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류사는 곧 전쟁의 역사다. 한 전쟁 연구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황허 유역 등에서 문명사회를 이루기 시작한 이래로 지난 3400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겨우 268년이다.

지난 20세기도 100년 내내 전쟁으로 얼룩졌다. <파리 대왕>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 소설가 윌리엄 골딩이 "20세기는 폭력의 세기"라고 한탄했듯이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전쟁, 발칸내전 등 유혈 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70억 인구가 살아가는 21세기 오늘의 세계도 평화와 거리가 멀다. 한 해 동안에 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낳은 전쟁들이 해마다 15건쯤 벌어지고 있다. 전쟁이 낳는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민간인 희생자가 군인 사망자보다 더 많다는 점이다.

한 전쟁 연구를 보면, 1900~95년 사이의 전사자는 1억970만 명이며, 이 가운데 민간인이 6200만 명으로 전투원보다 더 많이 죽었다. 민간인 희생자의 상당수는 무차별 포격과 공습에 따른 것이다.

"2000년 이후 30개의 전쟁이 벌어졌다"


▲ <오늘의 세계 분쟁 : 국제 분쟁 전문가 김재명의 전선 리포트>(김재명 지음, 미지북스 펴냄). ⓒ미지북스
국제 분쟁 전문 기자인 김재명(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 정치학 박사)의 <오늘의 세계 분쟁>(미지북스 펴냄)은 중동, 발칸반도, 서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시아 지역 등 전 세계 15개 분쟁 지역을 취재한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의 시점에서 새롭게 쓴 전쟁과 평화론이다. 저자가 직접 보고 겪고 느꼈던 분쟁 지역의 참상을 직접 찍은 140장의 사진과 함께 전쟁의 속살을 사실적으로 전하고 있다.

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는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했다. 전쟁을 모르고 살던 보통사람들도 어느 날 내전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책에서 "2000~09년 한 해에 1000명 이상 희생자를 낸 유혈 분쟁을 지역별로 모두 더하면 30곳이나 된다"고 말한다.

이 가운데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과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사이의 전쟁을 빼면 모두 내전이다. 지금 전 세계 언론의 눈길이 쏠린 리비아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내전 양상으로 번지는 중이다.

유혈 투쟁 한복판에 놓인 사람들

지구상에서 왜 유혈 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는지를 분석한 이 책은 저자가 2005년에 출간했던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지형 펴냄)를 전면적으로 수정 보완한 책이다. 팔레스타인, 이란, 레바논 등 지난 6년간 거듭 취재한 분쟁 지역들에 대한 분석을 더하고 그 동안의 국제 정세의 변화를 담아내 200쪽 가까이 책의 두께를 늘렸다.

저자는 이 책에서 분쟁 지역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뿐 아니라 전쟁 피해자, 난민, 정치 지도자, 병사, 국제 기구 요원들의 인터뷰를 통해 유혈 투쟁의 한복판에 놓인 사람들의 생각을 담아냈다.

특히 한국인이 만나기 어려운 사람과의 직접 인터뷰 내용이 눈길을 끈다. 팔레스타인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고(故) 야세르 아라파트,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 고 셰이크 아메드 야신, 다이아몬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도끼로 손목을 치는 잔혹한 내전의 땅 시에라리온 반군 지도자 포데이 산코, 체 게바라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5개국 여행길에 올랐던 고 알베르토 그라나도 등을 만나 그들의 귀한 말들을 전하고 있다.

"전쟁의 원인은 전쟁 숫자만큼 다양하다"

책은 모두 3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에서는 전쟁의 원인을 짚어보면서, 특히 1990년대 초 동서 냉전이 막을 내린 뒤 봇물처럼 터진 내전을 통해 인종 청소와 대량 학살의 참극이 왜 일어났는지를 살펴본다.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로버트 리버는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에 관한 설명들은 지금까지 일어난 전쟁 수만큼이나 다양하다"고 했다. 저자는 정치학자들의 전쟁 연구 성과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면서, 역사 이래 우리 인류가 벌여온 전쟁들, 특히 1990년대 이후 벌어진 전쟁들의 특성을 면밀히 분석한다.

제2부는 저자가 15년 동안 취재해 온 지구촌 분쟁 지역 가운데 15개 지역을 골라 새로 쓴 글이다. 중동 지역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이란, 아프가니스탄, 카슈미르, 동남아시아의 동티모르와 캄보디아, 유럽의 화약고라 일컬어지는 보스니아와 코소보,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남북아메리카의 볼리비아, 쿠바 관타나모, 미국 등이 저자가 다룬 지역들이다. 미국이 분쟁 지역에 포함된 것은 9·11 테러를 겪은 뒤 지금껏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병사들이 전투 중인 교전 국가이기 때문이다.

제3부에서는 9·11 테러 뒤 주요 시사용어로 떠오른 '테러와의 전쟁'을 다루면서, 미국이 벌여온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의 성격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또한 자살 폭탄 테러가 지닌 복합적인 성격과 자폭 테러범들이 누구이며 왜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지를 살펴본다.

끝으로 저자는 국지적인 내전과 자원을 둘러싼 이권 전쟁들, 강대국들의 군비 증강과 핵무기 보유 실태를 살펴보면서, 21세기 지구촌에 평화가 찾아오기 위해선 어떤 노력들이 필요한지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타 지역 분쟁은 한반도의 거울

지금껏 많은 국가와 집단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를 죽이고 피를 흘려왔다. 미국의 정치학자 케네스 왈츠는 전쟁이 우리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뜻에서 "전쟁에서 누가 이겼느냐고 묻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지진에서 누가 이겼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책은 현대 전쟁과 테러가 왜 끊임없이 일어나는가, 누가 그 전쟁으로 이득을 챙기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종의 '전쟁학 교과서'이다.

우리 한국도 세계적으로 관심이 쏠리는 분쟁 지역이다. 저자는 "다른 지역의 국제 분쟁은 곧 한반도 분단 극복을 위해 관심 있게 비춰볼 거울"이라 말한다. 그 분쟁이 왜 일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평화를 가져왔는지(또는 지금도 혼란 속에 있는지), 무엇이 전쟁과 평화를 갈랐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한반도 평화·통일의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영향력 큰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국제 분쟁과 내전이 끊이지 않는 지구를 가리켜 '전쟁 행성'이라고 불렀다. 21세기 문턱을 넘어선 지도 벌써 10년, 오늘의 세계는 분쟁과 폭력으로 어수선하다. 따라서 저자는 "한반도를 포함한 21세기 세계의 기상도는 여전히 흐림"이라고 진단하면서, 지구촌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평화의 비둘기가 날아들길 기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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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now 2011-03-25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프레시안에 직접 접속해 보아왔던 글들을
알라딘 서재에서도 편하게 볼 수 있으니 반갑습니다.

