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엘리베이터에서 아는 얼굴이 있어 무심코 인사를 했노라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는 사람이 아니었고 한창 즐겨보던 방송 프로그램에 얼굴을 자주 내비치는 사람이었다고 해서 웃은 적이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냥 웃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책의 저자에 대해 그런 경험이 빈번하다. 얼굴을 보기는커녕 목소리도 들은 적 없는데도 동일한 필자의 글을 자주 접하다 보면 나는 그 누군가를 잘 알고 있는 듯 착각을 하곤 한다. 정상호가 그런 필자 중 하나이다. 그래서 나는 우연히 정상호를 학술 세미나에서 처음 만났을 때 다른 어떤 이보다도 반갑게 인사하고 말았다. 물론 그는 내 반가움의 실체를 눈치 못 챘겠지만 말이다.


▲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화>(정상호 지음, 모티브북 펴냄). ⓒ모티브북
그가 쓴 논문들이 최근 한 권의 책,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화>(모티브북 펴냄)로 엮였다. 이번 책에서도 그의 문제의식은 일관된다. 나는 감히 그의 현실적 문제의식과 연구의 지향점을 '정치의 복원' 한 마디로 정리하고 싶다. 한국 사회의 낡은 정치에 대한 비판이 결국 탈정치로 귀결되었던 그간의 정치 경험에서 그는 정치의 복원을 꿈꾼다. 정치의 복원을 위해 그는 '생활 정치'와 '이익 정치'를 씨줄과 날줄로 배치하였다. 생활 정치와 이익 정치가 한국 정치를 종횡으로 교차할 때 이를 아우르는 역할은 '정당'이다.

그런데 나는 왜 정상호의 글을 자주 읽게 되었을까? 세칭 학계의 말석에 끼기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상호의 논문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말장난 같지만 안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에 답답함을 느끼고 소박한 수준에서라도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쓴 논문을 피해가기 어렵다. 다시 말해 그의 글은 논문이라는 학술적 형식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한국 정치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이에 상응하는 성실한 경험 분석과 정책적 제안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이 땅에 발 딛고 있는 사람이라면 외면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청목회 입법 로비나, 최근 행정안전위원회의 정치 자금법 개정 논란이 있을 때 그의 논문은 책에 갇혀있는 이론이 아니라 살아있는 주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정치 후원금을 무조건 대가성으로 치부하여, 정치 후원금 제도가 유권자들의 정치 행위 중 하나이며, 국회의원이 유권자들의 후원을 통해 입법 활동에 나서는 것이 대의 과정의 하나라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현실에서 이 책에 담긴 '정당과 조직화된 이익 집단과의 안정적이고 제도화된 연계의 강화'라는 그의 주장은 학계의 이론적 견해에서 시민사회나 정계의 진지한 검토 대상이 된다.

비록 그가 제안하는 여러 가지 차원의 제도적 대안들, 예를 들어 청원 심사제 활성화나 지방 정당, 비례대표 비율 확보 등에 이미 다른 입장을 갖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의 제안에 진지하게 화답해야 한다. 로비 제도 도입에 대해 그가 견지하는 비판적 태도 하나만 확인해보더라도 그가 지적하는 한국 정치의 퇴행-권력 불평등과 의회 정치의 비정상성-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지 답변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된다. 그는 로비 제도의 도입이 '기존의 정치 권력의 형평성을 저해할 것인가 아니면 제고할 것인가', '정당과 의회 정치의 활성화에 기여할 것인가 아니면 폐쇄성과 경직성을 심화시킬 것인가' 하고 묻는다. 때문에 로비 제도 도입에 대한 그의 비판적 견해는 정당의 정상화와 풀뿌리 정치, 생활 정치 강화의 주장으로 이어진다. 정당의 이익 표출 및 집약 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그의 총론적 주장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로 당장 동감을 표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고질적인 한국 정당의 후진성과 병폐에 넌더리를 내거나, 시민 정치 운동 등 다른 방식으로 정치 현실을 직접적으로 개선하려고 하는 경우 정당에 초점을 맞추는 그의 주장은 너무 원론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그의 문제제기가 매우 솔직하고도 정확하게 한국의 정치 수준을 진단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책에 담긴 문제의식을 제대로만 좇아간다면 이익 정치에 대한 삐딱한 시선과 정당의 정상화에 대한 과잉 정치화된 편견에서 벗어나 이참에 한국 정치의 재구성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말한다면 어떤 이보다도 사회운동을 중심에 놓고 운동과 제도를 대립적인 구성물로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이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개방적인 태도와 관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실린 그의 주장에 모두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의 이익 정치 개념 -'회원들에게 이득을 주기 위하여 정치적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는 이익 집단의 활동'-에 고개를 끄덕거리지 못한다. 만약 그의 정의를 따른다면, 경제적 이익 집단과 공익적 시민단체에서 이익의 개념이 동일한 것으로 유추되는데, 이는 이론적 영역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또한 그는 매우 여러 편의 논문에서 재정의 출처가 이익 집단의 전략과 전술을 규정한다는 슐로즈만과 티어니, 워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시민단체는 아웃사이드, 이익 집단은 인사이드 전략을 구사한다는 결론을 반복하고 있다. 이익 집단과 재정 구조, 재정 원천과의 관련성으로 이익 집단별 이익 표출 전략이 상이하다는 주장은 다양한 차원에서 변주된다.

한 예로 그는 시민단체의 영향력 평가나 접촉 빈도에서 유달리 지방자치단체가 높게 나타나게 된 것도 시민단체에 대한 지방의 보조금 제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다소 성급해 보인다. 즉 재정 출처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자 단체나 시민단체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 각 집단에서 다루는 이슈 등도 중요한 변수로 취급해야만 할 것이다. 포괄적으로 시민단체로 분류된다고 할지라도 입법 운동 전략을 주요한 운동 방식으로 선택하지 않는, 선택할 필요가 없는 단체들이 많은 현실에서 전략적 선호에 대한 분별을 하는 의의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가 이미 잘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사업자 단체는 자신들만의 배타적인 이익 수호를 목적으로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익 증대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나 반발을 우려하여 아웃사이드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할 필요가 없다.

