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적만 남은 닭의 날개, 혹은 날개라고 하기엔 보잘 것 없는 팔꿈치에 가까운 펭귄의 날개를 보며 이제 더 이상 날 수 없는 그들의 운명을 탄식한다. 아무리 진화란 정해진 방향이 없다지만, 창공을 가르는 자유 대신에 다소 구차한 무용지물처럼 보이는 날개의 흔적 기관만을 갖게 되다니. 진화의 운명이란 닭이나 펭귄에게 유독 가혹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또한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시선일 것이다. 우리는 펭귄의 행복을 재단할 수 없고, 닭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구병모의 신작 소설 <아가미>(자음과모음 펴냄)는 이런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치명적인 허점을 통쾌하게 파헤치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소설이다.


▲ <아가미>(구병모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행여 우리 인간의 기억 속에 아직 남아 있을 지도 모르는, 아직 자연과 인간 사이의 네트워크가 파괴되기 이전의 흔적 기관. 그 알 수 없는 신비의 이름은 바로 '아가미'다. <위저드 베이커리>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유쾌하게 뛰어넘었던 구병모는 <아가미>를 통해 동화와 소설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 소설은 <인어공주>의 흥미로운 짝패다. 바다에서 태어난 인어공주가 뭍으로 나오기 위해 다리가 필요했다면, 뭍에서 태어난 인어왕자가 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가미가 필요했다. 소년 '곤'은 자살한 아버지의 시체 곁에서 죽기 직전의 상태로 발견되지만 마음씨 착한 노인에게 발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노인의 손자 강하는 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매력의 실체가 귀 뒤의 흉터, 그러니까 '아가미'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퇴화된 숨구멍임을 알아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년 곤의 아가미는 퇴화의 흔적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는 뭔가 다른, 알 수 없는 신비'의 흔적임이 밝혀진다.

어떤 잠수 기구도 없이 마치 동화 속의 인어처럼 물속에서 자유로이 질주하고 새처럼 비상하는 곤. 물속에만 가면 정말 '물 만난 고기'가 되어버리는 곤의 수상한 야행(夜行)을, 강하는 눈감아주는 척하면서 이용한다. 곤의 기이한 외모 때문에 강하와 노인은 곤의 주민 등록조차 할 수 없고, 학교에도 보낼 수 없다.

그러나 '학교'라는 시스템에 물들지 않고, 법과 규범의 질서에 길들여지지 않은 곤은 자기만의 또 다른 세계를 피워 올리게 된다. 평생 인간을 피해 다녀야 한다고 믿었던 곤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을 만나고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걱정하면서 점점 자신의 운명을 자기만의 빛깔로 직조해내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인어공주>의 아름다운 데칼코마니다. <아가미>는 치밀한 신화적 패턴과 동화적 짜임새를 지니면서도 현실과의 치열한 갈등을 버텨내는 소설의 역학(dynamics)을 함유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신기하게도 우리가 오래 전에 잊고 있었던, 우리 내면에 아직 살아남은 동화의 흔적 기관이 만져진다.

<아가미>는 우리가 읽었던 모든 동화를 마음속에서 다시 쓰기 하고 싶게 만드는 소설이다. 작가 구병모는 투명한 소설의 프리즘으로 동화의 단순한 내러티브를 천변만화한 상상력의 무지개로 확산시킨다. 그렇게 <아가미>는 신화와 동화와 소설의 유쾌한 하모니를 연주해낸다.

곤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굴레에 진정 속박되지 않는다. 그 어떤 타인의 욕망, 타인의 명령에도 길들여지지 않은 곤. 시간이 갈수록 아가미뿐 아니라 아름다운 비늘까지 가지게 된 곤은 사회화될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기에 오히려 사회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그를 '인간'이라고도, '물고기'라고도 규정할 수 없지만, 그는 이미 그 모든 것이며, 인간을 넘어선 인간, 물과 뭍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가 된다. 학교나 또래 친구는 물론 주민 등록조차 없는 곤. 그렇기 때문에 곤은 그 어떤 편견도 없이, 그를 위협하는 타인의 광기와 분노조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현실 사회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흉터, 불가해한 돌연변이로 보이는 아가미. 그 이질적인 존재는 바다를 닮은 소년 곤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 부활을 위한 희망의 날개가 된다. 아가미라는 거대한 흉터를 지닌 소년 곤은 물과 뭍의 경계를 뛰어넘는 존재, 죽음과 삶의 경계를 뛰어넘은 존재, 사랑과 증오의 경계를 뛰어넘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아가미>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동화의 상상력을, 인류가 잃어버린 자연과의 교감을, 소설이 잃어버린 신화적 꿈을 되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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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있다. 우연한 동행, 한 여자는 "저는 아프리카에 가요"라고 묻지도 않은 그녀의 이야기를 한다. 다른 여자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된 딸 이야기를 꺼낸다. 한 여자는 잠비아의 커다란 폭포와 그 밑에 지을 자신의 미용실 이야기를 하고, 또 다른 여자는 딸을 잃은 친구의 이야기를 한다.