다만, 글마다 '글쓴이'가 하나도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수 많은 분들이 프레시안 books에 글을 올리고 계시는데
'누가 이 글을 썼는가' 정도는 명확하게 기재해 두시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서재에 퍼올리는 글 끝부분에
(1) 글쓴이와 (2) 원래 사이트의 URL 링크 정도는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페이퍼를 담당하시는 분의 검토를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2010년 연말 갑자기 중국 전문가 타령들이 각 언론을 장식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번의 경우는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폭격 사건을 겪으면서, 중국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있는데다가 수교 20여 년이 다가오는데도 아직 '중국을 잘 모른다'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그러한 호들갑 속에 역대로 주중 한국 대사 중에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대사가 한 명에 불과했다던가, 정부 내에도 중국 전문가가 없다고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근원적으로 중국이 오만해졌다는 등의 다양한 분석이 줄을 이었다. 그 결과 정부는 부랴부랴 외교안보연구원에 중국연구센터를 개설하였고, 외교통상부에서는 '중국 관련 일일 언론 보도' 내용을 전문가들에게 이메일 서비스를 시작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우리는 정말 중국 전문가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있기는 있지만 중국을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친중 인사'로 역차별(?)을 받는 경우는 아닐까? 그런데 왜 미국은 정당이 다른데도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존 헌츠먼을 대사에 임명했었고, 후임으로 중국계 미국인 게리 로크를 임명하였을까?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인가? 그렇지 않으면 혹시 우리 사회의 리더 그룹 대부분이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라 중국에 대한 저평가가 일상화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외교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일이고 내정의 연장선이다. 따라서 어떠한 외교 정책인가는 결국 지도자의 대외 인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지도자가 "우리가 미국과 가까워지는 것이 중국에게도 좋은 일이다"라고 인식하고 있는 한 우리에게 중국은 여전히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으며 중국의 역할은 북한 문제나 잘 해결해 주길 기대하고 있으니 한중 관계가 좋을 리가 없다.

국제 사회에서 중국은 이미 명실상부한 강대국이다. 세계적인 미래학자인 존 나이스비트는 중국이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야에서 세계를 바꾸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또한 '팍스 시니카(Pax Sinica :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 유지)'를 구현할 날도 멀지 않았다는 것이 중국인들의 대체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중국은 2029년까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1만5000달러, 국가 전체의 GDP는 25조 달러를 기록해, 중국의 GDP가 세계의 2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표는 미국이 세계 패권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때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당시 미국의 GDP는 세계의 18.9%를 기록했었다.


▲ <그레이트 차이나>(한인희·강준영·양평섭·박한진·전병곤·강진석·임대근·장리리 지음, 대선 펴냄). ⓒ대선
<그레이트 차이나? : 한·중·북 애증의 삼국지, 그리고 끝없는 스트레스>(대선 펴냄)는 한국과 중국의 중국 전문가들이 <프레시안>의 '중국 탐구'에 연재 중인 글들을 모아 <중국 속의 中國> 시리즈로 두 번째로 출판한 것이다. 크게 두 분야로 나누었다. 하나는 '한·중·북 애증의 삼국지'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북한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고, 또 하나는 '파워 중국의 끝없는 스트레스'로 중화의 부흥을 꿈꾸는 중국이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그레이트 차이나'로 가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극복해야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작업은 이른바 '집단 지성'으로서 매우 의미가 있다. 나는 중국을 연구하는 그룹이 더욱 다양하게 이러한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제너럴스트'의 시대는 가고 '스페셜리스트'의 시대가 도래했다. 한 전문가가 중국에 관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연구를 국가가 국익의 차원에서 정보를 통합하고 이를 활용하는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을 더 깊이 연구해야한다. 그리고 분야도 다양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은 '그레이트 차이나'가 될 것인가? 필자들은 '그레이트 차이나'를 흥미 있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영문으로 'GREAT'를 다시 해석하고 있다.

"'중화의 부흥'을 통해 '위대한 중국(Great China)'을 이루려는 꿈은 국제 무대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 주요 2개국(G2)으로 미국과 양대 강국의 시대를 열었고, 소프트 파워의 첨병인 공자(孔子)를 천안문 광장으로 끌어내는 '문예 부흥'을, 유인우주선 썬저우(神舟) 7호를 성공적으로 발사, 우주 탐사를 강화하면서 첨단 국가 중국의 이미지 부각에 주력하고 있다.

핵무기를 제외하고는 최고의 전력으로 평가받는 스텔스기 개발과 항공모함 건조를 비롯, 첨단 무기 개발에 뛰어들어, 미국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갖추겠다는 야망을 착실히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세계의 공장 중국은 세계 수출 1위국으로 부상하였으며(Trade), 이제는 세계의 시장으로 강력한 경제적 영향력을 세계적으로 투사하고 있다" (머리말)

그러나 이러한 '그레이트 차이나'를 달성하기 위해서 중국 앞에 놓인 상황은 그렇게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한반도 문제다. 이는 단순하게 남북한 문제이기보다는 중국과 미국 등 다양한 요인이 모두 엉켜있는 실타래이기 때문이다.

"북중 관계가 과연 한중 관계보다 중요한가의 문제를 살펴보자. 북중 관계에 관해 중국 지도자들은 분명히 정상적인 국가 관계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중 관계의 특수성도 항상 강조되고 있다. 중국도 대북 정책과 관련해서는 전략적으로 실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대북 영향력의 한계를 강조하면서 북한의 국내 안정을 위해 많은 것을 용인하는 한반도 정책을 실시해 왔다. 그 결과 중국은 '핵 보유국을 주장하는 북한'과 '안정된 북한' 사이에서 고민하는 정책적 모호성이 노정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여전히 '관리 가능한 북한'이 필요하므로 북한의 요구를 계속 수용하고 있다. 이 점을 잘 아는 북한은 결정적인 위기 때마다 중국에게 손을 벌리고 있다. 때문에 북중 관계는 한마디로 애증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35쪽)

여기에서 우리는 왜 중국이 우리에게 운명처럼 중요한지를 파악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렇다.

