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내가 쓴 것이라면!

책을 읽으며 배가 아팠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한다. 사촌이면 아주 가까운 친척이다. 그런데 왜 배가 아플까? 난 도통 그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서동욱의 <철학 연습 : 서동욱의 철학 에세이>(반비 펴냄)를 읽으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듯했다. 배가 아픈 까닭은 단순하다. 이 책이 내가 쓴 책이라면 하는 부러운 마음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부러움을 느꼈던 까닭은 몇 가지가 있다. 나 또한 철학을 공부했고, 철학에 관한 글을 쓰며 사는 사람이지만, 전공이 동양 철학이라는 것은 일종의 핸디캡이다. 같은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동양 철학을 한다는 것이 핸디캡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 의외의 말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서양 철학을 공부한 동료 선후배들이 동양 철학이야말로 우리의 전통이 살아있으니 훨씬 친숙하고 가깝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의 우리의 삶과 지금의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가 다르고, 한글이 아닌 한문으로 글을 썼기에 언어조차 다르다. 게다가 지금 내가 입는 옷을 입고서 100년 전 서울 거리에 나타난다면 도대체 누가 나를 조선 사람으로 보아주겠는가? 난 이미 서양인이고 근대인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껏 남의 글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느껴본 적은 별로 없었다.

<철학 연습>은 매우 시적이다. 서동욱이 철학자들의 글쓰기를 선보이겠다고 자신하듯, 그의 글은 아주 매끄럽고 잔잔하다. 게다가 사이사이에 인용하는, 다른 책이라면 읽을 때 막히거나 어색하게 만드는 그런 철학자들의 인용문이 그의 글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책에서 그가 다루고 있는 철학자들의 말과 저자의 글은, 시인이자 철학자 서동욱 한 사람의 목소리로 울린다. 그렇게 해서 그의 현대 철학 연습 여행은 내 삶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그래서 부러웠다. 이 책이 내가 쓴 것이라면! 하고.

'현대'란 늘 새롭게 되는 노력의 표현


▲ <철학 연습>(서동욱 지음, 반비 펴냄). ⓒ반비
그러나 <철학 연습>을 읽으며, 난 이것이 왜 우리 시대의 사유가 되어야 하는지 시비를 걸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의 책에 과거 조선의 철학자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면서 그의 글쓰기와 사유가 지금 우리의 삶에 더 밀착되어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설득 당했다고 해야 더 정확한 말일 게다.

내가 논문을 쓸 때, 내 글에서 '근대' 혹은 '현대'는 '서구'의 근대이고 현대였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이자 시대건만 난 늘 '서구'라는 수식어를 넣곤 했다. 왜냐하면 그게 다는 아니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서구의 거만한 철학에 대한 항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의 글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서동욱은 현대란 "늘 새롭게 되려는 노력의 표현"(9쪽)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현대란 역사적 연대기 상의 고정된 어느 한 시기가 아니란다. 또 "이 책은 철학의 최근 노력, 바로 우리 시대의 삶과 사회와 역사와 함께 하는 현대 철학의 고심에 관한 이야기"(8쪽)이라고 소개한다. 스피노자에서 데리다까지 13명의 철학자를 다루고 있으면서 이것이 당당히 우리 시대의 사유라고 선언한다. 나는 그를 통해 서구의 사유가 '지금 여기'의 사유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서동욱의 글은 그가 다루고 있는 13명의 철학자, 스피노자, 키르케고르, 니체, 프로이트에서 하이데거, 레비나스, 데리다, 들뢰즈를 마치 내 물음처럼 소개하고, 또 존재와 무, 진리 심지어 관상과 돈 이야기까지 누구나 고민해 보았음직한 주제들을 가려 생각을 긁어주는 철학의 사색 노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서동욱 자신의 말이자 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인용하는 사르트르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우리 삶을 향해 말을 건네지만 실은 우리 현대적 삶에 권총 쏘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 생각을 일으키라고!

그에 따르면, "철학은 별세계의 사유가 아니다. 다만 운동을 쉬는 근육이 쉽게 잠들 듯 생각 역시 쉽게 잠에 빠지는데, 철학은 이 생각을 잠을 깨우려고" 할 뿐이다. "한 마디로 철학은 천진한 학문으로서, 그저 삶을 온전히 살도록 만드는" 귀찮은 친구, 그러나 삶을 배신하지 않는 친구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현실에 개입하는" 것이다. 이 책이 말하는 '철학 연습'은 그러한 현실 개입을 위해 경험을 쌓는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물음'이다

하지만 어디에서 우리는 그런 '철학 연습'을 시작할 것인가? 또 그런 연습이 바로 우리 시대이고 현대라면, 어디서 출발할 것인가? 이 책의 전체를 꿰는 가장 중요한 매듭은 현상학과 구조주의이다. 그리고 아마도 들뢰즈적 사유의 노정이 아닐 듯싶다. 다루어지는 철학자들에 대한 의미와 위치에 대한 부여가 많은 경우 들뢰즈의 평가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두 가지 매듭을 중심으로 개개의 철학자들을 따로 소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철학자들은 분명한 개개의 주제의식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바로 물음이다.

그런데 한 철학자가 평생을 생각하고 다듬은 사유의 알갱이를 짧은 지면을 통해 압축해 놓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또 그러한 소개 속에서 그 철학자가 가장 힘을 들여 씨름한 물음을 독자들이 파악하게 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서동욱은, 근대적 사유를 개척한 스피노자에 대해 "어떻게 예속에 맞서 자유를 찾을 것인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수용소를 경험한 레비나스에 대해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인가, 신의 흔적인가", 또 그의 사유의 가장 커다란 배경인 들뢰즈에 대해 "어떻게 삶을 긍정할 것인가"와 같은 물음을 던지며, 우리로 하여금 함께 그 물음에 대해 생각하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공부란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말을 했는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자는 인(仁)을 말했고, 플라톤은 이데아를 말했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이야기를 건넨다. 하지만 "공자가 왜 인을 말했지?" 하고 묻는 순간 우리는 벙어리가 되기 일쑤다. 그건 모르는 것이거나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개별 철학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가장 중요한 물음으로 그의 철학을 압축하며, 심지어 그의 삶조차 녹여낸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쇠얀 키르케고르를 시작하면서 저자는 첫머리를 이렇게 꺼낸다.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 군중들은 살아생전 그토록 강력하게 덴마크국교회를 비판한 자의 시신을 교회가 거두어들이는 처사에 불만을 품고 거의 폭도가 되다시피 했다" (39쪽)

신 앞에 선 단독자의 철학을 제창한 그의 최후가 왜 그렇게 되었던 것일까? 이 궁금증은 책을 읽어나가며 자연스럽게 풀린다. 임종을 앞둔 얼마 전 목사인 친구와 교의 문답을 하면서 종교예식을 거부했던 키르케고르! 저자는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를 뒤집어 쓴 키르케고르의 글 <기러기>를 소개하며 이렇게 설명한다.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가 오리들 틈에서 돋보이는 백조가 되는 반면, 키르케고르의 <기러기>에선 날 수 있는 기러기가 날지 못하는 거위들을 날게 해 주려고 돕다가 결국은 공상적 바보라는 비난을 듣는다. 이런 비난 앞에 기러기는 의기소침해져 날지 못하는 거위처럼 돼버린다. 당대의 국교회는 거위이고 키르케고르는 기러기라고 해야 할까? '거위는 절대 기러기가 될 수 없으나 기러기는 곧잘 거위가 돼버린다. 경계하라!' 당대의 교회에 맞선 키르케고르의 책들은 바로 거위가 되지 않으려는 저 경계의 표현이었다." (41쪽)

철학자는 관상도 보나?

13명의 철학자를 개별적으로 사색한 후 저자는 10가지 주제로 본격적인 '철학 연습'을 진행한다. 서양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 가운데 하나인 '존재와 무'에서 '차별 차이 환대', '사랑과 정치' 등 철학적이면서 우리네 삶과 아주 밀착된 주제들이다. 이 또한 저자는 하나의 물음으로 압축하여 연습한다. 예컨대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의 가장 중요한 용어 가운데 하나인 '시뮬라크르'에 대해 저자는 "우리는 진짜 인생과 가짜 인생을 구분할 수 있는가"와 같은 식이다.

그 가운데 아홉째 '관상과 행위'는 "철학자는 관상도 보나" 하는 아주 재미있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아마도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듯, 첫 구절은 이렇다. "철학과 학생은 소개팅을 나가 곤욕을 치른다. 눈을 깜박이며 여학생이 묻는다. '어머 철학과야? 그럼 관상 좀 봐봐. 손금은 어때? 내 머리통은 똘똘하게 생겼어?'"(301쪽) 철학은 아직 조선 시대에 머문 부분이 있다. 이런 질문을 나 또한 수없이 듣곤 했으니까.

