교 역할을 한 셈이다.

이색이 전파한 성리학은 온건개혁파 유신들과 역성혁명과 유신들의공통된 정치 이념이 되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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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클레스 이후 그리스의 역사에서 천재나 거물이 등장하지않은 것은 사실이다. 30인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정을 부활시킨것도 한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라 수많은 지도자와 민중이었다. 기원전 403년에 부활한 민주정은 그 후 80년간 안정된길을 걸었다. 지도자들은 과거와 같은 가문이나 문벌 출신이 아 - P231

니라 민회에서의 변론을 통해 정책결정에 참여한 새로운 유형의정치가들이었다. 특히 그 기간에는 정치군인이라는 존재가 사라졌다. 장군들은 군사에만 전념했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는 과거의 힘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국내적으로는 과거보다 더욱 충실한 민주주의를 이루었고 경제도 부흥했다. 민주적 제도는 앞선어느 시절보다 더욱 충실하게 정비됐다. 민회 회의장은 더욱 넓어져 아테네 시민의 민회 참여가 더욱 더 확대됐다. 민회에 출석하는 시민에게 수당이 지급되어 참가자가 늘어나게 된 것도 민추정이 부활한 직후의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연극관람 수당도 지급됐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이 성행했던 것은 당시 연극관람이 정치참여의 하나로중요시됐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적어도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한 것이었다. 인치에서 법치로 지배원리를 변경한 아테네 민중은 페리클레스 같은 카리스마를 가진 인격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대신 재무관을 비롯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의 등장은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민주정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훗날 민주정을 파탄시키는 원인의하나가 되기도 했지만, 그것만이 파탄의 원인이라고는 말할 수없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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