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도

 

/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시 / 이문재 –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으며,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등을 수상함.

 

YouTube에서 이문재 시인의 낭송으로 들어보기

https://youtu.be/-IAD6jKxqg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무

/ 다무라 류이치

나무는 잠자코 있기 때문에 좋다.

나무는 걷는다든가 달리지 않기 때문에 좋다.

나무는 사랑이라든가 정의라든가

떠들지 않기 때문에 좋다.

 

정말 그럴까?

정말 그런 것일까?

 

보는 사람이 본다면

나무는 속삭이고 있는 거다.

느긋이 조용한 목소리로

나무는 걷고 있는 거다.

하늘을 향해

나무는 번갯불처럼 달리고 있는 거다.

땅 밑으로

 

나무는 틀림없이 떠들지 않지만

나무는 사랑 그 자체다.

그렇지 않다면 새가 날아와서

가지에 앉을 리 없다.

 

정의 그 자체다.

그렇지 않다면 지하수를 뿌리에서 걷어올려

하늘에 돌려보낼 리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김영하씨의 산문집, '보다'라는 책에서 첫편은 '시간도둑' 스마트폰을 다루고 있다. 같은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빼앗아가는 갖가지에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를 보내고 있는데, 특히나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님께서 우리 손안에 쥐어주신 '스마트폰'이란 존재는 직사각형의 거울로 우리의 눈과 귀를 끌어다가 붙들어놓는다.

함민복 시인이 '서울 지하철에 놀라다'라는 시에서 지하철에 타서 스마트폰을 붙든 사람들을 의사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뉴욕 맨해튼에선 휴대폰이 안터지기때문에

사람들은 종이책과 신문을 읽고 있다고 한다.

브루클린이나 퀸즈의 지상구간으로 나올때,

일제히 책을 덮고 스마트폰을 꺼내는 진풍경이 벌어진다고 하네.

 

어느덧 손안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물건.

근데 만나서 토킹어바웃을 할때 조차도 폰을 들여다고보고 있다면,

잠시 꺼두는 것도 좋지 않을지.

서로 만났을 때는 '폰 스택(Phone Stack)' 게임을 해보면 어떨까?

휴대폰을 테이블 한가운데 쌓아놓고 먼저 폰에 손을 대는 사람이 밥값을 내는거지. ㅎㅎ

 

작년에는 '책읽는지하철'이벤트에도 참여하곤 했었는데,

뜻있는 젊은이들의 지하철내에서의 종이책 읽기 이벤트도 의미있었던 듯 싶다.

 

http://songhwajun.com/1740

전철 안에 의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 귀에 청진기를 끼고 있었다
위장을 눌러보고 갈빗대를 두드려보고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옛 의술을 접고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손가락 두 개로 스마트하게
전파 그물을 기우며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었다
수평의 깊이를 넓히고 있었다
(함민복 시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소년이 온다, 본문 79쪽 중에서)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본문 134쪽 중에서)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 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 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본문 207쪽, 작가의 말 중에서)

 

5.18 광주민주화항쟁

학창시절부터 최류탄 냄새에 눈물 쏟으면서 청춘을 보냈던 이유. . .

꽃잎, 26년, 화려한 휴가 . . .

29만원 가지신 그분(?)에 대한 재산 추징을 위한 소동 . . .

 

우리 시대에 대한 자화상을 깊이  생각케 되는 하루.

 

https://youtu.be/Bo-Ck7Sly2w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보와 같은 삶. 달리보면 초월한 삶, 도사같은 삶을 그린 일본의 시 한편 같이 나누고 싶다.

518을 이리 조용히 지나가는 현실이 안타깝고 바보 노무현이 그리워지기도 하고...

 

비에도 지지 않고

雨にも負けず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1896-1933)의 시.

일본의 유명한 시 중 하나.

 

雨ニモマケズ 風ニモマケズ

雪ニモ夏ノ暑サニモマケヌ

丈夫ナカラダヲモチ 慾ハナク

決シテ瞋(イカ)ラズ イツモシヅカニワラツテイル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절대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미소지으며

 

一日ニ玄米四合ト 味噌ト少シノ野菜ヲタベ

アラユルコトヲ ジブンヲカンジョウニ入レズニ

ヨクミキキシワカリ ソシテワスレズ

野原ノ松ノ林ノ蔭(カゲ)ノ 小サナ萱(カヤ)ブキ小屋ニイテ

하루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조금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생각지 말고

잘 보고 들어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속 그늘에 조그만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며

 

東ニ病気ノ子供アレバ 行ツテ看病シテヤリ

西ニ疲レタ母アレバ 行ツテソノ稲ノ束ヲ負ヒ

南ニ死ニソウナ人アレバ 行ツテコハガラナクテモイヽトイヒ

北ニケンクワヤソシヨウガアレバ ツマラナイカラヤメロトイヒ

동에 병든 어린이가 있으면 찾아가서 간호해 주고

서에 고달픈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그의 볏단을 대신 져 주고

남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워 말라고 위로하고

북에 싸움과 소송이 있으면 쓸데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ヒデリノトキハナミダヲナガシ

サムサノナツハオロオロアルキ

ミンナニデクノボートヨバレ

ホメラレモセズ クニモサレズ

サウイウモノニ ワタシハナリタイ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운 여름엔 허둥대며 걷고

누구한테나 바보라 불려지고

칭찬도 듣지 않고 골칫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YouTube에서 '미야자와 겐지.비에도 지지않고' 보기

https://youtu.be/kxbV30H-uXg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