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우주>(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펴냄)는 움베르토 에코와 장클로드 카리에르가 책을 주제로 나눈 대담집이다.
이탈리아 사람인 움베르토 에코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장미의 이름>을 비롯한 몇 권의 소설, 그리고 자신의 전공인 기호학과 문화 비평 등 거의 전방위적인 글쓰기로 호가 난 지식인이지만, 프랑스 사람인 장클로드 카리에르는 비교적 생소한 인물이다. 소개에 따르면 그는 1931년생으로 소설가이자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서 <양철북>,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 80여 편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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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우주>(움베르트 에코·장 클로드 카리에르 지음,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
그러나 그가 이 대담에 불려 나온 것이 시나리오 작가로서라기보다는 에코에 못잖은 애서가이자 책벌레로서임은 물론이다. 경탄할 만한 박학과 재치, 그리고 생각의 깊이를 보여주는 두 사람의 대담을 프랑스의 에세이스트이자 저널리스트인 장필리프 드 토낙이 사회자로서 중간에서 이끌었다.
유럽의 두 지성은 우선 인터넷과 전자책, 영상 문화의 발흥으로 위기에 몰린 것처럼 보이는 책과 글의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말문을 연다. 막연한 짐작과 달리 인터넷이 글과 책의 적이기는커녕 오히려 무엇보다 믿음직한 아군이라는 주장은 책 동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복음'처럼 들릴 법하다.
"인터넷 덕에 우리는 알파벳의 시대로 되돌아왔습니다. (…) 컴퓨터로 인해 우리는 다시 구텐베르크의 우주로 들어왔고, 이제 모든 사람은 글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요. (…) 책은 자신의 효율성을 이미 증명했고, 같은 용도의 물건으로서 책보다 나은 것을 만들어 내기는 힘듭니다. 어쩌면 책을 이루는 각각의 구성 요소들이 변할 수는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 책장이 더 이상 종이로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책은 지금의 그것으로 남아 있게 될 겁니다." (에코)
"오늘날만큼 쓰기와 읽기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한 때는 없었어요. 읽고 쓸 줄을 모른다면 컴퓨터를 사용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요즘 요구되는 글쓰기의 방식은 새로운 기호들과 암호들이 편입되었다는 점에서 옛날보다도 한층 복잡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우리의 알파벳이 확장된 셈이죠." (카리에르)
대담의 후반부에서 사회자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책으로 볼 것이냐 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거니와, 두 대담자가 생각하는 책이 종이책이라는 고전적 형태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전자책을 포함해, 종이책의 기능과 형태를 대행하는 광범위한 범주가 이들이 말하는 책의 우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코가 책을 바퀴라는 불세출의 발명품에 견주는 것은 인상적이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정보 전달의 수단으로서 이 책만큼 효율적인 발명품은 아직 없었습니다. 수백 기가바이트 용량의 컴퓨터라 할지라도 반드시 전원에 연결되어야만 하지요. 하지만 책에는 이런 문제점이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책은 바퀴와도 같은 것입니다. 일단 한번 발명되고 나면, 더 이상의 발전이 불필요한 그런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책의 가치와 효용, 그리고 지속 가능성에 대한 두 책벌레의 '신앙 고백'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소문난 장서가인 두 사람의 책 수집에 얽힌 사연들이다. 각각 희귀본 1200여 권을 포함한 장서 5만 권(에코)과 고서 2000권을 포함한 장서 3~4만 권(카리에르)을 자랑하는 두 사람이 들려주는 자신들과 타인들의 수집 이야기는 어린이용 모험 소설처럼 흥미진진하다.
서구에서 근대적 의미의 책의 '원조' 격인 구텐베르크 성서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48권이 남아 있다는데, 에코는 바로 그 구텐베르크 성서 한 권을 소장하고픈 소망을 털어놓는다. 그는 "오래된 장롱에 구텐베르크 성서 한 권을 가지고 있는 어떤 노부인을 어딘가에서 찾아내는" 꿈을 소개한다.
95살인 그 노부인은 구텐베르크 성서의 가치에 대해 무지해야 하는데, 그 노부인에게 남은 생을 쾌적하게 보낼 만한 20만 유로를 건네고 구텐베르크 성서를 마침내 손에 넣어 집에 가져오는 것까지는 좋다 쳐도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의 앞에는 이제 두 개의 길이 선택을 기다리게 된다.
그 귀한 물건을 확보했으니 그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만 즐기는 것이 하나, 자신의 몫이 된 놀라운 행운을 타인들을 통해 새삼 확인받고자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이 다른 하나다. 전자라면, 그것은 혼자서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 될 것이고, 후자라면 세상의 모든 도둑들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되리라는 것. 결국 절망한 수집가는 자신이 사는 도시의 시청에 그것을 기부하고, 원할 때면 언제나 가서 볼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다. 그러나 그것을 만지거나 쓰다듬을 수는 없게 될 테니, 그것은 박물관에 가서 구텐베르크 성서를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는 것. 해답이 쉽지 않은 딜레마다.