서동욱은 하지만 이러한 관심이 한국 사회 특유의 미신이라고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칸트를 인용해, "관상학은 사람의 외면으로부터 그의 내면을, 그것이 성향이든 심술이든, 판정하는 기술이다"(304쪽)라고 소개하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관상학, 골상학 등 비슷한 전통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그것은 우리의 봉건적이고 미신적인 잔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란 점을 은근히 보여주며, 이렇게 묻는다.

"정말 누군가 당신의 외관을 보고 당신의 내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305쪽)

서동욱은 헤겔 또한 이러한 골상학적 취향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던 처방을 넌지시 알려준다, 즉 헤겔은 관상학자에게 따귀를 때리고 골상학자에겐 뼈가 드러나도록 머리를 부수라고 처방한 바 있다는 것이다. 끔찍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처방은 전혀 해결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의 칼을 꺼내든다. 관상을 보고, 점을 치고 우리의 운명을 엿보려는 것은 바로 우리의 '공포' 때문이라고.

그러고 나서 서동욱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의 알렉산더 이야기를 빌어 이렇게 말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수사에서 결과를 알 수 없는 전투를 앞두고 공포에 빠진 알렉산더는 점쟁이를 내세워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리우스에게 승리하여 공포가 사라진 후엔 점쟁이를 찾지 않았다. 행위가 운명을 만들어가야 할 시점에, 공포가 발목을 붙잡고서 미리 정해진 운명이 있지 않는지 찾아 볼 것을 권하는 것이다." (309쪽)

서동욱의 이 말은 어쩌면 책 전체의 주제의식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생각이 잠들 때 관습, 소문, 편견이 머릿속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철학이다. 공포가 우리를 점집으로, 관상가에로 향하게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운명을 오로지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그의 행위 속에서만 확인될 수 있다"고!

이 책은 세 가지 미덕이 있다. 첫째는 문장이 아름답다는 점, 둘째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인용이 자연스럽게 저자의 사유와 글쓰기 속에 녹아 있어 이해가 쉽다는 점, 셋째는 그의 말처럼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더불어 책에 삽입된 사진도 가끔 얼굴을 들이밀 때마다 큰 재미를 준다.

아쉬운 것은 이 좋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 일상의 경험까지 많이 들어와 있었더라면 하는 점이다. 우리의 일상적 체험과 경험이 저자 스스로의 사유와 말로 녹아든 <철학 연습>이 우리 삶의 연습 2권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 전쟁>(홍순도 옮김, 비아북 펴냄)은 서구 자본의 경제 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의 현주소를 고발한 책이다. 저자 랑셴핑은 미국과 유럽의 초국적 기업이 치밀하고 무자비한 방법으로 중국 시장을 공략해 들어오는 과정을 현대판 제국주의로 규정한다. 중국과 서구 자본의 정면충돌을 상징하는 19세기 중엽 아편 전쟁(1840~1842년)의 현대판 버전인 셈이다.

지난 30여 년간 기적 같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내고 세계 경제 대국 2위에 올라서서 미국을 넘보는 중국 경제가 사실상 서구 자본이 마음대로 이용하는 바둑알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이면서도 참담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서구 자본의 경제 식민지화를 우려하는 랑셴핑이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개발도상국들이 쫓아갈 수 없는 첨단 기술 분야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물과 먹을거리 시장이다.


▲ <자본전쟁>(량셴핑 지음, 홍순도 옮김, 비아북 펴냄). ⓒ비아북
농축산물 시장, 상하수도 인프라, 유통 시장 개방이 가져온 결과에 대한 랑셴핑의 미시적 분석은 의미심장하다. 13억 인구의 먹을거리 시장이 서구 자본에 의해 잠식당하는 과정은 경제 대국 중국의 치명적인 허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중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흥 시장국은 산업화를 위해 농업을 포기했다. 제조업 수출 성장을 위해 농업을 희생시킨 이들 국가에게 <자본 전쟁>이 던지는 뼈아픈 교훈이기도 하다.

<자본 전쟁>의 전반부에서는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아 중국의 농업을 초토화시키는 현대판 동인도회사인 종자 회사와 곡물 거래상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식용유의 주원료인 대두, 사료 산업의 기반인 옥수수, 중국의 주력 수출품 방직 제품 원료인 면화, 채소 종자 시장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핵심 농업 시장이 서구 자본의 수중에 들어갔다.

중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먹을거리인 돼지고기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의 골드만삭스는 돼지고기 가공 공장과 양돈장을 매입하고 유통 시스템까지 구축해 중국 양돈 산업 사슬 통합을 완성했다. 주식인 쌀과 밀의 경우는 중국 정부의 인위적인 가격 통제의 실패를 틈타 "서구 자본의 독수"가 뻗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서구 자본의 침투가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 불과하다. 중국 정부가 식량 안보와 관련된 국가 기밀이라는 이유로 정보 공개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농축산품 시장에서 서구 자본이 어느 정도까지 파고들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한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중국의 식량 공급과 가격 결정이 미국 기업의 통제 하에 들어가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상하수도 기반 시설 개방은 또 다른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의 중대형 도시에서 외국기업이 상하수도 사업을 장악하고 물 값을 원하는 대로 올려 받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정치적 업적을 위해 외자 유치 경쟁에 눈이 먼 지방 정부가 벌인 일이다.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를 집안으로 불러들인 꼴"이 된 셈이다.

서구 자본의 사악한 제국주의적 침탈이 총칼을 앞세워 강제된 것이 아니다. 최소한의 위기의식도 없이 다국적 기업에게 물 산업과 농산물 시장을 공손하게 갖다 바친 중국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랑셴핑은 무지하고 무능하고 어리석은 중국 정부와 기업에 대해 울분을 참지 못한다. 심지어 서구 자본의 치밀한 계략에 놀아나는 것이 체면을 중시하고 실속을 따지지 않는 중국의 민족성에서 기인하는 "문화적 저주"라며 개탄하고 있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서구 제국주의 본질과 진면목을 파헤치고 있다. 특히 현대판 제국주의의 최전선에 있는 미국의 음모를 폭로하는데 집중한다. 이 부분에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리하고 자의적인 해석이 난무한다. 랑셴핑은 미국이 수십 년 동안 중국에 대한 변함없는 적개심을 품고 중국을 해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서구의 아프리카 자원 침탈이 제국주의적이라면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은 진정한 우정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서구 자본의 제국주의적 실체에 대한 랑셴핑의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비난은 모든 악의 근원이 미국 정부라는 음로론적인 비약으로 흐른다. 홍콩 기업이든 프랑스 기업이든, 오스트레일리아의 기업이든 간에 저자의 눈에는 "악마와 같은 다국적 기업 배후의 최대 조정자"는 미국 정부이고 최근 국제 유가와 원자재 가격의 상승도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사주를 받은 월스트리트가 국제 유가를 조정한 결과이다. 물론 증거는 없고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음모론적 의혹에 덧붙여 중국 경제가 미국에 손에 달려있다는 심각한 피해 망상적 시각이 더해진다. 오바마가 환율 전쟁과 무역 전쟁을 무기로 내세워 중국의 수출을 타격함으로써 중국 경제를 불황의 수렁으로 밀어 넣고 원가 전쟁을 이용해 중국에 스태그플레이션을 앞당길 것이라는 우려를 토로한다.

이러한 랑셴핑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원자재 가격 급등이나 중국의 스태그플레이션은 미국 정부가 바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미국 경제에게는 악재이기 때문이다. 금융 위기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미국 경제는 원자재발 인플레나 중국발 인플레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 설사 일부 월스트리트의 금융 자본 세력이 원자재와 위안화 투기를 통해 엄청난 이득을 챙겨간다 해도 미국 경제 전체에 인플레의 고통은 치명적이다.

또 파렴치한 월스트리트의 금융 권력은 오바마에게도 정치적인 골칫거리이다. 더구나 국제 원자재 가격을 원하는 대로 조정하고 거대한 중국 경제를 수렁에 빠뜨릴 정도의 영향력을 미국 정부는 가지고 있지 않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미국이 세계 경제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의 경제력을 자랑하고 있을 때에도 미국 정부의 시나리오대로 세상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자본 전쟁>의 음모론적 경향은 이 책의 가장 큰 약점이다. 중국의 반미 민족주의적 정서를 자극하는 데는 충분하겠지만 학자로서 랑셴핑의 의미 있는 고민과 중국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연구 작업마저도 평가 절하하는 위험한 모험이다.