"한반도 문제의 난국은 모두 북한과 관련되어 있다. 비록 애증의 관계가 교차하고 있지만 불확실한 북한의 미래에 배팅하기보다는 비록 힘들지만 현재의 북한이 중국에게는 전략적으로 훨씬 매력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이러이러한 입장이 중국에 어떻게 유리하니 우리의 뜻을 받아들여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또는 통일된 한반도가 중국에게도 이렇게 유리하니 이랬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요구나 정책은 중국 측에 전혀 전략적 고려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이제 중국을 말로 설득하기 보다는 내부적으로 중국과 같이 북한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 정책이나 정책을 펼쳐가는 것이 더욱 실질적일 수도 있다" (36~37쪽)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국과 미국은 어떠한 의미인가?

"우리는 한중 협력이 긴밀해질수록 한미 협력이 손상되거나 견고한 한미 관계 하에서 한중 협력은 커다란 효용성이 없다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물론 한미 관계는 우리의 국익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동맹 관계이지만 중국의 위상과 중미 협력, 경쟁 관계 등 동북아 국제 관계의 변화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한미 관계를 공고히 하면서도 한중 협력을 확대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한중 관계, 한미 관계, 중미 관계가 상호 배타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촉진적인 관계로 설정되고 작동되어야 할 것이며, 최소한 한반도 및 북한 문제에 관한 한 한·미·중 3자 협의체를 구성하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49쪽)

이제야 분명해졌다. 그러나 중국도 반드시 깊이 인식해야하는 것은 '그레이트 차이나'든지, '중화의 부흥'이든지 간에 절대로 주변국을 희생하거나 패권적 행태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역사에서는 최고 정점에 이르면 다시 하강한다는 것이 진리다. 그럴 만한 요인들은 무수히 많다. 중국의 미래 발전에 발목을 붙잡는 것은 외부적인 강대국 간이나 주변국과의 관계 이외에도 중국 내부 문제라는 점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중국 사회를 이끌어야할 지식인들은 '문화 권력'으로 관방과 결탁(238쪽)하였고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또 우리의 장자연 사건과 같은 중국의 연예계의 숨겨진 규칙 '첸꿰이저(潛規則)'의 폐해 등은 중국 사회 각 분야에 만연하였으며(260쪽) 결국 '빨간 불이라도 손잡고 건너면 무섭지 않다'라는 중국식 속담이 오늘의 중국의 문제점을 가장 적절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문화계가 '자존심의 현대화'(318쪽)를 위해 노력한다는 글에서는 희망을 갖기도 한다.

이 책은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을 전문가들이 소개하고 평가하고 있다. 과거 중국을 하나의 연구 대상으로 평가해오던 많은 서적들과는 달리, 다양한 시각에서 이슈별로 평가하고 분석했다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날로 제고되고 있는 중국의 국제적 위상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시의적 문제들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풀어줌으로써 일반인들에 대한 접근성도 고려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중국의 부상을 기존 사실이라 전제하며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존재하고 있던 선입관을 배제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인식상의 영향력, 즉 중국이 '위협'적인가 아니면 또 다른 '기회'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출판물들과 구별되기도 하다. 또 중국 문제를 한반도 문제와 연관 지었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한반도 문제와 한중 관계를 둘러싼 현안을 파악하고, 향후 중국의 행보를 가늠해 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적잖은 시사점을 남길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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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1000권 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던 비밀

미안합니다! 먼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두 가지 사안에 대해 사과부터 해야 할 듯하다. 처음 '프레시안 books'로부터 서평 의뢰를 받았을 때 한편으론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내가 서평을 해야 할 책이 만화책이라는 점 때문에 반가웠고, 하필이면 논리학에 관한 책이라고 소개받았기에 걱정이 되었다.

내가 걱정을 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대학 시절 전공 기초 과목으로 수강한 <논리학 개론>의 학점은, 아마 C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주 기초적인 논리학 과목에서조차 성적이 좋지 않았던 내가 논리학과 수학을 소재로 한 책에 서평을 쓴다니! 그래서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난 논리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또 때론 '논리적'이란 말이 싫기도 했다. 결혼 후 부부싸움을 할 때 논리적으로 대화해 본 사람들은 아마 잘 알 것이다. 서로를 마음으로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정을 제거하고 대신 '냉철하게 논리적으로 따지는' 부부싸움은, 감정의 기관차가 머리끝까지 '칙칙폭폭' 하며 올라가 끝내 거친 말로 바뀌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또, 요즘의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자주 보듯,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논리적인 척하는 모습들을 보면 논리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일 수 있는지 여실히 확인하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기호로 가득 찬 논리학 책에는 호감이 가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엄청난 사물들, 사람들! 생긴 모양이 제각각인 사과들인데도 모든 사과는 단지 하나라는 기호 '1'로 표시된다. 크건 작건 발그스레하건 푸르스름하건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1'이라는 기호는 사과, 귤, 오렌지는 물론 엄청나게 높은 마천루 건물들에조차 동일하게 '하나'라고 동일화시킨다. 이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수학의 보편성이 내겐 개개의 것들이 가진 개성을 말살하는 폭력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 독자들에게 자랑할 만한 일도 있다. 대학 2학년이던 어느 날 수학을 전공하던 고교 시절 친구가, 자신의 대학 생활 목표 가운데 하나가 졸업 전까지 400권의 책을 읽는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도 뒤질세라 비슷한 목표를 잡았고, 정확하게 세어볼 수는 없겠으나 아마도 1000여 권도 훨씬 넘게 책을 읽은 듯하다. 내게는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읽은 책 권수 늘리기 비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만화책이다. 장편만화의 경우 10권을 넘는 경우가 흔하니, 1000여 권이란 숫자는 어쩌면 한참을 모자라는 숫자일 수도 있다. 난 지금도 만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서평 의뢰가 반가웠던 것이다.

러셀, 수학으로 인해 죽음에서 벗어나다!


▲ <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크리스토스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알레코스 파파다토스·애니 디 도나 그림, 전대호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 ⓒ랜덤하우스
그런데 우습지 않은가! 그런 내가 러셀, 칸토어, 화이트헤드와 같은 논리학자는 물론 폰 노이만, 괴델, 튜링과 같은 천재적인 논리학자와 수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의 서평을 쓰다니!

하지만 책장을 넘겨가면서 나는 이런 모든 우려와 걱정들이 기우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수학자 독시디아스, 컴퓨터공학자 파파디미트리우 그리고 만화가 파파다토스와 도나가 함께 펴내고 전대호가 번역한 <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랜덤하우스 펴냄)는 기막히게 재밌고 감동적인 만화책이다.

