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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와 교단

이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중재자나 대속자 없이 신과 신자의 직접 대화나 교통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누구도 하느님에게 대적할 수 없고 대신할 수도 없다. 하느님은 자식을 두지 않았으며 자식을 낳지도 않았다. 꾸란 전체의 3분의 1만큼 중요한 한 구절에 이 사상이 집약되었다.
「말하라, 그분은 오직 한 분
시작도 없고 영원하시도다.
그분은 낳지도 낳아지지도 않았으니
그분과 필적할 자 아무도 없느니라.
- 꾸란 112장」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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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협정과 라빈의 암살

걸프 전쟁 이후 야기된 정치적 상황은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도 영향을 끼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사이에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오슬로 평화 협정(1993)으로 이어졌다. 두 나라가 상호불가침과 외교 관계 수립 등을 통해 공존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1993년의 오슬로 평화 협정으로 마침내 이스라엘의 점령지인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 국가 설립이 가능해졌다. 서구와 이슬람 세계가 오랜 기간 분쟁과 갈등을 접고 화해와 공존으로 가는 중요한 선언이었다.
그러나 1995년 평화 협정의 이스라엘 당사자인 이츠하크 라빈 수상이 암살당하고 2001년 우파 리쿠드 당의 아리엘 샤론이 새로운 이스라엘 수상이 되면서 오슬로 평화 협정의 골격이 훼손되었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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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민주화와 서방
- 민주적 선거로 이슬람 정치세력이 집권하는 것을 서구는 반대한다?

1991년 알제리에서는 오랜 군부 독재 체제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알제리 대통령 차들리(Chadli)에 의해 다당제가 인정되었고,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실시된 1991년 총선에서 그동안 정치적 연금 상태에 있던 이슬람 정치 세력인 이슬람구국당(FIS)이 1차 투표에서 의석의 과반수 이상을 확보하였다. 예상 밖의 선거 혁명이었다. 다음 해로 예정된 2차 투표를 통해 이슬람 정당의 집권이 확실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슬람 정치 세력의 집권을 이슬람 원리주의의 부활로 확대 해석한 알제리 군부는 프랑스와 서구의 지지와 묵인으로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집권을 눈앞에 둔 이슬람구국당을 해체시키고 야당 인사들을 구금하였다. 이 사건은 국민들에 의한 새로운 민주주의 선거 방식이라도 서구의 이익에 합치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안겨 주었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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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와 이라크 관계

쿠웨이트는 원래 오스만 시대부터 이라크의 바스라 주에 속한 이라크 영토였다. 그러나 1932년 이라크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 영국은 석유 이권 때문에 쿠웨이트 지역을 계속 통치했으며, 쿠웨이트는 1961년 이라크에 귀속되지 않고 독립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에 이라크는 계속 영유권을 주장해 오던 터였다.
그러나 아랍 국가가 또 다른 아랍 국가를 공격한다는 것은 분명 엄청난 사건이었다. 사담 후세인의 패권 확대를 두려워한 일부 걸프 지역 아랍 국가들과 함께 미국 중심의 서구 세계는 유엔 안보리를 통한 이라크 제재에 착수하였고, 드디어 1991년 1월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사담 후세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42일 만에 끝난 전쟁으로 이라크는 쿠웨이트에서 철수했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absRYnB7cW3n4hz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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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모사데크 사건

반미 노선을 걷고 있는 이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바로 1954년 모사데크 정권 붕괴 사건이다.
1951년 스위스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 민족주의자 모사데크가 이란 수상이 되었다. 당시 막대한 석유를 독점적으로 채굴하고 정유하고 판매하는 영국의 앵글로-이란(Anglo-Iranian) 석유 회사의 횡포에 맞서 모사데크는 석유 산업의 국유화 조치를 단행하였다. 나아가 1952년 영국과의 국교를 단절하면서 서방과의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더라도 독자적인 노선을 주창하며 석유 이익을 이란에게 되돌리려는 정책을 시도하였다. 모사데크는 이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친서구파인 당시 팔레비 이란 왕은 그를 해임하였다. 국민들의 시위와 대립은 유혈 충돌로 치달았고, 결국 미국 정보당국이 개입하여 모사데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미적인 팔레비 왕정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이 공공연하게 중동 사태에 개입하는 뚜렷한 기점이 되었으며, 동시에 중동-이슬람 세계의 미국에 대한 불신이 더욱 가시화되는 정치적 계기가 되었다. - <이희수 교수의 이슬람>, 이희수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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