랑셴핑이 생각하는 중국의 미래는 초강대국 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세계적인 패권국이다. 제국주의의 덫에 갇혀 허우적대는 중국의 현재 모습에서 패권국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랑셴핑은 중국이 패권국이 되기 위해서는 서구가 만들어놓은 불공정한 세계 경제의 게임 법칙에서 벗어나 중국 스스로 룰 메이커가 되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랑셴핑의 주장처럼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룰을 만든 것은 미국을 필두로 한 서구 선진자본주의 국가이다. 그 룰을 바꾸는 것도 그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중국이 룰 메이커가 되지 못한 것은 서구 제국주의의 계략 때문이 아니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랑셴핑이 책 곳곳에서 중국의 이익과 영혼을 팔아버린 중국 정부와 기업의 무능과 무지몽매함에 분노와 절망을 토해내고 있듯이 중국이 앞으로 풀어야 할 가장 큰 난제는 외부가 아니라 중국 내부에 있다. 세계는 미래의 패권국으로서 중국을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현재 중국의 대응은 서구의 룰에 저항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 중국이 만드는 세계 경제의 새로운 게임의 법칙이 무엇일지에 전 세계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문제에 <자본 전쟁>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중국이 지향하는 게임의 법칙은 무엇인지, 서구의 법칙과는 다른 것인지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해 저자는 침묵한다. <자본 전쟁>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의 필요성

기생충을 전공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

"구충제 봄. 가을로 먹어야 되나요?" (그럴 필요 없다)

"요즘 들어 항문이 가려운데 혹시 기생충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대개는 안 씻어서 그렇다)

많은 이들이 같은 의문을 품고 있을 것 같아 공중파 방송에서 <기생충의 진실>이란 한 시간짜리 특강을 했다. 하지만 그 방송의 시청률은 1% 미만이었고, 그나마 방송을 봤다는 사람들은 어머니와 일가친척, 친구들 등이라, 그런 질문들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그렇다면 기생충에 관한 올바른 대중서가 대중들의 편견을 바로잡아줘야 하건만, 우리나라엔 기생충에 대해 알려주는 책이 거의 없다. 모 학자가 쓴 <기생충의 변명>(서민 지음, 단국대학교출판부 펴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어설프고, 같은 학자가 쓴 <대통령과 기생충>(청년의사 펴냄)은 기생충에 대해 혐오감만 부추겼고, 그나마 별로 팔리지도 않았다.

칼 짐머가 쓴 <기생충 제국>(이석인 옮김, 궁리 펴냄)이 그나마 괜찮은 책이지만, 우리나라 학자가 쓴 읽을 만한 책이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기생충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대중서를 안 쓰는 이유는 연구와 강의로 시간이 나지 않아서겠지만, 승진 등에 있어서 그런 책의 가치를 별로 인정해주지 않는 풍토도 한몫 했을 듯하다.

예컨대 우리 학교는 학술서를 쓰면 250점의 업적 점수를 주지만, 기생충 관련 대중서를 쓰면 달랑 50점만 준다. 그래서 학자들은 자기 학교 학생들 외엔 아무도 읽지 않는 기생충 교과서를 쓰는 데 열중하고, 그 결과 기생충 교수가 있는 학교 수만큼의 기생충 교과서가 시중에 나와 있다.

저자 정준호


▲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정준호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이런 판국에 우리나라 학자 한 분이 제대로 된 대중서를 썼으니, 그 기쁨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필적할 정도였다. 책 제목은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후마니타스 펴냄).

저자는 런던열대의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정준호. 그는 나를 잘 모르겠지만, 난 그를 잘 아는 편이다. 기생충에 관한 교양 강의를 준비하면서 그의 블로그를 많이 참고했으니까. (☞바로 가기)

아는 것도 많고 자신의 앎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도 대단했지만, 내가 감탄한 건 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쓸 때마다 아주 많은 논문을 참고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블로그를 보면서 얄팍한 지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온 스스로가 부끄럽기까지 했다.

석사를 마친 뒤의 행보도 평범하진 않았다. 그는 갑자기 아프리카에 있는 스와질란드로 떠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회의에서 비롯된다.

"연구가 기생충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연구를 위한 연구였던 것인지 지금도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결국 나는 실험실을 떠나, 실제 기생충이 어떻게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아프리카에 오게 되었다." (11쪽)

연구를 하는 목적은 진리 탐구여야 하고, "이건 도대체 왜 그럴까?" 하는 지적 호기심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연구가 한둘이 아니다. 남들이 다 해놓은 연구를 기생충의 종류만 바꿔서 한다든지, 아니면 미국에서 오래 전에 한 일을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을 걸고 하는 게 그 예.

누군가 내게 "네가 하는 게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별로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실제 기생충의 세계를 보기 위해 실험실을 박차고 나간 저자의 용기는 실로 존경스럽다.

기생충의 세상

이 책 184쪽에 언급된 것처럼 미국 기생충학회 회장이던 노먼 스톨(Norman Stoll)이 "벌레로 가득 찬 세상"이라고 탄식했던 건 1947년의 일로, 그땐 세계 인구수보다 기생충의 수가 더 많았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2011년, 기생충은 아직도 우글우글하다.

현재 장(창자) 속에 한 마리 이상의 기생충을 갖고 있는 사람의 수는 10억 명 정도, 아프리카에서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세상은 기생충으로 가득 차 있다."(1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충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첫 번째 이유는 일단 우리나라에서 기생충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2004년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의 기생충 감염률은 3.7%, 전체 인구를 5000만 명이라고 한다면 대략 170만 명 정도가 기생충 한 마리씩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많나?' 하며 놀랄 분도 계시겠지만, 1971년 전 국민 감염률이 84%였던 걸 감안하면 거의 없는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날더러 "요즘 할 일 없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또 다른 이유는 기생충의 대부분이 못사는 나라에 집중됐다는 것.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아무런 의료 활동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곳. (…) 기생충으로 대표되는 열대 질환이 만연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런 지역이다." (185쪽)

생각해 보시라. 미국에 기생충이 만연한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기생충을 더럽고 한심한 병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 어쩌면 기생충이 선진국병이라는 인식하에 일부러 기생충에 걸리려는 사람들이 생겨날지 모르겠다.

아무튼 못사는 지역에 기생충이 만연한다는 건 기생충을 박멸하려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뒷받침이 필요함을 의미하며, 우리나라의 성공적인 기생충 박멸도 경제 발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3세계의 경제 발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발

"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정비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수질 개선을 통한 지역 주민의 건강권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당 신상진 의원은 4대강 유역 주민들의 간디스토마 감염률이 10%에 달한다면서 이와 같이 말했다. 간디스토마는 담관암과의 관련성이 입증된 위험한 기생충이니 조심할 필요는 있지만, 그 대책이 4대강 정비 사업이라는 데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간디스토마의 중간숙주인 우렁이는 수질이 좋아야 살 수 있으므로 4대강 사업으로 수질이 정말로 개선된다면 오히려 간디스토마 감염률이 증가할 것 같아서다.

무분별한 개발이 기생충의 급증을 부른 사례는 이 책에도 여럿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간디스토마보다 훨씬 무서운, 주혈흡충이란 기생충이다. 이집트에 세계 최고의 저수량을 지닌 아스완 댐이 건설된 이후 "댐 근방에서 주혈흡충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 피 섞인 오줌을 누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152쪽)

또 케냐에서는 물고기 양식을 위해 보를 만들고 웅덩이를 만드는 일을 전국적으로 시행했는데, 그 웅덩이들은 결국 모기의 창궐을 불러왔고, 모기를 통해 감염되는 말라리아도 덩달아 급증했다.(155쪽) 더 큰 문제는 다음과 같은 일이다.

"과거에는 인간의 발길이 미치지 않았던 새로운 환경, 특히 열대 우림 지역의 난개발은 심각한 문제다. 개발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고 생물 다양성이 줄어드는 것뿐만이 아니라, 야생동물에 국한되어 있던 다양한 기생충들이 인간 사회로 풀려나오는 기회를 제공해 주어 인간과 기생충이 접촉할 기회가 늘었기 때문이다." (223쪽)

에볼라 바이러스와 에이즈 바이러스는 열대 우림 지역의 야생동물에서 유행하던 질병이 인간에게 옮겨진 경우라니, 기생충이라고 해서 이런 일이 생기지 말란 법은 없다. 개발에만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현 정부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노란 리본을 기다린다!

저자 정준호는 집필을 마치자마자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입대해 버렸다. 저자와의 대화나 저자 사인회, 신문 인터뷰 등이 죄다 취소된 건 아쉽지만, 원래 저자는 책을 내는 것으로 자기 의무를 다하는 존재니 이제부턴 독자들이 나서야 한다. 기생충을 통해 질병과 사회, 정치를 모두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책을 사 주는 건 좋은 독자의 의무일 테니 말이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책이 2000부 이상 팔리면 출판사 후마니타스에서 운영하는 책 다방의 은행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기로 했단다. 그의 첫 번째 휴가 때 노란 리본이 잔뜩 달리기를 기대해 본다. 이건 협박인데, 학자들 중엔 자신의 책이 안 팔리는 경우 엇나갈 수가 있고, 기생충학자가 엇나가면 그 파장이 크다. 책에 나온 사례를 옮겨 본다.