<로지코믹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한 3일 후인 1939년 9월 4일, 미국의 어느 대학교에서 러셀이 '인간사에서 논리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공교롭게 그 날 대학의 강연장 앞에서는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반대하던 고립주의자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러셀에게 강연을 취소하고 자신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으나, 러셀은 오히려 자신의 강연을 듣고 이 문제에 대해 합리적으로 따져볼 것을 요구한다.

러셀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야 했던 펨브로크로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이 '논리'를 열광적으로 좋아하게 된 과정에서부터 자신의 인생 역정을 거침없이 소개한다. 영국 수상까지 지낸 자상한 할아버지 그리고 자잘한 집안일부터 모든 것에 엄격하던 할머니와 더불어 규칙에 따른 삶을 살게 된다. 펨브로크로지에 도착한 첫 날, 러셀은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신음소리에 놀란다. 나중에 그 괴상한 소리가 미친 큰아버지의 신음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실제로 "나는 그 순간 미쳐버렸다"고 러셀은 고백한다. 러셀의 집안에는 정신병자가 여럿 있는 내력의 가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러셀은 그런 끔찍한 삶의 체험 속에서 이성이라는 희망, "철저히 논리적인 세계를 수학에서 찾으면서" 비로소 살아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암호로 쓴 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거의 모든 인간은 비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더욱 논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 물론 나도 인간이고, 따라서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비논리적인 생각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내 안에 있는 그런 경향들을 식별할 수 있고, 따라서 그것들에 더 잘 저항할 수 있다." (73쪽)

할아버지와 부모의 죽음, 큰아버지의 광기 등 어린 시절 처절한 정신적 고통을 겪은 러셀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버린 확실한 지식 즉 수학을 품에 안고서, 수학자가 되기 위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진학한다.

논리와 광기, 우리 안의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수학을 통해 확실한 토대를 찾으려 했던 러셀의 욕망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을 뿐더러 따분한 계산에만 열중하는 수학에 염증을 느낀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나 당시의 수학에 만족하지 못한 러셀은 철학에 열중하고, 수학자가 아닌 논리학자라는 자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첫 번째 부인 앨리스와 결혼한 후 러셀은, 유럽으로 여행하면서 프레게, 칸토어와 같은 당시 최고의 학자들은 만나고, 또 파리의 국제수학자대회에 참관하게 된다. 그 후 러셀은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의 원리> 집필에 몰두한다. 하지만 여러 번에 걸친 개작에 개작을 거듭하면서 <수학의 원리>는 미완인 채로 완성되어 출판되지만, 그 비용은 자신들이 내야 했다.

한번 상상해 보시라. 수년에 걸쳐 오로지 수와 식, 기호로 가득한 알 수 없는 암호로 된 책을 쓰는 데 온 정신이 빠진 사람들. 가장 명확한 토대를 추구하지만, 감정도 대상도 없는 끔찍한 기호들의 세계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했을까? 러셀은 삶의 과정에서 만난 수학자들, 논리학자들의 삶은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았다. 프레게는 미쳤고, 천재 수학자 괴델은 우울증에 걸렸고, 모리츠 슐릭은 나치 광신자의 총격에 숨졌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자살하고 만다.

학문의 가장 완벽한 기초, 토대를 찾았던 러셀의 삶의 과정이 강연에서 이야기되지만, 결국 괴델을 통해 수학의 확실성, 논리학의 토대는 여전히 불확실성 속에 남는다. 그리고 그네들 대개의 인생에는 광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렇다면 이런 미완의 기획, 실패한 기획이 왜 소설 같은 만화로 그려져야 하는가? 저자들은 책 속에 등장하여 산책을 하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파파디미트리우 : 나는 '광기에서 비롯한 논리학'이라는 주제가 간간히 튀어나올 때마다 영 불편해. 물론 그 주제도 함께 다루면 흥미롭긴 하지만 말이야.
독시디아스 : 러셀이 '1+1=2'를 증명하는데 왜 362쪽(책의 쪽 수)이 들었는지 에릭에게 한 말 기억나나?
파파디미트리우 : "정말 확실하게 증명하려면"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지.
독시디아스 : 아마도 러셀만큼 심한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러서라도 확실하게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할 걸세.
파파디미트리우 : '광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건 아닐까? 따지고 보면 세상에 정신병자는 쌔고 쌨잖아….
독시디아스 : 아리스토텔레스 왈, 비극의 효과는 "비극 안에서 완성된다"라고 했어. 교훈을 얘기하려면 비극이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204~7쪽)

말하자면 <로지코믹스>는 철학자이자 수학자, 논리학자 러셀의 생애를 다루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가장 확실한 토대의 논리를 추구한 수학과 논리학이 실은 학자들의 광기와 무관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어쩌면 논리학 속에 광기가 숨어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저자들은 이 모두가 비극이라고 말한다. '1+1=2'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362쪽이나 되는 엄청난 글을 써야했다면, 나 또한 정상적인 상태의 정신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그래서요? 우리가 뭘 배웠습니까?"

강연을 마친 러셀에게 청중들은 "그래서요? 교수님이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가 뭘 배웠습니까?" 라고 묻는다. 그러자 러셀은 이와 같이 대답한다.

"우리가 인생을 논한다면, 논리학의 한계는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또 논리학이 모든 것을 포괄하고 겉보기에는 완벽한 이론으로 굳어진다면, 그런 논리학은 극악한 사기일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한 이 말은 옳습니다.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을 전부 다 알아도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이 말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 모두에게 부탁합니다. 유럽을 덮친 문제들에 맞서 무기를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기 전에 두 번, 최소한 두 번 생각하십시오! 이 대목에서 또 다른 오래 된 삼총사를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책임, 정의, 그리고 선악을 느끼는 감각 말입니다." (299~301쪽)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이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가장 확실하다는 이성의 언어, 수학! 분명 그 이성에는 모든 개별적인 것들을 '1'로 동일화하는 거대한 폭력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거기에는 이명박도 노숙자도 모두 똑같이 '1'이라는 평등의 운동도 있었다는 것을 나는 새삼 알게 되었다. 사실 이성의 계몽으로 인해 우리는 신분과 계급을 넘어서 동등한 '개인'이라는 것을 창조해내지 않았는가!

