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퇴의 책, <금강경>

뒤통수를 후려치는 철퇴의 책, 어린 날 어느 해 <금강경>을 읽었다. 이 책과 묶어 읽은 노자, 장자, 반야경, 쿠자의 니콜라스, 십자가의 성 요한, 무함마드 루미는 한결같았다. 이들이 보여주는 언어의 특색은 역설(paradox)이었다. 깨우친 자들의 입술에서는 왜 똑같은 표현이 흘러나오는 것일까. 이것이 내 십대의 화두였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한다.

"모든 지혜를 얻기 위해서 어떤 지혜도 갈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위해서, 모든 것이 되기 위하여,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이 말에 대답하듯 <우파니샤드>에서 말한다.

"네가 브라흐만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면, 브라흐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금강경>이 다시 이를 받는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만이 갖고 있는 남다른 진리라는 것이 없다고 내가 가르치지 않았느냐, 그래서 깨달은 사람에게는 남다른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대와 종교를 뛰어넘은 동일한 말투가 정말 아름답고 놀랍지 않은가. 이들의 전언이야말로 무릎에 손이 가도록 만들고, 뒤통수를 후려쳐 망상을 깨는 말이었다. <금강경>은 다시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말한다. 아니, 이러한 화법이 <금강경>의 전체다.

'이것 봐, 네가 소위 중생을 구원한다는 보살 아니냐, 근데 너 말야, 네가 정말 누군가를 구원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눈곱만치라도 갖고 있다면 넌 벌써 보살되기는 글러먹은 게야.'

이런 말은 단순히 도덕적 차원의 겸양을 요청하는 말이 아니라 불교적 분석과 체험에서 비롯한 생세계의 사실적 표현이다.

한국에 익숙한 <금강경>은 소위 반야 사상을 표방하는 대승 경전인 반야경 유에 속하는 짧은 책이다. 그러니까 대략 인도의 고전기가 시작하는 굽타 시대 전에 제작된 것이다. 대략 기원후 400년 경에 해당한다.

이 책의 본래 이름은 '벼락처럼 자르는 뛰어난 지혜의 책'. '벼락(vajra)'은 신들의 무기로 초기 인도의 바즈라(금강)는 단단한 정강이뼈로 형상화된다. 유달리 고대 인도인의 표현 속에는 '머리를 쪼개버리겠다'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신들이 전투에 임해서 이렇게 말했고, 철학서 속의 현자들은 철학적 담론 속에서 상대방이 헛소리할 때만을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바즈라 즉 벼락은 무엇을 단숨에 박살내는 무기였다.

그런데 불교인들은, 또는 <금강경>에서는, 벼락과 같은 지혜로 무엇을 자른다는 말일까.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적 구성물, 개념적 허구 전체다. <금강경>과 같은 반야경 유의 특징은 특정한 불교의 교리적 건축물을 축성하지 않는다. 대신 기존에 존재하고 사용해왔던, 너무 익숙해서 당연시 되었던 관념들을 무너뜨린다. 해체한다. 그러나 건축하지 않는다.

반야/중관론자들은 철퇴를 든 재건축 현장의 철거반원들이다. 반야경의 사명은 동시대 인도 불교 내의 교조화되고 문자화된 붓다의 가르침을 폐기하고 본래의 핵심적인 붓다의 가르침을 직설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니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드러나는 일체의 비어 있음(一切皆空), 또는 자기 인식의 파괴(無我)를 끝없이 천명하는 것이다. <금강경>은 그러한 하나의 작은 예이다.

남을 도와준다는 생각, 도움을 받는 대상으로서 중생, 도와주는 주체인 보살, 이 모두가 허깨비일 뿐만 아니라 여래라는 특징도 허구이며, 심지어는 진리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란 강을 건너면 버려야하는 임시적인 뗏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한형조, 김용옥, 그리고 라즈니쉬

<금강경>은 수없이 많은 사람이 읽고 자신들의 생각을 붙여왔다.

혜능과 원효가 읽었고, 이색과 원천석이 읽었다. 페터 노이야르와 이기영이 읽었고, 장일순과 이현주가 읽었다. 잭 케루악과 게리 스나이더가 읽었고 주세페 투치와 훼른네가 읽었다. 그 외 세상에 숱한 멋진 중들은 모두 이 책을 읽었다. 우리 시대의 멋진 두 미치광이 오쇼 라즈니쉬와 김용옥도 읽었다. 그리고 이제 한형조가 읽었다.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 : 붓다의 치명적 농담>(한형조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한형조의 이 책 <붓다의 치명적 농담 : 금강경 별기>(문학동네 펴냄)는 불교 개설서에 해당하며 <허접한 꽃들의 축제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소>(문학동네 펴냄)는 금강경의 글귀를 좇으며 읽어간 해설서다. 전자는 후자에 들어가기 전에, 또는 사이사이에 읽어도 괜찮은 입문서다. 사실 <별기>라는 말을 달고는 있지만 <금강경> 자체보다는 불교 전체의 이야기가 종횡으로 줄달음질 한다.

두 종류에 관한 것이라면 이미 숱한 책들이 있지만 이 책들은 굳이 의도한 기획이 있다. 쉽사리 소통되는 불교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기획한 바는 이미 수년이 지난 일이라 '소통을 위한 인문학적 불교'의 옷 색깔은 벌써 바랜 듯 느껴진다. 불교인을 위한 불교인의 언어로 썼으나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도드라진다. 책들의 제목과 <별기> 본문에서 그 냄새가 짙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 시도이고 언제나 힘써야할 일이었다. 인문학적 불교를 위해서 <별기>에는 동양의 고전, 소설, 영화 이야기, 시사적 사건들과 신변잡기를 덧붙여 그의 말대로 '잡화경(雜華經)'을, 멋진 만자리(꽃다발)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소>에는 한문 원문과 혜능의 해석을 첨가했다. 보다 명료한 이해가 필요할 때는 여기에 가끔씩 콘제의 영어 번역을 더했다. 경봉의 해석과 야부의 시는 양념이다.

이 책의 미덕은 본문으로 옮겨놓은 <금강경> 언해(諺解)와 혜능의 구결이다. 현대적으로 어투를 수정한 언해본은 다른 <금강경> 주석서가 줄 수 없는 고투의 맛깔스런 향취가 난다. 여기에 해설을 가하면서 혜능의 구결을 덧붙였는데 금강경에 대한 혜능의 독특한 해석을 같이 읽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춘다. <소>는 불교학자를 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불교도가 아닌 일반 시민 독자를 위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정말 완전히 다른 <금강경>을 '들어보고' 싶다. <별기>와 같은 일반적인 해설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아직도 더 대중적인 <금강경>을 기다린다. 1할만 <금강경>인, 9할은 정말 어디서 빌려온 말이 아닌 자기만의 이야기인 그런 <금강경>을 말이다. 굳이 <금강경>을 다 따라가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학자들이 쓴 <금강경> 해설은 거꾸로 되어 있다. 답답한 지식으로 범벅이 되어 있거나, 아니면 깔끔하고 정숙한 단어들의 선택이 오히려 흥미를 떨어뜨리고 심드렁하게 만든다. 그러니 박진감도 떨어지고 경전이 주는 영성은 자취를 감춰버린다. 지식이 가득차면 영감이 들어설 틈바구니가 좁아진다.

이것은 학자들이 풀어내는 <금강경>의 태생적 한계일지 모른다. 차라리 학자들끼리 읽는 정밀한 고전 주역서가 더 바람직할지 모른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김용옥이나 오쇼 라즈니쉬의 광설을 좋아한다.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통나무 펴냄)는 비록 많은 부분이 기존의 책에서 비롯된 것이고 때로 공중 부양하는 단어들도 있지만 그만의 매력적인 박진감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경우는 라즈니쉬의 <금강경>(태일출판사 펴냄)이다.

너무 많은 것을 말하는 책은 이상하게 재미가 없다. 비슷한 해설을 또 들으면 재미가 없다. 고전의 재미는 완전히 스토리가 달라지는 이본(異本)이 등장할 때 배가 된다. 이본은 일견 매우 엉뚱하다. 이본의 저자는 다른 사람들과 목소리가 틀릴 뿐만 아니라 남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허사, 무관심한 단어, 반복적인 상투어를 매우 낯설게 만드는 재능에 천부적이다.

라즈니쉬는 그러한 재능이 있다. 그는 학자들과 완전히 다른 어법을 구사하며 무엇을 설명해야하는지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라즈니쉬와 김용옥은 유사한 점이 있다. 라즈니쉬는 붓다가 사위성에서 탁발을 하고 돌아와 식사를 하고 발을 씻는 일상적인 모습의 첫 장면을 아주 상세하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왜 이 장면이 의미 있는가를 매우 조용히 설명한다. 거기서 <금강경>과는 관계가 없는 샛길로 더 빠져버린다. 오히려 이 때문에 행간에 침묵이 있고 신비로운 정적마저 느껴진다.

그 뿐인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장면에 들어서면 그 구절에 신성한 아우라를 씌워버린다. 붓다가 수부띠에게 말을 시작하기 전에 '주의깊게 잘 들어라'는 말에 무려 20쪽에 걸친 해설을 붙인다. 이 해설은 자기만의 종교적인 영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학자들은 이 지면을 어디서 빌려온 해석으로 채운다.

이러한 식으로 완전히 다른, <금강경> 이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이본, 또 다른 <금강경>의 해석은 모든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것은 불교를 떠나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일반적인 언어의 불교, 불교가 아닌 불교를 만들어낸다.

나는 불교학자들이 이 귀여운 사기꾼처럼 새로운 글을 써보길 기대한다. 그 때 아마 새로운 모습의 불교가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혹시나, 여러분은 글쓰기의 어떤 상(相)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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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후쿠자와 유키치, 침략의 원흉만은 아니다"라는 글이 아무렇지 않게 떠다니고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침략의 원흉이 아니라면 조선의 구세주라도 된단 말인가? 이런 건 마치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은인일 수도 있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식자층에서 왜 모를까? (☞관련 기사 : '탈아론' 후쿠자와 유키치, 침략의 원흉만은 아니다!)

이런 평가에 대해 재일조선인 인권평화운동가 서승이 "후쿠자와에 대한 표피적이고 맹목적인 긍정론을 우려한다"라고 일침을 가하는 가운데, '아시아 침략의 선동가'로서 후쿠자와 유키치를 제대로 들여다 본 야스카와 주노스케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이향철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가 번역 출간되었다.

1만 엔 권의 모델로 일본 사회에서 여전히 사랑받는 '스승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신격화한 대표적 인물로 도쿄대학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년)를 꼽는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는 마루야마의 존경하는 '후쿠자와 님'에 대한 우상 숭배 신화에 정면 도전한 책이다.