그녀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비에 젖어 한기가 든 그녀들의 몸은 서로가 나누는 체온으로 조금씩 따뜻해진다. 이제 그녀들의 몸은 조금 따뜻해졌고, 아직 비 내리는 밤길, 우산은 없지만 서로 나눈 체온이 있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허니, 그녀들이 나눈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었다 해도 무에 그리 대수로울 것인가.

'아직은 밤', 어둔 밤길을 정처 없이 헤매는 그녀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헛된 희망, 혹은 무해한 기만이라도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아직은 밤'). 윤영수의 <귀가도>(문학동네 펴냄)의 인물들은 모두 무언가를 간신히 부여잡고, 겨우겨우 살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철학잉어'의 석형은 가족도, 친구도 없이 잉어와 말을 나누는 데 골몰해 있고, '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의 혜순은 평생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눠 본 적도 없는 친구의 오빠와 사랑에 빠졌다는 환상으로 남편의 학대를 견디며 살아간다.


▲ <귀가도>(윤영수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귀가도>에는 사실 집은 없다.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일뿐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따뜻한 보호 고치나 안식처 따위는 없다. 존재하는 것은 가학과 피학의 관계나, 무관심, 타인의 고통을 구경거리로 만들고야마는 온정을 가장한 적선의 세계뿐이다. '철학잉어'의 석형의 외로움과,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의 유순봉의 무기력함은 이 세계에서는 가장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일 뿐이다.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의 유순봉이나 '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의 혜순은 윤영수의 평판작이었던 이전 작품 '착한 사람 문성현'의 '착한 문성현'을 연상시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귀가도>에 대한 서평들이 주로 착한 인물이나 선함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착한 사람 문성현이 선천적인 장애로 고통 받는 인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순봉도 정신 지체로 불운한 삶을 살아가고, '아직은 밤'의 주인공은 교통사고로 실명한 딸의 자살로 고통 받고 있다. 이 인물들이나 상황들은 자연스레 '착한 사람 문성현'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귀가도>가 온전히 이전 작품의 반복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귀가도>의 작품들에서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내맡겨져 있다. 어떤 인물들은 선천적 장애나 신체적 질병처럼 말 그대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에 처해있다면, 또 다른 인물들은 비합리적인 상황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윤영수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두 가지 주제를 반복해서 탐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자신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인간들이 어떻게 그 상황을 견디며 생을 계속해나가는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학과 피학의 관계, 혹은 노예적 삶에 길들여진 인간의 무기력함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할 것이다.

딸을 잃고 비탄에 빠진 여자는 남편이 과수댁과 바람을 핀다는 의도적인 오해를 고집하며 부부 관계의 파탄을 방기한다.('아직은 밤') 자신의 집을 차지해버린 낯선 타인의 폭력 앞에서 착한 유순봉은 "전과자라고 다 나쁜 사람은 아니다"라며 폭군과의 동행을 방치한다. '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의 혜순 역시 다른 남자에 대한 환상적 사랑에 기대어 남편의 폭력과 외도를 묵인한 채 살아간다.

윤영수의 주요 관심은 '착한 사람'에 대한 탐구이다. <귀가도>의 여러 작품 속에서 그 착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허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 '착한 사람들'의 삶은 사도-마조히즘적이라 할 만큼 폭력에 대한 무기력과 방치, 묵인, 자발적 복종으로 얼룩져 있다. 물론 <귀가도>는 이런 문제에 본격적으로 집중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윤영수는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무기력함에 빠진 인물들이 그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기대는 거짓말이라든가, 헛된 희망, 무해한 기만 같은 것들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무기력함은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 누군가는 잉어와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는 보낼 수 없는 연애편지에 매달리고, 누군가는 갈 수 없는 아프리카에 관한 무해한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이 사랑과 환상과 거짓말은 때로는 무해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삶을 곤궁에 빠뜨리고, 자신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윤영수가 보기에 누구도 이 기이한 집착과 희망과 기만을 비난할 권리가 없다. 그러한 삶을 무기력하다고, 노예적이라고, 안타깝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그러한 삶에 대한 연민도 배려도 아니다.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의 유순봉에게 왜 폭군 기천웅을 쫓아내지 않느냐며 다그치는, 동정과 연민을 가장한 방송국 피디(PD)가 유순봉에게는 결국 기천웅과 마찬가지의 "강한 인간"이듯이 말이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여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법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따듯한 안식처가 없는 이들에게는 그 무언가는 더 절실하지 않으랴. 그게 비록 말하는 잉어같이 어처구니없는 것이라 해도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리고 윤영수는 아마 우리 삶에서 문학이라는 것이 말하는 잉어나 마찬가지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말하는 잉어를 사랑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거나, 아니면 결국 거짓된 기만의 시장에 팔려버리는 일일지라도, 그 잉어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일인 것처럼. 오늘날 문학을 사랑한다는 일은 이와 다르지 않은 일인지 모른다. 집이 없는 세계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귀가도>의 인물들의 발길처럼, 위안이 없는 세계에서 기만적인 위안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문학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설사 기만적인 위안일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생의 위기를 가까스로 견뎌나가기 위해 애를 쓸 힘을 얻는다. 그러나 <귀가도>가 놓치지 않고 있듯이 그 위안에 대한 집착은 기만이기에 자신의 노예적 삶을 공공연히 상연하는 일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윤영수가 <귀가도>를 통해 보여주는 오늘날 문학의 운명 역시 안간힘과 곤궁 사이에서 가까스로 겨우 생존하고 있는 모양새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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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대선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일부 진보 언론들이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을 때, 나는 문 후보 캠프에서 일하고 있던 모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 대선 공약을 조정하도록 권한 적이 있었다.

