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라는 나라는 현대 한국인에게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왕과 사대부로 이루어진 지주 계급이 민중을 억압하던 중세 왕조에 대한 분노와 저주이다. 다른 하나는 일제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깎아내리고 왜곡한 우리 역사상 마지막 왕조에 대한 연민과 변호의 욕구이다.

채만식의 단편 <논 이야기>에 나오는 한 생원은 구한말 고을 원님에게 부당한 방법으로 땅을 빼앗긴다. 그래서 이를 갈고 있던 차에 나라가 망하자 "그깟 놈의 나라 시원히 잘 망했다"라고 일갈한다. 백성을 괴롭히던 왕조에 대한 이런 혐오감에 일제의 식민사관이 덧칠되어 오랫동안 조선 왕조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은 부정 일변도였다. <조선 왕조 오백년>으로 대표되는 대중 역사 소설과 텔레비전 드라마는 조선을 궁중 음모와 당파 싸움으로 얼룩진 낡은 왕조로 조롱하곤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식민사관과 대결하면서 조선에 대한 왜곡과 편견을 걷어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인이 식민지 시절의 그늘과 열등감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되찾게 되자 조선도 다른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장과 번영이 꼭 서구적 근대화의 산물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전통에 힘입은 것도 있다는 자각 위에서 대한민국의 전사(前史)인 조선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 <조선 평전>(신병주 지음,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신병주의 <조선 평전>(글항아리 펴냄)은 출판과 방송을 통해 그러한 '조선 다시 보기'에 적극 참여해 온 역사학자가 그동안의 성과를 간략한 글들로 정리한 책이다. 간략한 글들이라고 해도 60꼭지에 이르니까 꽤 두툼한 편이다. 그동안 <역사스페셜>,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등 조선을 재조명하는 책과 방송을 접해 온 독자에게는 꽤 익숙한 내용이다. 그러나 아직도 조선에 대한 <조선 왕조 오백년> 수준의 인식에 머물러 있는 독자에게는 새로운 조선의 면모들이 곳곳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 책이 그리고 있는 조선의 '진면목'을 보자. 이 나라는 왕이 다스리는 전제 국가이기는 하지만 <경국대전>이라는 성문 헌법을 가지고 법과 제도에 의해 비교적 합리적으로 운영된 법치 국가였다. <춘향전>이 극적인 재미를 위해 설정한 것처럼 사또가 제멋대로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니었고, 과거에 갓 합격한 애송이가 연고 있는 고을에 암행어사로 출두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니었다.

또 이 나라는 세종이 토지 제도 하나를 시행하기 위해서도 17만 명이나 되는 백성을 대상으로 국민 투표를 실시한 뒤 시행 여부를 꼼꼼히 따져보았던 민본주의 국가였고, 창제의 원리와 의의가 명료하게 드러나 있는 세계 유일의 문자를 만들어내 문화의 힘을 뽐낸 나라였으며, 가장 비천한 존재인 노비조차도 출산 휴가를 지내는 것이 보장된 '복지 국가'였다. 또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의궤> 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국가 운영의 모든 국면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범으로 물려주고자 했던 역사와 기록의 나라이기도 했다.

식민사학자들이 조선을 깎아내리기 위해 공들여 연구한 것 중 하나가 당파 싸움이었다.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고 가려고 노력하기는커녕 당파를 지어 음모와 살육을 일삼았던 것이 조선의 지배 계급인 양반이었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학자들은 이런 논리를 비판하는 데 적잖은 공을 들였고, 이 책에도 그 성과는 어김없이 소개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당파 싸움은 조선 중기 이후 조선의 국가 운영을 책임진 사림 세력의 정치 양식이었다. 그것은 저급한 정쟁이 아니라 학문적 경향과 정치적 지향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붕당을 이루어 다른 붕당과 견제와 균형의 틀 위에서 경쟁하던, 나름대로 합리적인 정치 시스템이었다.

조선이 이처럼 합리적인 나라였고 지금도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배울 것이 많은 나라였다면,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으로서는 새로운 고민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은 본래 한국사가 근대로 나아가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나라였다. 엄격한 신분제 하에서 각종 세금과 부역으로 농민을 착취하던 전제 국가 조선이 대한민국과 비교해서도 뒤지지 않는 제도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면,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조선이 평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조선의 이런저런 특징을 나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조선이 왜 그런 특징을 갖게 됐으며 우리에게 그러한 조선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선 평전>이 그러한 '평전'의 필요성에 온전히 부응하는 것 같지는 않다. 조선의 의미에 대해서 궁금했던 것을 시원스럽게 풀어주기를 기대했으나,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은 마치 신발을 신고 가려운 곳을 긁은(격화소양·隔靴搔癢) 것처럼 시원치 않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 화폐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쓰는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이 죄다 조선 시대 인물임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아, 그렇구나!" 하고 눈이 확 뜨이는 대목이다. 우리에게 조선이 어떤 의미가 있기에 모든 돈이 조선 시대 인물, 그것도 조선 전기의 인물로 도배가 되어 있을까?

미국, 일본, 중국 등의 화폐를 보면 모두 근현대사의 인물을 담고 있는데, 우리만 이렇게 비교적 먼 옛날의 인물들, 그것도 진짜 얼굴이 남아 있지 않은 인물들을 그려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뭔가 조선과 우리의 관계에 얽힌 비밀의 실마리 하나가 풀릴 것으로 기대되는 순간, 저자는 "그만큼 우리의 의식 속에 조선의 역사가 가깝게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라는 허망한 결론으로 급하게 글을 마무리하고 만다.

이 책 곳곳에는 이처럼 궁금증을 자아내지만 끝내 궁금증을 해소하지 않고 마침표를 찍는 글들이 실려 있다. 인조반정이 현대의 군사 정변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얘기에 솔깃해서 읽다 보면, 각각의 시대에 두 정변이 가졌던 역사적 의미를 심층 분석해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가 참여해 성공했다는 외형적 유사성만 알려주고 끝나 버린다. 조선 시대에 운하 공사를 시도했다거나 수도를 옮기려 했다는 얘기는 현대 정치의 민감한 문제와 결부되어 관심을 끌지만, '평전'에 값하는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못한 채 "국민의 합의를 제대로 이끌어내야 한다"라는 원론적인 촌평으로 마무리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본래 신문에 연재되면서 시사적인 문제와 연결해 조선사의 이런 저런 측면을 가볍게 다룬 것이었다는 점에서 앞에 지적한 한계를 이해할 수는 있다. 책의 제목이 '조선 평전'이 아니라 '조선사 산책' 같은 것이었다면 좀 더 편하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출판사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점증하는 조선 시대에 대한 관심으로 볼 때 진정으로 '평전'이라는 말에 값하는 조선 역사책이 나올 필요는 크다.

이 책에서 언뜻 비치는 저자의 생각들, 예컨대 남명 조식을 계승한 북인과 그들의 지지를 받은 광해군에 대한 평가라든가 인조반정의 의의라든가 하는 것을 보면, 저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조선사를 평가하고 그 의미를 들려줄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저자가 그 역량을 온전히 발휘해 이번에 못 다한 '조선 평전'을 완성함으로써 독자들이 느끼는 '격화소양(隔靴搔癢)'의 가려움을 해소해 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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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우주>(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펴냄)는 움베르토 에코와 장클로드 카리에르가 책을 주제로 나눈 대담집이다.