<로지코믹스>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수학과 논리학 분야에서 확실성을 추구했던 학자들의 이야기가, 소설처럼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미덕을 지닌 책이다. 비록 실패한 기획이지만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지은 <수학의 원리>는 컴퓨터 혁명을 가능하게 했고, 우리는 이미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거의 광기에 가까운 노력으로 이성의 언어를 창조하고자 했던 논리학자, 수학자들이 없었다면 이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로지코믹스>는 역시 서양 철학의 고향 아테네 출신의 학자들답게, 그리고 수학과 논리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러셀과 그 주변의 등장인물들의 비극적 삶을 통해 진솔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그려 보여주고 있다. 책을 만드는 과정의 토론들이, 책 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책의 피날레는 책과 나란히 전개되어 온 자신들의 친구의 공연,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의 이야기로 끝난다.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의 재판을 여신 아테네는 아테네인들에게 맡긴다. 아테네 시민들이 오레스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자, 복수의 여신들은 분노한다. 분노한 복수의 여신들에게 여신 아테네는 이렇게 말한다.

"복수의 여신들이여, 설득을 존중하고 성스러운 이성의 힘으로 구현한 정의를 존중하시오! 나의 도시에 머무르시오. 좋은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좋은 것을 받으시오. 만일 당신들의 분노를 느껴본 적 없는 남자나 여자라면, 그는 삶의 진면모를 전혀 모르는 자요! 그러니 여기 머물러 당신들의 지혜로 나의 지혜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시오. 나와 함께 나의 도시를 다스립시다." (314쪽)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나는 다소 숙연해졌다. 그간 서양 철학이 사랑해 온 이성을 난 왜 그동안 그렇게 불신해왔을까? 이성의 열매가 익기도 전에 우리는 이성의 가지를 도려내 온 것은 아닐까? 우리가 우리 안의 지킬박사를 버린다면 끔찍한 하이드 씨만 남는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

독자 여러분들도 내가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동과 재미를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이해하기 쉽게 번역한 역자에게 감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족을 단다면, 그림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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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러분이 전성기의 고구려나 로마제국의 영토를 갓 물려받은 황제라면 제일 먼저 무슨 일부터 하고 싶은가?

자신의 광활한 영토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그 경계선부터 확인하는 것도 훌륭한 황제가 되기 위해 꼭 해야 할 일들 중 하나일 것이다. 경계선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현재 경계선을 확정짓기 위해 치열하게 전투를 치르고 있는 최전선이 어디인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의 최전선이 어디인지 확인을 해야 우리가 어디까지 와 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한마디로 말해 인간 인식의 최전선이다. 그곳에서는 매일매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며 그 결과에 따라 인간 인식의 경계선이 정해진다. 현대 문명을 흔히 과학 문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최전선에 선 과학이 매번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덕분이다.

그 중에서도,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최전선 중의 최전선을 꼽으라면 단연 'LHC'가 돋보인다. LHC는 '대형 강입자 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의 약자로서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 유럽핵연구평의회)가 보유한 인류 최대의 입자 가속 및 충돌 실험 장치이다.


▲ <LHC, 헌대 물리학의 최전선>(이강영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LHC 실험이 무엇인지, LHC가 왜 중요한지를 일반 비전문가들이 쉽게 알 수 있는 안내서가 거의 없었다. 이번에 나온 이강영의 <LHC,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LHC>, 사이언스북스 펴냄)은 그런 안타까움의 오랜 가뭄 속에 쏟아진 단비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최전선에서 한창 전투를 치르고 있는 장수가 틈틈이 정리한 난중일기가 장계와 함께 막 한양에 도착한 셈이다.

LHC는 지하 100m에 건설된 둘레 27㎞짜리 입자 충돌 장치로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속시킨 양성자를 자기 질량의 약 7000배 되는 에너지로 충돌시킨다. 규모와 성능 면에서 인류 역사상 최고 최대의 과학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두 개의 양성자가 고에너지로 충돌하면 양성자는 부서져서 양성자를 구성하는 쿼크나 접착자(gluon)가 튀어나와 높은 에너지에서 서로 상호 작용을 한다.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현상들은 양성자의 충돌 지점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입자 검출기에 그 흔적을 남긴다. 이때의 충돌 에너지는 대략 우주가 빅뱅으로부터 태어난 지 약 1000억 분의 1초~1조 분의 1초 되던 때의 상황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LHC는 초기 우주의 상황을 인공적으로 재현해서 들여다보는 일종의 망원경이라고 할 수 있다.

약 400년 전인 1609년, 갈릴레이는 자신이 직접 만든 60배율 망원경으로 달과 우주를 관측하였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그렇게 달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라도 앞 다투어 갈릴레이 앞에 줄을 섰을 것이다. (사실 망원경 앞에서 줄을 서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LHC라는 망원경(혹은 현미경이라고 해도 좋다!)이 보여줄 장면은 400년 전보다 훨씬 더 스펙터클하다.

이강영의 <LHC>는 이 스펙터클하고 경이로운 풍경을 감상하기 위한 백과사전식의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다. 1부에서는 물질의 근본을 추구해 온 인류의 역사를 고대 그리스부터 20세기 초 핵물리학까지 개괄한다. 2부는 현대 입자 물리학의 세계를 그 주역들을 중심으로 소개하며, 3부에서는 LHC가 있는 유럽의 CERN의 역사를 정리해 두었다. 마지막 4부는 LHC 자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다.

이 책의 장점은 입자 물리학의 역사가 장면 장면마다 생생하게 잘 살아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저자가 이론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입자 가속기의 역사와 구조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어서 이론과 실험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 LHC가 공식 가동을 시작했던 2008년 나 또한 LHC와 관련된 졸고를 책(<신의 입자를 찾아서>(마티 펴냄))으로 낸 적이 있었다.

그 책에서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표준모형 같은 물리 이론을 중심으로 LHC 실험의 의미를 다루었기 때문에 LHC 자체나 가속기 물리학의 역사, 여러 과학자들의 생생한 이야기 등을 담지 못했다. 그것은 나의 역량을 훨씬 넘어서는 일이었다. 신작 <LHC>는 그런 갈증을 모두 해소해 주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저자인 이강영을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이 10년도 훨씬 더 되었기 때문에 평소 그가 과학자나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에 대해 무척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던 터였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의 근거는 일차적으로 방대한 독서 덕분이다. 과학과 관련된 책은 그에게 문의하면 친절한 해설이 줄을 잇는다.