당시 문국현 후보는 경제 성장률 8%, 일자리 500만 개, 교육 예산 70조 원이라는 공약을 내걸었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경제 성장률 7%, 일자리 300만 개 공약에 다수의 전문가들이 코웃음을 치고 있던 차에 한 술 더 뜨는 문 후보의 공약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선 공약에 다소 낙관적인 '과장'과 '거품'이 있을 수밖에 없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의 공약은 지나쳤다.

문국현 후보의 거품 공약

문국현 후보 공약의 가장 큰 약점은 재원 마련 방안이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문 후보는 일부 부동산 전문가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건설 비리를 줄이면 50조 원이 확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토목 건설 부문에서 30% 이상의 거품을 거둬 내면 50조 원이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런 주장을 놓고, 나는 공공 부문의 건설비는 50조 원 정도고, 또 이 중에서 토목을 제외한 주택 부문에서 거품이 빠지면 주택 구입자들이 이익을 보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정부 세입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토목 비중 축소로 50조 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루쯤 지나 그 교수로부터 답신이 왔다. 자세한 내용을 문서로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문서가 그 쪽으로 전해지자 그들을 돕는다는 꽤 유명한 부동산 전문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리고 여러 가지 해명이 이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귀담아 들을 만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대선 공약은 발표되었고, 그것을 뒤집다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테니까.

어쨌든 문국현 후보의 경제 성장률 8%, 일자리 500만 개 공약, 교육 예산 70조 원이라는 공약은 국민들의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다만 '유한킴벌리의 패러다임 변화와 이로 인한 성공 신화'에 대한 기대를 일으켜 상당한 수의 지지자들을 모았을 뿐이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그 정도로 선거에 영향을 주기엔 역부족이었다.

문국현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 <세금 혁명>(선대인 지음, 더팩트 펴냄). ⓒ더팩트
최근에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이 50/50 전략을 들고 나왔다. 주요 골자는 부동산 관련 세 등을 증세하여 50조 원을 확보하고, 토목 사업 등을 줄여서 역시 50조 원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처음 이 구호를 들었을 때 문국현 후보의 공약을 떠올렸다. 토목 사업 등을 줄여 50조 원을 확보한다는 주장이 문 후보 공약을 그대로 빼닮았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선대인 부소장의 구호에는 부동산 관련 세 등을 증세하여 50조 원을 확보한다는 점이 추가되었다.

물론 구호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가 잇따라 펴낸 두 권의 책, <프리라이더>, <세금 혁명>(더팩트 펴냄)을 읽어 보니, 문국현 후보와 다른 점도 상당히 있었다. 그러나 대안의 근거가 충실하지 않다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공 토목 사업 감축으로 30~50조 원 재원 확보?

선대인 부소장은 그의 책, <세금 혁명>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전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에 퍼져 있는 하드웨어형 토건 사업 예산은 100조 원 가량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하드웨어형 토건 사업 예산 100조 원 가운데 30% 가량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343쪽)

하드웨어형 토건 사업 예산이 100조 원 가량이라는 주장이 과연 사실일까. 한국은행이 발표한 산업 연관 표를 보면, 2008년 우리나라 연간 건설 투자 총액은 168조 원이었고, 이 중 민간 부문 건설 투자액은 122조 원, 공공 부문 건설 투자액은 46조 원이었다.


 

공공 부문 건설 투자액이 46조 원이라는 것은 중앙 정부, 지방 정부, 공기업, 기타 공공 기관의 건설 투자 총액이 46조 원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건설 투자는 건축 투자와 토목 투자로 나뉘고, 이 중에서 공공 부문 토목 투자는 약 31조 원에 해당한다.

중앙정부의 1년 사회간접자본(SOC) 투자가 25조 원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공공 부문 토목 투자가 31조 원에 그치는 이유는 한국은행이 건설 투자비를 산출할 때, 토지 매입비를 계산 과정에서 제외하기 때문이다.

도로 건설비가 3분의 2를 차지하는 공공 부문 토목 투자비 중 토지 매입비 비중이 20%라 가정하면 공공 부문 토목 투자비 총액은 어느 정도 될까. 대략 39조 원 정도다. 이 중에서 20%를 절감하면 7.8조 원이 확보되고, 25%를 절감하면 9.8조 원이 확보되며 30%를 절감하면 12조 원이 확보된다. 선 부소장 목표치 50조 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보유세는 종합부동산세, 재산세만이 아니다!