이탈리아 사람인 움베르토 에코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장미의 이름>을 비롯한 몇 권의 소설, 그리고 자신의 전공인 기호학과 문화 비평 등 거의 전방위적인 글쓰기로 호가 난 지식인이지만, 프랑스 사람인 장클로드 카리에르는 비교적 생소한 인물이다. 소개에 따르면 그는 1931년생으로 소설가이자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서 <양철북>,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 80여 편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 <책의 우주>(움베르트 에코·장 클로드 카리에르 지음,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그러나 그가 이 대담에 불려 나온 것이 시나리오 작가로서라기보다는 에코에 못잖은 애서가이자 책벌레로서임은 물론이다. 경탄할 만한 박학과 재치, 그리고 생각의 깊이를 보여주는 두 사람의 대담을 프랑스의 에세이스트이자 저널리스트인 장필리프 드 토낙이 사회자로서 중간에서 이끌었다.

유럽의 두 지성은 우선 인터넷과 전자책, 영상 문화의 발흥으로 위기에 몰린 것처럼 보이는 책과 글의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말문을 연다. 막연한 짐작과 달리 인터넷이 글과 책의 적이기는커녕 오히려 무엇보다 믿음직한 아군이라는 주장은 책 동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복음'처럼 들릴 법하다.

"인터넷 덕에 우리는 알파벳의 시대로 되돌아왔습니다. (…) 컴퓨터로 인해 우리는 다시 구텐베르크의 우주로 들어왔고, 이제 모든 사람은 글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요. (…) 책은 자신의 효율성을 이미 증명했고, 같은 용도의 물건으로서 책보다 나은 것을 만들어 내기는 힘듭니다. 어쩌면 책을 이루는 각각의 구성 요소들이 변할 수는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 책장이 더 이상 종이로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책은 지금의 그것으로 남아 있게 될 겁니다." (에코)

"오늘날만큼 쓰기와 읽기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한 때는 없었어요. 읽고 쓸 줄을 모른다면 컴퓨터를 사용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요즘 요구되는 글쓰기의 방식은 새로운 기호들과 암호들이 편입되었다는 점에서 옛날보다도 한층 복잡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우리의 알파벳이 확장된 셈이죠." (카리에르)

대담의 후반부에서 사회자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책으로 볼 것이냐 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거니와, 두 대담자가 생각하는 책이 종이책이라는 고전적 형태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전자책을 포함해, 종이책의 기능과 형태를 대행하는 광범위한 범주가 이들이 말하는 책의 우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코가 책을 바퀴라는 불세출의 발명품에 견주는 것은 인상적이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정보 전달의 수단으로서 이 책만큼 효율적인 발명품은 아직 없었습니다. 수백 기가바이트 용량의 컴퓨터라 할지라도 반드시 전원에 연결되어야만 하지요. 하지만 책에는 이런 문제점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책은 바퀴와도 같은 것입니다. 일단 한번 발명되고 나면, 더 이상의 발전이 불필요한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책의 가치와 효용, 그리고 지속 가능성에 대한 두 책벌레의 '신앙 고백'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소문난 장서가인 두 사람의 책 수집에 얽힌 사연들이다. 각각 희귀본 1200여 권을 포함한 장서 5만 권(에코)과 고서 2000권을 포함한 장서 3~4만 권(카리에르)을 자랑하는 두 사람이 들려주는 자신들과 타인들의 수집 이야기는 어린이용 모험 소설처럼 흥미진진하다.

서구에서 근대적 의미의 책의 '원조' 격인 구텐베르크 성서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48권이 남아 있다는데, 에코는 바로 그 구텐베르크 성서 한 권을 소장하고픈 소망을 털어놓는다. 그는 "오래된 장롱에 구텐베르크 성서 한 권을 가지고 있는 어떤 노부인을 어딘가에서 찾아내는" 꿈을 소개한다.

95살인 그 노부인은 구텐베르크 성서의 가치에 대해 무지해야 하는데, 그 노부인에게 남은 생을 쾌적하게 보낼 만한 20만 유로를 건네고 구텐베르크 성서를 마침내 손에 넣어 집에 가져오는 것까지는 좋다 쳐도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의 앞에는 이제 두 개의 길이 선택을 기다리게 된다.

그 귀한 물건을 확보했으니 그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만 즐기는 것이 하나, 자신의 몫이 된 놀라운 행운을 타인들을 통해 새삼 확인받고자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이 다른 하나다. 전자라면, 그것은 혼자서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 될 것이고, 후자라면 세상의 모든 도둑들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되리라는 것. 결국 절망한 수집가는 자신이 사는 도시의 시청에 그것을 기부하고, 원할 때면 언제나 가서 볼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다. 그러나 그것을 만지거나 쓰다듬을 수는 없게 될 테니, 그것은 박물관에 가서 구텐베르크 성서를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는 것. 해답이 쉽지 않은 딜레마다.

"진정한 수집가는 소유보다는, 찾아 헤매는 행위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법"이라는 에코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도 이해할 만하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뜻이겠는데, 아울러서 "만일 누군가가 진정으로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많은 돈을 쓰지 않고도 도서 수집가가 될 수 있다"(에코)는 말 역시 가난한 수집가에게 큰 격려가 될 법하다.

구텐베르크 성서와 함께 에코가 꿈꾸는 또 다른 수집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언급되었으나 지금은 유실된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들이다. 에코와 카리에르는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를 고대 그리스의 삼대 비극 작가로 꼽는 견해에 짙은 회의의 시선을 던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언급된 다른 작가들의 비극 20여 편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 그 회의의 근거다.

"어쩌면 우리가 간직해 온 작품들은 단순히 아테네 관객들이 더 선호했던 작품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적어도 우리의 눈에는―가장 흥미로운 것은 아닌 작품들일 수도 있습니다." (카리에르)

이런 맥락에서 두 사람이 주목하는 것이 '여과' 과정이다.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은 선택과 여과의 긴 과정"이라고, 대담을 마무리하면서 토낙은 정리하는데, 그런 선택과 여과가 반드시 최상의 판단에 따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대담자들의 생각이다.

카리에르가, 싸구려라고 해서 천대받고 있는 17세기 프랑스의 우스꽝스러운 민중 문학을 주요 수집품으로 삼는다든가, 두 사람 모두 인간의 "오류와 허위의식과 어리석음"에 매혹되어 그와 관련된 책들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문화라는 이름의 여과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여과가 최소한의 양식과 합의에 기반을 둔 선택 과정이라면, '파괴'는 강제적 조처이거나 우연적인 사고를 가리키는 말이다. 서구인들이 중남미에서 자행한 원주민 언어와 텍스트의 말살, 15세기 말 그라나다를 회복한 스페인이 저지른 이슬람 서적 말소, 그리고 진시황의 분서갱유 같은 사례들은 "한번 창조되었던 것을 파괴하려는 열정(이) 우리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충동의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카리에르의 주장에 대한 방증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이런 의도적 파괴와 달리 도서관과 서재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날려 버리는 화재는 장서 수집가들을 위협하는 또 다른 적이라 할 수 있다. 에코는 자신의 집에 불이 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늘 지니고 있으며, <장미의 이름>에서 도서관이 불에 타는 장면을 그린 것도 그런 불안감과 무관하지 않다고 밝힌다. 역시 <장미의 이름>에서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살인'의 아이디어를 얻은 곳이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예일 대학의 스털링 메모리얼 라이브러리 도서관이라는 소개도 흥미롭다.