게다가 그는 기억력도 비상한 면이 있다. 예컨대 어느 해 대학가요제에서 누가 어떤 상을 수상했고 그해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누가 활약을 했는데 한국시리즈 몇 차전 몇 회에서 이런 플레이를 했으며 같은 해 무슨 바둑기전 결승전에서 누가 맞붙어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식이다. <LHC>에는 그의 그 모든 이야깃거리가 아주 꼼꼼하고도 풍성하게 널려 있어서 (전공자들도 잘 모를 법한 이야기들도 가득하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람은 소통의 동물이다. 뭔가 재미있고 신기한 것이 있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요즘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쇼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인기를 끄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LHC 실험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과학 이벤트이다. 나도 그랬지만, 아마 이강영도 이 엄청난 구경거리를 주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보면 동네마다 꼭 한 명씩 척척박사가 있어서 항상 동네 꼬마들이 몰려들어 그로부터 재미난 이야기를 듣곤 했었는데, <LHC>는 그런 이웃집 형님이 들려주는 신기하고 재미난 과학 이야기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LHC 실험의 인류사적인 중요성에 비해 일반인들이 그 실험 내용과 의미를 알 수 있는 <LHC> 같은 책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과학이 전반적으로 푸대접받고 대중화되지 못한 탓도 크겠지만, 일차적으로는 해당 분야 종사자들이 사회 일반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노력이 다소 부족해서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 면에서 이강영의 <LHC>는 학계 전체의 소중한 자산으로 자리매김하리라 기대해 본다.

과학은 21세기의 교양이라는 말이 있다. 책 한 권 읽는다고 갑자기 교양인이 되지는 않겠지만, 행여 스스로가 현대 과학에 대한 기본 소양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이 한 권의 책이 그 자괴감을 상당히 해소해 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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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화면이 뜨자, 순간 내 얼굴은 굳어 버렸다. "'복지'가 족발이야? 밥만 먹여주면 다야? 희망은?"이라는 제목을 읽자마자 그때 이미 내 볼은 마치 족발에 따귀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순식간에 불쾌감이 수직 상승해 버린 까닭은 네모난 상자 안에 갇힌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박근혜와 '1등급 복지'라는 낙인이 찍힌 채 나뒹굴고 있는 돼지 일러스트레이션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뒷목을 부여잡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 말도 안 돼!" 아직 내용도 보기 전이었지만 나는 알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서평 본문을 훑었다. 장문이었다. 분명 호의적으로 쓰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하는 감만을 느낀 채, 내 눈은 허겁지겁 '박근혜'라는 글자를 찾았다.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등장할 만한 의미 있는 내용은 전혀 없어 보였다.

왜 "복지가 '족발'이야"라는 물음을 던졌는지도 금세 드러났다. 현재의 복지 논쟁이 장충동 족발집 원조 논쟁처럼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해 불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읽어 보니…


▲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자유 시장과 복지 국가 사이에서>(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 ⓒ플래닛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복지 논쟁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 깊은 반감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걸까?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열망을 상인들의 장삿속으로 치환해 버리는 이 과감한 상상력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서평을 반복해서 다시 읽어 봐도 이런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평자 엄기호가 쓴 책을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서평을 반박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이 글은 또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란 책에 드러난 엄기호의 정치관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되었다.

이 책에서 엄기호는 20대 대학생들을 향해 쏟아지는 사회적 비난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건넨다. 그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한 기성세대의 20대에 대한 비난은 부당하다고 말하며, 오히려 문제는 기성세대에게 있다고 화살을 되돌린다. 20대 대학생들에게 "너흰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엄기호에 따르면, 기성세대가 20대 대학생에게 퍼붓는 비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우파의 비난으로 이들이 "힘든 일을 하기 싫어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좌파가 하는 비난으로 "완전히 탈정치화되었다"는 것이다. 우파의 비판에 대해서는 대학생들이 등록금을 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아느냐고 되물으면서 함부로 이들의 삶을 삭제하는 무례를 범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이어서 그는 젊은이들이 탈정치화되었다는 좌파의 비난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정치의 전제조건이며, 따라서 탈정치화된 존재는 언어가 부재해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언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엄기호에 따르면 그들의 언어는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정리된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적 관심 안에서 형성된 무관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지 말고, 왜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먼저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면 젊은이들이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음이 보이게 될 것이라는 논리다.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적극적인 정치적 의사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느냐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엄기호 자신이 바로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의 관점에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서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국가가 파괴되었다? 파괴든 것은 개인이다!

엄기호는 글의 서두를 애니메이션 <미래 소년 코난>에 관한 이야기로 열며 이를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근대적 대서사시"라고 추켜세운다. 그러면서 엄기호는 자신이 <코난>에 관한 이야기로 서두를 푼 이유는 이 책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글의 대의를 완전히 오판한다. 엄기호는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라는 말로 책의 대의를 전달하는데, 토니 주트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국가를 파괴했다는 이야기는 이 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창하고 받아들인 국가와 정부 아래에서 개인들의 삶이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 자체는 건재했고, 오히려 개인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토니 주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가지는 확실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 누구도 국가 자체를 축소하려 들지는 않았다. 마거릿 대처와 그녀에 뒤이어 등장한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 가운데 중앙 정부의 억압 기구 또는 정보 수집 기구를 옹호하는 데 주저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CCTV, 도청, 미국의 국토안보부, 영국의 독립안보국을 비롯한 그 밖의 장치들 덕택에 근대 국가가 그들의 신민들에게 행사했던 전방위적인 통제는 오히려 확장일로에 있다." (113쪽)

글의 대의를 완전히 오판한 문장 속에서, 엄기호는 저자 토니 주트에 대한 근거 없는 선입견마저 드러낸다. 엄기호는 굳이 "꼬장꼬장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저자를 소개하는데, "꼬장꼬장하다"는 말에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의도적으로(무심결에 그랬다면 더 큰 문제다!), 그는 토니 주트를 젊은이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그들의 "탈정치화"를 우려하는 좌파 기성세대로 바라보고 있다.

꼬장꼬장한 기성세대의 젊은이 비판? 둘은 동세대다!

책의 내용을 짧게 소개한 후, 엄기호는 곧바로 문제 제기에 들어간다.

책 내용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 이유로 엄기호는 다른 책들이 다 거론하고 있는 것을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오로지 68혁명 세대에 대한 토니 주트의 평가를 반박하는 데만 온 신경을 쏟는다. 엄기호는 주트가 68혁명 세대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젊은 세대에 대한 그의 입장은 대단히 가혹하다"고 말한다. 좌파 기성세대와 그들의 비난을 받는 젊은이라는 그의 도식을 떠올리게 하는 판단이다.