선대인 부소장은 또 다른 그의 책, <프리라이더>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부동산 보유세를 전체 부동산 자산의 0.5%만 과세한다고 해도 매년 32.5조 원의 세수를 거둘 수 있다. 2008년 현재 5.7조 원의 세수를 걷고 있으므로 26.8조 원의 세수를 추가로 거둘 수 있게 된다." (81쪽)

2008년 우리나라 보유세가 5.7조 원이라는 그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국세청과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08년 우리나라 보유세 총액은 10조6791억 원이었고, 2009년에는 9조6773억 원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우리나라 GDP 대비 보유세 비율이 1%에 근접한다고 발표했다. 다만 국세청과 행정안전부 집계 내용과 OECD 발표 내용 사이에는 다소간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OECD통계를 기준으로 분석한다.


 

선대인 부소장이 5.7조 원을 언급한 것은 종합부동산세와 재산세만을 보유세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부동산 보유세에는 크게 종합부동산세와 재산세가 있고, 종합부동산세의 부가세(surtax)로 농어촌특별세가 있으며, 재산세의 부가세로 지방교육세, 도시계획세, 공동시설세가 있다.

부동산 보유세를 미국 수준으로 증세하자고?

선대인 부소장처럼 보유세를 26.8조 원 더 거두면 보유세 총액은 얼마나 될까. 2010년 보유세 총액이 OECD 기준에 비추어 9.2조 원이라 가정하면 총 36조 원이 되고, GDP 대비 비율은 3.07%가 된다. 미국 수준 2.83%보다 더 높다.

그렇다면, 거래세를 어떻게 할 것인가? GDP 대비 보유세 비율을 미국 수준으로 높여 놓은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미국 수준에 도달하려면 20.8조 원의 거래세도 미국처럼 0으로 낮추어야 한다는 곤혹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선대인 부소장처럼 보유세를 26.8조원 늘리고, 거래세를 20.8조원 내리면 결과적으로 6조 원의 추가 세수가 확보된다. 그러나 어쨌든 부동산 보유세로 26.8조 원을 더 거둘 수 있다는 수치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혹자는 우리나라 PIR(연소득 대비 주택 가격 비율)이 미국보다 높기 때문에 보유세 비율도 더 높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미국의 보유세는 지역 공동체 주민들의 지방 교육 투자를 위한 자발적인 '헌금'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PIR과 GDP 대비 부동산 관련 세금 비율을 비교하려면 미국이 아니라 OECD 평균과 비교해야 한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참고로 OECD 30개 회원국의 GDP 대비 재산 관련 세금 비율은 2% 내외이고, 우리나라는 3% 내외다. 우리나라의 PIR(연소득 대비 주택 가격 비율)이 선진국보다 더 높기 때문에 부동산 관련 세금을 더 거둬야 되지만, OECD 평균보다 1.5배 이상 더 거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1가구 1주택 양도소득세로 5조원 확보?

선대인 부소장은 또 그의 책, <프리라이더>에서 양도소득세 증세 등으로 5조 원, 임대소득세 증세로 6조 원의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양도소득세 증세론은 1가구 1주택에 대해서 양도 소득에서 1억 원을 공제하고, 양도소득세를 부과하자는 것이다.

그가 미국의 1가구 1주택 양도 소득 공제액과 세율에 대해 정밀하게 조사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일단 취지는 좋다고 본다. 미국은 1가구 1주택자 양도 소득에서 부부의 경우 50만 달러, 독신의 경우 25만 달러를 공제하고 양도소득세를 부과한다.

다만 미국의 1가구 1주택 양도소득세 세율이 일반 소득세율에 비해 상당히 낮다는 점, 또 1가구 1주택에 대해서는 장기 보유 특별 공제를 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 안정세가 지속될 경우 양도소득세 세수가 현격하게 줄어든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이 세금은 부동산 가격이 하락할 경우 대규모로 줄어들기 때문에 선 부소장처럼 주택 가격 대폭락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세금이다.

전·월세나 상가의 임대소득세에 대해서도 그가 좀 더 정교한 연구 과정을 거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진국 수준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선진국 수준에 대한 연구가 거의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가며

선대인 부소장 대안 중 현실성이 있는 대안들을 추려보면 토목 비중 축소로 10조 원, 보유세·양도소득세·임대소득세 등 부동산 관련 세로 10조 원, 도합 20조 원 정도다. 물론 20조 원도 적은 액수가 아니고, 또 토목 비중 축소로 10조 원 이상을 마련한다는 것은 야당들의 대안과도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정 정도 의미가 있다.

다만 이 정도 대안으로 100조 원(50조 원+50조 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2007년 문국현 후보와 같이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선진국과 한국의 현황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더욱더 충실한 근거들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선대인 부소장과 그 그룹에게 큰 기대를 갖는 독자와 시민을 실망시키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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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화폐 전쟁>이라는 책 한 권이 중국을 강타했다. 실제로 당시 베이징 중관춘의 대형 서점에서 그 책이 무섭게 팔려나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서 도대체 어떤 이야기들이 있기에 저렇게 중국 사람들이 열광할까 궁금하여 저자 쑹훙빙(宋鴻兵)의 강연회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 그렇게 넓지 않은 강연장임에도 엄청나게 사람이 몰려들어 복도에까지 청중들이 늘어섰고 열기도 뜨거웠다.