반면 시민단체는 정책 목표 실현이라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적 담론 형성과 시민 참여를 동반하고 이를 위해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하므로 인사이드 전략과 더불어 아웃사이드 전략에도 큰 힘을 들여야 한다. 실제 시민단체의 입법 운동 경험에서 볼 때 대중 캠페인, 매스미디어를 활용한 전략, 공익 소송 등 다양한 운동 레퍼토리가 동시적 또는 종합적으로 구사되었을 때 성공했다는 점이 관찰된 바 있다. 또 한국 사회가 사회운동과 저항이 일상화된 운동사회(Movement Society)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치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시민단체의 일반적 관계는 대항적 혹은 갈등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현실에서 비추어 볼 때도 그러하다. 때문에 회비 의존도가 높은 사업자 단체는 인사이드 로비에 집중하고 정부 보조금과 기부금에 의존하는 시민단체는 아웃사이드 로비에 적극적이라는 주장은 일면적인 사실만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이는 한국 시민사회가 회비압도형(fee-dominant)라고 주장했던 그의 이전의 견해와도 달리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책에 관통하고 있는 문제의식과 현실 진단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이렇게 사소한 트집에 아까운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정상호에게 갈 길이 멀다며 재촉을 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연구 주제는 나에게 있어, 많은 독자들에게 있어 현실에서 해결해야 할 주요한 사회적 의제이다. 때문에 그가 정당의 정상화와 이익 정치의 활성화, 생활 정치의 강화라는 한국 정치의 길을 기왕에 닦아 왔으니, 향후 다가올 정치의 계절에 누구에게라도 교과서처럼 읽히는 한국 정치의 교본을 하나 펴냈으면 좋겠다.

또한 내가 그의 책을 탐독하는 열혈독자라는 이유로 이것저것 청하는 무례함이 조금 더 용인될 수 있다면 생활 정치에 대한 그의 이론적 지평이 지역을 넘어 더욱 확장되어야 함을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 생활 정치의 맥락은 유럽과도, 그리고 생활 정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과도 매우 다르다. 무엇보다 정치의 성립은 정체성에서 출발한다. 정치의 주체가 정치의 내용과 방향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기대하는 것처럼 생활 정치가 한국 정치의 구태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사회 건설을 위한 길잡이가 되려면, 생활 정치의 유력한 공간으로 지역을 상정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생활세계 전반에 대한 정치의 재구성이 필요할 것이다. 더불어 사회 집단별로 이익 표출 행위의 양상이 왜 다른지, 왜 서로 다른 전략에 치중하는지에 대해 좀 더 종합적인 연구를 제안하고 싶다. 정치적 성격의 변화가 이익 정치 양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는 시급히 이명박 정부를 대상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국제 비교 연구에 대한 그의 야심(?)을 발견하곤 했는데 그의 이후 연구 대상이 한국의 경험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제 비교 연구로 확장되었으면 좋겠다.

정상호는 저자 서문에서 학계의 글쓰기 풍토에 대한 나름의 불만을 토로하였다. 학술지에 게재되는 연구자들의 논문은 폭증하고 있지만, 꼭 그만큼 대중과의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에 그는 엄격한 논문 형식에서 탈피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책에 엮인 논문들이 학술지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완전히 벗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바라건대, 나는 누구보다 실천적 문제의식이 풍부한 정상호에게만큼은 학계의 제왕적 권력이 비껴나가 자유로운 글쓰기를 허하는 세상이 되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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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레디앙 펴냄)은 시인(송기역)과 사진작가(이상엽)가 지난해(2010년) 4월부터 반년여에 걸쳐 사람의 이성과 감성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4대강 파괴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보고 듣고 담은 처절하지만 지극히 아름다운 기록물이다.

시인은 가슴속에 죽임의 처절함과 그로 인해 야기된 애끓는 슬픔을 담았고, 사진작가는 "단 2년 만에 처참하게 변화해버린" 이 나라의 강과 숲을 냉정한 자세로 카메라에 담았다. 시인은 강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그 눈물방울을 '세상에서 가장 작은 강물'로 여기며 동병상련했다. 사진작가는 기록을 자임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파괴로 인해 고통을 얻고 있는 이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했고, 비밀스레 공사를 강행하는 이들로부터는 모욕을 당했고, 때로는 어이없는 주먹질까지 당했다.

나는 두 예술가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만을 담겠다는 정직한 태도로 일관해 세상에 내놓은 이 뜨겁지만 슬픈 책으로 인해 너무나 벅찬 감동을 받았다. 이들은 최소한 이 기록에서만큼은 누구도 감행하지 못한 치열한 현장주의자들이었다. 비범한 이들은 책상 위에서 세계를 조망하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제 발로 가서 제 눈으로 보고, 제 귀로 그곳 사람들의 목소리와 강과 숲이, 모래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생명 가진 것들의 목소리를 듣는 수밖에 없다. 그런 생체험의 나눔은 현장주의자이기를 포기한 이들로부터는 얻을 수 없다. 나는 해석하고 분석하고 가르치려는 사람들보다는 언제나 현장주의자들을 믿는다. 붓다나 예수도 기실은 탁상공론의 사람들이 아니라 치열한 현장주의자들이었다는 의미에서 나는 현장주의를 신봉하고 현장에 몸을 던진 이들의 말에 가장 큰 신뢰의 마음으로 귀를 기울인다.


▲ <흐르는 강물처럼>(송기역 지음, 이상엽 사진, 레디앙 펴냄). ⓒ레디앙
그래서 이 책은 실감의 책이고, 그 실감이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찌르고 울린다는 의미에서 공명의 책이다. 무엇이 공명되는가. 슬픔이다. 그래서 이 책은 부득불 슬픔의 책이라는 정의를 하나 더 보태야 한다.

시인과 사진작가는 이 험하고 고된 기록 작업을 자신을 위해 수행하지 않았다. 생업에 붙잡힌 세상 사람들 모두 어떻게 이 처참한 국토 파괴의 범죄 현장을 다 보고 샅샅이 살필 수 있을까? 모두 가 보고 느끼면 좋으련만, 환경운동가 감병만 씨 말대로 그 파괴와 상처의 현장에서 회복과 치유와 구원의 힘을 얻을 텐데, 하는 소망에서 그 소망을 쉬이 썩지 않을 책에 담아 간직하고자 예술가들이 대신 간 것이다.