"기생충학을 전공하던 어떤 박사생 한 명이 같이 살던 룸메이트가 너무 싫었다. 참다 못한 박사생은 매일 아침 먹는 샌드위치에 회충 알을 잔뜩 넣었다. 자신은 꾸준히 치료제를 먹으면서. 결국 룸메이트는 영문도 모른 채 급성 회충 감염증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 (179쪽)

회충이 든 샌드위치를 먹고 싶지 않다면 당장 서점으로 가시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내 과학 연구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 머지않아 세상도 나를 인정해 줄 것이다."

그레고르 멘델(1822~1884년)이 만년(晩年)에 한 이야기다(<유전학의 탄생과 멘델>(에드워드 에델슨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그의 말대로 세상은 그의 연구를 인정하고 그를 '유전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렇게 되기까지 35년이나 걸렸다. 그것도 독일어로 작성된 '식물의 잡종에 관한 실험'이라는 논문을 영어로 옮긴 번역자가 멘델의 글에서 명료하지 않은 대목들을 손질하여 개선한 다음의 일이다.

"저런, 이 사람이 벌써 오래전에 다 밝혀놓은 사실이잖아!"

진화론자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멘델의 업적을 재평가했다. 멘델의 논문이 알려진 다음에야 다윈의 진화론에 멘델의 유전학을 접목시킨 통합적인 진화 이론이 나왔다. 만약 멘델이 조금만 더 대중과의 의사소통에 적극적이었다면 통합 이론은 수십 년은 일찍 정립되었을 것이고 자연과학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앞서나갔을 것이다. 멘델은 연구는 훌륭하지만 대중과 의사소통을 못하는 과학자들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멘델이 별나게 의사소통 능력이 없었던 인물은 아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 역시 또 다른 멘델일 뿐이다. 그들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세워놓은 가설에 대한 테스트와 실험을 하는 것이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에는 또 다른 부분이 있다. 이것은 첫째 부분처럼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바로 대중과의 의사소통이다. 과학은 항상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멘델의 이름이 알려지기까지 35년이 걸린 까닭은 멘델에게 연구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넌 대가리로 연기를 하니, 이 XX야! 잘난 척만 하는 너 같은 인간들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내 수업에서 꺼져! 안 그러면 경찰을 부를 거야! 농담 아니야, 이 머저리 같은 놈아!"

남캘리포니아 대학교 영화과의 여교수는 갓 입학한 학생에게 이렇게 윽박질렀다. 그 상대는 랜디 올슨(1955~). 그는 잘 나가던 생물학자였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뉴햄프셔 대학교에서 해양생물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서른여덟 살에 영화과에 입학했다.

랜디 올슨은 재미있게 강의하는 인기 있는 교수라고 자부했지만 연기를 배우면서 자신이 대중과 소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분히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성향이 강한 인간들과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서서히 배워나갔다. 그 과정을 기록한 <말문 트인 과학자>(윤용아 옮김, 정은문고 펴냄)는 과학자가 대중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를 말해주는 책이다.

"대중과 교감하는 데 있어, 머리, 가슴, 복부 그리고 성기, 이렇게 네 개의 기관들만 생각하라! 머리로 들어간 정보는 진정성이 더해져 가슴으로, 유머가 더해져 복부로, 그리고 이상적으로는 섹스어필과 함께 아랫도리까지 내려가야 한다."


▲ <말문 트인 과학자>(랜디 올슨 지음, 윤용아 옮김, 정은문고 펴냄). ⓒ정은문고
연기를 가르치던 그 여교수는 이렇게 얘기했다. 아랫도리엔 지식인부터 카우보이와 금발 미녀들까지 모두가 포함되어 있지만 위로 한 단계씩 올라갈수록 대중의 숫자는 점차 줄어든다. 그래도 유머가 있으면 꽤 많은 대중을 확보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머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역시 그들을 잃게 된다. 그래도 가슴으로는 여전히 배우들과 종교인들은 확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까지 가게 되면 과연 누가 남아 있을까? 학자들뿐이다. 이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역학이다.

2003년 강남의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진화론자와 창조론자의 강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진화론자로는 지방 국립대학의 지질학과의 중견 교수가 나섰고, 창조론자로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젊은 의학자가 나섰다. 각자 강연 후 청중들의 공격적인 질문에 답함으로써 상호토론을 하는 재미있는 형식의 강연회였다.

지질학자는 OHP에 손으로 (자그마치 두 가지 색깔로) 끼적인 필름을 올려놓고 정확한 전문 용어로 설명했다. 의학자는 배경 음악이 깔린 동영상과 당시로서는 놀랄 정도로 깔끔한 파워포인트 파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영어로 멋을 부리기는 했지만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단순히 이런 도구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질학자는 철저히 머리에만 의존하였지만, 의학자는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가슴의 주장을 펼쳤다. 과학적인 논리로 보자면 지질학자의 완승이었지만 강연장의 분위기는 의학자가 완전히 주도했다. 머리보다 가슴에 호소하였기 때문에 더 많은 청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창조 과학 따위를 과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창조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수백만 명이 넘는다. 과학자들은 창조 과학자들의 논리를 단숨에 격파할 수 있다고 호언한다. 사실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랜디 올슨은 그런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는 만만하게 공격할 만한 급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랬다면, 이미 누군가가 오래전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대중과의 의사소통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자극과 충족이다. 처음엔 대중을 자극하여 흥미를 유발시켜야 하며, 그 다음엔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

랜디 올슨은 과학적 정보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 정보들을 알아듣기 쉬운 메시지로 변환할 것을 요구한다. 과학자들 스스로 대화 스타일을 다시 생각하고 더욱 많은 대중들과 의사소통할 방법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토리, 즉 이야기다. 과학자는 자연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와 그 결과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보들을 이야기로 꾸며야 한다.

랜디 올슨은 하버드 재학 시절 스티븐 제이 굴드의 조교로 활동했다. (운도 좋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일반 대중이 순수 과학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순수 과학은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에는 버겁다. 그런 이유로 좀 더 인간적이고 훈훈한 요소들을 과학에 접목시켜야 한다. 그래서 과학에 스토리가 필요하다. 스토리는 사람들의 가슴과 복부, 심지어 아랫도리까지 자극한 뒤 머리를 사용하고 싶은 동기를 부여한다. 그 순간이 바로 과학자들이 파고들어야 하는 적기(適期)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처음 몇 문단에 과학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야구, 미키마우스, 건축, 오페라, 미술 같은 요소를 배치하여 독자들을 자극시키고 궁금증을 유발한다. 독자들이 "흥미롭네. 그런데 그게 진화론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지?" 하고 의심을 품을 때 비로소 과학 이야기로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킨다.

<말문 트인 과학자>에는 소통에 실패한 과학자와 성공한 과학자의 다양한 예가 제시되어 있다. 이 예들은 흥미진진하다. 미국 국립과학원이 가입을 거부한 칼 세이건이 왜 가장 훌륭한 과학자의 상징이 되었는지, 정치인 앨 고어가 환경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로 어떻게 5000만 달러를 벌었는지 알려준다.

"그런 과학자는 되지 마세요(Don't be such a scientist)!"

랜디 올슨의 아내가 그에게 한 말인데 <말문 트인 과학자>의 원제다. 머리만 사용할 뿐 재미있는 이야기를 꾸며낼 줄 모르고 데이터 자체가 재미있는 것인 줄 착각하고서 연구 이야기만 반복하는 그런 과학자는 되지 말라는 뜻이다.

과학자들의 지식은 한계를 뛰어넘고 질병을 고치며 인류를 존속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단 그들의 무슨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랜디 올슨은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미래는 과학자들의 지식이 아니라 그들의 의사소통 능력에 달려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흔히들 '조선의 3대 구라'라 추켜세우지만 누구는 "경솔한 입 때문"이라며 흉을 본다. 입 열었다 하면 조선 8도를 휘감는다 하고, 펜 들었다 하면 수백 년 역사들이 어제오늘처럼 숨 가쁘게 쏟아진다 한다. 수권의 저서와 수백만 부에 달하는 판매 부수로 누구에게나 그의 목소리 미쳤으니 더는 원이 없을 것 같은데, 또 새로운 '썰'을 푼단다. 그러나 사실 그의 전공은 '듣는 것'이란다.

유홍준 명지대학교 교수(미술사학과). 그에겐 아직 못 들은 얘기가 남았다. 1권의 남도부터 5권의 금강(金剛)까지, 들리지 않았거나 들을 수 없었던 곳과 때의 목소리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지면에 새겨 온 그다. 이름 모를 합천의 어느 촌부에게서, 그야말로 죽은 듯한 릉(陵)이니 분(墳)에서조차 그는 펄펄 뛰는 이야기들을 낚는다. 그러니 그의 긴 '썰'은 어쩌면 눈이 아닌 귀가 예민한 탓이다.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유홍준 지음, 창비 펴냄). ⓒ창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울과 경기도, 충청북도와 제주도 답사기는 쓰지 못했다며 아쉬워하던 그가 10년 만에 드라마의 '시즌 2'에 해당하는 여로를 시작했다. 1990년대 초중반 서점가를 강타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3권에 다른 출판사에서 냈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를 4, 5권으로 이어서 세월에 변한 내용을 깎고 덧붙여 개정판으로 다듬었다. 여기에 완전히 새로운 6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도 함께 펴냈다.

