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뜨거운 감자) 지난 2005년 4월 4일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겠다는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의 발언은 다시 한번 스크린쿼터의 문제를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만들었다. 스크린쿼터가 과연 필요한가라는 문제는 한국의 영화가 주목을 받고 한국 영화시장이 성장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논쟁은 스크린쿼터 자체의 폐지 아니면 온존의 질적인 판단을 둘러싼 논란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어떨 때는 쿼터 비율의 확대와 축소라는 양적인 문제를 둘러싼 논란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2. (질문의 변경) 이 글에서는 시각을 달리하여 국내산업의 보호, 수입제한, 수입대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스크린쿼터가 적절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수입대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스크린쿼터 이외에도 관세부과, 보조금지급 등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수단과 비교할 때 스크린쿼터는 열등한 수단인지 아니면 우월한 수단인지를 검토하자는 것이다. 질문을 바꾸는 이유는 영화가 보호가 필요한 특별한 재화 또는 산업인지에 대해서 그간 관계 전문가의 논의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데 더 보탤 것이 없으며 새로운 질문을 통해 새로운 측면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논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 (관세부과) 영화와 관련하여 세가지 정책수단 중에서 관세부과의 방식은 실제로 사용된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영화는 배급의 단위비용이 거의 미미하기 때문이다. 생산의 비용은 엄청나게 높지만 복사하여 배포하여 상영하는데는 그다지 돈이 들지 않는다. 따라서 관세를 아무리 매기더라도 해외생산자와 배급자는 싸게 가격을 매김으로써 관세의 효과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4. (프랑스와 한국) 수입대체를 위한 정책수단은 국내 영화계에 대한 보조금 지급의 대안과 배급시장에서 강제로 1년에 몇 일을 의무상영하도록 하는 스크린쿼터의 대안 두개가 남게된다. 보조금의 대안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프랑스였다. 이에 비해 쿼터제의 대안을 적극 활용한 것은 한국이다. 국내 영화계의 성장을 지원한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두 개의 수단이 귀결한 것은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 영화의 점유율의 하락과 헐리우드 영화의 득세인데 비해 한국의 경우 한국 영화의 점유율의 상승으로 완전히 상반된 결과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5. (보조금과 예술영화) 보조금 지급의 문제의 경우 누가 보조금을 받을지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바로 부딪힌다. 이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대답은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미술대회에서 심사위원이 미술전문가인 것처럼 말이다. 프랑스의 경우 바로 이렇게 보조금 수혜자를 결정했다. 유명 영화감독과 영화평론가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에서 보조금 수혜자를 결정하게 되었는데 그 결정과정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대중의 영화취향을 저급한 것으로 폄하하고 고급스러운 영화취향을 나홀로 추구하는 악명 높은 영화평론가들과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추구하는 거장으로서 이윤을 추구하는 제작사 사장과 갈등을 빚는 영화감독이 모여서 결정한 수혜자는 그들의 취향에 맞는 감독의 영화이지 대중이 원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전문가들이 높이 평가하는 예술영화와 작가주의 영화들이 정부 세금의 지원과 함께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프랑스에서의 프랑스 영화의 점유율은 계속 떨어져갔다.
6. (스크린쿼터와 경쟁) 스크린쿼터 제도는 누가 일종의 보조금을 받을 것인지를 전적으로 대중에게 맡기는 시스템이다. 마치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하듯이 사람들은 7~8천원의 돈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에 투표를 한다. 스크린쿼터에서는 정부의 세금이 필요없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제작자에게 보조금과 비슷한 이윤이라는 상금을 안겨다 준다. 스크린쿼터 제도는 단지 한국 영화 전체에게 안정적인 시장을 제공할 뿐 특정 감독에게 안정적인 시장을 주진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한국 영화 내의 제작자, 감독, 배우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야기되고 경쟁의 결과는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본 것과 같다. 스크린쿼터 제도의 성공이 경쟁에 대한 경제학의 일반적 원리를 바꾸도록 강요하는 증거이지는 않다. 경제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경쟁이 뛰어난 성과를 가져온다는 것이지 경쟁 속에 반드시 해외경쟁이 포함되어야만 뛰어난 성과가 귀결된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7. (상업주의 편향) 한국 영화에 대해 양적인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지만 특정 장르 영화에 편중되어 있다거나 코미디와 같은 상업적 성격이 농후한 영화만이 다량 생산된다는 식의 비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대중문화, 상업문화 전반의 문제이기 스크린쿼터 제도의 책임은 아니다. 스크린쿼터와 보조금 지급을 두고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스크린쿼터 제도는 어떤 특정 영화에 대한 편향적 지원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보조금 제도는 앞서 언급한 프랑스와 같이 운영될 경우 예술영화, 작가주의 영화를 지원하는 편향을 가진 제도이다. 이에 비해 스크린쿼터 제도에서는 대중이 결정할 뿐 제도 자체의 편향성은 없다.
8. (민주화와 영화) 한국 영화의 성공을 스크린쿼터 제도에 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주장이고 필자 역시 전혀 동의하지 않는 주장이다. 스크린쿼터 제도는 한국 영화가 뜨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제도라는 점에서 한국 영화의 성공을 스크린쿼터에 한정하는 논변은 무너진다. 이전부터 스크린쿼터가 있었는데 성공한 시점은 왜 그 시기였느냐라고 묻는다면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로 인한 소재와 주제의 다양화이다. 유신과 그 뒤를 이은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다수의 사람과 거액의 돈이 상상력을 통해 결합되는 영화라는 장르 또는 산업은 철저하게 억압되었던 것이다. 추가적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영화가 스크린쿼터 제도 없이 성공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필자는 동의한다.
9. (헐리우드의 음모?) 국내 영화의 지원, 수입대체의 목적을 달성하는 여러 정책수단 중에서 스크린쿼터 제도는 다른 정책수단들보다 국내 영화 점유율의 잣대를 기준으로 할 때 우월하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은 비가격적 규제방식보다는 가격규제방식이 우월하다는 선입감 또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 정책수단 중에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스크린쿼터가 그 하나의 예이다. 한국의 스크린쿼터 제도를 두고 제3세계에서 채택할 수 있는 성공모델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고 최근 프랑스에서 한국 영화의 성공을 보고 한국의 스크린쿼터 제도를 도입해보자는 논의가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미국이 그리고 헐리우드가 한국의 스크린쿼터를 약화 또는 폐지시키기 위해 애쓰는 이유가 단순히 한국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크린쿼터 제도의 세계적 확산의 위험성 때문이라면 약간 오버한 상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