예술가들은 본시 사람들 누구에게나 그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대신 끄집어내 실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 본분인 이들이 아니었는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만든 시인과 사진작가는 그 본래적 본분에 더할 나위 없이 충실했다. 급하게 파괴되고 있는 산천의 목격자로서 헌신했고, 증언자로서 성실했고, 기록자로서 치열했으며, 인간으로서 정직했다. 파괴는 가치 없는 짓이며 그 과정이나 결과가 매우 흉악하지만, 파괴를 담은 기록은 이 책처럼 그것이 제대로 담긴 기록이었을 때 너무나 슬프고 아름답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아이러니이고, 서글픈 소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권세를 지닌 이들과 토목 장사꾼들이 4대강에 손을 대면서 뭐라고 말장난을 하든, 이 대규모 산천 파괴를 범죄 행위라고 단언한다. 본문 어느 대목에도 지금 이 사태는 한 나라가 외세에 강점되고 유린되는 것에 비견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대목이 나온다. 나라가 외세에 강점당할 때 오로지 저항이 의무이듯이 4대강 파괴에 저항하고 중지를 촉구하고, 파괴의 현장을 철저하게 기록하는 것은 허락된 유일한 의무일 수밖에 없다. 저항의 당위성이라 해도 좋겠다.

속도전을 벌여 숲을 무너뜨리고, 강물을 막고, 모래와 골재를 퍼내는 이들조차도 왜 이런 공사를 하고 있고, 왜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민족 중흥을 위해서도 아니고, 국토의 재건을 위해서도 아니고, 가뭄과 홍수를 위해서라곤 하지만 그것도 단지 새빨간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공사장 인부들도 잘 알고 있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산천 파괴의 역사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공업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그 순간부터 자연은 단지 자원 가치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숲이 베어지면서 산은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폐수를 내뿜는 공장이 빠르게 건설되기 시작했고, 굴뚝에서 내뿜는 연기는 곧 성장을 상징하는 은총의 연기로 축복받기 시작했다. 건설과 증산, 개발과 성장 가치는 사람살이의 토대를 무너뜨리면서도 한 치의 의심없이 강화되고 부추겨져야 하는 유일한 시대 가치였다.

그것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독재 정권이나 그 후 간신히 고개를 쳐들었던 이른바 민주화 정권 시절이나 진배없었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들에서 그들은 두 얼굴의 한 뿌리 형제들이었다. 그 끔찍한 형제 결속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동시대의 보통 사람들이 그들더러 개발과 성장의 선봉이 되어달라고 열렬한 얼굴들로 의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금의 4대강 파괴는 정확하게는 이명박 정부의 수장인 '이명박' 개인의 책임이 가장 심대하지만, 안하무인이고 고집스럽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특별한 인성을 지닌 그의 파멸적 행위에 제때 제동을 걸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무기력과 무관심으로 동조했던 우리 시대 모두의 책임이라 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경중의 차이야 있겠지만 이 범죄의 가담자라는 자책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왜 4대강 파괴를 거대한 범죄 행위라 자주 단언하는가? 이 책에 담겨 있는 치열한 현장의 이야기들과 피 끓는 강안(江岸) 사람들의 절규, 강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분노와 싸움으로서 얻게 된 깨달음의 목소리들, 그리고 처참한 상처의 풍경들을 만약 마음속 깊은 곳의 양심의 눈으로 잘 헤아려 살피기만 한다면, 왜 이 폭력적인 토목 공사를 범죄라 단죄해야 하는지 누구나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글로, 때로는 사람들 숲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줄기차게 말해 왔지만, 이 산천은 이명박 정부의 것이 아니다. 토목 업자들의 것도 아니요, 땅 투기꾼들의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우리의 것도 당연히 아니다. 산천은 본시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산천이 한 번도 우리를 소유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건대, 우리는 결단코 이 산천의 주요 인물이 아니다. 관리자도 아니고, 통솔자도 아니다. 이 산천에서 이익만 뽑아낼 투기꾼도 아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이 산천에 속해 있을 뿐이다. 우리 목숨이 바로 이 산천에 의지하고 있고, 산천은 우리를 포함해 모든 생명체들을 무심하게 품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단지 짧은 한순간의 기생자일 뿐이다. 이것이 가장 간명한 산천과 사람 간의 관계이고, 이게 결국은 전부 다인 것이다.

누가 무슨 권한으로 이 산천을 이토록 철저하게 분탕질할 폭력을 허락했을까? 지금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무자비하게 없애고 죽인 것들이 본래 대로 회복되는 데 얼마만한 시간이 걸릴까? 이 불필요한 비용을 낭비한 죄악을 과연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무슨 까닭으로 이 가증스러운 산천 파괴 장사에 우리는 이 지경으로 둔감하고, 무기력해졌는가? 강을 죽이고, 강에 붙어 누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을 피눈물 흘리며 서로 헤어지게 만들고, '서 있는 강'인 숲을 베고, '흐르는 숲'인 강에 포클레인을 집어넣어 불필요할 뿐 아니라 과도한 준설로 모래 장사를 하고, 우리보다 더 오랜 시간 강과 함께 살아온 생명체들을 일거에 죽이고 사라지게 하는 이 범죄의 시대에 우리는 또한 돈 때문에 산 것들을 산 채로 파묻는 살처분까지 감행하고 있다. 우리가 과연 나무나 햇살을 머금은 여울보다 이 행성에 보탬이 되는 유익한 존재일까? 일찍이 맹자는 '측은지심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無惻隱之心非人也)'라고 단언했다. 그 말을 거울로 지금 우리 시대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지금 인간도 아니다.

이 책은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인간이라는 항변의 책이기도 하다. 쓸쓸하고 슬프다. 우리도 인간이냐는 질문을 해야 하는 시절은 너무나 비참하다. 우리도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는 이런 슬프고 눈물 나는 책이 묶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곧 지나가겠지만, 이명박 시대도 우리 삶의 일부이다. 이 시대를 흘려보내면서 우리 삶에 이 책만큼은 우리의 일부인양 같이 흘렀으면 좋겠다.