3, 4만 권에서 5만 권에 이르는 장서를 보유한 책벌레로서 이들에게 불가피하게 따라 다니는 질문이 있다. '여기 있는 책들을 다 읽어 보았나?' 하는 질문이다. 그에 대해 에코는 '아시겠지만 난 읽지 않는답니다. 글을 써야 하거든요'라는 농담 같은 대답으로 응수하기도 한다는데, 그보다는 "서재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들"이라는 정의가 한결 효과적인 대답이 될 듯하다. 다 읽은 책들을 증거처럼 과시해 놓는 곳이 서재가 아니라, 앞으로 읽고 싶은 책들을 대기시켜 놓은 곳이 서재라는 뜻이 되겠다.

<전쟁과 평화>를 마흔 살이 되어서야 읽었으며,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은 세 번이나 읽기에 도전했지만 결국 포기했다는 에코의 고백도 흥미롭다. 그럼에도 에코와 카리에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얼마든지 발언할 수 있다'고 입을 모으는데, 얼마 전 방한한 프랑스 비평가 피에르 바야르의 책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핵심이 바로 그런 것이다. 두 사람은 실제로 바야르와 이 책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책의 중간쯤에서 에코는 위대한 걸작들에 대해 어리석은 편집자들이 보인 반응을 몇 소개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 "왜 침대에 누워서도 잠이 들지 못하고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고 있는 누군가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30페이지를 할애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노라는 리뷰,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대해 "이런 작품이 젊은 독자층의 관심을 끌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반응,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대해 "동물들에 대해 쓴 이야기를 미국에서 파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한 답변 등이 그것으로 이 이야기들은 모두 <퇴짜 맞은 걸작들(Rotten Reviews)>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편집자는 각주를 통해 그 책이 열린책들에서 곧 번역 출간될 것이라고 알리고 있는데, 바로 그 책을 한껏 게으르게 번역하고 있는 나로서는 반갑기도 하고 약간 켕기기도 하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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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의 영화 <올드 보이>에서 15년 동안 아무런 이유 없이 군만두만 먹어온 주인공 오대수는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누구냐 넌?"

이때 오대수는 무엇이 궁금했던 것일까? 컴퓨터의 할아버지쯤 되는 앨런 튜링이 비슷하게 물은 적이 있다. 보이지 않는 차폐막 뒤에 있는 뭔가가 우리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의 존재라면 그 뭔가를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따금씩 생뚱맞은 대답을 하기는 하지만 별다른 문제없이 내 말을 이해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라면 그 뭔가를 '인간'이라고 불러야 하지는 않을까? 오대수의 물음이나 튜링의 물음은 모두 '정체(Identity)'에 관해 묻는다. 그 '정체'는 문제의 대상을 다른 것들과 구별시켜 주는 본질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다.


▲ <뇌의 초상>(아담 지먼 지음, 김미선 옮김, 지호 펴냄). ⓒ지호
물론 이러한 질문의 원조는 조금 다른 형태로 던져지긴 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너 자신을 알라!"고 한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제일 궁금하다. 그러다 어느 나이 때가 되면 그런 궁금증을 억누르거나 질문 자체를 잊어버리고 산다. 답이 없는 질문인 것 같기도 하고,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 문제가 되지도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잊고 살다가 삶의 위기가 찾아오면 새삼 묻게 된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 칸트가 자신의 그 위대하고 복잡한 철학을 한 마디로 묶었을 때 던진 질문도 그것이었다.

인문학이란 학문은 바로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나는 누구이고 또 너는 누구이고, 우리는 무엇이며 인간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가 아니며, 적어도 한 문장으로 하긴 어려울 거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문장도 아닌 한 단어, 오직 한 자인 '뇌'라고 쿨하게 대답한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물리적인 몸이자 살아있는 생명체이자 의식 있는 마음이기도 한,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인 존재"가 우리 본질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니 그가 앞서 언급한 인간 본질의 세 가지 측면이란 것은 이미 히포크라테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통찰이었던 것 같다. 고대 그리스어 프렌(Phren)은 '뇌'라는 뜻인데 동시에 '마음'을 뜻하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뇌와 마음을 동시에 가리키는 하나의 단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해볼수록 흥미롭다.

뇌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뇌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가를 밝혀낼수록 왕년에 뇌와 같은 지위를 누렸던 마음은 더욱더 미스터리한 어떤 것으로 치부되며 설자리를 잃어갔다. 그러다 급기야 인간은 뇌라는 물질이 지배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에 의해서 방을 빼야할 상황에까지 몰리기도 했다. 어떠한 첨단 과학 기술과 철학적 논리로도 마음의 증거를 찾을 수 없었고, 증거가 없음이란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마음의 증거를 찾을 수 없으므로 마음은 없는 것이라는 믿음은, 마음이 몸을 떠나 존재하는 독립적인 어떤 것이란 믿음만큼이나 의심스러워 보이지는 않는가.

문화와 역사적 시기를 막론하고 인간은 마음과 몸이 분리될 수 있고, 죽은 뒤에도 마음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상상해 왔다. 이러한 상상은 과학이 더할 수 없이 발전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흥미롭게도 과학자들조차 이러한 믿음을 거부하기보다 수용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 그렇다면 왜일까? 임종을 맞이한 아내가 남편에게 '우리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요'라고 애틋하게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여보, 다음 세상이란 없어. 인간은 한번 죽어 묻히면 그냥 끝이야'라고. 아무리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몸은 죽어도 마음은 살아남을 거라고 굳게 믿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이 정말로 불멸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는 '원자들과 공허'뿐이라고 전망하는 것보다는 삶을 혹은 생을 덜 허무하게 할 테니까.

물론 저자는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자신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불멸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는 믿음을 멋들어진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곧 뇌'라는 황량한 대답을 하진 않는다. 불멸하는 영혼이 아니라도 어쩌면 또 다른 위대한 신비, 생명 그 자체의 신비의 숙명이 우리에게 마음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려줄지도 모를 테니 말이다. 결국을 꼭꼭 숨은 아이들을 모두 찾아내고 말 숨바꼭질 게임처럼.

"마음 없는 물질과 물질 없는 마음의 대립. 하지만 주장하건대, 이 대립은 거짓이다. 마음과 물질은 반대되는 관계가 아니라 긴밀하고 순환적인 관계다. 마음은 물질로부터 발현하고 물질은 마음에 의해 움직인다. 주체와 객체의 극단적 대비 역시 같은 이유로 우리를 오도한다. 우리는 결코 완전한 객관성을 획득할 수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이고, 우리는 누구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책의 결론에 따르면 물론 우리는 뇌 이상이다. 결론이 개인적으로 매우 흡족하다. 왜냐하면 마음은 있으니까. 있어야만 하니까. 그래야 '진심 드립'도 가능하지 않을까? 물리적 세계에서 '마음의 자리를 찾아온' 우리의 방법이 잘못이었던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어쩌면 우리가 마음과 물질의 관계에 관해 불가능한 질문만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전적으로 뇌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 괜찮은 답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재료들에 눈감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 <뇌의 초상>은 과학책일까, 인문학 책일까? 책표지에 걸린 '뇌의 초상'을 노려보며 이렇게 묻고 싶다.

"누구냐,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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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에 찬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책은 두 가지이다. 너무도 뻔한 내용을 가지고 장광설을 늘어놓은 그래서 읽고 나서 후회할 허접한 책, 그리고 책 여기저기에 밑줄을 쳐가면서 아껴가며 읽게 되는 좋은 책이다. <타격의 과학>(김은식 옮김, 이상미디어 펴냄)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수천 번 되풀이해 말하지만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서 야구공을 때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

저자의 이런 자신에 찬 문장들은 책 곳곳에서 발견된다.