이번에는 서울 경복궁과 충남 부여·논산·보령 답사에 각각 네 꼭지를 할애했다. 이 구성에서 '답사기'를 떠나 있던 10년간 유홍준 교수의 삶이 보인다. 서울 사람이었던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삼고 '5도 2촌(5都2村)' 생활을 하는 부여 외산면 반교리와 그 주변의 이야기, 그의 문화재청장 재직 시절의 깨달음이 담겼기 때문이다. 그는 공직에 몸담는 동안 경복궁 경회루를 일반인에 개방했고, 낡은 광화문 현판을 떼자고 했고, 광화문광장 만들기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왜 국제 대회 만찬을 고궁에서 여느냐",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를 모독했다" 등 수없이 매서운 말을 들었다. 존재감 없는 문화재청장 자리가 전무후무하게 연일 지면에 화면에 오르내렸다. 사고도 유난히 많았다. 2008년 2월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그도 4년간의 공직 생활을 접어야 했다. 못 다한 이야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경복궁을 얘기하는 6권의 초반부는 '나의 공무원 체험기'로도 읽힌다.

재직 시절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의 말대로 "'답사기'에 대해서만은, 못 썼다고 한 사람 한 명도 없었다." 거기에 실제 문화재 관리 현장에서 뛰었던 경험이 덧붙여졌으니, 기대를 키우는 이들이 있는 한편 걱정하거나 냉소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그는 과연 서문에 쓴 대로 "초심으로 돌아갔"을까. 또 다시 독자들을 설레게 할 수 있을까.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출근할 때마다 경복궁을 찬찬히 거닐고 싶은 충동을, 봄 냄새 가기 전에 선암사 답사 떠나고 싶은 마음을 몇 번이나 억눌렀다고만 말해 두자.

부슬비가 내리는 10일 오후, 유홍준 교수와 그의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 수졸당(守拙堂) 마당에서 만났다. 점잖은 말씨임에도 걸쭉한 기운이 담겨 마치 우리 소리를 듣는 듯했다. 그는 섬처럼 떨어진 광화문 광장도, 감동을 주지 않는 광화문 현판 글씨도 아쉽지만 모두 "이번에 내가 썼으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18년 전 그의 글이 국민의 미감과 주말 풍경을 바꿨다면, 2011년의 글은 '정책'에도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다음은 그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 유홍준 명지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문화재를 좇다가 촌부들에게 배웠다"

프레시안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이 10년 만에 나왔다. 감회가 어떤가?

유홍준 : 오래 끌던 숙제를 낸 것 같다. 사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같은 시리즈는 학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손해가 되는 책이다. 한국 사회에서 책이 잘 팔리면 저자는 공부 끝난 사람으로 취급되거든. 학자로 취급되는 게 아니라 베스트셀러 작가로 취급되는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 답사기를 그만 쓰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다시 쓸 만했을 때 문화재청장 제의를 받았다. 물러나면서 다시 손대려고 했더니, 이번엔 학생들이 내 강의(한국 미술사)를 책으로 내주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유홍준의 한국 미술사 강의 1>(눌와 펴냄) 작업을 했다. 물론 나도 환갑 지나고 정년을 바라보는 마당에 더 미루기도 뭐했고. 그런 중에 창비에서 자기들도 그렇고 독자들도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하면서 보챘다. 그래서 '시즌 2'를 쓴다는 마음으로 <월간 중앙>에 연재를 시작했고, 한 권 분량이 나와 묶은 것이다.

프레시안 : 책 나오는 과정이 매우 힘들었다고 들었다.

유홍준 : 창비 사람들, 말이 많았을 거다. 어휴, 내가 무지하게 원고를 고치거든. 자다가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 또 고치고…. 몇 번 다 엎기도 했다. 출판사로서는 월간지 연재를 그대로 가져다가 교정만 보면 될 줄 알았겠지만 내가 연재로 쓴 것도 다 뒤집었거든. (웃음)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독자들을 끝까지 붙잡아 두어야 하기 때문에 불안해서. 심지어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국보 순례' 시리즈도 겨우 5.2매인데, 연구실 조교 말로는 한 회 쓸 때 5번 이상을 고친다고 한다. 인쇄해서 읽고 다시 고치고, 징그럽다 싶을 때 최종 메일을 보낸다.

편집자 입장에선 지독하게 까다롭다고 욕할 수도 있지만 글에 끝까지 책임지려는 자세는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필자가 밉기야 하겠나. 사진에도 엄청 신경 쓴다.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곤 다 내가 찍은 사진이다. 사진가 강운구 선배에게 왜 똑같은 영암사터 사진인데 남의 사진을 쓰면 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강운구 선배 대답이 그랬다. "당연하지. 다른 사람이 찍은 건 내가 본 게 아니거든. 카메라는 기계라기 보다 일종의 붓과 같은 것이지."

프레시안 : 과거에 "1권과는 다른 2권, 2권과는 다른 3권, 남한 답사기와는 다른 북한 답사기(4, 5권)를 쓰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는데, 이번 6권은 어떤 점이 다르고 새롭나?

유홍준 : 마음을 비웠다. 초심으로 돌아갔다고나 할까. 억지로 잘 쓰려고 하는 생각 전혀 없이 썼다. 가령 선암사에 대해 쓸 때 예전 같으면 다른 사람이 선암사에 대해 어떻게 썼는지 조사하고 그들과는 다른 글을 쓰려고 했을 텐데, 지금은 다른 사람이 했든 안 했든 '내 얘기'만 쓰려고 주력했다.

독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라고 판단되는 것을 주저 없이 쏟았다. 그래서 주인공인 유물들보다 그와 연관되는 부차적인 얘기들이 많이 부각된다. 경복궁 양의문에서 우리나라 굴뚝, 온돌 문화 얘기로 이어진다든지 태원전과 빈전을 소개하면서 엄격한 장례 문화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풀어놓기도 하고. 합천 영암사터에서 해인사로 향할 때마다 들려주는 한 촌부의 이야기….

프레시안 : 그점이 6권에서 눈에 띄는 부분 중 하나다. 부제인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가 말해준다. 도처에 무수한 상수(上手)들의 노력이 있었고, 그것의 가치를 밝혀낸 이들도 상수들이었다는 얘기다. 특히 이름 없는 필부들의 존재감이 글 곳곳에 녹아 있다.

유홍준 : 1권에서 쓴 것처럼 여태까지 답사를 다니면서 특별한 연줄로 남들이 못 들어가는 데 들어가 본 적 없다. 여느 여행자와 똑같은 입장에서 다닌다. 안 들여보내줘서 화딱지 나서 욕한 적은 있어도. (웃음) 본래 필부들의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이문구의 <유자소전>에 나오는 '유재필 씨' 같은, 이름은 없지만 멋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 어떤 영웅전보다 가슴에 진하게 다가온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비록 교육 혜택을 못 받았더라도 자기 삶을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사람들이 어디나 많다. 그런 얘긴 빠짐없이 썼다. 그러나 사실 내가 써야 할 게 아니다. 르포나 소설 속에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문학, 우리 언론에는 정작 주장은 많은데 사람 얘기가 빠진 경우가 많아서 항상 아쉽다.

프레시안 :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가령 자금성과 구별되는 경복궁의 가장 큰 특징이자 미덕은 위치 설정, 즉 자연과의 어울림이라고 말했다. 또 가는 곳마다 꽃과 나무 얘기가 '흐드러지게' 많다.

유홍준 : 일단 나이가 들어서일 거다. (웃음) 사실 원래 자연에 관심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나는 답사할 때 건물 얘기보다 나무 얘기를 더 많이 한다. 문화재청장 할 때도 천연기념물 분과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내가 나무에 대해 잘 안다고.

우리 건축 문화 복원하는데 있어 건물 못지않게 나무가 중요하다는 걸 의식하고 살았다. 청장 하는 동안 임업으로서가 아니라 '조경'으로서 어떻게 나무를 우리 왕릉과 궁궐에 들여올지를 많이 고민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건물은 복원이 됐는데 정원은 복원이 안 되고 있다. 정원엔 병아리꽃, 황매, 백당나무, 불두화 같은 관목들이 많아야 하는데, 이 나무들이 정원수로 어떻게 활용되는지 전례가 없고 남아있는 사진도 없었다. 나중에 전공을 바꿔서 그걸 해보고 싶다. 시골에 수목원을 사서 우리 정원에 어울리는 토종 관목들, 작은 나무들을 심어 보급하고 싶다.