▲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야스카와 주노스케 지음, 이향철 옮김,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이 책은 2000년 말에 일본에서 출간되자마자 '후쿠자와 님'에 대해 집단 최면에 빠진 일본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독자들이 1만 엔 권의 붙박이 인물인 후쿠자와를 끌어내리자는 운동을 전개할 정도였다. 이 책은 일본에서도 '후쿠자와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역사 비평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아시아 침략을 선동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음모와 흉계의 전모를 밝혀 온 저자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2001년 4월 21일 <아사히신문>에 '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 멸시를 확산시킨 사상가'라는 논설을 발표했다. 그러자 다음달 같은 지면에 히라야마 요우 시즈오카 현립대학 국제관계학부 조교수가 '후쿠자와 유키치, 아시아를 멸시 했는가?'라는 글을 게재해 반박했다. 이로써 두 학자는 '야스카와-히라야마 논쟁'을 벌이게 됐다.

이 논쟁을 지켜보면서, 또 야스카와가 이 책을 펴내면서 집단 최면에 빠졌던 일본 사회는 조금씩 야스카와 주노스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야스카와는 이 책을 발간하고 나서 교통비만 받고 일본 전역으로 '공짜 강연'을 다니면서 아시아 침략의 원흉 후쿠자와 유키치의 '가면'을 벗기는 일에 매달렸다.

후쿠자와 유키치! 그는 일본의 전후 사상가들이 전쟁과 패전으로 얼룩진 시대를 뛰어넘어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고 붙잡은 모델이었다. 그에게 '자유주의자'라는 환상을 덮어씌운 전후 사상가들은 그 이미지를 뒤흔들 만한 발언은 외면한 채 오로지 입맛에 맞는 문구들만 나열하며 후쿠자와를 일본 근대화의 최고 스승으로 만들었다.

야스카와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분칠된 후쿠자와의 껍질을 하나둘씩 벗겨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자라면 알 수 있는 '아시아 침략의 선동가'인 그의 면모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 한국에 나타난 이 책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속내를 감출 수 없다. 이런 책은 진작 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 냈어야 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후쿠자와 유키치를 바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야스카와 주노스케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끼며, 한국인으로서 이 책을 읽으며 찾을 수 있는 세 가지 의미를 살펴보자.

첫째. 후쿠자와는 아시아 멸시와 침략의 선동자다.

"조선 침략의 목적은 일본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며 남을 위한 게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다." "조선국은 사지가 마비되어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이 없는 병자와 같다." "대만인은 오합지졸 좀 도둑떼" "청국병사는 돼지꼬랑지 새끼" "조선과 중국 이 두 나라는 진보의 길을 모르고 구습에 연연하며 도덕마저 땅에 떨어진데다가 잔혹, 몰염치는 극에 달하고 거기에 오만방자하다."

"조선은 본래 논할 가치가 없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당면의 적은 지나(중국)이기 때문에 우선 병사를 파견해 경성에 주둔 중인 지나 병사를 몰살하고 바다와 육지로 대거 지나에 진입해 곧바로 북경성을 함락시켜라." "눈에 띄는 것은 노획물밖에 없다. 온 북경을 뒤져 금은보화를 긁어모으고 관민 가릴 것 없이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빠뜨리지 말고 '창창 되놈'들의 옷가지라도 벗겨 가져와라."

야스카와는 이 책의 부록 '후쿠자와 유키치 아시아 인식의 궤적'이라는 항목에서 후쿠자와의 국제 관계 인식, 전쟁 구상, 아시아 멸시 발언 등을 낱낱이 적어 놓았다. 이 구절들은 일본인이 후쿠자와를 '대 스승님'으로 받들어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모습이다. 이런 자가 위대한 선각자로 분칠된 채 최고액권 1만 엔 권의 인물로 일본인들의 품에 아직까지 안겨 있다는 게 불가사의하다.

낯 뜨거워 읽을 수 없는 아시아 멸시 발언을 두고 야스카와는 이러한 발언이야말로 청일전쟁을 위시한 일본이 일으킨 숱한 전쟁에서 일본군의 죄의식을 마비시키게 한 원인이었다고 역설한다. 이런 인식을 가진 후쿠자와는 '조선이 문명국이 되지 못한 것은 썩은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지 않은 탓'이라며 철없는 서른 살 조선 청년 김옥균에게 돈 몇 푼을 건네며 조선 왕조 타도를 부추겼다.

"일본이 조선을 독차지하는 것은 일본의 권리이고 의무이다"라는 망발을 내뱉는 후쿠자와의 오만방자함은 새삼 거론할 가치도 없지만 이런 인물과 놀아난 개화기의 조선인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청일전쟁은 문야(문명과 야만, 文野)의 전쟁"이라며 일본을 문명국가의 최고에 놓는 모습은 '문명 인식'이라기보다 미치광이의 자기도취였다.

둘째, 후쿠자와는 말썽 많은 천황제의 중심에 있었다.

후쿠자와는 천황제를 누구보다도 열렬히 뒷받침한 사람으로 "개인의 재산과 목숨은 천황을 위해 바칠 때 그 가치를 발한다"고 평생 주장했다. 야스카와는 주저 없이 후쿠자와를 이중인격자로 규정한다. 후쿠자와는 <제실론(帝室論)>에서 "천황제는 어리석은 백성을 농락하는 사기술"이라고 간파했음에도 일생동안 천황에 대한 맹세로 일관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쿠자와는 "개전 이래 천황 폐하께서는 대본영을 히로시마로 옮겨 친히 전쟁 관련 업무를 보시고 주야로 침식조차 편안하지 못했다"고 들먹이며 천황도 이러할진대 일반 병사의 목숨쯤이야 천황을 위해서라면 초개처럼 버려도 되는 양 호도하는데 앞장섰다. 또 이들의 영혼은 야스쿠니가 책임진다는 궤변으로 전쟁 미화를 부추겼다.

더 나아가 후쿠자와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던져도 아깝지 않다" "압제도 내가 당하면 싫지만 남을 압제하는 것은 몹시 유쾌하다"라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로 전쟁을 찬양하고 국민을 선동하고 나서, "천황은 야스쿠니 신사 제사에 참석하여 유족에게 금품을 지급하여 죽은 자의 공로에 보답하라"며 천황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전략도 구사했다.

셋째, 야스카와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실종된 저널리스트 정신과 진실 은폐·왜곡을 통렬히 꼬집는다.

흔히 후쿠자와를 일본 개화기의 계몽사상가, 교육가, 언론인 등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두고 후쿠자와는 조선의 궁궐을 짓밟은 일본의 의도가 "조선의 국사 개혁을 촉구하고 조선이 스스로 자립하도록 돕는 데 있었다"라고 말한다. 야스카와는 이런 망언을 놓고 후쿠자와를 "사건의 진실에 눈감고 은폐로 일관한 몰염치한 언론인"이라며 질타한다.

또 다른 예도 있다. 1894년 11월 25일 중국 여순에서 발생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제1군사령관이 저지른 '여순 학살' 사건을 놓고 당시 <뉴욕월드>는 "일본은 문명의 가면을 둘러쓰고 야만의 근육과 골격을 가진 괴수"라고 보도했다. 이에 후쿠자와는 "일본 군대는 문명화된 공명정대한 일을 했으므로 한 점의 비난을 받을 것이 없다"라고 반박해 세계 언론으로부터 비웃음을 당했다.

이런 사실을 세심히 짚으며 야스카와는 "허풍이라면 후쿠자와, 거짓말이라면 유키치"라는 유행어가 돌아다닐 만큼 형편없는 인물이었던 후쿠자와가 어떻게 근대 일본에서 "원칙 있는 체계적인 사상가"로 자리매김했는지 의아해 한다. 그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일본의 시민에게 다음과 같이 간곡히 호소한다.

"지금 일본은 전쟁으로 지샌 어두운 쇼와 시대를 털어내지 못하고 역사의 시계바늘을 메이지 시대로 돌려놓은 채 그릇된 '스승님' 후쿠자와 모델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밝은 메이지 시대의 큰 스승으로 추앙받는 후쿠자와야말로 전쟁으로 얼룩진 쇼와 시대를 끌어낸 장본인임을 깨닫고, 일본인들은 과거의 집단 최면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아시아 평화를 말해야 한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야스카와는 이어서 "후쿠자와에 대한 오랜 최면에서 깨어나는 길이야말로 메이지 시대에 싹 틔웠던 일본의 아시아 침략사상에 대해 속죄하는 길이며 아시아 여러 나라에 입힌 전쟁 책임을 절감하는 작업의 시초"라고 역설한다. 이런 시각을 가진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이렇게 제안한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제국주의 시대에 잘못된 '탈아입구(脫亞入歐)' 노선을 선택하여 아시아와 일본의 근대사에 불행한 균열과 분열을 만들어 낸 후쿠자와 유키치 사상을 극복하는 공동 연구의 제안과 함께 피해자와 가해자 역사 인식의 차이를 좁혀가 진실된 역사적 언어를 만들어 나가자!"

거듭 강조하지만 이 책은 제국주의 침략을 당한 한국인의 손에 의해서 먼저 나왔어야 할 책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그간 나온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허호 옮김, 이산 펴냄)과 최근 임종원이 쓴 <후쿠자와 유키치>(한길사 펴냄)는 주체적 역사관 없이 그저 후쿠자와 유키치를 계몽사상가, 교육가, 저술가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뛰어난 인물로 묘사했다.

이러한 한국인의 후쿠자와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견주어 이 책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는 아시아를 불행에 떨어뜨리고도 영웅시되었던 후쿠자와란 인물에 대한 깊은 성찰을 주는 책이다. 학자의 양심을 걸고 후쿠자와 신화의 모순에 도전한 이 책은 일본 제국주의 아래 고통과 시련을 겪고도 그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꼭 읽어야 한다.

한국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나온 지 10여 년이나 된 이 책의 난해한 메이지 시대의 문장과 한국어화하기 어려운 일본말을 매끄럽게 번역해 낸 광운대학교 교수 이향철의 노고도 엿보인다. 다만, 제3장 '조선 왕궁 점령, 민비 살해' 편에서 "민비"라는 말이 거슬린다. 비록 원문을 충실하게 따랐다 하더라도 '명성황후'로 표기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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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4월 22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36호에 실린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의 <프리라이더>, <세금 혁명> 서평에 대한 저자 선대인 김광수경제연구소 부소장의 반론입니다. (☞관련 기사 : '문국현 오류'를 극복해야 진보가 산다!)

나는 지난해 말 출간한 <프리라이더>(더팩트 펴냄)와 3월말 출간한 후속편 격인 <세금 혁명>(더팩트 펴냄)을 통해 조세 구조 개혁과 세출 구조 조정을 통해 각각 50조 원씩, 100조 원의 추가 재정 여력을 확보해 나가는 '50/50 전략'을 제안한 바 있다.