쑹홍빙의 강연은 흥미로웠지만 모든 것을 금융 과두 세력의 음모로 몰아가는 것은 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의 주장과 <화폐 전쟁>의 내용들에는 단순히 음모론이라고 치부하여 무시하기 힘든 예리한 지적이나 직관들이 곳곳에 있지만, 그 장점들이 자극적인 내용과 뒤섞여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화폐 전쟁>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터지면서 더 큰 반응을 얻었고, 그 뒤로 시리즈의 2권(2009년), 3권(2011년 : 한국은 미출간)까지 출판되었으며, 관련 주제를 다루는 비슷비슷한 제목의 책들도 잇따라 출간 중이다. 사실 이 책 <화폐 전쟁, 진실과 미래>(랜덤하우스 펴냄)도 중국 관영 CCTV에서 제작 방영한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류 중 하나일 것이라고 별 기대 없이 들었다.


▲ <화폐전쟁, 진실과 미래>(중국 CCTV 경제 30분팀 지음, 류방승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랜덤하우스
하지만 이 책은 쑹훙빙의 <화폐 전쟁> 시리즈와는 이름은 같지만 분명히 다른 책이다. 일단 이 책은 음모론을 거부한다. 이 책은 "음모론의 시각에서 달러의 운명을 다룬다면 이는 날조일 뿐이며, 그럴 경우 화폐 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히 해독할 수 없다"(143쪽)고 지적하고 있으며, "몇몇 금융가, 은행가, 정치가 등이 치밀하게 조종하거나 심지어 음모를 꾸며 달러를 패자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는"(104쪽) 점을 분명히 한다.

이 책은 "국가의 종합적인 국력이야말로 화폐를 움직이는 큰손"(90쪽)이며, "한 국가의 국력이 진정 강성해지면 개인의 의지가 아니더라도 그 국가의 화폐가 자연스럽게 위대한 화폐, 대국의 화폐가 될 수 있다"(104쪽)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이 책은 각국의 화폐를 주인공으로 국제 화폐 시스템의 측면에서 바라본 강대국 흥망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역사와 국가를 따라가면서 파운드, 달러, 엔, 유로, 위안이라는 주요 강대국 화폐를 주인공으로 하여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파운드에서는 영국에서 국가가 은행을 매개로 하여 조세를 담보로 국채를 발행하고 이를 통해 군비를 수월하게 조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는 과정을 다룬다. 이 과정을 통해서 영국이 다른 나라를 제치고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파운드화가 최초로 세계의 기축통화가 되는 내용을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2장 달러에서도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영국이 미국에 세계의 패권을 넘겨주게 되었고 따라서 미국의 달러가 새로운 기축통화가 되고 이후 베트남전쟁, 엔, 마르크 등과의 경쟁, 닷컴 붐과 이라크 전쟁, 서브프라임모기지 위기에 이르기까지 달러의 흥망성쇠 이야기가 다채롭게 전개된다.

1장, 2장이 다루는 시기는 자본주의가 발생하여 여태까지 진화해온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 세계 자본주의의 역사는 한편으로 국가 간에 패권을 놓고 벌이는 경쟁의 역사로도 설명 가능할 것이다.

"각국의 화폐가 세계 화폐 시스템에서 어떤 위치를 갖는지는 그 국가의 경제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또 거꾸로 화폐의 지위를 통해 해당 국가의 경제 발전을 추진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계 화폐 시스템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테면 '화폐의 정치화'이다. 이러한 화폐 전쟁은 한층 격렬한 방식으로 폭발하기도 하는데, 심한 경우에는 실제 전쟁을 불사하기도 한다." (132~133쪽)

3장 엔, 4장 유로, 5장 위안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각각의 국가 혹은 지역에서의 화폐가 미국이 지배하는 달러 중심의 세계 화폐 시스템과 어떻게 경쟁해왔으며, 또 어떻게 경쟁하고 있는 지를 다루고 있다.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었으나 냉전이라는 특수한 세계 질서 속에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발판으로 다시 세계에서 제일가는 산업 국가로 거듭나게 되었고, 이에 엔은 달러를 위협하는 화폐로 성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압력 속에 자본 시장을 개방하고 플라자 합의에 서명하면서 엔은 대폭 평가 절상되었고 이에 주식 시장과 부동산 시장에 커다란 거품이 형성되었다 꺼지면서 결국 일본은 지금까지도 불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고, 엔도 국제화에 실패한 화폐가 되었다.