"나는 보스턴에서 뛰었던 20년 내내 50타점 이상을 기록했다. 나의 통산 타율은 0.344이다. 나는 베이브 루스보다도 많은 결승 홈런을 때렸고, 장타율에서도 베이브 루스 말고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나는 루스보다 볼넷을 많이 얻었으면서도 삼진은 적게 당했는데, 그런 측면에서 루스가 나보다 나았던 건 7년에 한 번 정도씩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생각을 달리 했다면 아마 훨씬 더 큰돈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 <타격의 과학>(테드 윌리엄스 지음, 김은식 옮김, 이상미디어 펴냄). ⓒ이상미디어
저자 자신이 직접 쓰기에는 온몸이 오그라들 정도로 과한 자화자찬처럼 들린다. 하지만 저자가 메이저리그에서 19시즌을 뛰면서, 521홈런, 2654안타를 치고 통산 타율 0.344(역대 6위), 출루율 0.482(역대 1위), 장타율 0.634(역대 2위)를 기록한 야구 선수라면? 그리고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선수인 스탠 뮤지얼이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타자"라고 칭송했던 타자라면? 그렇다. 저자의 이름은 테드 윌리엄스이다.

이 책은 "타격의 과학"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과학"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다. "만일 스포츠가 과학적이라면 야구의 타격이야말로 과학"이라는 선언적인 말 외에는 특별한 물리 법칙도 생리학적 설명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모든 과학이 그렇듯 야구의 타격에도 기초가 있고, 모든 훌륭한 타자와 타격코치들이 말해줄 수 있는 어떤 원칙들이 있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이 몸으로 체득해가며 익힌 비결을 담긴 책이다. "훌륭한 타자" 윌리엄스가 <타격의 과학>에서 제시한 타격의 법칙은 세 가지이다.

첫째, 좋은 공을 골라서 쳐라.
둘째, 적절한 생각을 하라.
셋째, 배트 스피드를 빠르게 하라.

그런데 메이저 리그 역사상 마지막 4할 타자라는 사람이 전해주는 비결 치고는 너무 단순한 건 아닐까? 하지만 그는 이 세 가지를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각각의 비결에 대해 설명을 덧붙인다. (이 서평에서 윌리엄스가 말하는 비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보면 된다.)

이 책을 집어 든 혹은 앞으로 집어 들게 될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뉠 것이다. 야구를 '하는' 사람, 그리고 야구를 '보는' 사람이다. 내 생각에는 당신이 어느 쪽에 속한 사람이건 책을 사는 데 든 돈, 그리고 책을 읽는 데 든 시간 둘 중 어느 하나도 아깝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다.

당신이 야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윌리엄스의 충고를 머리에 꼭 담고 몸에 배게 한다면 당신의 타율은 분명 올라갈 것이다. 윌리엄스는 분명히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은? 직접 야구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윌리엄스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내 생각에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장담할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당신이 야구를 '보는' 사람이라면 윌리엄스가 들려주는 말들을 잘 새겨두면 분명 달라질 것이다. 야구를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고, 야구를 보는 재미가 훨씬 더 많아 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말한다.

"이것도 내가 수천 번은 했던 말이다. 타격의 절반은 머리로 하는 것이다."

이 말은 타자가 아니라 팬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야구 한 경기를 보는 데는 적어도 두 세 시간이 걸린다. 다른 스포츠에 비해 무척 긴 시간이다. 그저 '우리 팀'이 이기느냐 마느냐, 혹은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홈런을 치느냐 마느냐에만 온통 정신을 쏟으며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아닐까?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야구는 아는 만큼 보이고 그럴수록 더 많은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도 머리를 써야 한다. 저 타자는 스리 볼 노 스트라이크에서 얼토당토않은 공에 왜 방망이가 나가지? 저 선수가 나올 때면 왜 투수가 초구를 늘 한 가운데다 던지는 걸까? 그러다 큰 거라도 한 방 맞으면 어쩌려고?

이 책을 읽고 나면, 이제 앞으로 야구 경기를 볼 때, 타자와 투수의 머리싸움. 타자의 타격 습관 등에 대해 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야구가 훨씬 더 재미있어 질 것이다.

'보는' 사람의 처지에만 치우친 것 같다. 이 책을 읽을 야구를 '하는' 사람을 위해 책의 한 구절을 소개하겠다.

"그리고 연습, 연습, 연습. 나는 물집이 잡히고 터질 때까지 배트를 휘둘렀고, 손바닥에 아주 단단하고 거친 굳은살이 박일 때까지 스스로를 몰아쳐대곤 했다. 여러분들은 요즘 그렇게 무시무시한 굳은살을 본 적이 아마 없을 것이다."

꿈이 절실하다면, 저자의 말을 믿기 바란다. 그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야구만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

"보스턴 홈구장의 타석이 앞쪽보다 뒤쪽이 조금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타격을 할 때는 항상 뒷발이 좀 더 단단하게 지면에 고정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캔자스시티에서는 타석이 반대로 뒤쪽으로 조금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위쪽을 올려다보면서 치는 느낌이었다 하루는 내가 홈런을 두 개나 쳤는데 캔자스시티의 감독이 나중에 그 사정을 알고 구장 관리인을 해고해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용하는 야구 방망이가 습기를 머금어 무거워질까봐 걱정하던 사람이기도 하니까.

한국 프로 야구도 이제는 30년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30년 동안 한 팀에 푹 빠져 지내 온, 그래서 딸아이가 태어난 바로 그 날 오후에 딸을 구단 어린이 회원에 가입시키는 만행을 저지른 내 책꽂이에는 <타격의 과학>만큼이나 확신에 찬 문장으로 시작되는 야구 책이 한 권 더 꽂혀 있다.

"두려움, 타격을 야구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타격의 가장 기본적인 요체는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윌리엄스만큼이나 야구에 빠져 산 레너드 코페트라는 사람이 쓴 <야구란 무엇인가>(이종남 옮김, 황금가지 펴냄)라는 책이다.

나도 단호하게 "수천 번을 되풀이해서 말할 수" 있다. 두 책을 읽고 난다면 당신이 "하는" 야구가, 그리고 당신이 "보는" 야구가 분명 달라질 것이다. 두 권 다 여느 책들과는 급이 다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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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9월 19일 원산항을 통해서 입국한 김일성이 처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모인 평양 시민은 처음으로 보천보 사건 등으로 유명한 스타 독립운동가 '김일성 장군'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김일성이 한반도 북쪽의 권력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잠깐,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만약 그 때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이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를 평양이 아닌 서울에서 열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당시 이승만은 아직 귀국 전이었다. 그는 이틀 뒤인 10월 16일에야 미군이 제공한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 정부의 주요 인사는 11월 23일에야 귀국했다.

외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로서 대중적인 명망을 가진 세 사람 중 오직 김일성만 국내에 있었다. 만약 김일성이 서울에서 대중의 열광적 환영을 받았다면, 그리고 남쪽에 있었던 여운형, 박헌영, 안재홍 등과 긴밀한 교류를 가지면서 해방된 나라의 미래를 준비했었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한반도의 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을까?


▲ <해방일기 :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김기협 지음, 너머북스 펴냄). ⓒ너머북스
이런 상상을 해보는 것은 지난 2010년 8월 1일부터 10개월째 쉬지 않고 연재가 진행 중인 '해방 일기'를 읽을 때마다 이렇게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방 일기의 처음 석 달 분량을 묶은 <해방 일기 :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너무북스 펴냄)를 읽으면서도 이런 생각은 끊이지 않는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데, 이런 상상은 불필요한, 쓸 데 없는 일일까? 매일 <프레시안> 지면에 해방 3년사를 일기처럼 기록 중인 역사학자 김기협과 <대한민국사>(전4권, 한겨레출판 펴냄)를 통해서 국방부가 인증한 '불온한',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역사학자로 자리매김한 한홍구는 강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들은 함께 입을 모은다.