일반인들은 1조, 2조 원 만들어내기도 어려운데 100조 원은 가당키나 한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현실 구조를 생각하면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계산해봤을 때 내가 제시한 100조 원의 액수도 보수적으로 잡은 것이다. 지금 한국은 생산 경제 영역에 비해 주식이나 부동산과 관련된 자산 경제 규모가 이미 7배 이상으로 커졌다.


▲ <세금 혁명>(선대인 지음, 더팩트 펴냄). ⓒ더팩트
거기에 비례해서 다 세금을 매길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 경제에 매기는 비중이 82%로 절대적으로 많다. 그러나 자산 경제에 대해선 그 큰 규모에 비해서 전체 세금의18% 정도만 부과한다. 물론 생산 경제 영역의 소득이 시간을 두고 자산으로 축적되는 측면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불균형이 심각하다.

중앙과 지방 정부의 주요 재원인 부동산 보유세만 해도 미국의 경우 실효세율이 평균 1%가 넘어가지만 국내의 경우 실효세율이 0.1%도 채 안 된다. 보유세가 2008년 종합부동산세가 살아있을 때 기준으로 5.7조 원 정도밖에 안 된다. 터무니없이 적다. 종부세뿐만 아니라 재산세, 종합토지세 등을 다 합쳐 부유세로 보더라도 그 비율이 너무 적다.

거기에서 제대로 거두면 부동산 보유세수는 30조 원을 넘어야 한다. 또한 주택 거래시 지금 다운계약서가 관행인데 사실상 탈세를 묵인하는 것이다. '업계약서'나 '다운계약서'를 통해서 막대한 탈세가 일어난다. 매년 5조 원 가까운 탈세가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또 1가구 1주택자 비과세를 배경으로 해 부동산 거래의 95% 가까이를 과세하지 않고 있다.

연봉 몇 천 만 원만 되도 1년에 몇 백만 원씩 건강보험료, 고용보험료, 국민연금 등 각종 직간접적인 세금을 내는데, 당장 주식으로 5000만 원 벌고 부동산으로 양도 차액 6, 7억 원씩 남겨도 세금 한 푼 안 낼 수 있다. 이런 과세 구조는 너무나 불공평하기 때문에 바꿔야 한다.

삼성 이건희 회장을 비롯해서 태광, 한화 등의 비자금 조성과 탈세 사실이 검찰을 통해 줄줄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 또한 빙산의 일각이다. 또 대한민국의 부패의 온상인 건설업계의 탈세와 간이과세제를 배경으로 한 자영업자들의 탈세도 횡행한다. 정직하게 성실 납세하는 사람들만 억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조세 정의, 재정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

재정 집행 문제에 있어서도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지금까지의 한국 사회는 토건 개발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부에서 '망국적인 복지 포퓰리즘'을 이야기하는데, 실상을 보면 복지 수준이 너무 열악하기 때문에 거론하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실제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것은 '망국적 토건 개발 포퓰리즘'이었다.

지역의 토호 세력, 정치권의 개발 과시적인 지방 행정과 그것이 지역 경제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지하는 지역 주민들의 환상 등 여러 가지가 버무려진 가운데 개발 포퓰리즘이 지속돼 왔다. 지금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는 만들어졌다. 무상 급식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실생활에 대한 세금 씀씀이가 더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토건 개발로 성장을 해왔고 이를 통해 혜택을 본 기득권 구조가 있다. 그쪽의 힘이 세고 목소리가 크다 보니 그것이 주류인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을 보면 다르다. 차 없는 도로, 유령 지방 공항들, 서해안 시대라며 지어진 텅텅 빈 서해안의 항구들, 차이나타운, 제조업과 공장의 해외 이전으로 산업 단지들이 텅텅 비어가지만 계속 산업 단지를 짓는 현상….

과거 성장 잠재력에 기여한 토건 사업이지만 이제는 과포화 상태가 되면서 성장 잠재력에 기여하지도 못하면서 기득권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 우리 아이들 밥도 제대로 못 먹이고 영유아 예방 접종조차 제대로 못하면서 형님예산, 암묵적 예산, 각종 토건 예산을 남발하고 있다.

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구조를 바꿔가야 한다. 이를 바꿔야 한다는 시민 욕구는 분출되고 있다. 최근 불거진 복지 논쟁이 이를 대변한다. 아직 토건 패러다임을 탈피했다고 보기 힘들지만, 적어도 근본적으로 전환해갈 수 있는 시민 의식은 성장해 있다. 그럼에도 아직도 정부 관료나 정치권, 지역의 토호 세력, 건설업계 등 개발 포퓰리즘에 편승했던 세력들만이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경제에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이른바 저출산·고령화 충격이다. 이미 10~20㎞ 전방에서 거대한 쓰나미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몰려오고 있다. 내는 그 충격이 5~10년 범위 안에서 뚜렷한 충격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본다. 저출산·고령화 속도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이다.

출산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고 고령화 속도는 가장 빠르다. 일본이 겪은 속도보다 더 빠르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경제적인 토대는 외환 위기 이후로 질적으로 굉장히 약화됐다. 1인당 2만 달러 시대라지만 실제 대기업-중소기업 간, 계층 간 양극화가 굉장히 심각해졌고 이런 가운데 부동산 버블까지 겹쳐 가계 부채 문제까지 산적해 있다.

5~10년 지나면 저출산·고령화가 본격적으로 닥친다. 현재 여러 중첩된 위기도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데 더 장기적으로 지속될 큰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 것이다. 크게 이야기해서 저출산·고령화 충격을 받게 되면, 생산 경제, 내수 경기가 위축되고 복지 지출 비용이 크게 늘어난다.

그와 함께 자산 가치, 특히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자산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 충격들 하나하나가 굉장히 크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생산 경제 위축을 최소화하면서 복지 지출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세수를 마련해야 한다. 자산 경제에 충분히 과세하고 탈세나 부패를 통해서 새나가고 있는 세금들을 제대로 거둬들이기 위해 조세 형평성을 바로 세워야 한다.

또 재정 지출 구조 개혁을 통해 토건에 쓸데없이 쓰는 예산을 막아내 삶의 질을 올리는 복지 체계를 강화하고 젊은 친구들의 두뇌 투자로 집중하는 세금 씀씀이에 대한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 한두 해는 큰 효과가 없을지 몰라도 매년 예산을 제대로 써나간다면 10~20년 정도 후에 적어도 저출산·고령화의 충격을 최소화하면서도 생산 경제 위축을 막을 수 있는 틀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내가 이 땅의 조세 정의를 바로세우고 탈토건 친생활 재정 지출 구조 개혁을 추구하는 '세금혁명당'을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고 두 권의 책을 잇따라 낸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런데 최근 '프레시안 books'가 내가 출간한 <프리라이더>와 <세금혁명>에 대한 서평 형식을 빌려 책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폄하하는 장문의 글을 장시간 게재했다.

한 외부 연구원이 쓴 이 글은 책에서 주장한 내용에 대한 의도적 왜곡과 부정확한 사실, 경제학적 이해 부족 등으로 점철돼 있어 서평이라기보다는 비방에 가까웠다. 나로서는 정색하고 반박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한심한 수준의 글이었다. 하지만 해당 글은 지난 주말인 23일 아침부터 만 이틀에 걸쳐 <프레시안>이 편집하는 네이버 뉴스캐스트에 노출돼 최소 10만 명 이상의 독자들이 읽은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그 글을 논박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글을 읽고 오해하는 독자들을 위해 일정한 설명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판단된다.

우선, 해당 글은 책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국현 후보의 대선 공약을 앞머리에 내세우며 <프리라이더>와 <세금혁명>에서 제시한 주장이 매우 허황된 것처럼 프레이밍했다. 2007년 대선 당시 문국현 후보가 내세운 경제 성장률 8%, 일자리 500만 개, 교육 예산 70조 원이라는 공약처럼 <프리라이더>와 <세금혁명>에서 세입 및 세출 구조 개혁을 통해 각각 50조 원씩 100조 원의 재정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른바 50/50 전략이 매우 허황된 주장인 것처럼 덧씌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허황되고 형편없는 책이라면 한나라당의 박근혜, 이한구 의원이나 민주당의 정동영, 천정배, 원혜영 의원 등 여야 정치권의 주요 인사들이 이 책을 읽고 추천하고, 이미 수만 명의 독자들이 읽고 높은 평가를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전혀 상관없는 두 가지 사건을 연결시켜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려는 방법으로 사심 없는 비평자가 쓴 정당한 서평에서는 보기 힘든 논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후의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연구소는 두 권의 책에서 전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전개되는 하드웨어형 토건 사업 예산이 100조 원 가량으로 추정되며 이 가운데 30% 가량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해당 서평이 2008년 산업연관표에서 공공 부문 건설 투자액이 46조 원, 이 가운데 토목 투자액을 31조 원이라고 설명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해당 서평은 이어지는 글에서 내가 말하는 토건 사업을 토목 투자로 축소·왜곡해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토건 사업이라고 하면 토목과 건축을 합쳐서 부르는 말로 해당 서평에서 언급한 건설 투자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가장 기본적인 사실 자체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지만, 만약 착각한 것이라면 그 또한 매우 불성실한 서평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 왜곡에 기초해 해당 서평은 토목 투자비 31조 원에 더해 토지 매입비를 자의적으로 20% 가량으로 잡아 매년 '토목 사업' 예산을 39조 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이 가운데 20%~30%를 절감할 경우 대략 7.8조~12조 원 가량을 아낄 수 있는데 그치고 있으므로 내가 50조 원을 아낄 수 있다는 것이 매우 허황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두 권의 책 전반에 걸쳐서 '하드웨어형 토건 사업'이라고 할 때는 흔히 말하는 토건 사업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장비 및 설비 사업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다. 해당 서평자가 책을 조금만 성의 있게 읽어봤다면 이를 모를 리 없다. 따라서 굳이 해당 글에서 제기하는 방식에 따라 계산한다면 일단 토건 예산은 46조 원이다.

또한 해당 서평은 토지 매입비를 대략 8조 원 정도로 잡고 있는데, 이는 실제보다 매우 축소한 것이다. 해당 서평을 쓴 연구자가 자의적으로 추정한 것과 달리 토지 보상금은 매년 국토해양부가 집계해 발표하고 있다. 지장물 보상비를 포함한 토지 보상비는 2006년 29.9조 원, 2007년 25.2조 원, 2008년 22.5조 원, 2009년 34.8조 원 등으로 매년 22조~35조 원 수준에 이른다. 정부에서 공식 발표한 토건 예산과 토지 보상금만 합쳐도 매년 68조~81조 원 규모가 되는 것이다.