프레시안 : 문화재를 보존하려면 오히려 더 열어두어야 한다는 메시지도 눈에 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몰려오면 부작용도 생기지 않을까.

유홍준 : 문화재는 열어두어야 한다. 권위주의 시대 강압 통치를 오래 경험해서 그런지 우리는 '출입 금지', '사진 촬영 금지'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세계 어딜 봐도 이유 없이 개방하지 않는 예는 없다. 모든 종갓집 사람들의 고민이 뭐냐면, 사람이 살지 않아서 건물이 무너진다는 거다. 아무리 잘 지은 한옥도 사람이 3년만 살지 않으면 폐가가 된다.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건물도 생기가 돌지. 나무도 그렇다. 경복궁 자경전에 있는 나무들이 예전엔 회색빛이었는데 지금은 초콜릿 빛이다.

다음은 민도(民度, 문화 수준)의 문제다. 문화재청장 하는 동안 경회루를 44년 만에 개방하면서 '출입 금지'를 흔들었다. 지금 경회루처럼 1일 4회, 100명씩 출입을 제한하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당시에 고궁에서 국제 대회 환영 만찬을 여는 걸 허락했다고 비난이 많았는데, 사실 그건 고궁의 최대 메리트다.

또 그렇게 써 줘야 건물도 더 보존이 잘 된다. 손님 맞으려고 마루 한 번 더 쓸고 닦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고궁에서 만찬을 하겠다고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문화재는 열어 두되, 어디까지 개방하느냐는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으로 판단하면 된다.

"유홍준이 남대문을 태워먹었다면…"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문화재청장으로 있는 4년 동안 가장 잘 했다고 생각하는 일은 뭔가.

유홍준 : 문화재 관리에 큐레이터십을 심었다. 원래 문화재청이라고 하는 데가 고리타분하고 폐쇄적인 공무원 집단이었다. 인지도도 낮거니와 직원들도 상당히 침체되어서 수동적으로 문화재를 관리했다. 누가 찾아와 천연기념물, 보물, 국보 등재를 신청하면 가치 있으면 해 주고…. 문화재청이 먼저 찾아가서 조사하고 발굴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어떤 청자는 보물 등재된 것보다 더 멋있는데 아무 것도 안 붙어 있고… 이거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찾아다녔다. 백자달항아리니 고지도니 초상화, 글씨 다 나오라고 해서 전부 (국보, 보물) 지정했다. 또 전국에 있는 돌담길 열 곳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지, 복원 가능한 관아 조사해서 6곳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지…. 이렇게 적극적으로 하니 문화재청 사람들도 좋아했고, 아직도 그 문화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또 있다. 궁궐, 왕릉에 노년층 대상으로 관람 안내 지도위원 뽑은 것. 그게 은퇴한 사람들 일자리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모범적인 사례다. 이건 보건복지부 노인정책국 같은 곳의 일자리 창출 콘셉트와 약간 달랐다. (궁·능에서) 제일 멋있고 좋은 자리가 관람 안내 지도위원이다. 중요한 건 노인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직업을 주는 거다. 주 이틀 일하게 하고 30만 원 주는 것보다 주5일 일하게 하고 90만 원 주는 게 낫다. 용돈 받으러 나간다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 직업이라는 의식을 갖게 해야지.

프레시안 : 재직 당시, 여론으로부터 공격당하는 일도 많았다. 힘들었던 부분은 없는가.

유홍준 : 광화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를 뗀 것 때문에 보수층으로부터 매를 맞았는데, 그건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고. 사실 내가 하자는 대로 했으면 현판도 안 갈라졌지. (웃음) 그리고 북악산 개방한 것. 정말 힘든 일이었다. 사실 나보다 대통령(노무현 전 대통령)이 더 하고 싶어 했던 일인데 누가 나서서 하지 않던 일이었다.

대선 후보도 신문 3면을 써서 공격하는 일은 없다고 하는데…. (웃음) 나를 그토록 공격한 건 하나는 내가 노 전 대통령과 친하다는 것 때문이고, 또 하나는 당시 언론과 정부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날 왜 그리 못살게 구냐고 (언론 쪽에) 물어봤다. 그랬더니 "기사의 상품적 가치가 높아서" 그랬다고 하더라.

그런데 내가 맞을수록 오히려 노무현 정부는 한시름 덜었다는 얘기도 있다. 청와대 쪽 사람이 그러던데 '언론 폭탄 정량제' 이런 게 있단다. 언론이 정부를 '조지는' 탄환의 수가 정해져 있는데, 문화재청을 때리면 다른 데는 못 때린다고. 외교통상부나 통일부 같은 데가 맞으면 정부 전체가 흔들리는데 문화재청은 때려봤자 문화재청이고 내가 워낙 맷집도 좋으니까. (웃음)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전에 있었던 숭례문 화재 사건의 경우는 내가 도의적으로는 사표를 쓰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홍준이 숭례문을 태워먹었다는 논리라면 천안함은 김태영 전 국방장관이 침몰시킨 것 아닌가. (웃음) 세월 지나면 사람들도 다 알 거다. 그래서 그런 얘기가 가끔 나와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사람들이 제대로 풀지 않고 넘어간 의문이 있는데, 어떻게 소방차 60대가 달려왔는데도 불을 끄지 못했을까? 대한민국 최고 장비가 다 현장에 있었는데….

내 생각은 이렇다. 2006년에 똑같은 사건이 수원 팔달산 서장대 누각에서 일어났다. 그때도 방화 사건이었다. 소방관들이 와서 누각을 부숴 20분 만에 진화했다. 그런데 그 소방관이 '과잉 진화'로 1년 넘게 조사를 받았다. 숭례문 탈 때도 소방관이 가만히 있으면 아무 죄가 없는데, 부수고 불 끄면 조사를 받는다. 그 문제가 제일 크지 않았을까.

숭례문 화재 당시에 내가 외국 출장 중이었다. 현장에 있었다면 무조건 기왓장 끌어내리고 속의 불을 끄라고 지시했을 텐데 그런 지시를 내릴 사람이 없었던 거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 책임자는 문화재청장이 아니라 중구청장이다.

프레시안 : 경복궁 복원 작업을 하면서 광화문광장을 만들자고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기도 했다. 안(案)이 서울시로 넘어가는 등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만들어졌는데, 문화재청안과 달리 섬처럼 된 광장이 됐다. 원래 안에선 광장이 세종문화회관 쪽에 붙어 있었다. 현재 모습이 아쉽지는 않나.

유홍준 : 나중에 그렇게 (세종문화회관 쪽에 붙게) 고치면 된다. 내가 답사기에 그렇게 썼으니까, 정권 몇 번 바뀌면 그렇게 되겠지. (웃음) 데모 공포증 때문에 광장이 광장답지 못하게 됐다. 어느 정부든 광장을 무서워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광장은 사람이 모이라고 있는 건데, 반대로 사람이 모일까 무서워서, 모임을 차단할 수 있는 콘셉트를 염두에 두니까 이렇게 됐다.

아쉬운 건 비단 광화문광장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건축 전체의 문젠데, 건축가의 작품이 되지 못한다는 거다. 우리나라 대형 건축 프로젝트는 턴키(turn key·공사 일괄 수주 계약 방식) 방식으로 진행되어서 대기업 아니면 참여를 못한다. 건축가들이 참여한다고 해도 그들의 이름은 부각이 안 된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예로 들어보자. 방패연 모양으로 아주 잘 지었다. 누가 봐도 멋있다. 그런데 그건 '삼성엔지니어링'이 만들었다. 그런데 설계한 사람은 건축가 유춘수(이공건축)다. 삼성에서 컨소시엄을 구성해 유춘수를 스카우트해서 지은 거다. 참여해도 그게 드러나지 않으니까, 우리 건축가들이 세계 100대 건축가에 이름을 못 올린다.

결국 행정 편의적인 턴키 방식이 우리 건축 문화에 장애 요인이 된 셈이다. 광화문광장도 누가 되었든 최고 가는 건축가의 작품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뭐 광장이 생겼으니까, 앞으로 좋게 고쳐나가면 된다.

프레시안 : 광화문 현판 글씨를 놓고도 말이 많았다. 여러 안이 있었는데 결국 흥선대원군 복원 당시 현판의 유리원판 사진을 디지털로 복원한 글씨를 현재의 현판으로 했다. 지금도 새로 쓰자는 얘기가 나오는데….