유럽은 강력한 달러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연합이라는 길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유럽은 30여 년이 넘는 지난한 갈등과 협의의 과정을 거쳐 1999년 1월 지역의 초주권 화폐인 유로를 출범시켰으며 유로는 바로 세계 제2의 국제 통화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로 역시 미국의 견제와 압력 속에서 달러의 세계 패권을 더 이상 흔들지 못했으며, 2008년 세계 금융 위기가 각국의 재정 위기로 전화하면서 기로에 처해있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으로 새롭게 달러의 경쟁자로 등장하고 있는 위안의 입장에서 엔과 유로는 하나의 교훈이다. 현재 중국 경제 성장의 양상, 즉 제조업 발전으로 세계의 공장이 되었고, 증시 및 부동산 시장이 폭등하고 있으며, 미국의 국채를 다량 보유하고 있고, 환율 평가 절상의 압력을 받고 있는 현실은 일본의 경로와 유사하다.

저자들은 내수를 키우지 못하여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지 못하고 미국의 압력에 쉽게 굴복한 일본의 선례를 중국이 따라서는 안 된다고 주문한다. 한편, 저자들은 달러 중심의 기축통화 체제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점진적으로 위안화의 국제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주장한다.

특히 저자들은 아시아 지역에서 먼저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을 주문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일국이 독점하는 통화 시스템에서 벗어나 범세계적인 기구가 관리하는 초주권 기축통화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는 2009년부터 저우샤오촨(周小川) 중국 인민은행 총재가 주장해온 IMF의 특별인출권(SDR)의 사용 범위를 강화하자는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 간의 원만한 정치적 협조를 통해 초주권적인 기축통화를 만든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현재 중국 일각에서 난무하고 있는 위안화가 앞으로 새로운 기축통화가 되어야 한다는 강한 민족주의적 논리보다 좀 더 냉철하고 차분하게 현실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이 강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이 책 <화폐 전쟁, 진실과 미래>가 공들여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화폐'를 단순하게 투명한 교환의 매개 수단이나 가치 척도라고 기능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권력을 투사하는 사회적 제도의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존의 화폐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화폐를 '사회적 관계'로 보고 화폐의 생산과 분배를 둘러싼 여러 사회 세력들의 갈등과 협력이라는 틀로 역사와 제도를 분석하는 책인 제프리 잉햄의 <돈의 본성>(홍기빈 옮김, 삼천리 펴냄)은 '화폐'라는 제도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화폐 전쟁, 진실과 미래>에서와 같이 근대 자본주의의 역사를 단순히 세계 화폐를 차지하기 위한 국가 간의 경쟁이라는 측면에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군사 부문의 경쟁에서 비롯한 기술 혁신이 산업 부문의 혁신으로 이어지고 이에 고도 금융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다면적인 틀로, 그리고 그로 인한 헤게모니 교체의 과정으로 분석하고 있는 조반니 아리기의 <장기 20세기>(백승욱 옮김, 그린비 펴냄)도 자본주의 역사를 보다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가이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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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삿짐을 싸 놓았다. 거실 마룻바닥에 널브러진 세간들,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장난감과 잡동사니, 화면 한 켠에 드러난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건너편 동 아파트. 화가 유근택의 연작 <수평적 이사>의 한 장면이다. 화가는 주엽동 아파트에서 홍제동 아파트로 '수평 이동'한 도시 일상의 한 순간을 무심한 풍경으로 그려냈다.

이사 전후의 실내는 다른 공간이지만 서로 닮아 있다. 또 다른 그림에서는, 아파트 거실의 네모난 프레임 속에 식물들이 둥둥 떠다닌다(<자라는 실내>). 허공을 화단 삼아 거실 곳곳에서 붉은 꽃이 자라기도 한다(<어떤 실내>). 유근택의 그림에서 아파트는 풍경처럼 얌전히 정지해 있으면서, 동시에 일상의 사물들과 함께 비밀스럽게 호흡하는 공간이다.


▲ 유근택, '자라는 실내' (2007) ⓒnaver..com

한편, 화가 정재호의 화폭에는 괴이한 구조의 아파트 전경이 펼쳐진다. 붕괴와 퇴색의 냄새를 풍기는 외벽과 창문들이 패턴처럼 늘어섰다. 전자는 일상 거주의 공간을, 후자는 곧 사라질 낡은 건물들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둘 다 아파트라는 일상적 공간이 드러내는 비일상적 매혹에 집중한 화가라는 점에서는 같다. 아파트에게는 분명, 숨겨진 표정이 있다.

나에게는 아파트에 얽힌 특별한 추억이 없다. 그래서일까.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모음 펴냄)를 펼치면서 몇 장의 그림부터 떠올렸던 건. 아파트에 관해서라면, 미술을 전공하면서 접하게 된 시각 이미지들이 오히려 더 구체적인 기억의 자료 구실을 하는 셈이다. 사실, 아파트라는 공간에 주목하면서 현대 사회의 심리적 풍경들을 구축해 온 작가를 미술에서 찾기란 장르를 불문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플라잉시티는 아파트를 비롯한 도시 공간의 형성 과정이 공동체에 미친 영향을 연구해 온 이른바 '도시주의 그룹'이다. 젊은 작가 조익정은 <냉장고 네 대>라는 영상 작업을 통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부'에 관한 의문과 고민을 직설적인 언어로 풀어냈다. 부의 잉여를 온몸으로 전시하는 거대한 덩치의 냉장고는 으리으리한 고층 아파트와 겹친다. 한편, 이은우는 최근 매매가 3억 원짜리 아파트의 평면도 1167개를 수집, 분류하여 <3억>이라는 출판물을 제작했다. 사진작가 이득영의 아파트 단지 조감 사진 연작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도 수록되어 있다.