이에 더해 내가 언급하는 하드웨어형 토건 사업은 건설에 더해 각종 기계 설비류 등과 불필요한 토건 사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산 사업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기계 설비류는 일반기계/ 전기기계 및 장치/ 전자통신기기/ 컴퓨터 및 사무용 기기/ 정밀기기/ 수송 장비 등을 포괄하는 것으로 한 해 공공 부문 투자액이 약 20조~30조 원에 이른다. 이 정도 규모만으로도 내가 '하드웨어형 토건 사업'이라고 일컫는 규모가 이미 100조 원을 넘나들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불필요한 토건 사업을 진행하게 되면 인건비 등을 포함한 각종 운영 예산도 불가피하게 발생하게 된다. <프리라이더>와 <세금혁명>에서는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나 종합운동장 사례 등을 들어가며 이 같은 사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재정 지출 측면에서 왜 이처럼 통합적 관점에서 재정 낭비를 봐야 하는지를 <세금혁명>에도 소개한 바 있는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해 보자.

노무현 정부 당시 광역시도별로 모두 2022개에 이르는 각종 명목의 균형 발전 정책 사업을 추진했다. 각 정부 부처별로 추진하고 있는 균형 발전 세부 사업 내용들을 각 광역시도별로 모아 놓아보면 사업 수가 너무 많아 기절할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사업 수가 많다는 게 아니었다. 각 시도별 사업들 대부분이 중앙 정부 부처들이 '밥그릇' 챙기기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실시한 중복 사업이라는 점이 진짜 문제였다. 예컨대, 당시 산업자원부(현재 지식경제부의 전신)의 경우 전국 53개 지역에 혁신장비센터 구축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혁신연구개발센터는 전국 55개 대학에 설치하고 있었다.

또 전국 15개 지역에 테크노파크를 구축하고 기술원과 연구소 등을 각지에 건립하고 있었다. 한편, 당시 정보통신부는 전국 광역시도마다 정보통신연구진흥원 설립과 IT클러스터 등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중소기업청은 벤처창업보육센터를 전국 각지에 설립하고 있었다. 교육부는 전국 대학에 누리사업이라는 명목으로 100개가 넘는 전문 인력 양성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처럼 부처별로 유사한 사업을 경쟁적으로 추진하다 보니 시설 및 장비 중복 등으로 수십 조 원 단위의 예산이 낭비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 정부 부처가 서로 경쟁적으로 비슷한 중복사업을 벌이다 보니 각 지자체는 이를 소화하지 못해 쩔쩔매는 실정이었다. 그것도 하드웨어 위주로 중복 투자가 이뤄지다 보니 이들 장비들의 평균 가동률은 3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각종 조직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예산 또한 계속 팽창될 수밖에 없었다.

재정 사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정부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하지 않고서는 어떤 사업이든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돈을 쏟아 붓는다 한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지역 균형 발전 사업의 경우 부처 중심이 아니라 사업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예산을 편성한 다음 혁신사업 추진기관을 관련 부처가 통합적으로 공동 구축해 추진했더라면 시설과 장비, 인력의 중복을 막고 사업 효과를 크게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세금혁명> 370~371쪽)

이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불필요한 토건 사업을 남발하게 되면 단순히 토건 예산 낭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설비 기계류 및 운영 예산과 인건비 또한 낭비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내는 두 권의 책 전반에서 이런 맥락 속에서 '하드웨어형 토건 사업' 예산을 줄이자고 제안하며 실제로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각종 토건 사업의 자금줄이 되고 있는 교통시설특별회계를 비롯해 각종 토건형 특별회계를 대폭 삭감하고, 각종 공공 공사 발주의 기준이 되는 예정 가격 부풀리기와 잘못된 입낙찰 제도를 근본적으로 수술하는 한편 일반적 통념과 달리 사실상 막대한 재정 낭비를 초래하는 민자 사업의 개혁 방안 등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한 전제 조건으로 국토해양부를 소규모 청단위(예를 들어 도로관리청, 주택복지청 등)로 해체하고 한국주택토지공사 등 시대적 소명을 다한 개발 공기업들의 해체 또는 역할 전환을 주문하고 있다. 이런 내용들이 두 권의 책 전반에 걸쳐 제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의 주장을 의도적으로 왜곡 축소한 뒤 이를 평가하는 서평 방식에 대해서는 유감을 금할 수 없다.

해당 서평의 왜곡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세입 부문의 구조 개혁 방안에 대한 해당 서평자의 왜곡은 심각하다.

우선, 해당 서평은 내가 2008년 기준 부동산 보유세로 5.7조 원을 언급한 것을 두고 농어촌특별세와 지방교육세, 공동시설세 등의 부가세를 계산에 넣지 않아 국내 보유세 실효세율을 줄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해당 서평이 비교해서 언급한 미국의 부동산 보유세격인 property tax는 주마다 다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다른 부가세가 붙지 않는다는 설명은 빠뜨리고 있다. 미국의 경우와 비교하기 위해 순수한 의미의 보유세만을 계산한 것을 두고 해당 서평은 마치 내가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왜곡은 약과다. 그는 내가 제시한 대로 부동산 보유세를 26.8조 원 가량(실효 보유세율 0.5% 가정) 더 거둘 경우 GDP 대비 보유세수 비중이 3.07%가 돼 미국의 2.83%를 비롯해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보다 GDP 대비 부동산 보유세 비중이 더 높아지므로 매우 무리한 과세라고 주장한다. 이 부분에 이르면 해당 서평자가 부동산 보유세의 경제학적 의미와 취지를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부동산 보유세는 부동산의 자산 가치에 대해 매기는 세금이다. 이 같은 부동산 보유세는 소유 부동산을 활용해 가장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제 주체에게 부동산이 배분되도록 하는 한편 부동산 투기에 강한 내성을 가지는 세금으로 매우 시장 친화적 세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동산 가치에 비례해 세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으며 구체적 방법은 다르지만 다른 선진국에서도 대체로 이 같은 세율 체계가 마련돼 있다.

따라서 부동산 보유세는 그 나라의 부동산 자산 가치에 비례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책에서 추정했듯이 국내 부동산 자산의 가치는 보수적으로 잡아도 약 6500조 원으로 생산 경제를 대표하는 지표인 GDP의 6배를 넘는다. 반면 미국의 부동산 자산 가치는 미국 GDP 총액 대비 약 1.5배 정도에 그치고 있다. 부동산 보유세의 취지에 비춰서 이해하자면 국내의 부동산 보유세는 GDP 대비로 계산할 때 미국보다 약 네 배의 비중을 자연스럽게 갖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해당 서평자는 국내 부동산 시장의 자산 가치가 다른 나라에 비해 지속적으로 매우 부풀려져 왔으며, 그 같은 양상이 특히 2000년대 이후 극심해졌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채 GDP 비중에서 차지하는 부동산 보유세 비율을 근거로 나의 주장이 매우 과도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해당 서평도 소득 대비 주택 자산 가치 비율을 의미하는 PIR을 거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를 무시하고 있다. 참고로, 각국의 PIR은 산정방식이 달라 일률적인 비교가 어려워 한 국가 안에서 역사적 추이를 파악하는데 더 유용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국내 PIR은 실거래가가 아닌 국민은행 호가 지수를 근거로 하고 있어서 정확한 PIR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내가 두 권의 책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내가 부동산 보유세 강화를 주장하는 데는 한국의 조세 현실이라는 매우 구체적 맥락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현재 조세 체계는 개발 경제 시절 노동집약적 및 자본집약적 성장 시대에 구축된 것이다. 아무래도 생산 경제 영역의 세금 비중이 클 수밖에 없었던 시대다. 그래서 국세 수입의 3대 축인 부가가치세와 법인세 그리고 소득세의 대부분도 생산 경제 활동에 부과되는 세금이다. 반면 2000년대 이후 자산 경제의 규모는 급격히 커졌다. 소득은 다른 곳에서 훨씬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수십 년 전 개발한 세원에만 죽자 사자 세금 내놓으라고 야단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생산 경제의 비중이 클 때는 법인세나 근로소득세, 부가가치세 등 가계나 기업의 생산 활동에 대한 세금 비중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자산 경제 규모가 엄청나게 비대해진 상황에서도 자산 경제 부문에 대한 세금은 매우 적거나 과세 구멍투성이다. 경제구조가 크게 달라졌는데, 언제까지 개발 연대 시절의 시대착오적인 조세 구조를 그대로 가져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생산 경제에 대한 부담을 줄인다고 무턱대고 법인세나 근로소득세를 깎을 수도 없다. 지속적인 세원을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분별한 감세에 나서면 심각한 재정 위기에 노출될 수 있고, 극단적으로는 경제 전반의 침체와 사회보장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근로 소득에 대해 수백만, 수천만 원의 세금을 부과하면서 불로소득이라고 할 수 있는 자산 소득에 대해 훨씬 적은 세금을 부과하는 구조는 사회 구성원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런 세제로는 시간이 갈수록 근로자들의 근로 의욕을 꺾어 경기 활성화도 어렵게 된다. 따라서 정말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선진조세체계를 구축하려 한다면, 이 같은 세원 구조에 대한 조정이 필수적이다.

더구나 국내 조세 현실상의 구조적 불공정 문제가 심각하고 향후 저출산 고령화 충격으로 생산 경제 위축과 복지 재정 지출 급증이 명약관화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 경제 위축을 최소화하면서도 복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부동산 등 자산에 대한 과세는 강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책에서 그 같은 필요성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는 구체적 사정이 다른 OECD 국가들과, 그것도 부동산 자산 가치가 아닌 GDP 대비 비중을 비교해 부동산 자산에 대한 과세가 매우 과도하다는 식의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다.

해당 서평자는 또 거래세(취등록세)가 연간 20.8조 원 정도이므로 거래세를 한 푼도 걷지 않는 미국처럼 할 경우 전체적으로 6조 원밖에 더 거둘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 2008년 기준 취등록세 수입은 15조 원인데, 이 가운데 80% 가량이 부동산 취등록세이므로 12조 원에 불과하다. 또 미국처럼 거래세가 없는 나라도 있지만 부동산 보유세와 함께 거래세를 함께 걷는 나라도 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자국 현실에 적합한 세목과 세율 체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나도 보유세 정착 속도에 따라 거래세를 점진적으로 축소해가는 방안을 이미 책에서 제시하고 있다. 내는 부동산 자산 규모에 비해 부동산 보유세율 0.5%는 크게 과도한 것이 아니라고 보므로 취등록세를 지금보다 7조 원 가량 덜 걷는다 하더라도 합쳐서 20조 원 가량은 더 거둘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목표로 하는 실효 보유세율을 미국처럼 1% 이상으로 하지 않고 0.5%로 잡은 것은 이 또한 부동산 가치 하락 등을 염두에 두고 보수적으로 잡은 것이다.