4대강 파괴의 확신범인 이명박 대통령이 이 책을 탄생시켰기에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는 원인 제공자로서 이 책의 공동 저자라 말할 수 있다. 이미 충분히 넉넉한 그에게 인세까지 챙겨줄 필요는 없겠지만 이 책을 가능하게 한 이는 사실인즉 이명박 대통령이라 우리는 역설의 어조로 분명하게 명토 박아 놓는다. 그가 권력을 잡은 이래 그 잠시 상간에 무슨 짓을 했는지 지금은 잘 모르고 있으므로 그보다 몇 천 배 더 긴 시간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이 책이 한때 그가 한 일을 가감 없이 증거할 것이므로, 그는 결국 이 책에 사로잡힌 셈이다.

4대강파 괴라는 범죄 행각에 직접 가담자는 아니지만, 우리 또한 미필적 고의의 태무심한 방관자로서 이 책에 덜미 잡혔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진상의 아주 작은 일부나마 감지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느낀다면 우리의 질병 같은 무기력과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죄의식은 어느 정도 탕감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매우 침착한 문체와 설명이 필요 없는 사진으로 인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책이지만, 무서운 책이라 말해도 된다. 이 부드럽고 무서운 책을 만들어내는 데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 우리를 공감으로 눈시울 적시게 만든 상처받은 강안 사람들, 강을 지키는 것을 본업으로 받아들인 이 나라 구석구석에 질경이처럼 굳세게 버티고 있는 여러 환경운동가들에게 우리는 결국, 빚졌다.

우리 산하가 지금 격심하게 고통 받고 있으므로, 고통의 현장이 잘 담겨 있는 이 책을 서둘러 구입해 살피고 널리 퍼뜨리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 의무다.


'프레시안 books'의 서평위원인 최성각 작가가 쓴 이 글은 <흐르는 강물처럼>에 '추천의 글'로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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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십 년 동안에 세계 경제는 심오한 변환을 겪었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금융 영역에서 발생한 극적인 변화일 것이다.

금융 거래의 규모와 중요성 모두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왔으며, 금융 시장과 이 시장에서의 행위자들은 경제에서 점점 더 지배적인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 결과, 이제 금융 부문은 단순히 우리의 경제 활동이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보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정하고 구성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금융 정보와 지식은 "부자 아빠"와 "가난한 아빠"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서점의 경제 코너에는 금융 수익률을 보장하는 다양한 지침을 가르치는 책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차현진의 <숫자 없는 경제학>(인물과사상사 펴냄)은 그런 '속물학'으로서의 경제학이 아니라 '물질생활에 대한 철학'으로서의 경제학을 '문·사·철(文·史·哲)'에 기초하여 개진하고 있다.

"문(文)이란,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장르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나 의지를 말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파토스(pathos)의 영역이다. 이에 비해 철(哲)은 논리와 사상,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로고스(logos)의 영역이다. 사(史)는 사회의 배경이나 제도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는 사회적 관습 또는 사회 구성원의 기질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와 일맥상통한다." (머리말, 8쪽)


▲ <숫자 없는 경제학>(차현진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인물과사상사
이 책은 경제 이론과 제도에 담겨있는 치열한 논쟁과 반목의 사회적 배경을 다룬다. 그러나 "인물·철학·열정이 만든 금융의 역사"라는 부제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런 내용을 관계된 사람의 내면세계를 통해서 전달함으로써, 무미건조할 수 있는 경제학설사에 생동감을 줘 이론과 역사가 잘 버무려진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화폐란 무엇인가"라는 논쟁적인 주제로 시작해서 중앙은행의 존재 근거를 도출하고(1~2장), 한 은행가를 통해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의 성장 과정을 조명함으로써 금융 혁신의 비판적 해석을 제공하며(3장), 뉴딜 개혁 시기 중앙은행법 개정 과정에서 나타나는 재무부와 중앙은행의 갈등을 통해 중앙은행의 독립성 획득 과정을 보여준다(4장).

특히 6장에서 금융 시장의 효율적 작동에 대한 믿음을 맹신의 수준까지 밀고 나간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철학적 배경은 매우 흥미롭다. 그의 미국적 객관주의는 인간의 의식과는 별개의 객관적인 실체가 존재한다는 철학사조의 한 아류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이기적 행동을 옹호하는 시장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논리적·철학적 기초를 제공했다.

이 6장에서는 작은 정부, 규제 완화, 시장의 자율, 개인의 이기심 등을 옹호한 시장주의가 왜 "개똥철학"인지를 자세히 살핀다. 이런 부분을 보면서, 금융 시장 및 경제가 작동하는 원리로서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던 시장주의가 최근의 금융 위기로 그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 즉, 책 전반에 '문·사·철(文·史·哲)'에 기초하여 전개된 풍부한 내용을 관통하는 핵심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으로 보인다. 금본위제 하에서 화폐의 발행은 존재하는 금의 양에 구속되는데 반해서 법정 화폐(fiat money)는 그러한 제약이 없기 때문에 화폐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며 그 안전장치가 바로 독립된 중앙은행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따라 한국은행의 탄생과 독립성을 획득하는 과정에 가장 많은 지면이 할애되고 있다(8~10장). 최초의 한국은행법을 두고 한국은행 측의 위법과 로비 의혹을 제기한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장관을 구체적 근거를 들어 조목조목 반박하는가 하면, 군사 정권에 대항해 한국은행 기능 축소에 반대한 제7대 한국은행 총재 민병도의 삶도 자세하게 소개한다.

최근 이명박 정부에서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 기획재정부 관료가 10년여 만에 참석함에 따라 한국은행 독립성 훼손 논란이 일기도 했고, 경기를 부양하려는 정부 정책의 압력에 굴복하여 금리 인상 시기를 놓쳐서 인플레이션 문제가 심각해졌다는 비판이 한국은행 총재에 집중되기도 하였다.

이명박 정부의 포퓰리즘 단기주의가 가져오는 폐해를 예방하기 위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이지만,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누구로부터의 독립성이며 무엇을 추구하기 위한 독립성인가는 매우 논쟁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중앙은행의 독립이 과연 최선인가?

통화 정책을 추진하는 금융통화위원회는 한국은행 3인, 정부 2인, 재계 2인 추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금융통화위원회의 의사 결정이 이자율이나 환율과 같은 거시 경제 변수뿐만 아니라 나아가 실업률과 소득 분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정부로부터의 독립뿐만 아니라 시장, 재계로부터의 독립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구조에서 시장이나 재계에 프렌들리(friendly)한 정부의 경우 금융통화위원회의 의사결정 내용은 불 보듯 뻔하다. 이뿐만 아니라 독립성이 확보된다고 하더라도 중앙은행의 목표가 현재와 같이 물가 안정에만 지나치게 맞추어져 있다면, 금융 시장의 과도한 과열과 붕괴로 인한 경제 전반의 불안정과 고통은 고스란히 취약 계층에 전가될 가능성이 크다.