"한국의 역사학자는 해석에 인색했다." "역사학자는 학계 동료가 아닌 일반 대중을 상대로 글쓰기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 역사학은 '한 일'에만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역사학이 진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안 한 일'이다." "그러니 당연히 역사에 '가정'은 있다." "역사학의 목적은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삶에 기여하는 것이다." "고로 역사학의 목적은 정치다."

알 듯 모를 듯한 용어로 치장된 고리타분한 역사책에 질린 독자라면 이들의 선언에 깜짝 놀랄 것이다. 누구보다도 정통적인 역사 교육을 받았고, 심지어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쳤거나, 가르치는 이들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 우리가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해방 일기> 첫 번째 책이 나온 것을 계기로 좀처럼 만나기 힘든 김기협, 한홍구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평소에 아껴뒀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다음은 지난 3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통인동 길담서원에서 약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대화의 주요 내용이다. 정리는 강양구 기자가 맡았다.


ⓒ프레시안(손문상)

역사책 10권으로 기록하는 해방 3년

한홍구 :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생님도 그러시겠지만 요새 저는 역사학자들이랑 접촉하는 것보다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날 일이 더 많아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해방 3년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신 것도 <프레시안>의 연재를 보고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벌써 시간이 꽤 지나서 이렇게 첫 번째 책이 나왔군요. 전부 몇 권으로 계획 중인가요?

김기협 : 1945년 8월 1일부터 1948년 8월 31일까지 총 37개월을 정리하는 작업입니다. 책으로는 총 10권을 예정하고 있어요.

한홍구 : 대작이네요. 해방부터 분단 정부 수립까지의 3년을 과거에 나온 어떤 책보다 더 자세히 다루겠어요. 한길사에서 나왔던 <해방 전후사의 인식>도 다 합쳐서 6권인데…. 감회가 새롭습니다. 현대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역사학자 입장에서, 이 해방 3년사를 집중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는 이런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렙니다.

김기협 : 많이 얘기하는 게 속된 말로 '장땡'은 아니잖아요. (웃음) 있었던 사실을 정확히 담는 것을 넘어 작업의 규모에 걸 맞는 저자의 생각이 들어가야 할 텐데. 얼마나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한 선생 같은 분들의 도움과 비평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프레시안 books'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한홍구 : 어이쿠, 너무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1945년 8월부터 10월까지 석 달이 400쪽 분량의 책 한 권으로 정리되어 나왔어요. 통상적인 역사책을 염두에 두면 다루는 기간이 아주 짧습니다. 아무래도 사실보다는 해석에 방점이 찍힌 작업이라는 방증이지요. 사실 역사책을 접하면 독자들은 방대한 분량의 사실에 질리기 마련이에요.

역사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도 송남헌 선생의 <해방 3년사 : 1945~1948>(까치 펴냄) 같은 책을 보면서, 그 안에 정리되어 있는 수많은 사실을 소화하기도 바빴으니까요. 책 자체가 자료집 성격을 띤 것이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보면, <해방 일기>는 해방 3년을 다룬 그간의 작업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역사가가 개입한 시도입니다.

사실 그간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참 해석에 인색했어요. 그런 경향에 반기를 드는 작업이라서 더욱더 이 책이 반가웠습니다.

김기협 : 이번 작업에서 기존의 훌륭한 연구 성과에 많이 기대고 있어요. 중요한 연구자 중에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가 있습니다. 커밍스 선생은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한국전쟁의 기원)>(역사비평사 펴냄)에서 자신의 해석, 의견을 아끼지 않고 내고 있어요.

반면에 서중석, 정병준 선생 등 한국의 중요한 연구자들은, 한국 역사학계의 표준에 비하면 다소 적극적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커밍스 선생과 비교하면 개인의 해석과 의견을 내는 데 대단히 인색합니다. 개인의 성향보다 한국 사회의 학문 풍토 탓이라고 생각해요.

통상적 의미의 역사학계 밖에 있기 때문에 그런 풍토에서 자유로운 내가 먼저 그런 분위기를 깨자, 이런 마음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역사학의 목적은 정치다!


▲ <해방 일기>를 펴낸 김기협 프레시안 편집위원. ⓒ프레시안(손문상)
한홍구 : 김기협 선생님도 원래는 계명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홀연히 이른바 정통 역사학계라는 곳을 떠나서, 지금은 학계의 동료보다는 대중을 상대로 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해방 일기>를 읽으면서, 새삼 그런 변화의 계기가 궁금해지더군요. 흔한 일은 아니니까요.

김기협 : 내가 나이가 몇 살 많으니까 '선생님' 소리를 듣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한홍구 선생이야말로 이런 작업에 있어서는 나에게 '선생님' 아닙니까? <대한민국사>를 보며 "세상에, 별 짓 다하네!" 속으로 생각했는데, 그 동안 내게 가장 중요한 벤치마킹 대상이 됐어요. 판매 실적도 벤치마킹해야 할 텐데. (웃음)

한홍구 : 판매만 놓고 보면 몰라도 다른 것은 그렇게 내세울 처지가 못 됩니다. (웃음) 잘 알다시피, <대한민국사>가 많이 팔린 데는 국방부가 큰 힘이 되었어요. 2008년에 전체 4권을 모조리 불온서적으로 지정해주는 바람에, 훨씬 더 많은 독자가 책을 사보도록 광고를 해줬으니까요.

김기협 : 한 지인이 한홍구 선생이 <대한민국사>와 같은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서 의견을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생각나는 대로 이렇게 얘기했어요.

"나는 한 선생한테 연대감 혹은 친근감을 느낍니다. 나는 역사 공부의 목적이 정치에 있다는 사실을 역사학자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명 초기부터 인간이 역사를 공부하게 된 것은 과거의 일을 되새겨서 그것을 정치적인 목적, 좁은 의미의 정치는 물론 아니고, 그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만들고자 하는 일에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역사학이 정치적 입장을 내세우면 안 되는 것처럼 잡아떼는 아주 이상한 분위기가 있어요. 이것은 애초에 인간이 역사 공부를 하는 이유를 부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선생도 틀림없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는 것 같아서 반갑습니다."

맞게 얘기했나요? (웃음)

한홍구 : '잡아뗀다' 이 표현이 아주 와 닿습니다. 1978년에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사학 개론' 수업을 들었어요. 고(故) 양병우(1923~2003년) 선생님의 강의였습니다. 그런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역사의 교훈을 찾아서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태도를 경계하는 듯했습니다. 독재 시대였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런 사학과의 분위기가 무척 낯설고 거북했지요.

제가 역사를 좋아했던 이유는 역사가 지금의 암울한 상황을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거든요. 아무튼 대학교 1학년 때 가졌던 그런 역사학계의 분위기에 대한 불만이 지금도 해소되지 않는 걸 보면, 여전히 역사학계는 변화가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한겨레21>에다 대중을 상대로 한 역사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런 오랜 불만을 나부터라도 해소하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저도 연재를 시작하면서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이지만, 역사학자로서 제가 받은 트레이닝은 어떻게 하면 역사 이야기를 재미없게 하나 이런 것이었더군요. 역사학자끼리만 책 안 잡히면서 소통할 수 있는 식으로요.