해당 서평자는 또한 부동산 보유세뿐만 아니라 양도소득세와 임대소득 등에 대한 과세에 대해서도 특별공제 혜택 등을 근거로 실제 세수 확보 효과가 그만큼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부동산 부문 전체에서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세수는 10조 원 정도에 불과한데 내가 50조 원 가량이나 된다고 부풀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양도소득세의 경우 내 또한 특별공제 혜택이나 장기보유 특별공제 등을 모두 언급하고 있다. 다만, 내가 큰 틀의 설명을 하면서 하나의 예시로 특별공제 혜택을 1억 원 정도로 제시한 것을 두고 마치 내가 확정적으로 제안한 것처럼 인용한 것은 오독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부동산 보유세 비중은 엉뚱하게도 GDP 비중으로 비교하는 해당 서평자가 한국과 미국의 평균 소득 격차는 고려하지 않고 우리보다 공제한도가 높은 미국의 경우를 그대로 적용해야 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 내가 양도소득세와 관련해 더 큰 문제라고 본 것은 기본적으로 1가구 1주택 비과세를 배경으로 다운계약서 등을 작성하는 등의 탈세 수법으로 주택 양도 거래의 95%가 비과세 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현실에서 1가구 1주택자에게 과세하면 1가구 1주택자보다 다주택 투기자들의 탈세를 막을 수 있고, 이 효과가 훨씬 크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수적으로 잡아 대략 5조 원의 추가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에 더해 부동산 임대 소득에 제대로 과세할 경우 6조~7조 원 정도의 추가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나도 향후 부동산 가격이 장기간에 걸쳐 하락할 공산이 커 보유세와 양도세, 임대소득세 세수 또한 앞서 설명한 대로 모두 걷히지 않을 수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같은 세수 확보를 위한 개혁도 충분한 국민적 공감대를 쌓아가며 10년 정도에 걸쳐 점진적으로 정착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왜곡은 내가 마치 부동산 부문의 세금만 언급한 것처럼 내 주장을 축소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건설 부패 비자금 탈세액과 자영업자 등의 고질적인 탈세 관행 등을 거론했지만 이에 대해 해당 서평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탈세 등을 포함한 지하 경제 규모를 현재보다 절반으로 줄일 경우에 15조 원의 추가 세수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는데도 말이다. 또한 재벌의 세금 없는 경영권 승계에 대한 세금 부과 문제도 거론했지만 이 또한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

<세금혁명>에서 현재 약 30조 원 규모에 이르는 비과세 감면 혜택을 일괄 축소해 약 15조 원 정도의 추가 세수를 확보하는 방안도 제시하고 있지만 이 또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또 나는 부자 감세 철회를 요구하고 있으므로, 현 정부의 부자 감세로 인해 매년 약 10조~20조 원 가량의 세금이 덜 걷히는 부분도 당연히 더 거둬야 한다. 이런 식으로 더 거둘 수 있는 세금을 논리적으로 풀자면 모두 80조~90조 원에 이르지만, 책에서는 보수적으로 잡아 50조 원 정도만 더 걷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국내 정치 경제적 현실을 감안하면 이 정도 당연히 더 거둬야 할 세수를 확보하는 것조차 매우 쉽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얼핏 들으면 50/50 전략은 좋게 말하면 매우 이상적인 방안으로 느껴지고 허황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의 책 내용을 꼼꼼히 정독해서 읽어본 이들이라면 이 같은 주장이 적어도 이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는 결코 허황되지 않으며 한국의 구체적 현실을 바탕으로 마련한 매우 구체적인 전략임을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나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고, 대중들에게 잘못된 사회 경제적 현실을 알리고 설득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특히 최근에는 이 땅의 조세 정의를 바로세우고 재정 지출 개혁을 추진하는 풀뿌리 시민 모임인 '세금혁명당'을 꾸려가느라 여념이 없다. 이처럼 생산적인 곳에 시간을 써도 시간이 모자란 나를 향해 해당 서평자가 왜 그렇게 줄기차게 내 실명을 거론하면서 소모적인 공세를 취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해당 서평자도 내 주장을 꼬투리잡기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좀 더 생산적인 역할이 없는지 찾아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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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먼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은미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단지 아즈마 히로키의 전작 중 국내에 번역된 유일한 저작이라는 이유뿐만이 아니라, <퀀텀 패밀리즈>(이영미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의 세계관과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일반적으로 저패니메이션과 '미소녀 연애 육성 시뮬레이션(미연시)' 게임 등에 맹목적으로 몰입하는 오타쿠의 하위문화를 분석한 저서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단지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특히 오타쿠를 근대 이후(post-modern)에 출현한 신인류 내지는 '뉴 타입'의 한 형태로 지목하고 있는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테면 그 오타쿠들 중 일부는 어떤 애니메이션의 전편을 보거나 미연시 게임을 즐기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러한 텍스트들이 제시하는 세계에 기초하여 팬픽이나 동인지 만화 등을 만들어낼 만큼 극심하게 몰입하곤 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완결성을 갖춘 독자적인 이야기가 아닌, 원작에 충실한 디테일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해당 애니메이션에 대해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이를테면 중요한 메카닉(機體)의 사양 같은 것)에 완전히 정통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에게는 얼마나 원작의 설정에 부합하고 있는지, 그것에 비추어 있을 법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지가 더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작업은 원작이라는 일종의 데이터베이스적 원천에 기초하여 재구성 내지는 일종의 변주를 시도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 가운데 원작의 이야기는 자기증식을 거듭하는 가운데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며, 그 무수한 이야기의 상이한 버전들이 상호 교차하면서 동시(同時)적으로 존재하는 다소 기묘한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어쨌거나 오타쿠는 과거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이야기했던, 어떤 뚜렷한 동기도 목적도 없이 단지 가상의 형해화된 형식에 집착하면서 만족을 얻는 '속물(snob)'로 지칭되고 있으며, 이들이 기존의 우세적인 인간상이었던 근대의 주체(subject)와 명백히 구별되는 존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사실상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되는, 첨단기기의 스펙(specification)이나 패션 브랜드, 스포츠 데이터 등에 집착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개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이러한 신인류는 간단히 긍정되지도 부정되지도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상의 텍스트를 데이터베이스로 삼아 각기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파생시키는 행위를 자신의 일부 또는 전부로 여기면서 만족하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이야기의 무한한 순환 속에서 원작과 그 모방 간의 구별 내지는 위계 자체는 근본적으로 희미해져 버릴 터입니다.

요컨대 진짜(실재)와 가짜(시뮬라크르)를 식별하는 문제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원작과 그 모방들이 한데 모여 구성하고 있는 데이터베이스 전체이고, 그 속에서 이야기가 지속될 수 있는지의 여부이며, 무엇보다도 그것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투사하는 개인들이 됩니다. 이 기이한 삼위일체 속에서 그 목적이나 지향을 따지는 일은 전적으로 무의미해진다고 해도 좋습니다.


▲ <퀀텀 패밀리즈>(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영미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그런데 이와 같은 아즈마의 역사철학적인 비전에 입각하여 이러한 속물이 근대 이후의 지배적인 인간형이 되었다는 판단을 더 밀고 나아가 봅시다. 만약 그들이 구현하고 있는 데이터베이스의 무수한 상호 참조 및 그 영원한 지속과 같은 사태가 아예 이 세계 속에서 물리적으로 실현 가능해진다면 어떨까요? 사실상 <퀀텀 패밀리즈>는 바로 이러한 가정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체라는 인간형의 모범이 견인했던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데이터베이스적 인간의 출현. 우리는 이 과도기적 사실로부터 회피할 수 없는 다분히 "세컨드 임팩트"적인 사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위한" 평행 세계입니다. (알다시피, 큰따옴표 안은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퀀텀 패밀리즈>에서, 가령 빛은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한 형용모순 내지는 이율배반을 가능성 그 자체로 수긍하도록 하는 양자역학의 가설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첨단의 네트워크를 통해 평행 세계가 구현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데이터의 진위를 식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네트워크 자체가 기존 데이터의 조합과 재구성을 통해 가상의 데이터를 무수히 만들어내면서 자기 증식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데이터가 진짜고 또 가짜인지 판별하는 것조차도 가능성의 영역으로 환원되며 허구는 언제든 현실로 둔갑해 버릴 수 있는, 따라서 그것에 못지않은 힘을 가진 것으로 되는 역설적인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네트워크를 통해 평행 세계조차도 현실 세계 못지않게 가능성의 차원에서 실재하는 것이 될 수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일 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과 실제적으로 연루되거나 심지어 그것으로부터 촉발되기도 하고 필립 K. 딕의 소설 속의 이야기가 현실로 실현되기도 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평행 세계라는 설정은 사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소설 등에서 그리 낯선 것은 아니며 오히려 상당히 즐겨 채용되고 있는 장치에 해당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가령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리부트 버전으로 최근 제작된 <에반게리온 : 서(序)>와 <에반게리온 : 파(破)>는 그 세계관이라든가 메카닉, 등장인물 등에 있어서 1990년대의 TV시리즈 및 극장판과는 미묘하게 달라진 설정에 입각해 있으며 따라서 원작과 일종의 평행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금 경우는 다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근작 <1Q84> 역시 그렇습니다. 알다시피 이 소설의 제목 '1Q84'는 1984(1984와 1Q84는 일본어로 읽었을 때 발음이 동일합니다)년에 대응하는 가상의 평행 세계를 가리킵니다. 두 개의 달이 떠 있으며 공기번데기를 자아내는 리틀 피플이 실재하는 바로 그 세계로 주인공 아오마메와 덴고가 예기치 않게 이끌려 들어가는 되는 데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 소설입니다.

그러나 결코 간단히 요약하기 어려운 이 복잡한 내러티브의 소설 <퀀텀 패밀리즈>가 기존의 평행 세계를 다룬 여타 텍스트와 구별되는 결정적인 부분은 다름 아니라 그 평행 세계 간 경험의 교차 및 인격의 교환을 이 양자 네트워크를 통해 실정적인 차원에서 가능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아시후네 유키토(葦船往人)와 그의 자녀 아시후네 후코(葦船風子), 오시마 리키 그리고 그들 모두를 한 자리에 불러 모으게 되는 오시마 유리카(大島有利花) 모두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제각기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개인들입니다.