중앙은행의 독립이 누구로부터의 독립인지 그리고 무엇을 위한 독립인지에 대한 논쟁 지점만 유념한다면, <숫자 없는 경제학>은 현상 분석에만 집중하는 화폐·금융 경제학 교과서보다 풍부한 논의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경제학은 돈을 넘어선 것을 탐구하는 철학"이며 "자신의 범위를 확장해서 새롭게 정의된 경제학"의 등장을 기대하는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는 독자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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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 "언젠가 그대가 머물 시간들"은 죽음의 시간이나 열반의 시간이 아니라 사랑의 시간을 말한다. 너무나 그리운 시간이다. 외우기 쉽지 않은, 그러나 유한한 삶 속의 궁극적인 것들을 떠올려 보게 하는 이 제목을 보자 이런 문장이 생각난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 것과도 같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죽어가는 한 여인이 있다. 거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우렁차게 방귀를 뀐다.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친다. 방귀를 뀔 수 있다니 나는 아직 살아있는 거야! 이 글을 읽고 나서 이 일화를 이렇게 바꿔 보았다. '사랑을 할 수 있다니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거야!'


▲ <언젠가 그대가 머물 시간들>(최재봉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최재봉의 <언젠가 그대가 머물 시간들>(한겨레출판 펴냄)은 영원히 정열적인 사랑이란 없고 모든 사랑은 절정과 추락을 겪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저자가 그려낸 한국 문학 속 사랑의 풍경이다. 그러나 영원하고 절대적인 사랑이 존재함을 믿지 않는 태도가 곧바로 사랑의 허무함, 부질없음, 체념을 지지하는 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그보다는 차라리 고통과 시련이 없는 사랑을 믿지 않는 쪽에 가깝고 사랑은 낭만적 유토피아적 환상이라기보다는 살아있게 함, 견디게 함, 약속하게 함, 다짐하게 함,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미래를 꿈꾸게 함, 즉 타인으로부터 나에게로 오는 '생명'이라고 믿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이 글에 나오는 서른 두 개의 사랑 이야기는 사랑 자체보다 삶을 생각해보게 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사랑이 비록 칼날과 가시를 예비해 두었더라도 그 길을 따라가라"는 칼릴 지브란의 말을 들어 "삶의 진실에도 빛과 어둠, 영광과 굴욕이 존재하듯, 사랑에서도 밝고 화사한 것만을 좇으려 해서는 반편이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일그러졌어도 있는 그대로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부름을 따라 가라고, 그러면 길이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것이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일 것이다. 저자가 이 말을 한 이유는 쉽고 화려한 것만을 좇는 세태를 비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은 나 혼자선 꿈 꿔 볼 수도 이룰 수도 없는 또 하나의 놀라운 가능성이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 뭘까? 뭐라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려고 수없이 시도해도 결국 그 외엔 다른 뭐라고 어떻게 불러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사랑은 좋은 만남과도 사귐과도 연애와도 다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비인간적이고 불안할수록 사랑은 절박하고 매혹적이다. 사랑이 있는 한 우리 사회에 대해 쉽게 절망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일 것 같다.

그래서 가난한 사랑, 이루어지지 못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보다 "시험대에서 분석하면 모든 사랑은 다 가짜로 밝혀진다"는 은희경 소설 속의 사랑이나 마치 연금 보험을 들듯이 조건을 따져 결혼하려는 정이현 소설 속의 사랑이 더 초라하고 비참하다. "우리 시대의 사랑이란 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개인의 욕구를 일일이 통제하는 시장이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패턴을 반영할 수밖에"(엘리자베스 벡) 없더라도 우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 고유한 것, 유일한 것, 내 손으로 만지고 접촉할 수 있는 것, 내 내부로부터 간절히 원하는 것,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이름이나 성별, 직업과 신분같이 사회가 나를 규정하는 온갖 것들 말고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랑은 반란이고 저항이고 새로운 시작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것은 왜 사랑이 아닌가?'라는 부제 하에 실린 글들이 크게 와 닿았다. 이 질문이 '이것이 사랑이다' 보다 사랑에 대해 훨씬 많은 말을 한다.

'이것은 왜 사랑이 아닌가?'에는 공선옥의 단편 <지독한 우정>이 나온다. 이 단편은 "최악의 조건에서 최선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화자인 스무 살 아가씨 수정의 어머니는 뇌성마비 장애인이고 어머니의 남자 친구 아저씨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전다. 셋은 어느 날 주문진으로 여행을 간다. 다리가 불편한 아저씨는 수시로 쉬어야 하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저씨의 다리를 힘껏 주무른다.

그렇게 도착한 주문진의 찜질방에서 그들은 이런 말을 듣는다. "웬 병신들이 지들도 사람이라고 육갑을 하고 있다냐. 나 원 참 둘이 보듬고 오들오들 떨고 있고만." 다행스럽게도(?) 이 말은 수정 어머니 일행을 두고 한 말은 아니고 왜소증 여인을 향한 말이었다. 한밤의 찜질방에서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는 것은 다반사이다. 그러나 '그것도 장애인이 하면 징그러운 일이 되는구나'라고 수정은 생각한다. 이 깨달음이 어떤 일을 불러일으키는가?

사랑은 모든 일의 끝이 아니다. 사랑에서 모든 일이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동사다. 행동하고 변화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동사다.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스 벡은 언젠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1990년대 이전에 사랑은 명사이거나 동사였다. 그러나 사랑은 점점 더 사랑 중독자나 사랑 상용자처럼 형용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 사랑이 형용사가 되었다는 것은 사랑이 이제 무언가에 종속되고 무언가를 꾸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닐까? 그러나 사랑이 동사라면, 혹은 명사라면 그 때 사랑은 하나의 구체적이고 고유한 실재-비록 그것이 불확실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할지라도-를 지칭하고, 이 실재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계를 이어주고, 이 이어짐에서 새로운 '나'와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이런 이유로 사랑이 끝나지 않는 성실한 노력과 움직임이란 것을 잊는다면 결국 우리는 사랑을 잃고 나를 잃고 세계를 잃어버릴 것이다.