자명한 사실이다. 도시는 아파트로 넘쳐난다. 따라서 그에 관한 말 역시 넘쳐날 수밖에. 이미 여러 권의 아파트 연구 서적이 출간된 바 있다. 획일적인 주거 형태와 부동산 투기 붐에 관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는 새로울 것 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여기다 어떤 말을 보탤 것인가이다.


▲ <콘크리트 유토피아>(박해천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콘크리트 유토피아> 역시 아파트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아파트에 관한 방대한 양의 정보에도 불구하고, 단연코 이 책은 아파트에 관해서 말하고자 쓰인 책이 아니다. 여기서 아파트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정치, 문화, 역사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열쇳말로 작동한다.

저자 박해천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책을 설명한다. "아파트는 한국의 시각 문화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법을 탐색하는 과정이었다고. 그러니 이 책의 여정은 아파트의 변천사를 설명하고 주거 풍속도를 훑어보는 수준에서 멈출 생각이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아파트에 투영된 현대인의 심리와 욕망, 그 작동 원리까지 그려내고자 하는 야심찬 기획이다.

저자 스스로 '가짜 자서전' 혹은 '허구의 회고담'이라고 표현한 이 변종 보고서는, 아파트를 통해 아파트가 아닌 한국 사회를 해부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자 했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지. 한마디로 말해 이 회고담은 개인과 공동체를 아우르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아파트 비판이 무기력한 까닭은…

악취 나는 투전의 장으로 전락한 아파트의 표면적 행보를 비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담론의 세계에서와 달리 물질의 세계에서 그러한 비판은 별 쓸모가 없다. 현실의 아파트는 여전히 대중을 매혹시키고 있다. 지금도 TV를 켜면 미녀가 속삭인다. 아파트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게 있다고. 러브 앤 피스.

아파트 비판은 백전백패한다. 저자는 바로 그 이유를, 아파트가 교묘하게 구축해 놓은 시각 문화의 대중적 호소력을 간과한 데서 찾는다. 압축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아파트는 단지 몸집만 불린 것이 아니다. 거주자의 생활양식 뿐 아니라 감각 양식까지 조직하면서, 우리가 특정한 시각 논리를 갖추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파트는 더 이상 주거 상품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시각 문화 전반에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급기야 도시 생활자의 시선과 인지 방식 자체를 변화시켜 왔다. '보는 법'을 연구하고 그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내는 것이야말로 현대 미술의 과제라 했던가? 그러니 아파트라는 괴물이 미술의 주요 관심사가 된 것도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가장 열심히 참고한 것은 문학 쪽인 것 같다. 특히 소설은 인물과 서사를 기반으로 한다. 집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사람의 생활과 행위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요소일 게다. 자연스럽게도, 소설과 수필들은 시대별 주거 문화의 일면과 더불어 집에 얽힌 여러 가지 표정들의 적나라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먹고 사는 문제를 둘러싼 시대적 공기와 함께 말이다.

1부 '픽션'과 2부 '팩트'로 나뉘어진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픽션' 부분은 이처럼 수많은 문학과 사료를 인용하면서 완성됐다. 참고 문헌 페이지를 들여다보라. 이렇게 무수한 인용과 패러디의 집합이 매끄럽게 완결된 드라마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누구일까?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진정한 재미는 흥미로운 화자 설정에 있다. 익명의 '강남 1세대 남성'은 근대화라는 열차에 올라탄 욕망의 세속화 과정을 고백의 이름으로 항변한다. '아파트' 역시 일인칭 화자로 등장해, 자신이 어떻게 정치권력의 대리 역할을 수행하며 대중의 욕망과 결합해 왔는지를 당당히 고백한다.

심지어 비물질이라 해야 할 '시선'과 '꽃무늬'까지 발언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시선'은 프로이트, 르 코르뷔지에, 벤야민, 윙어 등 모더니티의 감각에 관한 역사적 담론들을 언급하며 자신이 국가 권력의 형태로 진화해 온 여정을 들려준다. 다소 장황한 전반부의 이론 설명도 말미에 이르면 이해가 된다. 현대 도시 상공을 활보하는 조감의 시선이 이토록 익숙한 것이 되기까지, 우리의 신체 감각은 얼마나 숱한 경험과 실험을 거듭했을 것인가.

꽃무늬의 고백

마지막은, '꽃무늬'다. 다정다감한 '꽃무늬'는 1970년대 입식 부엌과 함께 보급된 플라스틱 가전의 차가운 표면에다 일말의 정서적 교감을 새겨 넣으면서 탄생했다. 그 감수성은 모던한 시스템 키친이 부엌을 장악하면서 촌스러운 구식 취향의 자리로 밀려났다가, 최근 고급 가전제품의 상징적 도상으로 격상하며 환골탈태했다.