이를테면 주인공 유키토의 인격이 거주했던 2007년의 시공간에서는 후코가 출생하지 않았으며 대신 리키가 태어났지만, 그의 존재란 어디까지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사건입니다. 반대로 후코가 삶을 영위했던 2035년에는 당연하게도 리키가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되고 있습니다. 2007년의 유키토가 어떤 삶을 영위했는가에 따라 선택적으로 분기된 존재인 두 개인이 동일한 세계에 공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들은 서로에게 가공의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각각의 시공간 또한 그 나름의 질서에 입각하여 평행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자의 존재는 어떤 형태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심지어 그것을 넘어서서 유키토의 존재가 모든 원인을 제공하고, 후코가 유키토에게 메일을 전송함으로써 평행 세계 간 접촉의 계기를 촉발하며, 리키에 의해 다른 시공으로 인격을 교환 전송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 그리고 각자의 세계에서 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복잡다단한 사태가 유리카의 다중적 경험에 의해 종합되지 않는다면 <퀀텀 패밀리즈>의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설정이 자신의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가족의 잠재적인 실존 가능성을 의식하고 나아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역설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유키토는 후코의 메일을 계기로 '지금 여기'의 자기와 전혀 다른, 별개의 시공에 존재하는 낯선 자신의 모습 및 그 일상세계, 그리고 그로 인한 자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로 인해 그의 삶은 결정적인 전회를 경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인격의 교환을 통해 별개의 시공간으로 진입하게 되는 모험의 도정이 바로 <퀀텀 패밀리즈>의 주된 이야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박람강기한 지식의 성찬에도 불구하고, <퀀텀 패밀리즈>에서 양자역학에 기초한 네트워크라든가 평행 세계의 존재 자체가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 '퀀텀 패밀리즈'가 불요불급하게 휘말리게 된 데이터베이스적 시공간을 위한 일종의 전제라고 해도 좋습니다. 즉 허구와 현실이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어떤 가상도 진짜로 둔갑할 수 있지만 동시에 확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오직 부정성(否定性)의 가능성만이 농후한 네트워크 자체 말입니다.

그리고 후코가 유키토에게 메일을 전송하는 바로 그 행위가 이 가족 모두를 아직 현행화되지 않은 가능성의 집적(集積), 바로 그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도록 하는 계기가 됩니다. 각자의 이러한 접속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살지 않았던 가상의 삶들, 그 무수한 가능성 자체를 들여다보고 또한 구성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여기 자신'의 존재조차도 허구로 돌리거나 심지어 부정해야만 하는 난국에 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한하게 파생된 가능성들의 데이터베이스에만 구애되는 것이 전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제껏 회의된 적이 없었던 자명한 자신의 존재를 부정(否定)의 가능성에 위치시키는 것, 즉 시차(視差)에 입각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 동요하는 위치를 통해 이 가족들 각자가 대면하게 되는 것이 오히려 과거 자기 자신의 욕망에 의한 실책 내지는 죄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후코와 리키는 각각 자신의 욕망 그 자체이자 분신(分身), 실체적으로 구현된 시오코(汐子)라는 인격이 모든 기이한 여정을 가능하게 했다는 진실에 도달하게 됩니다. 유키토든 유리카든 간에 그들이 어떤 시공간에 머물든 간에 데이터베이스의 오랜 우회를 거쳐 그들이 확인하게 되는 것은 유즈리하 나기사를 둘러싼 그들 자신의 욕망의 원죄로부터 현재의 사태가 파생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진실입니다.

20세기 이후 일체를 복수(複數)의 가능성과 시차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양자역학이 고전 물리학을 대체하는 패러다임으로 되고 있다고 해도, 또한 그들 자신이 속해있는 데이터베이스가 무수한 다른 삶의 가능성을 교차시킨다고 해도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유키토의 최종적인 결단 또한 이 모든 사태를 조장했다고 생각되는 시오코의 존재를 단호하게 근본으로부터 파기하는 것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들 가족 모두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예시되지 않았던 완전히 다른 형태의 삶으로 회귀하게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퀀텀 패밀리즈>가 현시하고 있는 허구와 현실 간 무한한 교착상태로부터 빚어진 변증법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적인 귀결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 점에서 <퀀텀 패밀리즈>는 이 시대의 개인들이 천착하고 있는 무수한 텍스트들 그리고 그것이 집적된 데이터베이스가 사실상 자기 자신을 시차의 위치에 입각하도록 하는 일종의 변증법적 계기로 작동할 수 있음을 환기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지금 여기와 다른 삶을 꿈꾸거나 혹은 이러한 욕망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개인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이, 자신의 시공간을 한 순간에 소거시키거나 또는 다른 세계와 순식간에 교환되거나 하는 식의 예기치 않은 악몽으로 구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가 자기 자신의 진면목을 들여다보는 거울 같은 것으로 작용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의 중심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수한 진짜 같은 가상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시대 개인들의 정체성 내지는 그것을 형성하는 욕망의 중핵에 육박해 들어가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퀀텀 패밀리즈>는 어떤 의미에서 대단히 정통적인 소설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사물과 현상의 진위를 가늠할 수 없는 조건에 놓여 있다고 해도 일체는 어디까지나 주체의 실책, 그리고 자기 인식에 입각한 결단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시후네 유키토라는 이름에서 갈대배(葦船)에 띄워져 유기된(往), 일본 신화 상의 최초의 인간/괴물(人)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는 것은 이 점에서 다분히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역사의 종언 앞에 선 최후의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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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지 않았으면 입을 닫으라고? 아니야. 실제로는 읽지 않은 책을 놓고도 열정적이고 창조적인 대화가 가능해! 사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독서야.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경우, 대충 훑어 읽은 경우,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 어떤 상황이든 당당하게 말하라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퀼 푸아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가 밝힌 범인이 진짜 진범일까? 아니야! 추리 소설 작가와 탐정은 범인을 지목할 때 종종 오류를 범해. 그들의 수사가 치밀하지 못한 탓에, 진짜 범인은 살인을 저지르고 작가도 모르게 평온하게 살고 있다고. 안 믿겨진다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의 진짜 범인은 푸아로가 밝힌 그 사람이 아니야!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고!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세계 3대 추리 소설 중 하나로 꼽히는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 가의 개>는 어떻고? 명탐정이라고 칭송 받는 셜록 홈즈는 범인을 잡기는커녕 완전 범죄에 이용당했어! (<셜록 홈즈가 틀렸다>)"

"흔히 우리는 후대 작가들만 선대 작가들의 작품을 '표절'한다고 얘기해. 과연 그럴까? 문학사, 예술사의 많은 사례는 선대 작가들이 후대 작가들의 작품을 베끼는 깜짝 놀랄 일이 빈번하게 있음을 말해주고 있어. 안 믿겨진다고? 그런 사례는 한둘이 아니어서 책 한 권 분량으로 정리할 수도 있다고! (<예상 표절>)"

여기까지 읽었으면 이런 도발적인 주장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미치도록 궁금할 것이다. 최근 주한 프랑스문화원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프랑스 파리8대학 피에르 바야르(57) 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정신분석학자 바야르 교수는 '개입 비평'이라는 새로운 비평 방법을 제안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 ⓒ여름언덕
특히 바야르 교수는 2007년 펴낸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 주목을 받으면서 프랑스를 넘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개입 비평을 '추리 비평', '예상 비평', '개선 비평' 등의 방법으로 변용하면서 기존의 통념을 깨는 다양한 작품을 내놓아 독자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을 포함해 '추리 비평 3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 <셜록 홈즈가 틀렸다>(백선희 옮김, 여름언덕 펴냄), <햄릿을 수사한다>(백선희 옮김, 여름언덕 펴냄)와 <예상 표절>(백선희 옮김, 여름언덕 펴냄)이 소개되었다.

바야르 교수는 이밖에도 <망친 작품을 개선하는 법>과 같은 귀가 솔깃할 책을 펴냈다. 최근에는 톨스토이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마거릿 미첼 지음)를, 카프카가 <이방인>(알베르 카뮈 지음)을, 프루스트가 <제르미날>(에밀 졸라 지음)을 썼다고 가정한 <작품의 작가가 바뀐다면?>을 펴내 또 한 번 독자를 놀라게 했다.

지난 4월 27일 오후 서울 중구 봉래동1가의 프랑스문화원에서 바야르 교수를 만났다. 그는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 내내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를 쏟아냈다. 다음은 최소한 '다섯 명' 이상은 되어 보이는 다양한 정체성을 주장하는 바야르 교수와의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프랑스 파리8대학 피에르 바야르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니까!"

프레시안 : 한국의 책벌레들 사이에서 당신의 책은 필독서 중 하나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인터뷰를 하려니 걱정이 앞선다. 2007년 11월, 뉴욕 퍼블릭 도서관에서 움베르토 에코와 했던 대담에서 당신은 이렇게 충고하지 않았었나?

"첫째, 저자에게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하고 칭찬을 하라. 두 번째, 이것이 아주 중요한데, 저자를 칭찬하면서도 (저자가 실망할 수 있으니) 책의 내용에 대해 너무 꼼꼼히 언급하지는 말아라."

혹시 인터뷰 과정에서 당신의 기대와 어긋나는 질문이 쏟아지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음) 이어지는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하자. 당신은 '개입 비평'을 강조한다. 이런 비평은 저자의 의도에서 해방된 독서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책을 읽은 독자야말로 역설적으로 당신의 개입 비평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닌가?

바야르 : 정확히 그렇다. 내 의도대로 책을 읽지 않아도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게 바로 내가 강조했던 창조적인 책읽기니까. 혹시 내가 원하는 대로 읽지 않았어도, 나는 비판하지 않겠다. (웃음) 설사 내 책을 읽지 않아도 비판하지 않겠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말했던 대로. (웃음)

프레시안 : 불행히도 나는 국내에 소개된 당신의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바야르 : 그건 내가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닌데…. (웃음) 그런데 보통 저자 앞에서 책을 다 읽었다고 강조하는 사람이야말로, 전혀 읽지 않은 경우가 많지 않은가? 당신도 그런 경우이길 바란다. (웃음)

프레시안 : 이 인터뷰를 위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여러 독자에게 질문을 받았다. 그 중 열다섯 개 정도를 추렸다. 물론 그 독자들 중에는 당신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독자들도 끼어 있다.

바야르 :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내가 원하는 독자들이다.

프레시안 : 다른 나라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이 이렇게 주목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바야르 : 사실은 제목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제목을 보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실용서로 읽은 사람이 많지 않을까?

프레시안 : 그렇다. 이 책은 모든 독자에게 저자의 권위에 도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많은 독자들은 당신의 기대와 달리 이 책을 일종의 '실용적 조언'으로 받아들였다. 나 역시 그게 이 책이 많이 팔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한 독자는 이런 걱정도 던졌다.

"당신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통해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열정적이고 창조적인 대화가 가능하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독서의 목적이자 진실이라고 강조했다.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독자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바야르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비록 실용적인 목적에서 이 책을 집었더라도,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그때부터 책을 적극적으로 읽기 시작할 것이다. 만약 이 책을 읽고서 정말로 책읽기를 멈춘 독자가 있다면, 그는 이 책을 진짜로 읽지 않은 독자라고 생각한다.