저자는 "사랑은 그만큼 강렬한 것이다. 그러니, 사랑 앞에서 힘자랑 하지 말자. 다친다!"라는 말로 이 글을 끝낸다. 이 말은 사랑 앞에서,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는 광인이요. 바보요. 속수무책의 패배자요 약자라는 말이 아닐까?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꿔보고도 싶다. 사랑 앞에서 힘자랑 하지 말고 대신 '사랑으로' 힘자랑 하자. 사랑의 힘으로 살자.

사랑은 언제 힘을 발휘하는가? 타인의 초라함, 비굴함, 술수, 온갖 인간적 약점, 패배, 불명예, 죽음, 지루함까지도 이겨낼 때 그 힘은 빛나는 것이 아닌가? 사랑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나조차도 잃는다.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싸우는 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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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명문대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이전에도 많았다. 다만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공계 엘리트들이 모인 명문 대학에서 학생 4명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제야 사람들은 뭔가가 잘못됐다고 소리치기 시작한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루만져야 하는 걸까?

저마다 애도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지적한다. "서남표 총장의 개혁을 중단해야 한다", "경쟁 일로로 치닫는 대학 교육 문화 전체의 문제다"라고. 사회비평가들은 그렇게 카이스트 학생들의 죽음을 사회 비판을 위한 제단에 올린다. 한편, 반대쪽에서는 자살은 개인의 문제라며 '나약하다'는 평가로 망자를 질타한다. 경쟁 구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두 시선이 놓치고 있는 것은 '사람'이다. 자살에까지 이르게 한, 고유한 경험과 고통을 보려 하지 않는다. 글 쓰는 정신과 의사 하지현(건국대학교 교수)은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한 명쯤은 그 안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한다"며 "그것이 정신과 의사들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그는 진료실에서뿐만 아니라 몇 권의 저서와 방송 활동을 통해 현대인의 심리를 분석해 왔다.


▲ <심야 치유 식당>(하지현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심야 치유 식당>(푸른숲 펴냄)은 불면증, 폭식증 등 흔한 '도시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등장시킨 픽션이다. 전직 정신과 의사였던 철주가 '노 사이드'라는 바(bar)를 열어 그들을 맞는다. 회사에선 유능한 인재로 추켜세워지지만 뒤돌아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 자전거에 올라탄 것처럼 멈추면 쓰러질 줄 아는 사람들이 손님으로 찾아온다. 철주는 그들을 인간 대 인간으로 치유해주고자 한다.

"당신, 문제는 너무 열심히 산다는 것이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책은 <심야 치유 식당> 시리즈의 시작일 뿐이다. 이번엔 빡빡한 일상에 지친 20~30대 직장인들을 타깃으로 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노인부터 청소년까지 후회부터 사랑까지 다양한 인물과 테마가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한창 열심히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비극이 닥친 시기, 고군분투하는 모두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다는 의사 하지현을 만났다. 다음은 지난 11일 오후 건국대학교 근처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의 주요 내용.


▲ 하지현 건국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카이스트에서 지난해 12월부터 현재까지 학생 4명과 교수 1명이 자살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지현 : 자살 이유를 예단할 수는 없다. 결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일이 동시에 겹쳐 일어나면서 감정이 어그러지고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는 거다. 그러나 각기 다른 한 명 한 명의 자살 이유 말고, 이런 '현상'이 일어난 이유를 보면….

카이스트는 기본적으로 고립돼 있다. 일반 고등학교 출신 비율이 많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구성원 대부분이 과학 고등학교를 나온 학생들, 교수들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비슷한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게 흔들렸을 때 문제가 된다. 마치 적벽대전 같은 거다. 안전해 보이지만 작은 불씨가 한 번 붙으면 순식간에 퍼지는 구조다. 이질적인 개인이나 단위가 섞여 있으면 불씨를 막아주는 효과가 있는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뭐가 하나 잘못되면 '이럴 수도 있어' 하고 넘어가는 게 잘 안 된다.

두 번째로는 이 친구들 특성이, 이성적인 부분은 과도하게 발달해 있는 반면 감정을 다루거나 통제하는 능력에선 상대적으로 미숙할 가능성이 크다. (학교 공부 외에) 다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삶에 있어서 애티튜드(자세)가 단 하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열심히 하면 돼, 그래서 성공하면 돼'라는 식이다. '천천히 가면 돼', '가기 싫은 길이면 가지 않아도 돼'라는 선택항은 별로 고려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도 오히려 뛰어난 학생들이 많은 학교 내 자살률이 높다고 하는데, 1위가 MIT이고 2위인 하버드 대학과 30% 정도 차이가 난다고 들었다.

그런 사람들한테, 정확한 이유는 본인도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자살'이라는 것이 생각할 수 있는 옵션으로 들어온다. 자살이 고통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 주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선택 가능 항의 범위가 휴학, 자퇴 정도에서 갑자기 확 늘어나 버린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는 것이다.

서남표 총장이나 카이스트 교수들은 차등 등록금제나 영어 수업이 자살 이유가 되지 않을 거라고, 일상적인 스트레스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작은 변화들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율을 점점 높인다. '옆으로 조금밖에 안 밀었어'라고 해도 전체적으로는 기준선 밑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다.