그러고 보면, 김 선생님이나 제가 하는 일은 역사학계의 시각에서 보면 점잖은 말로 외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바람이 난 예 같습니다. (웃음) 그런데 김기협 선생님께서는 저보고 이런 작업에는 선배라고 하시지만, 사실은 오래 전부터 <중앙일보> 같은 언론에 에세이를 연재하시고 그러셨잖아요.

김기협 : 1990년대에 <중앙일보>에 칼럼을 쓸 때는 지금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 때는 내심 역사학 자체에서 벗어날 생각을 했어요. 역사학자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저널리스트가 될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지금 남들이 뭐라 하건 역사학자로 자임하는 자세와 달랐지요.

'역사학은 정치와 관계가 없는 재미없는 얘기만 해야 한다.' 이런 통념에 나도 휩쓸렸던 셈입니다. '역사학이라는 게 이렇게 재미없는 것이라면 재미있는 일, 현실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도록 역사학을 그만두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웃음) 역사학자로서 제 역할을 찾아서 열심히 하자, 이런 독실한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웃음)

한홍구 :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 보탤게요. 양병우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모교 사학과 신년 하례식에서 뵌 적이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양 선생님께서 "역사의 교훈을 찾아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내심 '내가 하는 일이 역사학자로서 맞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나 선생님이나 독실한 역사학자로서 옳은 길을 가고 있나 봅니다. (웃음)

역사학자여, 대중과 만나라!


▲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김기협 : 방금 우리가 역사학자로서 공유하는 태도를 얘기하면서 의기투합했지만, 사실 실제로 활동하는 모습은 큰 차이가 있잖아요. 한 선생은 하는 일이 많은데, 나는 <해방 일기> 하나만 하는데도 아예 세상일과는 담을 쌓고 있고요. 사실 한 선생 만날 생각을 하면서 자격지심이 많이 들었습니다.

한홍구 : 저야말로 선생님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또 해야 하는 일이 바로 호흡이 긴 체계적인 역사책을 쓰는 일이거든요. 특히 노무현 정부 때 3년간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정리에 관여하면서 일반인이 보지 못하는 자료를 많이 접할 수 있었어요. 그 때의 경험을 밑천 삼아서 네댓 권의 책을 정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계획했던 것 중에 사법사 작업만 겨우 해놓은 상황입니다. 간첩사, 정보기관사 등 염두에 둔 작업은 있는데, 늘 땜질 하는 식으로 일을 하다 보니…. 사실 <대한민국사>의 초고를 <한겨레21>에 연재할 때도 처음에는 일반인에게 잘 안 알려진 현대사의 여러 대목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정작 연재를 서너 번 하다 보니까 그게 안 되더군요. 한국 사회에 얼마나 사건이 많습니까? 그런 사건들을 보면,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한테는 보이는데 일반인은 보지 못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미 여러 시민단체에 관여하던 터라서, 그런 대목들을 짚어주면 일반인의 이해를 돕는 데는 물론이고 시민운동에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사건을 염두에 두고 그것이 일어난 역사적 배경을 짚어줄 수도 있고 또 과거의 유사한 사건의 전개 과정을 소개하면서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겠느냐 하는 통찰을 권유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다른 편으로는 과거의 사실을 들추면서, '지금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이런 과거를 감추고 사기를 치는 것이다' 고발도 할 수 있고요.

실제로 그런 식으로 2주에 한 번씩 글을 써놓으니, 제 글을 제일 좋아하던 게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이었어요. 역사학자로서 저한테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역사라는 게 현실에 쓰임이 있다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흔히 역사는 과거의 현재의 대화라고 하는데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 생생히 경험했으니까요.

다만 그런 작업이 몇 년째 계속되다 보니, 저도 이제 이런 작업은 후배들에게 넘겨줄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정병준 선생 같은 후배는 글재주도 좋잖아요. (웃음) 그런 후배들이 좀 더 대중적인 글쓰기를 했으면 좋겠고, 덕분에 저도 선생님처럼 앞에서 얘기한 주제를 얼른 차분히 정리할 기회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김기협 : 한 선생이랑 내가 이렇게 외도, 아니 바람이 났는데도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벼락을 내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정병준 선생과 같은 다른 훌륭한 역사학자들도 이렇게 역사학의 성과를 일반인과 공유하는 작업에 동참할 생각이 들지 모르죠. (웃음)


ⓒ프레시안(손문상)

해방 3년, 그 사람들의 일기를 엿본다면…

한홍구 : <해방 일기>를 읽으면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 중 하나는 '일기' 형식입니다. 역사를 대중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매일 일기를 쓰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성격이 급한 데다 게으르기까지 한 저 같으면 엄두를 못 낼 형식입니다. (웃음)

사실 일기는 역사를 서술하는 형식으로는 이점보다는 한계가 많습니다. 과거의 어떤 날 하루의 일을 정리하기로 독자와 약속한 역사학자는 이미 내일 신문, 모레 신문은 물론이고 다음 주에 나올 주간지, 다음 달에 나올 월간지까지 다 본 입장이잖아요. 당연히 뒤에 벌어진 일까지 얘기해 주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일기 형식으로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한 번 시작하면 마무리할 때까지 멈출 수도 없어요. 하루하루 써서 정해진 기간을 채워야 비로소 전체를 정리할 수 있으니까. 솔직히 이번 작업도 계획했던 대로 1000일이 넘는 기간 동안 써내려가는 게 보통 작업이 아니지요. 하필이면 일기라는 형식을 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기협 : <해방 일기> 작업 바로 앞에 했던 일이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돌베개 펴냄)로 묶여져 나온 조선 망국사였습니다. 그런데 반년 남짓 걸쳐 그 작업을 하고 보니, 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 작업을 하면서 '그 때 잃어버린 나라를 아직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이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얘기를 충분히 펼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 반 년 더 투자해서 후속 작업을 벌일 궁리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일기 형식이 떠올랐습니다. 책 한 권이 아니라 몇 년의 노력을 쏟아붓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홍구 선생이 <한겨레21>을 만난 것처럼, 저는 <프레시안>이 마침 그런 계획에 진지하게 호응해줬어요. 일단 몇 년에 걸친 작업을 해나갈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셈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독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 이런 고민을 했어요. 독자들보다 앞서 가거나, 높은 자리에서 가르쳐주는 식이 아니라 함께 고민하는 그런 장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하루하루 일어난 일을 같이 살피고, 그 일의 의미를 같이 찾는 작업을 이 시대를 같이 사는 독자들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설사 염두에 둔 결론이 있더라도 일단은 접어놓고, 새롭게 해석할 여지가 없는지를 독자와 함께 계속 모색해 나가는 것이지요. 2010년 8월 1일 연재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10개월째가 되는 지금까지 그 자세가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일기라는 형식을 잘 선택한 셈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루하루 정리를 하다 보니,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의미가 나타나서 나 자신 놀랄 때가 많아요.


ⓒ프레시안(손문상)
한홍구 : 당연히 매일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지요. 그 연재를 정리한 첫 번째 책이 이번에 나온 <해방 일기>인데, 그 책을 읽다가 제일 통쾌해 하면서 낄낄댔던 부분이 바로 대담한 해석과 과감한 추측입니다. 사실 그런 부분을 놓고 누가 뭐라고 할 수도 없어요. 일기라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웃음)

가령 저도 논문에다 하고 싶은 얘기를 웬만하면 다 집어넣는 편입니다. 그래도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어떤 사실에 대한 해석 정도라면 '난 이렇게 본다' 이렇게 쓰면서도, 아무래도 추측을 할 때는 주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선생님 개인의 대담한 해석뿐만 아니라 과감한 추측도 심심찮게 등장해서 통쾌했어요.