"당신 앞에 다섯 명의 바야르가 있다!"

프레시안 : 계속 질문을 해보자. 당신은 자신의 비평을 일종의 "이론적 픽션"이라고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달리 당신의 책 속의 "나"는 피에르 바야르가 아니라 당신의 일부가 투영된 가상의 화자다. 즉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저자처럼 실제로 당신이 책을 전혀 읽지 않고 강의를 하는 교수가 아니라는 얘기다.

바야르 : 그렇다. 내 모든 책은 '이론적 픽션' 그러니까 허구와 이론의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다. 내 책에 나온 '나'는 나 자신이 아니라 허구적 화자다. 인문학 서적에서 화자는 으레 저자와 동일시되지만 내 경우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 나는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갖고 있다. 지금도 당신 앞에 한 다섯 명의 바야르가 앉아 있는데 혹시 보이나? (웃음)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첫 쪽에서 화자는 자신이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 강의를 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실제로 그렇다면 대충 훑어봐도 많은 독서에 기반을 둔 이 책을 어떻게 쓸 수 있었겠나? 그러나 이렇게 책과 더불어 살아가는 내 안에는 책을 읽기 싫은, 읽지 않고 말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정체성이 분명히 있다.

내 안의 많은 정체성 중에서 바로 그런 정체성 하나를 선택해 이 책에서 가상의 화자로 선택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주인공은 범죄자다.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책을 죽여 놓고 안 죽였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까. 추리 소설에서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는 범인과 같은.

프레시안 : 그런 하나의 정체성이 투영된 가상의 화자를 내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왜 비평에서 그런 전략이 필요한가?

바야르 : 나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외에도 다른 작품에서 매번 각기 다른 화자를 내세운다. 각 작품에 가장 적합한 정체성을 가진 화자를 내세울 때, 독자가 해당 주제를 가장 잘 성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더구나 이렇게 쓰인 '이론적 픽션'은 한 편의 문학 작품으로서 그 자체로 독자에게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하니까.

다만 내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화자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다 아주 강박적이라는 것이다. (웃음) 그나저나 이렇게 '가상의 화자'를 내세우는 전략에 주목한 이들은 거의 없어서 아쉬웠던 참인데, 이런 질문을 받으니 반갑다.

"나의 관심사는 망친 세상을 개선하는 법!"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당신은 지난 25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있었던 강연('개입주의 비평을 소개하며')에서 이런 개입 비평의 궁극적인 목적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진리와 정의라는 이상을 좇아 문학 세계를 개선하려는 것." 당신이 생각하는 현실에서 구현되어야 할 진리와 정의는 무엇인가?

바야르 : 예를 들어 내가 쓴 책 중에 <망친 작품을 개선하는 법>이 있다. 이 책에서 강조한 것처럼, 나는 일단 모든 존재하는 것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 진리와 정의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현실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을 좀 더 나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나는 스탈린과 같은 인물의 정치적인 입장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20세기 초의 러시아와 세계를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려고 했던 이상 자체에는 공감한다. 방금 내 작품에 등장하는 가상의 화자가 모두 다 강박적이라고 했었는데, 보통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강박적이기 마련이다.

프레시안 : 놀랍다.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많은 (창작가, 비평가를 포함한) 작가는 '문학이 공통으로 추구해야 할 진리와 정의 같은 것이 있기는 한가?' 혹은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문학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르 : 자, 한 가지 주의할 게 있다. 내가 25일 강연에서 그런 얘기를 하긴 했지만, 또 방금 그것을 부연하긴 했지만, 그것은 내가 얘기한 것이 아니라 '가상의 화자'가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니 "진리와 정의라는 이상을 좇아 문학 세계를 개선하려는 것"을 개입 비평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이는 바야르가 아니라 그 때의 '가상의 화자'다. (웃음)

"톨스토이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다면…"

프레시안 : 가장 최근의 작업은 <작품의 작가가 바뀐다면?>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은 오히려 하나의 작가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목소리 혹은 정체성을 하나로 환원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톨스토이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다고 가정할 때, 필연적으로 톨스토이는 단순화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카프카가 <이방인>을 쓴다고 가정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바야르 : 정확한 지적이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굉장히 많은 정체성을 가진 위대한 작가임에는 틀림없지만, 내가 작품마다 한 가지 정체성을 가진 화자를 내세우는 것처럼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각 작품마다 맞춤한 중심 화자를 내세웠다. 바로 이 부분에서 개입 비평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톨스토이가 기존에 썼던 작품을 비평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가 새로운 작품을 썼다면 어떻게 활약했을까?' 이렇게 가정하고 작업을 해볼 수가 있을 테니까. <작품의 작가가 바뀐다면?>에서 내세운 톨스토이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스칼릿 오하라의 불같은 성격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또 카프카의 <이방인>을 읽어 보면, 이 소설이 자신을 짓누르는 정치 체제와 갈등하는 시민을 조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가능성을 열어두면, 앞으로 우리는 수많은 톨스토이와 카프카의 새로운 작품을 즐길 수 있다. 이런 작업은 아주 멋지지 않은가?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는 불량 사회"

프레시안 : 실제로 당신은 개입 비평 혹은 '창조 비평'을 통해서 끊임없이 분석 대상을 '재창조(re-creation)'한다. 그러나 정작 이 때문에 당신은 그런 작업을 하나의 레크리에이션(recreation)으로 즐기는 듯하다. 작업에서 일종의 편집광적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바야르 : 당연하다. 나는 아주 큰 즐거움을 얻고 있다. 나한테는 글쓰기가 레크리에이션이다. 그리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경우에는, 프루스트를 연구해야 하는데 그 책을 다 읽지 못해서 죄책감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 그 책을 통해서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런 도움을 주는 일도 내게는 레크리에이션이다. (웃음)

프레시안 :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으로 돌아가 보자. 방금 학생들의 '죄책감'을 얘기했는데, 이 책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수치심(shame)'이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저자의 권위로부터 해방된 독서를 권유하는 책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수치심이라는 사실은 이율배반처럼 여겨진다.

정작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해방된 사람은 애초에 수치심 따위는 없을 테니까.

바야르 : 한 미국의 친구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읽고서 이런 얘기를 하더라. "책을 읽지 않아서 부끄러워하는 일은, 미국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미국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친구의 얘기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구성원들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사회야말로 좋은 사회가 아닐까?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 같다. 질문에 대답이 되었나? (웃음)

프레시안 : 충분히 되었다. 한 독자가 이런 질문을 덧붙였다. "이 책에서 소개된 '모욕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책을 딱 한 권만 고르라면?"

(모욕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은 읽지 않았지만 널리 알려진 책을 한 권을 정한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이 내세운 책을 읽었다고 할 때마다 1점을 얻는다.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읽었으나 자신은 읽지 않은 책을 찾는 것이 관건이다. 교양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양 없음을 내세워야 승리할 수 있어서, 이름이 모욕 게임이다.)

바야르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일동 웃음)

"우울할 땐 내 책을 읽으라니까"

프레시안 : 당신의 작품에는 프로이트의 영향력이 짙게 드리워져있다. 당신의 비평에 프로이트는 어떤 영향을 주었나?

바야르 : 잘 알다시피, 나는 정신분석학자다. 그래서 당연히 프로이트를 연구했고, 내 작품 곳곳에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얘기했듯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수치심이 중요한 주제다. 프로이트도 무의식의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일을 중요한 주제로 연구했다. 그런 면에서 이 책과 프로이트는 서로 통한다.

한 가지 팁을 알려주자면, 기분이 안 좋고 우울할 때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 상담하기가 번거롭고 비싸다면, 내 책을 읽으면 아주 저렴한 가격에 똑같은 처방을 받을 수 있다. 내 책을 일주일에 한두 권만 사도 정신과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는 비용보다는 훨씬 쌀 것 같은데…. (웃음)


ⓒ프레시안(손문상)

"지금 <오이디푸스>, <햄릿>을 다시 써야 한다!"

프레시안 : 텍스트의 유동성이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드라마와 같은 상업적인 텍스트들이다. 드라마의 경우는, 제작비 문제로 중간에 있던 인물이 빠지기도 하고, 독자들의 반대 때문에 결말이 뒤집혀지기도 하니까. 그런데 당신은 고집스럽게 <오이디푸스>, <햄릿> 같은 고전적인 문학 텍스트만 주로 다룬다.

왜 상업 텍스트는 다루지 않은가? 이 상업 텍스트야말로 개입 비평이 필요한 대상이 아닐까? 당연히 책도 훨씬 더 많이 팔릴 것이라 확신한다. (웃음)

바야르 : 첫째, 일단 <오이디푸스>, <햄릿> 같은 작품은 독자들이 다 아는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루면 독자들이 화자의 주장을 따라올 수 있다. 둘째, 나는 지금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데, 드라마 작가처럼 살아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비판하기 시작하면 (각종 소송 때문에) 가족을 부양하는 게 어려워지지 않을까? (일동 웃음)

셋째, 물론 드라마, 영화와 같은 상업 텍스트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 드라마는 지금의 시청자들이 개입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 <햄릿> 같은 고전은 대개는 단 하나의 해석만이 옳은 것처럼 간주된다. 그러니 오히려 그런 작품이 고정돼 있지 않고, 항상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훨씬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물리학자들이 얘기하는 평행 우주와 비슷한 이야기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 남아있는 작가들의 작품 역시 다양한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미처 그들이 주목하거나 부각하지 못했던 가능성에 숨을 불어넣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나는 지금은 당신과 인터뷰를 하고 있지만 다른 세계에서는 폴리네시아에서 금발 미녀와 인터뷰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다른 세계가 있을 가능성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나는 바로 우리가 대가라 부르는 작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작품에서 이런 다른 가능성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프레시안 : 금발 미녀가 아니어서 미안하다. (웃음)

바야르 : 끝나고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 금발 미녀의 전화번호를 못 받은 대신 당신의 전화번호라도 받아야 덜 억울할 것 같다. (일동 웃음) 참, 방금 살아 있는 작가의 작품은 비평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다룬 적이 있으니까. 덧붙이자면, 에코는 그 부분을 호평했었다. (웃음)

"출판사 편집자도 어쩌지 못한 작품을 고치려면…"

프레시안 : 당신은 <주제에서 벗어나기>, <망친 작품을 개선하는 법>과 같은 책에서 개입 비평 중 하나인 '개선 비평'을 내놓았다. 예를 들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불필요한 여담을 제거함으로써 훨씬 더 짧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당신이 말하는 개선 비평이란 사실 출판 현장에서 늘 행해지는 것이다. 저자의 초고에서 일관성이 없는 요소를 들어내고, 취약한 인물을 수정하고, 문장과 문체를 수정하고, 제목을 바꾸는 등…. 현실에서 편집자의 손으로 이뤄지는 에디팅과 개입 비평 사이의 경계는 무엇일까?