프레시안 : 이번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카이스트 안팎이 분주해졌다. 제도 개선과 별개로 교수들이 수업을 휴강하고 학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다른 학교에서 비슷한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전문 상담사를 고용하려는 추세다. 상담을 통한 문제 해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프레시안(최형락)
하지현 : 전문 상담사를 많이 고용한다고 해결될 문제일까? 다소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누구한테 나의 어려움을 털어놓는 데 익숙해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플랜으론 가능하겠지만 단기적으론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본다. 지도 교수 면담을 늘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에게 지도 교수 만나는 건 부담스러운 일, 잘 보여야 하는 일인데 약하고 우울한 모습 보여주고 싶겠나. 그래도 학내에서 문화적으로 가능한 방법들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멘토와 멘티 제도, 즉 학내 구성원들을 가까운 상대끼리 1대 1로 이어주는 제도가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엇보다 학생들 숨통을 틔워주어야 한다. 거기서 제도 개선 문제가 거론된다. 등록금 차등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교육 철학도 재고해 봐야 한다. 하지만 모두 서남표 총장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 밖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라기보다 카이스트 내부에서 타당한 방법을 모색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프레시안 : 자살을 사회 구조의 산물로 보는 사람들은, '개인'에 주목하는 심리학적 접근을 비판한다. 심리학자로서 자살하는 개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지현 : 자살은 결국 매우 다양한 층위에서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에밀 뒤르켐 식으로 사회적 영향의 산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고 정신과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질환에 의해 발생하는 개인적 문제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 거다.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다.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정신과 의사로서 나는 그래도 '사람'을 보려고 한다. 특히 자살을 선택한 사람이 갖고 있었던 욕망 내지는 판타지가 무엇이었는지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살 시도를 했던 사람들과 인터뷰 해 보면 특징적인 판타지가 있다. 도피 욕구, 자신에 대한 징벌 욕구, 영화 <박하사탕>의 김영호와 같은 리셋 욕구, 종교적인 부활 욕구, 또 누군가에게 평생 죄책감을 안겨주고 싶다는 복수심… 이렇게 다 다르다. 그들을 자살로 이끈 기제를 알 필요가 있다.

전체적인 자살률을 떨어트리기 위해서는 역시 (사회) 시스템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자살이 사회 이슈가 되어서 누구나 떠들 때마다 걱정되는 게 하나 있다. 아까 말했듯이 개인이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자살을 선택 가능한 옵션으로 둘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나(개인)의 자살을 막기 위해서라도 자살률을 낮추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마음이 추울 때 가고 싶은 '심야 치유 식당'

프레시안 : 자살을 생각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번 책, <심야 치유 식당>에 나오는 손님들도 자기만의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민수, 징크스의 덫에 빠져 있는 4번 타자 태조, 갑자기 찾아 온 발기부전에 삶의 의욕을 잃은 초밥 요리사 상진 등이다. 등장인물들이 실제 환자를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현 : 지금까지 만난 환자가 몇 만 명은 될 거다. <심야 치유 식당>에 나오는 인물과 1대 1로 맞아떨어지는 인물은 없지만, 그분들의 모습이 유형별로 반영됐다고 보면 된다. 실제 환자들 말고도 영화나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이들의 전형성을 섞어 가공의 인물들을 만들어냈다.

주인공 철주가 손님들에게 제시하는 솔루션은 사실 내가 진료실에서 직접 행하는 방법들이다. 물론 책에서처럼 누군가의 집에 가거나 여기 저기 데리고 다닐 수는 없지만 '상상해 보라'고 한다. 여기엔 내 판타지도 존재한다. 내가 실제로 제시하는 솔루션들을 직접 동적으로 해 보면 어떨까 하는 판타지.

프레시안 : 철주는 의사 하지현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전직 정신과 의사인 그는 바(bar) '노 사이드'를 차려 자영업자로 변신했음에도 끊임없이 '의사 노릇'을 한다.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그를 통해 충족시키고픈 판타지가 있었다. 의사로서 의료의 영역이 갖는 한계를 극복해보고 싶다는 개인적 환상, 그리고 의사를 의료 영역에서 만나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고 싶다는 일반인의 환상이 만나는 접점을 찾아보고 싶어 픽션을 썼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에 가는 건 꺼리면서도 정신과 의사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판타지를 갖고 있더라. 나 역시 정신과 의사라는 현실의 정체성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고. 의사가 병원 바깥에서 의료 시술하면 불법이지 않나. 그래서 '전직 의사 철주'라는 안전판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프로이트 심리학의 관점으로 보자면, 우리가 보통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증상'도 타협의 결과물이다. 나름 어려움과 싸운 결과로 그만큼의 증상이 생긴 거다. 그 사람을 견디게 하는 증상을 가위로 잘라내듯 없애버리면 오히려 와장창 무너질 수도 있다. 모든 증상엔 그런 순기능이 있다. 먼저 그걸 인정하고, 왜 이 부분에 빠져 있을까에 대한 원인을 찾는다. 증상이 왜 그렇게 기능하게 됐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그 다음이 바로 치료다. "얘(증상) 말고도 다른 걸 사용해도 괜찮아. 위험하지 않아"라고 설득하고 이해하게 만드는 거다.

이 과정이 꼭 의료 시스템 안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생기면 의사를 찾기보단 책을 찾는다. 혼자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팁을 주고 싶었다.

프레시안 : 신선한 시도다.

하지현 : 예전부터 심리학자들이나 정신과 의사들의 천편일률적인 글쓰기 구조에도 반감을 갖고 있었다. '진료실에 이런 사람이 왔다, 이런 문제가 있더라, 이런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이런 이론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이렇게 봐야 한다'는 식이다. 그래서 <관계의 재구성>(궁리 펴냄)에서도 영화라는 틀을 도입했고, 앞으로도 새로운 형식을 고민할 것이다.

특히 어떻게 하면 재밌게 읽힐까를 고민한다. 보통 '좋은 기획은 두 줄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나. 대박 나는 영화 시나리오는, 작가가 승강기 안에서 프로듀서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심야 치유 식당>은 "전직 정신과 의사가 심야 식당 하는 얘기야. 만화책 <바텐더>랑 비슷해"라고 하면 사람들이 한 번에 다 알아 듣는다.

제목은 어디서 본 듯하다는 거, 안다. (웃음) 사실 이걸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출판사에서 권유했다. 내용은 <심야 식당>보다는 <바텐더>에 가깝다. <심야 식당>, <바 텐더>, <공중 그네>를 섞어 보면 이 책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태양 아래 새로운 건 없다지만 섞다 보면 새로운 게 만들어진다고 보는 입장이다. 어디서 본 듯 익숙하면서도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누구도 하지 않았던 것들, 그런 게 경쟁력 있는 콘텐츠라고 본다.


ⓒ프레시안(최형락)

글 쓰는 의사, TV 나오는 의사

프레시안: 의료 시스템 바깥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욕망을 얘기했다. 저자, 신문사 칼럼 필자, 방송 코멘테이터 등으로 활동하며 대중과 소통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인가?