김기협 : 여러 가지 앞뒤 사정을 염두에 두고, 상식과 합리성에 입각해서 내 나름대로 해보는 생각이니까요. 독자들한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자신 있게 권할 만한 생각을 권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항복과 미·소의 점령 방침을 총독부가 8월 11일부터 알고 있었으리라고 나는 '추측'합니다. 8월 15일을 전후한 총독부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그런 추측을 배제한다면 어떻게 진정한 이해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한홍구 :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번 작업은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해방 3년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에게도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내리는 선생님의 대담한 해석, 과감한 추측을 보면서 역사학자들이 자극도 받고, 또 그런 자극을 통해서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을 수도 있고요. 선생님의 다양한 문제제기에 답하려고 하면서요.

김기협 : 역사학계의 동료들이 그렇게 이 작업을 받아들여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이것도 한 선생이랑 다소 차이가 나는 부분일지 모릅니다만, 나는 학문(學問)에 물을 '문(問)' 자가 들어 있는 것에 늘 신경을 씁니다. 평소 학문을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해답을 주는 일이라기보다는 질문을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뜻 매사에 '결론은 이것이다.' 말하기를 주저해요. '이게 답이야!' 하고 큰소리를 치는 일도 성미에 맞지 않습니다. 빤한 결론처럼 보여도, 심지어 이미 일어난 일이라도, 거기에 또 어떤 가려진 의미는 없는지 더 자꾸 파고들고만 싶거든요. 역사를 끝없는 이야기로 보는 이런 태도가 사실 일기 형식의 이번 작업에도 반영되는 거죠.

'한 일'이 아니라 '안 한 일'에 주목하라!


ⓒ프레시안(손문상)
한홍구 : 바로 그 점이 <해방 일기>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동안 역사학자들은 '한 일'에만 초점을 맞춰 왔어요. 그런데 사실은 마땅히 했어야 했지만 '안 한 일'에 초점을 맞춰야 놓쳤던 많은 것, 그러니까 우리가 미처 가지 못했던 길에까지 생각이 미칠 수 있습니다. 일기라는 서술 형식은 그런 점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김기협 : 한 일에 시선이 묶이는 게 바로 근대적 사고의 한계입니다. 매일 일기를 쓰듯이 작업을 하려면 아무래도 해방 당시의 사람들과 비슷한 템포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갈림길에 서 있었던 그들의 처지로 이입이 됩니다. 그 당시에 보통 사람들이 했던 고뇌, 갈등, 선택이 눈에 들어오는 거지요.

당연히 그 때 그들이 선택하지 않았던 길에 대해서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지요. 작업을 진행하면서 가능한 한 자기 목소리를 또렷하게 남길 수 없었던 보통 사람들의 입장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그들이 바랐지만 결국 현실이 되지 못했던 여러 가지 가능성도 복원해 보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홍구 : 사실 역사학에서는 '만약에(If)~' 이런 식의 가정을 금기로 여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일이 바로 가지 않은 길이에요. 한참 전에 <일요일 밤의 대행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잖아요? 그 프로그램에서 제일 인기를 끌었던 꼭지가 '몰래 카메라'와 '인생극장'이었어요. 저는 '인생극장'을 즐겨봤었는데, 혹시 기억나세요?

김기협 : 그 때 한국에 있었는지…. 하긴 저는 한국에 있어도 텔레비전은 안 보고 사는 사람이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웃음)

한홍구 : 역시…. 저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다 봤어요. (웃음) 이런 프로그램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서 주인공이 A, B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을 합니다. 주인공이 "그래, 결심했어!" 하고 외치면서 시청자 앞에 A, B 두 가지 선택을 했을 때의 상황 전개를 보여줍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가 한동안 '만약에~' 이런 식의 가정을 해볼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 것은 일어난 일을 제대로 설명하기도 바빴던 탓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진짜 중요한 일은 바로 하지 않은 일이잖아요. 당장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을 파헤치는 사업을 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일은 그가 하지 않은 서민 복지잖아요.

결과에만 집착하다 보면 정말로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는 일이 왕왕 있지요. 해방 3년을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정작 그 상황에서 사람들이 했던 고민과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실이 되지 못했던 많은 가능성이야말로 오늘날 정말로 소중한 것들인데요. 그런 면에서 <해방 일기>를 읽으면서 저 스스로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뉴라이트 세력을 비롯한 오늘날의 우파는 마치 분단 정부 수립을 '성공'처럼 얘기하잖아요. 하지만 분단 정부 수입은 명백히 우파의 실패거든요. 앞으로 김기협 선생님이 <해방 일기>에서 그런 우파의 실패 과정을 잘 보여주시겠지만. 바로 그렇게 실패한 과정이기 때문에 아쉬움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

김기협 : 한 선생은 그 때 그 상황에서 제일 아쉬운 게 뭡니까?

한홍구 : 글쎄요. 제 박사 학위 논문 주제가 일제 시대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이었잖아요. 그래서 저는 우파의 행보보다는 좌파의 행보 즉, 해방 후에 김일성이 보였던 모습에 아쉬움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에요. 왜 '김일성 장군 환영 대회'를 서울에서 안 열었을까? 김일성이라고 서울 구경을 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습니까?

김일성 자신이 경복궁, 광화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하고 싶었을 테고, "김일성 장군 만세"를 연호하는 시민들에게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 주고, 동아일보사도 방문하고. 만약 해방 직후에 김일성이 그런 제스처를 취했더라면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상당한 파급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현실에서 그런 일은 없었지요. 그게 좌파의 한계인지, 소련의 방침이었는지, 아니면 남쪽의 박헌영이 시쳇말로 "여기는 내 나와바리(구역)니까 내려오지 마!" 이랬던 것인지…. (웃음)

김기협 : 박헌영이 가로막는다고 안 내려올 김일성은 아니었을 것 같고요. (웃음) 저 역시 궁금한 대목입니다. 지금이야 분단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미군정청과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추궁하는 데 에너지를 쏟고 있지만, 어느 단계가 되면 김일성 측에도 문제를 제기해야 할 텐데, 아직은 뚜렷한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어요.

한홍구 : 해방 3년을 염두에 두면 아쉬운 대목이 한 대목이 아니지요. 일반 독자도 <해방 일기>를 읽으면서 탄식할 부분이 한두 대목이 아닐 듯해요. 아마도 <해방 일기>의 정점이 될 부분은 1948년 김구가 분단을 막고자 주도했던 남북 협상 과정일 것입니다. 그 대목을 김 선생님이 피를 토하면서 쓰실 것 같습니다. (웃음)

그런데 김구가 왜 일찌감치 그러니까 1946년부터 분단의 기미를 포착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반대에 나서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김구가 좀 더 일찍부터 움직였다면 분단 정부 수립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았을 텐데요. 당연히 한국의 현대사도 크게 달라졌겠지요.

김기협 : 그렇게 당시의 상황에 서 보면서 아쉬워하는 일이 일부 역사학자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그런 아쉬움이 곧바로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통해서 미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한 지혜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이런 통찰을 얻는 일이야말로 역사를 공부하는 진짜 목적입니다.