바야르 : 현실에서 편집자가 원고에 개입하는 것과 내가 하는 개선 비평은 같은 행위다. 단지 나의 개선 비평은 시간적인 개념을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나는 과거의 작품을 현재의 작품으로 개선한다. 그런데 편집자는 지금 진행 중인 혹은 미래에 등장할 작품을 개선한다. 그런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 같은 행위다.

"저자의 권력에서 해방을 선언하라!"

프레시안 : 한 독자가 이렇게 물었다.

"한국에서는 당신의 시각에서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았다는 독자들이 많다. 왜냐하면, 한국의 국어 교육은 작품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도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면 책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자책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바야르 : 바로 그런 독자의 반응이야말로 내게 큰 용기를 준다. 아주 좋은 지적이고, 이 자리를 빌려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프레시안 : 계속되는 질문이다. 또 다른 독자는 이렇게 물었다.

"프랑스 사회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당신의 이런 작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닐까? 지금 자신의 작업이 있게 했던 독서 교육은 무엇인가?"

바야르 : 사실 내가 받았던 프랑스 교육도, 한국의 상황을 정확히 모르니 이렇게 단순히 말하긴 어렵겠지만, 한국 교육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등에서 강조했던 내용은 지금도 프랑스에서 비주류에 속한다. 오히려 이런 고립이야말로 내가 다르게 생각하는 힘이 되었으니까. (웃음)

프레시안 : 그렇다면, 당신의 학생한테는 어떻게 독서 교육을 하는가?

바야르 : 다만 최근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교사가 되려면 봐야하는 시험이 있는데, 그 시험에서 내 책 <예상 표절>이 문제로 출제되었다. 이런 비주류의 주장이 국가시험에서 채택되는 걸 보면서, 교수로서 '이런 시각을 좀 더 강조하자'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

질문에 답하면, 교육자로서 걱정이다. 한국도 비슷하겠지만, 지금 내가 고민하는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이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내가 주장하는 바대로, 독서가 지겨운 것이 아니라 즐거운 창조 행위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학생들이 좀 더 책과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

프레시안 : 한국에서는 독자들이 주로 찾는 책은 주로 실용서, 처세술 책이다. 당신의 독서법이 그런 독자들한테도 통할 수 있을까?

바야르 : 내가 '책'이라고 말할 때의 책은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들, 그러니까 문학적 텍스트이다. 그렇기에 실용서, 처세술 책만 읽는 독자들이 꼭 문학적 텍스트에 관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내 책이 그들이 문학적 텍스트와 같은 진짜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책만 잘 팔리란 법 있어?"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화제를 바꿔보자.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유독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작가이다. 프랑스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

바야르 : 일단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을 알기는 하는데, 읽지 않아서 평가를 하기는 그렇다. 프랑스에서도 많이 팔린 작가라서 질투가 나는 건 사실이다. (웃음) 내 책을 꾸준히 한국에 소개하는 여름언덕의 대표를 위해서라도 내 책도 한국에서 베르베르처럼 많이 팔려야 하는데…. (웃음)

프레시안 : 유독 한국의 독자들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열광하는 것도 의미 부여가 가능하지 않을까?

바야르 : (주저하다가) 솔직히 말하면, 베르베르의 작품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의 판매량이 작품의 우수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니까. 한국의 독자들이 베르베르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따로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지만. 아까 평행 세계를 말하지 않았나? 또 다른 세계에서는 내가 한국에서 베르베르 같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 않을까? (웃음)

프레시안 : 베르베르는 한국인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등, 한국의 팬을 의식한 서비스(?)를 해왔다. 혹시 한국 작가가 쓴 작품을 다룰 생각은 없는가? (웃음)

바야르 :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나라의 작품을 많이 넣었는데, 이번에 방문한 한국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작품만을 다루는 게 아니라 한국 인물을 등장시킬 수도 있다. 참, 폴리네시아에서 만날 금발 미녀도 오늘 생각해냈기 때문에 그녀도 꼭 책에 넣을 것이다. (일동 웃음)

프레시안 : 비평과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가 있을 텐데….

바야르 : 물론이다. <제인 에어 납치 사건>(송경아 옮김, 북하우스 펴냄)을 쓴 재스퍼 포드를 좋아한다.

프레시안 : 그는 한국에도 소개가 된 작가다.

바야르 : 혹시 인기가 많은가?

프레시안 : 안타깝게도 그의 소설 몇 편이 소개되었지만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소설에 열광하는 독자는 있다.

바야르 : 그의 작품도 좋았지만, 한 행사에서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눠보니 나랑 세상을 보는 시각도 비슷했다. 그래서 '신이 우리를 똑같이 생각하도록 만들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했다. (웃음) 내가 세상에 가능성만으로 남은 존재하지 않은 세상을 재창조하는 것처럼, 그 역시 새로운 세상을 작품 속에서 구현한다. 비슷한 작업이다.

프레시안 : 혹시 한국의 작가, 작품 중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있나?

바야르 : 27일 프랑스문화원에서 열리는 좌담회에서 만날 김연수의 단편 소설을 읽었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김연수를 직접 만나게 되어서 설렌다.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중요한 것은 텍스트!"

프레시안 : 혹시 아마존의 '킨들'과 같은 휴대가 가능한 전자책(e-book) 기기를 이용하고 있는가?

바야르 : 아직까지 사용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조만간 사용하고 싶다. 책을 많이 읽는 독서가 입장에서, 그런 전자책 기기는 가볍기 때문이다. 요즘 그런 얘기가 많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위협한다고. 하지만 나는 전자책을 위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텍스트가 중요한 것이지 플랫폼은 중요하지 않다.

프레시안 : 최근 전자책과 관련된 서비스 중에는 다른 사람이 그은 밑줄을 참조할 수 있는 등 새로운 것이 많다. 창조적 읽기라는 측면에서 이런 서비스의 등장을 어떻게 생각하나?

바야르 : 아주 흥미롭다. 그것이 내가 말한 창조적인 책 읽기의 한 모습이다.


ⓒ프레시안(손문상)

"책과 삶은 하나다!"

프레시안 : 책과 삶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의 책벌레 중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른바 '은둔형 책읽기'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바야르 : 프랑스 상황은 반대다. 책과 삶은 전혀 괴리되어 있지 않다. 책을 많이 접하고 다양한 의견을 접하는 사람일수록, 불만스러운 세상을 바꾸려는 활동에 나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에게 책(독서)이란 어떤 의미(존재)인가?

바야르 : 이것이야말로 나의 진짜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라서 한 마디로 잘라서 말하기 어렵다. 그냥 당신 마음대로 써라. (웃음)

프레시안 : 끝까지 대답을 안 하면, '밥벌이'라고 쓰겠다.

여러 차례의 재촉에도 바야르 교수는 끝까지 대답을 피했다. 그 대신 내가 떠올린 답변은 이렇다. "내게 책(독서)의 의미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하긴, 이런 규정 자체가 바야르 교수에게는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그리고 남은 질문들

인터뷰의 말미에 독자로부터 받은 질문 중 미처 소화하지 못한 것들을 잇달아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프레시안 : 프랑스는 제국주의 시대 한국에서 강탈해간 책을 돌려주지 않고 있다. 그것에 대해서 당신의 견해는 무엇인가? '침략해서 가져간 책들을 돌려주는 법'은?

바야르 : 과거 프랑스가 타국으로부터 가져온 문화재는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것도 당연히 돌려줘야 한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도 강탈한 문화재를 하루 빨리 제자리에 가져다 놓아야 한다.

프레시안 : 앞으로 비평을 준비하는 다른 추리 소설이 있는가? (바야르는 개입 비평의 한 형태로 추리 비평을 내세웠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내에 소개된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셜록 홈즈는 틀렸다>, <햄릿을 수사한다>는 이른바 '추리 비평 3부작'이다.)

바야르 : 다음 작품은 추리 비평은 아니다. 하지만 추리 비평도 준비 중인데, 대상 작품은 비밀이다. 실제 사건과 연관되는 작품이라서 더욱더 말하기 어렵다. (웃음)

프레시안 : 혹시 직접 추리 소설을 쓸 생각은 없는가?

바야르 : 지금까지 해온 '이론적 픽션'이 내게 맞는 스타일이다. 앞으로도 가능한 한 이런 식의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다. 이것은 독자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내 책을 사면, 추리 소설과 그것을 비평하는 책 두 권을 한꺼번에 사는 셈이기 때문이다. 나도 즐겁고, 독자의 주머니 사정에도 좋다. (웃음)

프레시안 : 창작의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는가? 또 다른 독서, 여행, 교육, 대화 등….

바야르 : 나는 여가를 즐기지 않고 거의 일만 한다. 읽고 쓰고 읽고…. 그러니 또 다른 독서?

프레시안 : 특별히 독서를 하는 장소가 있는가? 책을 읽으면서 듣는 음악은?


▲ <햄릿을 수사한다>(피에르 바야르 지음, 백선희 옮김, 여름언덕 펴냄). ⓒ여름언덕
바야르 : 음악은 전혀 듣지 않는다. 독서하는 장소는 서재가 따로 있는데, 조용히 책을 읽을 분위기는 전혀 아니다. 아이들을 비롯한 가족들이 왔다 갔다 해서 굉장히 시끄러운 곳이다.

프레시안 : 평생 엄청난 양의 책을 읽었을 텐데,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나?

바야르 : 굉장히 많이 읽었다. 더구나 나는 아까 강조했듯이 '여러 사람'이기 때문에 셀 수 없을 정도다.

프레시안 : '살아 보지 않은' 한국에 대해서 얘기하면?

바야르 : 임마누엘 칸트는 평생 한 번도 자기가 살던 도시를 떠나지 않았으면서 세계의 다른 도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며칠 동안 경험을 했기 때문에 '살아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웃음) 한국에서의 얘기는 앞으로 낼 책에서 자세히 써볼 생각이다.


이 인터뷰에는 '프레시안 books'와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통해서 신청한 독자의 질문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출판사 여름언덕에서 바야르 교수가 직접 서명한 책을 보내드립니다. 질문이 채택된 독자의 명단(ID)은 아래와 같습니다.

@sveinoz, @stoneswitheyes, @daekeunlee, @bookrws, @rookieu, @zcorn, @ascreamk 도서관여행자, 산호섬, 보보, shkim6664, 휴먼이당, 비밀, NaUjuin, 열시에산다, 물음표, mira-da (이상 1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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