하지현 : 그럴 수도 있다. 그런 활동이 정신과 의사로서 사회적 책무라고 생각한다. '신정아가 <4001>을 왜 썼을까요', '왜 경쟁 지상주의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열광할까요' 같은 질문에 답하는 일들은 본업에서 소득을 올리는 데 아무 도움도 안 된다. '명의'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내게 특별한 치료법이 있습니다!"라고 광고하면 모를까. (웃음) 한마디로 '접객'과는 하등 관계없는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 한 명은 사회학적인 접근, 정치 공학적인 비평의 틈바구니에서 '그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지적해 주어야 한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행동에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게 정신과 의사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활동은 내게도 많은 도움을 준다.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이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훈련을 시켜주니까. 사안을 내 언어로 소화하고, 다수가 잘 알아듣도록 설명하는 것만큼 좋은 학습법은 없다.

프레시안 : 하고 싶어도 글 쓰는데 익숙하지 못해서 과외 활동을 하지 않는 분들이 더 많다. 하지현이 책, 칼럼 등 글쓰기를 지속하는 방법이 있다면?

하지현 : 기본적으로 글쓰기를 좋아한다. 방법이라면 흔히 말하는 다독(多讀)·다작(多作)·다상량(多商量)이다. 특히 책을 많이 읽는다. 책은 만 원짜리 한 장으로 타인의 지적 활동의 총화를 얻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책을 고를 때는, 한 우물을 깊이 파기보다 3:3:3 원칙을 지킨다. 3은 내 본업을 위한 전공 관련 서적, 3은 책을 내기 위한 자료들, 3은 오로지 재미를 위해서 구입하는 책이다. 이러면 어느 정도 균형이 잡힌다.

나는 글쓰기를 중국 요리에 비유한다. 중국 요리는 밑 준비는 오래 걸려도 요리 자체는 짧은 시간에 불로 확 볶아 낸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로 자료 조사, 구상, 인터뷰, 구조 만들기 같은 밑 준비만 잘 되어있으면 막상 쓰는 건 금방이다. <심야 치유 식당>도 주말만 들여 2~3달 만에 썼다. 어떤 소설가가 픽션은 첫 문장이 가장 어렵고 그 이후엔 펜대가 알아서 움직인다고 그랬는데, 나 역시 처음엔 마음 가는대로 즐기면서 썼다.

"나는 예외적인 경우다"

프레시안 : 요즘 심리학 서적 소비 추세를 보면, 자기 계발서에 가까운 긍정 심리학이 잘 팔린다. 독자들이 왜 이런 책에 끌린다고 생각하는가.

하지현 : 과거의 자기 계발서는 조직 내에서 처신하는 방법, 시간을 효율적으로 잘 쓰는 방법에 치중했다면 요즘 유행하는 긍정 심리학 자기 계발서는 '경쟁력 있는 사람이기 위한 마음가짐'에 치중한 책들인 것 같다. 이런 걸 보면서 '이제 믿을 거 나밖에 없다는 얘기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조직이나 공동체보다는 개인에 집중한다. 사람들이 '나라도 좀 튼튼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또 기대치를 많이 낮추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이건 나쁘지 않은 현상이라고 본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높은 기대치에 다다르려고 아옹다옹 살아왔는데, 지금은 4~50대 남성들에게서조차 삶의 페이스를 늦추려고 하는 경향이 발견된다. 아파트 평수 늘리기, 아이들 유학 보내기에 집착하기보다 자신의 취미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것도 한 번 열심히 살아 봤던 사람들에게 국한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얘기다. <심야 치유 식당> 첫 번째 이야기 메인 카피가 "당신, 문제는 너무 열심히 산다는 것이다"인데 20대 초중반 젊은 세대는 공감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직 열심히 살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진료실 찾는 사람 중엔 '공무원 준비 중이다' '언론사 입사 시험 준비 중이다'라고 '준비 중' 팻말을 내건 친구들도 많다. 거의 다 부모님 손에 끌려온다.

프레시안 : 정신의학이라는 학문의 매력은 무엇인가.

하지현 : 정신의학의 특징은 최신 내·외 신경과학에서부터 인문학까지를 포괄하는 학문이라는 점이다. 뇌, 약물에 대한 얘기부터 정신분열증 환자의 입원율을 줄이기 위한 사회 정책이라든가 통계 분야까지 아우른다. 대체 정상은 무엇이고 비정상은 무엇이냐 하는 인문학적인 성찰도 요구한다. 그렇게 광범위하게 공부할 수 있고 적용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내 활동을 보고 정신과 의사들은 다 이럴 거라고 판단하면 안 된다. 나는 굉장히 극단에 서 있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정신과 학문 자체는 생물학적 관점에 입각한 '의학'이다. 물론 나도 진료를 할 때는 의료 서비스를 행하는 의사로 임한다. 다만 언론을 통해, 책을 통해 인간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활동이라든가, 그로 인해서 한국 사회에서 갖게 된 역할은 일반적인 '정신과 의사'와 차이가 있다는 거다. 청소년들이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웃음)

프레시안 : 뇌 과학 분야 학자들은 프로이트 심리학을 비과학적이며 문학적 은유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프레시안(최형락)
하지현 : 뭐, 1940~50년대부터 나오던 얘기다. 아직도 그런 얘기 하는 분들은 계속 그러시라고 해라. (웃음)

오히려 2000년대 초반부터 반대되는 경향이 생겼다. '신경정신분석학'이란 학문이다. 과거에 기껏해야 '왼팔 움직이면 뇌 어느 부분이 움직이고 오른팔 움직이면 뇌 어느 부분이 작동하고', '사랑을 느끼면 며칠 동안 뇌 어디가 변하고' 하는 1차 방정식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던 뇌 과학이 테크놀로지가 발달하면서 새로운 프레임을 필요로 하게 됐다.

좀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 거다. 뭘 갖고 얘기할까 하다 보니까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다양한 개념들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정신분석학 개념들이 입증도 꽤 되어 있고, 고차원적이기도 하니까. '전이'라는 게 무엇일까, '저항'은 무엇일까, 무의식이란 게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 (뇌 과학자들로 하여금) 이런 문제에 도전하게 할 만한 좋은 개념 덩어리가 정신분석학에 있었던 것이다. 마치 가속기 개발하는 사람들에게 물리학자들이 만든 '쿼크'라는 개념이 필요한 것처럼, 그게 있어야만 말이 되지만 아직 증명을 하지 못한 개념들이 있는 거다. 그게 정말 맞나 확인해 보는 거다. 이런 경향이 뇌 과학에서도 생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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