먼저 68혁명과 그 세대에 대한 토니 주트의 설명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후의 복지 국가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지만 그것은 부작용을 수반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국가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오고 있었다. 복지 정책에 수반된 무지막지한 획일성은 젊은 세대를 숨 막히게 했다. 또 참혹했던 전쟁과 전후의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은 60년대 세대는 이전 세대 개혁가들이 내세운 목표인 사회정의와 같은 대의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의 표현에 가해지는 제약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60년대 세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권리였다. '개인주의', 즉 모든 사람은 사적 자유를 최대한 누리고 자신의 욕망을 어떠한 제한 없이 표현할 자유가 있으며 이 모든 권리는 사회에 의해 존중되고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점차 좌파의 슬로건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95쪽)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절대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사실상 그들의 감정은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으로 확실히 나뉘어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새로 등장한 우파 역시 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98쪽)

토니 주트는 신좌파의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태도가 전후에 인기를 잃었던 보수주의자들이 '가치', '국가', '권위', '존경심' 등을 내세우며 문화 전쟁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본다. 68혁명이 내세운 개인의 자유와 욕망의 해방에 대한 요구가 보수주의의 부활과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엄기호는 주트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동의할 수 없는 것을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우리의 삶은 좀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기호는 마치 존재의 근간을 부정당한 사람처럼 주트의 비판에 격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주트의 분석에서 68혁명이 비판적으로 언급되는 자리마다 사회민주주의(또는 구좌파)를 집어넣는다. 아무런 설명 없이 모든 것을 전도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철저히 무능하고 무지한 사회민주주의자들 탓에 신자유주의가 도래했다는 어이없는 강변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엄기호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토니 주트(1948~2010년) 자신이 68혁명 세대라는 점이다. 엄기호의 시간 개념은 1차원적이다. 그에게서 모든 사건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지 않고 마치 영화의 스틸 컷처럼 정지되어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세대로 정의될 수 없는 역사를 지녔다. 기성세대만이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다. 20대 사회민주주주의자들이 있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 가운데도 사회민주주의자가 있을 것이다.

68혁명에 참여했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제 60대 이상의 고령층이 되었다. 당시 스무 살의 청년은 지금 우리 나이로 예순네 살이다. 그들은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기성세대다. 68혁명에 참여했던 젊은이들 가운데는 좌파 지지자가 된 자들뿐 아니라 우파 지지자가 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극우파나 극좌파가 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가 된 자들도 있음은 물론이다. 말하자면 68혁명은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대척점에 놓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68혁명 세대의 젊은이들은 엄기호의 머릿속에서 불로초를 먹은 듯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도로' 복지 국가? 역사의 시간은 흘러간다!

토니 주트는 복지 국가의 건설을 주도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유산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오류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평하고 있고, 이러한 접근 방식은 끝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엄기호는 주트의 주장이 결국 "'도로' 복지 국가"에 불과하다고 단정을 짓는다.

이어서 엄기호는 68혁명이 결국 보수주의의 도래에 일조했다는 주트의 평가에 심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신자유주의를 초래한 주범은 사회민주주의라는 납득하기 힘든 주장을 펼치면서 사회주의와 어깨동무를 한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성공을 거두었다는 주트의 단언에 조소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이 보기에 신자유주의야말로 사회민주주의가 실패한 결과가 아닌가? 신자유주의와 대결하였다가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무릎을 꿇은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냐는 사회주의자들의 조소가 들려오는 듯하다."

정말 사회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조소를 보낼까? 엄기호는 다시 역사의 시계를 19세기 후반의 수정주의 논쟁으로 돌려놓고 거기서 시계 바늘을 멈춰 세운다. 굳이 주트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1989년부터 연쇄적으로 일어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충격적인 몰락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이러한 사태가 서구의 좌파에게 심각한 정치적 부담감을 안겼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과 핀란드 등 북구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의 시민들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질 높은 삶을 누리고 있고, 서구의 대다수 선진국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언제든지 집권당이 될 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엄기호는 자신의 근거 없는 억지 주장을 사회주의자들의 당연한 생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서둘러 책에 대한 판결문을 내린다.

"토니 주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젊은이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주트는 한국어판 제목으로 말하자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촉구하였지만, 젊은이들은 결국 '도로' 사회민주주의에 불과한 그의 당부에 그리 귀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

서평으로서는 최악의 악담이지만, 이미 엄기호가 사회민주주의 자체에 대해 아무런 기대가 없음을 말해 버린 마당에 다른 결론은 내려질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로써 사회민주주의의 수용을 전제로 할 때만이 진정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복지 논쟁이 그에게 "무의미"한 이유도 밝혀진 셈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무능하고 무지하고, 개인들의 삶에 무관심하다?

엄기호는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상상력을 요구한 68혁명의 구호가 자본주의의 구세주가 된 이유는 "구좌파들이 이것을 사적인 것으로 폄훼하면서 적극적으로 포용하지 못한 철저한 무능과 무지의 결과이지 68혁명의 귀결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반면 68 세대가 한 것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분법, 이미 정치적으로 구획된 그 정치를 해체하려는 가장 '정치적인 시도'"였으며 "그들은 생존이 아니라 삶을 위하여 '사회 밖으로!'를 외쳤다"고 추켜세운다. 그러면서 엄기호는 사회민주주의와 복지 국가가 만개한 상태에서 이런 주장이 나왔다는 것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더욱 깊게 생각해 봐야 하며, 역사를 되돌아봐야 하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들이 왜 "생존"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했는지, 그리고 그 삶의 요구에 대해 당시의 사회민주주의가, 아니 지금의 사회민주주의 역시 얼마나 "무지"했는지, 그리고 무관심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엄기호에게 반문하고 싶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정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정치인가? 또 "사회 밖으로"를 외칠 때 기본적으로 국가라는 공동체에 주어진 권력은 누가 차지하게 되는가? 그리고 토니 주트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책 속에서 충분히 되돌아보고 있지 않은가? 1960년대 후반부터 젊은이들이 사회 복지와 공공 의료 정책의 무지막지한 획일성에 숨 막혀 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주트는 68혁명의 의도가 아니라 그로 인해 초래된 두 가지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는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것을 앞세우는 그들의 정서가 아이러니하게도 새로 등장한 우파의 감정과 일치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좌파가 감정의 분출과 해방에 몰두한 나머지, 반대급부로 보수주의자들이 '가치', '국가', '권위' 등을 주장하며 문화 전쟁을 벌일 수 있도록 하는 빌미를 제공했으며 결국 정치적 헤게모니를 그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엄기호는 토니 주트가 68혁명에 지나친 비난을 퍼부었다고 보고, 68혁명에 지워진 책임을 사회민주주의에 뒤집어씌우려 애쓰며 근거 없는 주장을 계속한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와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서문에서 둘 다 젊은이들을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두 책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데서 의견이 일치하고 그 이유 또한 다르지 않다.