"진정한 수집가는 소유보다는, 찾아 헤매는 행위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법"이라는 에코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도 이해할 만하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뜻이겠는데, 아울러서 "만일 누군가가 진정으로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많은 돈을 쓰지 않고도 도서 수집가가 될 수 있다"(에코)는 말 역시 가난한 수집가에게 큰 격려가 될 법하다.
구텐베르크 성서와 함께 에코가 꿈꾸는 또 다른 수집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언급되었으나 지금은 유실된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들이다. 에코와 카리에르는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를 고대 그리스의 삼대 비극 작가로 꼽는 견해에 짙은 회의의 시선을 던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언급된 다른 작가들의 비극 20여 편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 그 회의의 근거다.
"어쩌면 우리가 간직해 온 작품들은 단순히 아테네 관객들이 더 선호했던 작품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적어도 우리의 눈에는―가장 흥미로운 것은 아닌 작품들일 수도 있습니다." (카리에르)
이런 맥락에서 두 사람이 주목하는 것이 '여과' 과정이다.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은 선택과 여과의 긴 과정"이라고, 대담을 마무리하면서 토낙은 정리하는데, 그런 선택과 여과가 반드시 최상의 판단에 따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대담자들의 생각이다.
카리에르가, 싸구려라고 해서 천대받고 있는 17세기 프랑스의 우스꽝스러운 민중 문학을 주요 수집품으로 삼는다든가, 두 사람 모두 인간의 "오류와 허위의식과 어리석음"에 매혹되어 그와 관련된 책들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문화라는 이름의 여과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여과가 최소한의 양식과 합의에 기반을 둔 선택 과정이라면, '파괴'는 강제적 조처이거나 우연적인 사고를 가리키는 말이다. 서구인들이 중남미에서 자행한 원주민 언어와 텍스트의 말살, 15세기 말 그라나다를 회복한 스페인이 저지른 이슬람 서적 말소, 그리고 진시황의 분서갱유 같은 사례들은 "한번 창조되었던 것을 파괴하려는 열정(이) 우리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충동의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카리에르의 주장에 대한 방증으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이런 의도적 파괴와 달리 도서관과 서재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날려 버리는 화재는 장서 수집가들을 위협하는 또 다른 적이라 할 수 있다. 에코는 자신의 집에 불이 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늘 지니고 있으며, <장미의 이름>에서 도서관이 불에 타는 장면을 그린 것도 그런 불안감과 무관하지 않다고 밝힌다. 역시 <장미의 이름>에서 '도서관에서 벌어지는 살인'의 아이디어를 얻은 곳이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예일 대학의 스털링 메모리얼 라이브러리 도서관이라는 소개도 흥미롭다.
3, 4만 권에서 5만 권에 이르는 장서를 보유한 책벌레로서 이들에게 불가피하게 따라 다니는 질문이 있다. '여기 있는 책들을 다 읽어 보았나?' 하는 질문이다. 그에 대해 에코는 '아시겠지만 난 읽지 않는답니다. 글을 써야 하거든요'라는 농담 같은 대답으로 응수하기도 한다는데, 그보다는 "서재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들"이라는 정의가 한결 효과적인 대답이 될 듯하다. 다 읽은 책들을 증거처럼 과시해 놓는 곳이 서재가 아니라, 앞으로 읽고 싶은 책들을 대기시켜 놓은 곳이 서재라는 뜻이 되겠다.
<전쟁과 평화>를 마흔 살이 되어서야 읽었으며,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은 세 번이나 읽기에 도전했지만 결국 포기했다는 에코의 고백도 흥미롭다. 그럼에도 에코와 카리에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얼마든지 발언할 수 있다'고 입을 모으는데, 얼마 전 방한한 프랑스 비평가 피에르 바야르의 책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핵심이 바로 그런 것이다. 두 사람은 실제로 바야르와 이 책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책의 중간쯤에서 에코는 위대한 걸작들에 대해 어리석은 편집자들이 보인 반응을 몇 소개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 "왜 침대에 누워서도 잠이 들지 못하고 몸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고 있는 누군가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30페이지를 할애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노라는 리뷰,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대해 "이런 작품이 젊은 독자층의 관심을 끌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반응,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대해 "동물들에 대해 쓴 이야기를 미국에서 파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한 답변 등이 그것으로 이 이야기들은 모두 <퇴짜 맞은 걸작들(Rotten Reviews)>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편집자는 각주를 통해 그 책이 열린책들에서 곧 번역 출간될 것이라고 알리고 있는데, 바로 그 책을 한껏 게으르게 번역하고 있는 나로서는 반갑기도 하고 약간 켕기기도 하는 대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