'꽃무늬'야말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발언자일 것이다. 사실 이 챕터는 2인칭 서술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꽃무늬'가 파란 많은 흥망성쇠의 작은 역사를 겪는 동안 줄곧 두려움과 욕망을 지닌 행위자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감정 이입을 느끼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감정 이입은, 꽃무늬의 의인화가 단순히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기에 배가 된다.

꽃무늬는 곧 꽃무늬와 함께 했던 주부들인 것이다. 실내 장식에 애정을 쏟는 것으로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자기실현을 도모했던. 소비 유행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정체성의 나침반을 따라 우왕좌왕했던. 산업화의 역군이라 불린 가부장 집단과 다를 바 없이 욕망의 숨바꼭질을 통해 나름의 역사를 써온 그녀들.

집이라는 공간이 가족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거울이자 타자의 인정을 받기 위한 전시용 스크린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은 아파트 성공 신화를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다. 그렇다면, 그녀들의 노력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꽃무늬는 그 노력에 힘입어 확장을 거듭했다. 심지어 '세계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믿는 '상상의 눈'이 활개를 친 88 서울 올림픽 전후로는, 국가적 축제를 장식하는 꽃 탑으로 변신을 모색하기도 했으니.

꽃무늬가 당시 유행하던 자수나 꽃꽂이, 홈패션, 베란다의 미니 분수와 수족관처럼 유사한 형태의 인공 자연으로 변주되었다는 해석은 특히 인상적인 부분이다. 나 역시 1980~90년대 서점가의 스테디셀러로 군림하던 잡지 <그린 인테리어>가 엄마의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수차례 이사를 다니면서도 엄마가 결코 버릴 수 없어 짊어지고 다녔던 '벤자민 고무나무'도.

어느 좁은 집에서는 천정에 가지가 닿기도 했던, 그 이름도 이국적인 벤자민 고무나무의 존재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개인의 기억을 소환하는 책이다. 그 안에서 나는, 강남 1세대와 386세대 사이에 낀 '이름 없는 세대'의 자식으로 출생해 외환 위기의 불안한 학창 시절을 거치고 비정규직 900만 시대를 고스란히 살아가고 있는 내 세대의 역사까지도 덤으로 읽고 만다.

아뿔싸, 내가 아파트에 얽힌 기억이 별로 없다고 했던가? 그 말은 이렇게 수정해야 한다. 나는 아파트를 이해할 생각이 별로 없었던 거라고.

아파트에 관해서 사람들은 극단적이기 쉽다. 열광하거나, 경멸하거나, 혹은 무심하다. 세 경우 모두, 아파트가 가진 힘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나는 세 번째 경우다. 서른이 될 때까지 아파트 청약 통장을 만드는 일이 왜 필요한지 몰랐을 정도이니. 하지만 그러한 무관심은 무의식적 회피와 다름 없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아파트와 함께 재편된 도시적 시각 질서 속에 있다. 우리는 언제나, "네가 어디 사는지를 말해봐, 그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테니"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이 조르조 아감벤의 '장치'라는 개념을 불러들이는 저자의 의도일 것이다. '아파트' 스스로 대담하게 고백하듯이, 아파트는 그저 아파트가 아니다. 그는 '우리 내면의 윤곽을 주조하는 거푸집'이었던 것이다.

아파트 공화국의 미래?

책의 후반부인 '팩트'는 최초의 아파트인 마포아파트에서부터 분당과 용인의 모델하우스까지 아파트의 역사에 관한 객관적 서술을 담고 있다. '픽션' 부분이 감행한 허구화의 모험을 역사적으로 검증해주는 역할을 하며, 옛날 잡지 등의 도판들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팩트' 부분은 불필요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건 아마도 '픽션'에서 저자의 기획 의도가 충분히 몫을 다했다는 독자로서의 만족 때문일 터. 더군다나, 이 '허구의 회고담'에 반드시 검증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저자는 문학이 삶의 풍경을 그리는 더할 나위 없이 진실한 사료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서문으로 돌아가 본다. 저자는 아파트에게 "비판의 법정에 선 용의자가 아니라 자기 옹호의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배우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아파트가 지닌 매혹적인 힘의 핵심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이 말은 대도시에 관한 게오르그 짐멜의 의미심장한 언급을 떠오르게 한다.

짐멜은 대도시의 개별적 현상들이 우리에게 호감을 주든 주지 못하든, 우리가 그러한 삶 가운데 속해 있으면서 재판관의 태도로 임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의 중대한 과제는 불평하거나 용서하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이해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옳은 얘기다. 문학도, 미술도, 다른 모든 종류의 예술도, 결국은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방편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자문해 보자. 아파트 공화국의 미래는 과연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물론, 질문이 틀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재판관이 아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같은 근사한 경험을 통해 우리의 과거-현재-미래를 진정으로 이해할 더 많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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