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의 영화 <올드 보이>에서 15년 동안 아무런 이유 없이 군만두만 먹어온 주인공 오대수는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누구냐 넌?"
이때 오대수는 무엇이 궁금했던 것일까? 컴퓨터의 할아버지쯤 되는 앨런 튜링이 비슷하게 물은 적이 있다. 보이지 않는 차폐막 뒤에 있는 뭔가가 우리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의 존재라면 그 뭔가를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따금씩 생뚱맞은 대답을 하기는 하지만 별다른 문제없이 내 말을 이해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라면 그 뭔가를 '인간'이라고 불러야 하지는 않을까? 오대수의 물음이나 튜링의 물음은 모두 '정체(Identity)'에 관해 묻는다. 그 '정체'는 문제의 대상을 다른 것들과 구별시켜 주는 본질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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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의 초상>(아담 지먼 지음, 김미선 옮김, 지호 펴냄). ⓒ지호 |
물론 이러한 질문의 원조는 조금 다른 형태로 던져지긴 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너 자신을 알라!"고 한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제일 궁금하다. 그러다 어느 나이 때가 되면 그런 궁금증을 억누르거나 질문 자체를 잊어버리고 산다. 답이 없는 질문인 것 같기도 하고,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 문제가 되지도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잊고 살다가 삶의 위기가 찾아오면 새삼 묻게 된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 칸트가 자신의 그 위대하고 복잡한 철학을 한 마디로 묶었을 때 던진 질문도 그것이었다.
인문학이란 학문은 바로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나는 누구이고 또 너는 누구이고, 우리는 무엇이며 인간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가 아니며, 적어도 한 문장으로 하긴 어려울 거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문장도 아닌 한 단어, 오직 한 자인 '뇌'라고 쿨하게 대답한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물리적인 몸이자 살아있는 생명체이자 의식 있는 마음이기도 한,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인 존재"가 우리 본질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니 그가 앞서 언급한 인간 본질의 세 가지 측면이란 것은 이미 히포크라테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통찰이었던 것 같다. 고대 그리스어 프렌(Phren)은 '뇌'라는 뜻인데 동시에 '마음'을 뜻하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뇌와 마음을 동시에 가리키는 하나의 단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해볼수록 흥미롭다.
뇌 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뇌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가를 밝혀낼수록 왕년에 뇌와 같은 지위를 누렸던 마음은 더욱더 미스터리한 어떤 것으로 치부되며 설자리를 잃어갔다. 그러다 급기야 인간은 뇌라는 물질이 지배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에 의해서 방을 빼야할 상황에까지 몰리기도 했다. 어떠한 첨단 과학 기술과 철학적 논리로도 마음의 증거를 찾을 수 없었고, 증거가 없음이란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마음의 증거를 찾을 수 없으므로 마음은 없는 것이라는 믿음은, 마음이 몸을 떠나 존재하는 독립적인 어떤 것이란 믿음만큼이나 의심스러워 보이지는 않는가.
문화와 역사적 시기를 막론하고 인간은 마음과 몸이 분리될 수 있고, 죽은 뒤에도 마음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상상해 왔다. 이러한 상상은 과학이 더할 수 없이 발전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흥미롭게도 과학자들조차 이러한 믿음을 거부하기보다 수용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 그렇다면 왜일까? 임종을 맞이한 아내가 남편에게 '우리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요'라고 애틋하게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여보, 다음 세상이란 없어. 인간은 한번 죽어 묻히면 그냥 끝이야'라고. 아무리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몸은 죽어도 마음은 살아남을 거라고 굳게 믿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이 정말로 불멸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는 '원자들과 공허'뿐이라고 전망하는 것보다는 삶을 혹은 생을 덜 허무하게 할 테니까.
물론 저자는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자신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불멸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는 믿음을 멋들어진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곧 뇌'라는 황량한 대답을 하진 않는다. 불멸하는 영혼이 아니라도 어쩌면 또 다른 위대한 신비, 생명 그 자체의 신비의 숙명이 우리에게 마음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려줄지도 모를 테니 말이다. 결국을 꼭꼭 숨은 아이들을 모두 찾아내고 말 숨바꼭질 게임처럼.
"마음 없는 물질과 물질 없는 마음의 대립. 하지만 주장하건대, 이 대립은 거짓이다. 마음과 물질은 반대되는 관계가 아니라 긴밀하고 순환적인 관계다. 마음은 물질로부터 발현하고 물질은 마음에 의해 움직인다. 주체와 객체의 극단적 대비 역시 같은 이유로 우리를 오도한다. 우리는 결코 완전한 객관성을 획득할 수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이고, 우리는 누구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책의 결론에 따르면 물론 우리는 뇌 이상이다. 결론이 개인적으로 매우 흡족하다. 왜냐하면 마음은 있으니까. 있어야만 하니까. 그래야 '진심 드립'도 가능하지 않을까? 물리적 세계에서 '마음의 자리를 찾아온' 우리의 방법이 잘못이었던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어쩌면 우리가 마음과 물질의 관계에 관해 불가능한 질문만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전적으로 뇌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 괜찮은 답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재료들에 눈감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 <뇌의 초상>은 과학책일까, 인문학 책일까? 책표지에 걸린 '뇌의 초상'을 노려보며 이렇게 묻고 싶다.
"누구냐, 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