유홍준 : 내 얘기대로다. 현재 현판은 문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감동을 주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어느 땐가는 바뀔 거다. 여론도 그러하니까. 사실 논의 당시에 내가 마련했던 여섯 개 안 중에 어떤 걸 선택하더라도 진지하게 논의했으면 좋은 답이 나왔을 거다. 그런데 공무원들의 목표는 감동을 주는 뭔가를 만드는 게 아니었던 거다. 결국 그 시대의 문화 능력이 말해줄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김지하, 김수영, 신동엽…가느다란 '맥'이 있었다"

프레시안 : 광화문 현판 글씨를 바꾼다 해도 문화유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면 똑같이 감동을 못 느끼지 않을까. 특히 젊은 세대 가운데는 의복이나 서양 문화에 대한 미감은 있어도 우리 문화유산, 옛 것에 대해선 갸웃거리는 이들이 많다. 고민이 되지는 않는가.

유홍준 : 기본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제 나라 것들을 별로 안 좋아한다. 젊은 세대의 미감? 큰 신경 안 쓴다. 젊은 놈이 날 때부터 옛 것에 푹 빠져있는 것도 보통 놈은 아니지 않나. (웃음)

우리 아름다움에 무감각해졌다고 해도 그네들을 탓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우리 교과서 내용이 적잖이 과대 포장되거나 강요된 게 있어서 반발도 있었을 거다. 우리 문화는 예로부터 찬란하다든지 위대하다든지 하는 과장이 있잖나. 바깥의 것들도 보고 우리보다 뛰어난 것도 가르쳐 주고 해야 뭐가 좋은지 이해할 텐데….

내겐 '우리' 문화유산의 우수성을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많은 이들이 내 책에 공감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서양 미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색안경을 벗고 봤을 때 오히려 거기서 독특한 별도의 미학이 나오지 않겠는가.

박물관 디스플레이도 연대기적으로 우리 역사가 유구하고 어쩌고 자랑하듯 하는 것보다, 미적 기준을 적용해 한국 문화의 독특한 면모들을 소개하는 방법으로 하면 좋을 거다. 이쪽엔 아기자기한 금속 공예를 놓고 저쪽엔 청자 공예품을 놓는 식으로, 우리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봐도 아름다워서 감동이 생기는 분위기를 만들어 줄 때가 됐다.

프레시안 : 유홍준 본인은 어떻게 우리 미술, 우리 문화유산에 심취하게 됐나.

유홍준 : '깐수' 정수일이 언젠가 나를 비롯해 서중석, 안병욱, 홍세화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나왔는지 참 희한하다는 얘기를 했다. 우리가 1960년대 후반에 대학 다니던 세대인데, 그땐 모든 게 완전히 서양 문화에 압도된 상태였거든. 거기서 시대 분위기와는 다른 민족주의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이 나온 게 신기하다며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거다.

지금 돌이켜 보면 웃기는 생각이지만, 처음에는 서양 미술사의 방법론을 우리 미술사에 적용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서양 미술사엔 참 많은 스토리와 감동이 있는데 왜 우리는 연대기적 분석, 물질 분석만 하는가 싶어서.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해서 나올 건 아니더라고. 그러면서 한국미술을 밝히는 또 다른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특별히 애국적 관점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사실 4·19 이후에 김수영, 신동엽, 조동일, 김지하, 염무웅, 백낙청 같은 분들에 의해 이어지는 아주 가느다란, 민족주의적인 줄기가 있었다. 그 줄기가 꽤 중요한 영향을 준 것 같다. 특히 우리 세대에겐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이라는 계간지의 등장이 의미가 컸다. 거기서 받은 감화는 학교 다닌 것보다 더 컸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건 민족적인 걸 떠나서 진실을 보고 싶은 마음에 가까웠을 지도 모른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같은 (우리 이야기를 하는) 책이 왜 우리 국문학자나 민속학자, 인류학자들로부터 나오지 않는지 이상하다. 그들이라면 더 재밌고 풍부하게 쓸 수 있을 만한 장르인데. 내 답사기에 우리 문학 얘기가 간혹 나오는데 처음에는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가령 북한 답사기에 기자묘(箕子墓)에서 김동인의 <배따라기>를 생각하며 그의 문학을 예찬하는 내용을 썼는데, 과대평가했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국문학자라면 이런 것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기행문을 낼 수 있을 텐데…, 언젠가는 나오지 않을까.

프레시안 : 그렇다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가?

유홍준 : 앞서 나온 것 중에 비슷한 게 없었다. 재밌는 게, 내가 답사기를 쓰기 전에 육당 최남선의 <심춘순례>(1926년)를 읽어본 적이 없다는 거다. 그걸 봤으면 남도 답사기가 못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다행히도 안 봤다. (웃음) 나중에 사람들이 하도 얘기를 하기에 찾아서 읽어봤는데, 내 글과는 전혀 다르더라.

더러는 시바 료타로의 <가도를 가다>(전 41권)를 보고 답사기를 썼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궁금해서 탐라 편과 한나라 편을 찾아 읽기도 했다. 그런데 그 책도 내가 쓴 답사기하고는 전혀 다르더라. 원서로 봤는데, 나중에 출판사한테 꼭 번역하라고 얘기해서 국내에도 소개됐다.

프레시안 : 문화유산 하면 민족주의적인 시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면이 있는데 요즘엔 문화, 학문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민족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열린 민족주의 시대다. 그런 인식의 변화 속에서 우리 문화유산들이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유홍준 : 우리 문화의 정체성은 우리가 우리 것을 얘기하는 것으론 나타나지 않고, 동아시아 전체 속에서 그 위치를 찾을 때 글로벌한 가치와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지분율을 갖고 있는 문화적 주주 국가다"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그 말대로다. 그런 개념 속에서 이야기해야한다. 단순한 애국심이라든지 국토애만으로 우리의 미는 보이지 않는다. 책 속에서 내가 자금성을 얘기하거나, (1995년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였던) 미국인 캐서린 같은 이의 눈을 빌려 선암서 이야기를 한 예들이 그런 '아이덴티티 찾아주기'의 주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우리 문화재가 외부로부터 시선을 빌린 대표적인 예가, 일제 강점기 때 광화문 철거 반대를 외쳤다는 일본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가 아닐까. 이번 6권에서 그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강하게 드러냈다.

유홍준 : 어느 나라에서든 문화재의 가치는 꼭 그 나라 사람이 밝혀낸 것만은 아니다. 외부의 시선이 보태짐으로 하여서 그 의미가 더 커진다. 여전히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판하고 극복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우리에게 준 어마어마한 공을 인정하고 비판하는 게 아니라 비판만 남아 있다. 그를 식민지 지배의 연장선상에서, 제국의 신민이라고 비판한다면 누구도 인생을 살 수가 없다.

그는 한국 문화 속에서 예술성을 발견했고 광화문을 허는 계획에 온몸으로 분노했다. 야나기 전집 24권 가운데 2권이 한국 문화에 해당한다. 그의 다른 인생은 몰라도, 그 부분만 놓고 보면 우리는 그에게 정말 고마워해야 한다. 그가 한국 예술을 비애의 미라고 규정했던 건 식민지의 궁상맞음을 얘기한 것이 아니다. 그가 지향하던 민예 사상의 핵심을 우리 미술에서 발견했던 것이고, 그래서 일본 민예관에 한국 미술을 현시한 것이다.

"朴통, '전문가 우대'만 했어도 성군"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문화재 정책에 대해 얘기해 보자. 역대 대통령들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나 관련 정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유홍준 : 박정희 대통령이 관심도 제일 많았고 관련 예산도 많이 책정했다. 그런데 그분이 전문가를 존중했으면 참 성군이었을 텐데, 그렇지가 못했다. 전문가들한테 역할을 위임하고, 자신은 행정적인 지원만 했으면 결과가 대단했을 거다.

불국사 복원하고 황남대총 발굴하고…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아산 현충사, 칠백의총, 신사임당 기념관에다가 천편일률적으로 콘크리트 한옥에다 미색 수성페인트를 칠해 놨다. 똑같이 해놔서 하나도 남길 게 없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경복궁 복원 20년 계획을 세워서 현재 광화문 복원까지 오게 한 업적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냥 나한테 다 맡겼으니 내 마음대로 했지. (웃음) 문화재 관련해서 나처럼 대통령한테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사람은 없을 거다. 예산도 2500억 원이던 게 4200억 원이 되었으니까. 내가 잘했고 못했고를 떠나서, 대통령이 문화재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그 방법이 가장 좋다. 전문가를 쓰고, 예산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면 된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는 어떤가?

유홍준 :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사업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별로 남을 게 없을 것 같다. (웃음)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사례가 몇 가지 있는데 김대중 정부 때 추진한 경북 유교 문화권 관광 개발 사업, 노태우 정부 때 김종필이 주장했던 백제 역사 재현 단지 같은 거다. 유교 문화권 개발 사업으로 영주에 선비촌 만들고 한 게, 경상도 사람들한테 '보여주기 위해' 추진한 건데 정말 잘못된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건 관계자들 몇 십 명이 오랫동안 연구해서 결정해야 할 일인데 선거 공약으로 순식간에 결정되고 조 단위 예산이 들어가니까 천하의 흉물이 되어버렸다. 선거가 망친 것이다.