ⓒ프레시안(손문상)

분단과 전쟁이 앗아간 것들

한홍구 : 선생님께 바라는 점을 나열하는 자리이니, 한 가지 더 덧붙이겠습니다. (웃음) <해방 일기>틀 통해서 분단과 전쟁이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들을 좀 더 부각하셨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이런 것들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60년이 지나도록 대중적인 진보 정치인, 진보 정당이 아직 우리 앞에 등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 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김구와 함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조소앙이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병옥을 상대로 전국 최고 득표를 얻어서 당선이 되었지요. (조소앙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바로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한국전쟁 직전만 하더라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지금 한민당은 흔히 우파 정당, 친일 정당, 지주 정당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그 정강을 지금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읽어보면 '악' 소리가 나올 거예요.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얘기하고, 토지 개혁이라는 표현은 안 썼지만 토지의 합리적 재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니까요. 요즘 말로 하면 '좌빨' 소리 듣기 십상이지요.

사실 지금의 민주노동당 강령을 해방 정국에다 그대로 가져다 놓으면 고작 중도 우익 정도에 불과합니다. 한국 사회의 당시의 지형을 지금의 지형과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여러 가지 내용을 <해방 일기>에 녹여 내면 좋겠어요. 젊은이들이 그런 대목을 꼼꼼히 읽는다면 한국 사회가 변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겠습니까?

김기협 : 한 선생 얘기를 듣고 보니 더 걱정이 됩니다. 독자들이 흥이 나서 읽도록 쓰는 사람이 만들어드려야 할 텐데…. 이 기회에 한 번 더 각오를 다지게 되네요.


ⓒ프레시안(손문상)

잃어버린 목소리, 중도파

한홍구 : 이제 화제를 바꿔 볼까요? 이 책의 초점은 중도파에 맞춰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승만, 김구, 김일성, 박헌영보다는 여운형, 김두봉, 김규식, 안재홍, 홍명희 같은 이들을 부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선생님께서 더 강조하는 것은 이념으로서의 중도보다는 기질로서의 중도일 것 같아요. 극단적 선택을 피하고, 모험주의를 비판하는….

해방 당시와 지금 현재를 비교하면 중도파의 입지가 어떻습니까?

김기협 :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나빠졌어요. 최근의 한국 상황을 보면, 정치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정치적 선택을 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정치 공학적인 기준에 너무 쏠려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습니다. 극좌, 극우의 적대적 공생 관계가 더욱더 공고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일반인까지 '모 아니면 도' 식 극단적 선택의 강요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국 정치에서 유독 '연대의 정치'가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고요. 사실 연대의 정치가 부재하면 가장 웃을 이들은 바로 현상 유지를 바라는 기득권 세력이지요.

한홍구 : 중도파 중에서도 <해방 일기>의 파트너로서 안재홍 선생을 선택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김기협 : 일단 안재홍 선생이 정치인이기 이전에 역사학자로서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켰다는 점에 끌렸습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주견이 분명한 기록을 아주 많이 남겼거든요. 그런 자료들은 당시의 상황을 중도파가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사료입니다.

다음은 안재홍 선생의 기질에도 끌렸습니다. 안 선생은 극단적이고 이기적인 선택을 배제하고 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까도 얘기했던 갈림길에서 갈등, 고뇌하는 당시의 보통 사람의 모습에 가장 겹치는 정치인이자 지식인이었습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그를 내 긴 작업의 파트너로 선택한 것이지요.

한홍구 : 안재홍 선생은 1947년에 미군정청의 민정장관을 지냈잖아요. 저는 그렇게 손에 피를 묻힐 수밖에 없는 자리를 수락하면서 안 선생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김 선생이 안 선생을 파트너로 선택한 것을 보고 놀랐지요. 하지만 말씀을 듣고 보니, 오히려 그런 선택 속에서 그가 했던 갈등을 보여줄 수도 있겠군요.

김기협 : 한 선생 같으면 누구를 파트너로 선택했겠습니까?

한홍구 : 저야 아무래도 여운형 선생한테 끌렸을 것입니다. 송진우 선생도 아주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당시 가장 대표적인 우파 이데올로그였던 송 선생을 우파가 암살한 이유를 따져보는 것도 해방 3년을 살피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런 분들에 비하면 안재홍 선생은 뒤에 물러나 있었던 분이라는 인상이어서….

김기협 : 그렇게 뒤에 물러나 있다는 인상을 주는 행보도 내 성향에 맞는 점이죠. (웃음) 그리고 여운형(1947년), 송진우(1945년) 선생 등은 모두 일찌감치 암살을 당해서 해방 3년 동안 함께 갈 수가 없고요. 그나저나, 송 선생을 암살한 게 진짜 누굽니까? 나는 암살범 한현우의 단독 행동이거나, 이승만 측의 짓일 가능성만 조심스럽게 내놓았습니다만.

한홍구 : 저는 이승만 측이 배후에 있었다는 데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봅니다. 만약 진짜 이승만 측이 암살을 주도했다면, 그 이유를 캐묻는 일도 흥미로운 작업이겠지요. 그리고 안재홍 선생과의 가상 인터뷰도 파격적인 시도인데, 더 나아가서 암살당한 여운형, 송진우 선생을 못 불러낼 이유가 뭡니까? (웃음)

나중에 필요하면 여운형, 송진우 선생도 인터뷰이로 내세워서 3인 혹은 4인의 가상 대화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농민, 교사, 경찰, 학생 등 당시의 진짜 보통 사람들의 육성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내용이 덧붙여진다면, 독자들이 그 시대를 훨씬 더 생생히 체험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역사가 재미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사료에 근거해서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민중사가 가진 결정적인 한계이기도 하지요. 민중을 생생히 대변할 사료가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어차피 구태의연한 역사 서술을 형식을 깨고자 하셨으니, 사료가 없어서 제대로 등장하지 못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그들의 눈높이에서 대변해 주시면 좋겠어요.

물론 지금도 다른 역사책과는 비교가 안 되게 훌륭하지만…. 선생님께서 좀 더 그 부분을 보완해 주시면 훨씬 더 훌륭한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웃음)


ⓒ프레시안(손문상)

기쁨이 아닌 불안과 함께 온 해방

김기협 : 이거 오늘 한홍구 선생의 주문이 많습니다. (웃음)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들으면서 작업의 방향이 더 분명해지네요. 어떤 결론을 얻고, 판단을 하기보다는 감촉 즉 느낌을 얻는 것을 이번 작업의 궁극적인 목표로 해야겠어요. 쓰는 사람이 느껴야, 읽을 사람에게도 그것이 전해질 테니까요. 많은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하려면 사실과 논리만이 아니라 독자의 서술자에 대한 신뢰에도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옳건 그르건 간에 한 대상의 고민과 결단을 한 인간의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 자신이 노력하고, 독자들에게도 그런 길을 열어주는데 노력을 집중해야겠습니다. 지금 연재는 책 세 권 분량을 채웠어요. 하지만 오늘 한 선생의 지적을 염두에 두고 책으로 펴낼 때는 좀 더 보완할 궁리도 해야겠습니다.

한홍구 : 사실 선생님께서도 머리말에서도 지적하듯이 해방을 기쁨이라고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우리가 해방에서 분단까지 이어지는 그 3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해방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불안한 과정이었습니까? 사실 그 불안이야말로 이승만 같은 자가 집권하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었을 테죠.

김기협 : 그렇지요. 기쁨만 있었던 판이었다면 돈과 주먹을 가지고 그렇게 한 나라를 통째로 휩쓸기가 힘들었겠지요. 당분간은 한 선생의 지적대로 당시 사람들의 불안을 파고드는 데 집중할 계획입니다. 당시 사람의 불안이야말로 상황만 다를 뿐이지 지금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대동소이하지 않을까요. 오늘 좋은 말씀 정말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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