"여론조사는 정치인과 정치 제도에 대한 냉소적인 혐오감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독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꾀하면서 자기네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행동이 낳을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136쪽)

하지만 이어지는 논의에서 두 책의 태도는 180도 달라진다. 토니 주트는 정치적 무관심이 초래할 치명적인 위험을 경고하는 반면, 엄기호는 반대로 젊은이들이 정치에 냉소적인 이유를 천작하고 정치가들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와 정치인이 20대에게 다가가야 하는 방식에 대해 엄기호가 제시하는 모범답안은 충격적이다.

엄기호는 정치에 냉소적인 20대가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때는 따로 있다고 말한다. "정치가 사기라는 것을 잘 아는 이들이 정치적으로 움직일 때는 정치가 오락이 되거나 혹은 정치가 오락을 방해할 때이다." "진정성이 아니라 재미, 오락"만이 이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20대는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라면 정당과 정치인들은 오락 기계가 되는 셈이다.

여기서 엄기호는 20대를 정치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로 보지 않고 재미가 있으면 반응하고 재미가 없으면 반응하지 않는 지극히 수동적인 입장에서 정치를 소비하는 수용자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엄기호가 젊은이들의 정치적 언어라고 주장하는 "정치적 관심 안에서 형성된 무관심"의 실체이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정치적 능력의 주체로 설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고 수동적인 객체로 전락시키면서, 엄기호는 위로와 격려를 해준다는 책의 의도와 달리 사실상 이들을 정치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확정짓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20대 또한 언젠가는 30대가 되고, 40대, 50대의 기성세대가 될 것이다. 20대에 오락으로 즐기던 정치가 나이를 먹으면 과연 다른 정치가 될 수 있을까?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인가, 만화적 상상력인가?

지난 몇 달간 복지 논쟁은 아주 뜨겁게 달아올랐다. 서울 시장은 무상 급식을 둘러싸고 시의회와 맞붙어 싸웠고, 여러 정당과 유력 정치인들은 복지에 대한 정강과 정견을 앞 다투어 밝혔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정치인들은 표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여론의 동향에 민감하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 논쟁은 정쟁이라기보다는 정치인들을 통해 드러난 민심의 발현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복지는 차기 정권 창출의 명운이 걸린 핵심 의제로까지 대두되었다.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라는 용어가 익숙해질 만큼 복지 수준을 어디까지 높여야 하느냐에 대한 백가쟁명이 일어났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복지 망국론과 포퓰리즘 공세도 이어졌다. 언론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기호는 장충동 족발집들의 원조 논쟁처럼 "무의미하다"는 한 마디로 복지 논쟁을 일축한다. 정치적 냉소주의에 관해서는 학생들이 아니라 엄기호 자신이 더 문제인 듯하다.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냉소와 혐오의 늪에 빠져 여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엄기호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만으로, 복지에 대한 주장만으로 아무런 현실적 차별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도대체 복지에 대한 백가쟁명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현실적 차별성이 있다는 것인가?

우리는 한 번도 사회민주주의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설사 백 번 양보해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엄기호의 말처럼 '도로' 복지 국가와 사회민주주의를 말하고 있을지라도, 어쨌든 우리에게는 '도로'가 아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동안 벌어진 논쟁을 두고 엄기호는 우리 모두가 "복지주의자"가 되어 버렸다고 조롱한다.

그는 "해방에 대한 요구"는 더 많아지고 커졌으며, "사회민주주의는 그 해방의 요구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하거나 무능해서 신자유주의에 패배한 것이다"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 하지만 엄기호가 "현존하는 모든 욕구들에 더 선도적으로 응답할 때 출현할 수" 있다고 보는 "정치적 상상력"은 그가 <미래 소년 코난>에서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를 목격했듯이 만화적 상상력에 가까운 몽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엄기호가 말하고자 하는 정치는 아마도 각각이 독자성을 갖는 예술 작품처럼 자유롭고 완성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일 것이다.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말 그대로 "해방"된 삶 말이다. 그는 정치의 미학화를 꿈꾼다.

엄기호가 말하는 정치에는 정당의 이름이 적혀 있는 현판이 없다. 당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상상 속에서는 개개인의 이름이 정당이고, 개개인의 삶이 이념이다. 마치 개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예술 작품처럼 그가 말하는 정치는 개념 속에서 포착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68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68혁명에 대한 주트의 평가에 그토록 과민 반응을 보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거부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현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68혁명에 대한 주트의 분석은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옳았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정치를 정치적 범주 속에서 상상한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범주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해나가야 할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한다. 당연히 우리만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하지는 않는다. 우리 앞 세대 또한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해 왔다. 거기에는 성과도 있었고 오류도 있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의 바탕 위에서 상상한다. 성과를 이어받고, 오류를 삭제하며 더 나은 삶이 도래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인간사의 모든 일이 그러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

"과거는 항상 미래에 비해 더 밝은 빛 아래 놓여 있다"

엄기호가 말한 바처럼 아직도 정치는 기껏 "생존"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정치, 그리고 모든 이념은 더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상상하고 주장하며 많은 피를 흘려 왔고, 오류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더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여기에 사회민주주의는 절대적인 기여를 해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많은 이들의 생존이 위태로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토니 주트는 사회민주주의를, 그리고 복지 국가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통제와 억압이 두려워 정치를 포기할 때, 우리는 어떠한 통제와 억압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생존"이 보장돼야 엄기호가 그토록 강조해서 말하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 "생존"의 보장, 정치와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일차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로운 사회라는 미명하에,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가난한 자들의 식판을 발로 걷어차 엎어버리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글은 지난 3월 11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30호에 실린 엄기호 교육 공동체 '벗' 편집위원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서평에 대한 반론이다. (☞관련 기사 : '복지'가 '족발'이야? 밥만 먹여주면 다야? 희망은?)

안성열 대표는 1969년생으로 자신을 "386 세대의 끝자락"이라고 규정한다. 자기 소개 부탁에 그는 "미학을 공부했으며 미술판을 잠시 기웃거리다 출판계로 흘러들어왔다"며 "40대 초반의 두 아이의 아버지로 NL, PD 같은 용어를 아직도 헷갈려 할 정도로 학생운동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정치적 관심이 고양 중"이라고 덧붙였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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