프레시안 : 국가가 보호해야 할 문화재의 범주가 확장될 필요는 없을까. 가령 혹자들은 철거되었거나 철거 위기에 내몰린 옥인아파트, 동대문 운동장 같은 근대 이후의 한국 현실을 보여주는 건물들도 잠재적 문화유산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것들을 문화재로 인식하고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유홍준 : 국가에서 지정하는 문화재란 공식적으로 역사가 100년 이상 된 것이어야 하고, 근대 문화재도 적어도 50년이 넘어야 등록할 수 있다. 그런데 문화재라는 게, 처음부터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잘 보존한다고 문화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지나고 거기에 문화재적 가치가 있을 때 비로소 보호받는 문화재가 된다. 동시대에 '문화재냐 아니냐'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먼 훗날 그것이 시대를 증언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됐을 때 보존에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 후대를 위해 남겨두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가령 이 집, 수졸당(守拙堂) 인근에 사람들이 하도 안 와서 파격적인 면세 지원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지어진 집 가운데 2층짜리 펜트하우스 '불란서 집'이라는 것들이 있다. 그들 중 단 한 블록만이라도 살아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지금 시세론 그 집들을 그대로 두는 거랑 아파트를 새로 짓는 거랑 차익이 몇 십 억이니까 개인이 그렇게 보존하지는 못한다.

또 과거에 '바다이야기' 사건 터졌을 때 그 기계를 10대 정도 남겨두려고 하기도 했다. 국회에서 예산 심의할 때 옆에 경찰청장이 있기에 "압수한 거 10대만 문화재청에 기증해 주쇼. 50년 후에 이 엄청난 사건을 누가 알겠어. 그냥 들으면 '바다이야기'가 횟집인지 알지 않겠어? 이건 민속박물관에서 사둬야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웃음) 민속박물관장한테 말했더니 "그런 거 다 사 놓으려면 대형 할인점 창고가 필요하다"고 하더라. 실제로 그렇다. 모든 증언들을 남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복궁, 대충 보지 마라"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시즌2'가 시작되었으니 7권도 머지않아 나올 것으로 안다. 책날개에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이라는 제목이 나와 있다.

유홍준 : 제주도와 다도해의 여러 섬들을 답사한 내용이 될 것이다. 사실 제주도만으로 한 권 분량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러면 답사기 '제대'가 멀어지니까. (웃음) 네 번째 글까지 나왔는데 아직 제주 시내도 못 벗어났다. 한 권에 열 네댓 꼭지가 들어가는데, 제주도 기행이 열 번이 되면 네 번을 억지로라도 늘려야지. 써봐야 알 것 같다.

프레시안 : 1990년대 초반 답사기 1, 2권이 나오고 베스트셀러가 되자 전국적으로 답사 열풍이 불었다. 당시 한국이 '마이카 시대'로 진입해 이와 맞물려 답사 열풍이 불었다는 분석도 있었는데, 이번 1~6권 전질 출간의 반향은 어떤 식으로 나타났으면 하나.

유홍준 : 하나는 경복궁을 비롯해 서울의 고궁을 좀 더 구석구석 진지하게 봤으면 좋겠다. 서울 사람들이라면 내일 당장도 쉽게 가볼 수 있는 곳인데 겉핥기로만 보지 말고 조목조목 뜯어서 보면 좋지 않겠나. 또 하나는 마지막 네 꼭지에 실린 부여·논산·보령 답사기를 통해 향촌에 대한 시각이 약간은 달라졌으면 한다. 산, 들, 마을에 동정심 내지는 동참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프레시안 : 부여·논산·보령 답사기 부분은 문화유산 답사기기도 하지만 유홍준의 '5도2촌' 생활 일지이기도 하다. 부여 '반교리 마을청년회원'으로서의 삶은 어떤가.

유홍준 : 아주 행복하지. 5도2촌이든 귀농이든 처음엔 흉내 내기 힘들겠지만 결국 다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행복하지 않을 거니까. 서울에서 아파트 한 평만 팔아도 시골 가서 넓은 집 짓고 살 수 있다. 내가 일찍부터 서울에선 헬스나 가지 뭐 할 일이 있느냐는 얘기를 하고 다녔더니 "그럼 네가 가서 한 번 살아봐라"라는 말이 돌아오더라. 내가 못할까봐? (웃음)

정부에 있는 사람이건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건 간에, 못 내려가겠다고 하는 사람들 얘기가 늘 그거다. "우리는 시골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려면 그곳에 문화·의료 시설 등 인프라가 있어야 한다". 아이고, 대한민국 어디에도 차로 한 시간 안에 대형 병원 못 가는 데가 없다. 그리고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공연도 안 보는 사람들이 부여문화원에서 하는 공연에는 가겠나. '인프라 없다' 운운이 결국 안 가겠다는 핑계다. 1년에 한 번 공연하기도 힘든 곳에 요란한 문화 시설을 짓는다는 게 말이 되나. 외국의 사례를 여기에 적용하려니 그런 헛소리들이 나온다.

한국은 땅덩이도 좁아서 멀리 가봤자 차로 3~5시간이면 된다.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해도 그런 의지만 있으면 누구든 내려갈 수 있으리라고 본다. 또 원주민하고 도래인하고 마찰이 심하다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럼 시골 사람들이 도시 사람들이랑 다른 걸 모르고 가나. 이해하고 들어가야지. 서울서 직장 생활하던 것처럼 똑같이 대화가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부딪치는 게 싫어서 외따로 사는 사람도 있다더라. 나는 외로워서 그렇게 못한다. 반교리 우리 집(휴휴당·休休堂)엔 울타리가 없다.

다만 아무나 못 가는 게, 한국의 독특한 자식 교육 문제 때문에 애들이 대학 가는 것까진 해결한 사람들만이 해방될 수 있다. 그러다 일흔 넘어서는 내가 살면 몇 년이나 더 산다고, 겁난다고 안 가게 된다. 그나저나 책 나온 다음 반교리 우리 집이 어떻게 될 것 같나?

프레시안 : 사람들이 많이 찾아가지 않을까? 시골집 얘기를 책에 공개하는 것에 대해 갈등하지 않았나.

유홍준 : 우리 마누라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웃음)

프레시안 :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마을 사저에서 그랬듯 주말마다 방문객들 앞에서 인사해야하는 것 아닌가. (웃음) 아직 멀었지만 답사기 '제대'한 다음의 계획을 듣고 싶다. 언젠가 '나의 공무원들 답사기'도 써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유홍준 : 그냥 부여에서 농사 지으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다. 나무 길러서 여기저기 보급하고. 하여간 '원고 빚' 없이 살아보는 게 소원이다. (웃음) 욕심? 이젠 없을 것 같다. 다만 <한국 미술사 강의>와 <화인열전> 남은 부분 털어내고, '국보 순례'는 일주일에 한 번 쓰는 거니까 필력이 닿는 한 <조선일보>든 <프레시안>이든 어디든 연재할 거다.

요즘엔 '국보 순례'에서 미국에 있는 문화재들을 하나씩 소개하는데 사람들이 재밌어 하더라.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도 중국 편이나 일본 편은 써보고 싶다. 중국은 북중 국경선 압록강 유역이나 연암 박지원이 갔던 길들은 우리와 연관해 얘깃거리가 많고, 일본 교토, 나라, 아스카 유산들은 뭐 우리 문화유산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일본 안내원들한테 듣는 얘기 말고, '나는 이렇게 느꼈다'고 얘기하고 싶은 게 분명 있더라.


ⓒ프레시안(손문상)


유홍준이 사랑하는 책은…

프레시안 books는 인터뷰에서 만난 저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인생을 바꾼 책은 무엇이냐고. 그들은 어느 때보다 눈을 빛내면서 대답한다. '유홍준이 사랑하는 책'은 그가 쓴 책만큼 그의 족적과 향수와 희망을 잘 보여준다.

"무조건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반성완 옮김, 창비 펴냄)와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백승길 옮김, 예경 펴냄)다. 그 두 권이 내 인생을 바꿨다. 문학에서는, 유치하다고 할지 몰라도 <삼국지>다. 요시카와 에이지, 김광주, 황석영, 고우영 등 소설, 만화 가리지 않고 다 봤다. 아, 이문열 건 안 봤구나. (웃음)

그리고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이기웅 옮김, 까치 펴냄),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전10권, 사계절출판사 펴냄),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맹은빈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요즘은 <고요한 돈강> 같은 소설은 많이 안 읽지? 참 좋은데….

시집을 고르라면 김지하의 <황토>(솔 펴냄)다. 그게 제일 멋있었다. 진짜 시다. 사람의 심금을 들었다 놨다 하니까. 그리고 김소월의 <진달래 꽃>. 우리말을 그렇게 잘 쓴 사람이 소월 말고 없었다. 산문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등 전통 위에 모더니즘의 기운을 받았던 당시의 것들이 가장 좋았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