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전문가 시대다. 의사, 변호사 등 자격증이 필요한 전문가부터 자장면 배달 등 생활의 달인까지 우리 주변엔 전문가들이 차고 넘친다. 회사를 믿기엔 불안한 직장인들도 저마다 자신을 브랜드화하기 위해 전문 분야를 파고든다. 그러니 언론에서 온갖 전문가를 만나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다.

하지만 통계와 전문 용어를 동원하며 세상만사에 명쾌한 해법을 내놓은 전문가들은 과연 믿을 만한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수상한 전문가'들이 적지 않은데다 '권위 있는 전문가'들도 특정 현안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는 마당이니 말이다. (멀리 갈 것 없다. 4대강 사업이나 천안함 사고에 대한 논란은 어떤가.)


▲ <거짓말을 파는 스페셜리스트>(데이비드 프리드먼 지음, 안종희 옮김, 지식갤러리 펴냄). ⓒ지식갤러리
미국의 과학 및 기업 분야 저널리스트가 전문가의 신뢰성에 강력하고도 근거 있는 의문을 던졌다. 의학 분야를 중심으로, 과학·기업·스포츠 분야의 전문가들을 인터뷰하고 사례와 자료를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른바 전문가들이 왜 곧잘 허튼 소리를 하는지, 우리는 왜 전문가에 혹하는지, 전문가의 조언을 제대로 가려내 수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파헤친 덕분이다.

예를 들어보자. 비만이 사회 문제가 되면서 온갖 다이어트 비법을 다룬 책이 쏟아진다. 의사는 물론이고 헬스 트레이너며 연예인까지 나서 요가 등 운동이나 특정 식품을 이용한 비법을 소개한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서로 상충된 '비법'이 적지 않다. 심지어 고기만 먹으며 살을 빼는 비법도 한때 인기를 끌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우선 의학 분야 연구의 진위를 가리는 전문가 이오아니다스에 따르면, 비만의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요인은 3000가지다. 한데 다이어트 전문가들은 이중 한두 가지에 초점을 맞춘다. 명쾌하긴 하지만 일반인들을 오도하기 딱 좋은 '비법'을 소개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깊은 연구를 하지 않은, 이른바 '주변의 전문가'들이라고? 그렇다면 경영의 혁신을 가져온다는 각종 신 경영 기법은 어떤가? 회사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절차나 일을 제거하자는 '린 경영 혁명', 모토로라에서 시작된 품질 혁신 운동인 '식스시그마'는 여러 기업들이 앞 다퉈 도입했던 '히트 상품'이었다.

뿐만 아니다. 수많은 경영학 대가들이 경영 이론 열풍을 비꼬는 'TLAs(세 글자로 된 두문자어·three-letter acronyms)란 말이 나올 정도로 MBO(management by objective·목표 경영), BPR(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업무 재설계), BSC(balanced score cards·균형 성과 기록표), JIT(just in time·적시 생산 시스템), TQM(total quality management·종합 품질 관리) 등 각종 경영 기법을 쏟아내 경영학도와 기업가의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이런 신기법이 과연 경영 개선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 이를 채택한 기업 중에 실패한 사례가 없는지, 채택하지 않은 기업과 비교해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를 밝히지 않는 "단선적이고 비약적인" 이론이라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나아가 다른 전문가의 입을 빌어 "오늘의 성공 사례가 내일의 실패 사례로 드러나는 형편에 성공한 기업에서 배울 교훈은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각종 기록으로 선수 능력 등이 분명히 드러나는 스포츠에서도 전문가들의 실패를 찾아볼 수 있다. 미국 프로 미식축구 팀 뉴잉글랜드 패트리어트의 쿼터백 톰 브래디는 팀을 슈퍼볼에 네 번 진출시켜 세 번 우승시켰고, 슈퍼볼 최우수선수상을 두 번 받은 미식축구의 스타다.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 등재가 확실하며 미식축구 사상 최다승을 기록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대학 시절 후보 선수였으며 드래프트에서 198번이나 "고맙지만 됐어요"란 말을 들은 끝에 199번째로 프로 선수로 턱걸이했다. 감독, 코치, 스카우트 담당자, 스포츠 평론가 등 전문가들이 브래디의 재능과 잠재력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럼 일반인들의 기대와 달리 전문가들의 분석과 전망이 왜 틀리는 걸까. 지은이는 6가지 요인을 들었다. 편견과 부패, 비합리적인 사고, 청중에 대한 고려, 능력 부족, 감독의 부재, 자동적인 반응이 전문가 실패의 전형적인 패턴이란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정신 질환을 진단하는 데 널리 쓰이는 '정신 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4판)에 글을 실은 170명의 정신과 의사들 100%가 정신질환 약품 제조 회사와 재정적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실은 어떻게 봐야할까. 제약사에 우호적인 편견이 개재될 여지는 없었을까.

대학 평가에서 전문가들은 졸업생의 평균 수입을 주요 기준으로 삼아 아이비리그 교육을 높이 평가하지만 아이비리그 졸업생들이 다른 학교 졸업생들보다 힘 있고 부유한 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거나 이들이 주로 연봉이 높은 금융 관련 직장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이런 사실을 들어 대학 평가 기준이 계량화하기 쉬운 요소에 집중하고, 그 기준도 모호하다고 지적한다.

지은이는 과학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세계에서도 올바른 것이 항상 직업적으로 성공하는 최선의 방책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비공식적 전문가들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전문가의 실패는 언론에 의해 더 부풀려진다. 지은이는 2005년 영국의 BBC, <타임스>와 미국의 CNN 등이 이메일과 전화 때문에 산만해진 사람들은 지능 지수가 10점 하락했는데 이는 마리화나의 악영향보다 두 배 높다는 연구 결과를 보도했던 사례를 든다. 80명을 임상 시험했고, 1100명을 면접 조사했다는 이 뉴스를 추적한 지은이는 '연구 책임자'가 8명을 간략히 시험했으며 본인도 언론의 보도 태도에 어리둥절했다고 전한다.

"대체로 옳고 바른 것을 수용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언론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며 (…) 전문가의 연구 결과를 선정하고 전달할 때 재미있고, 도발적이고, 유용한 것 같은 것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저널리스트가 진리를 밝히기 위해 헌신한다는 주장은 회계사가 세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과 비슷하다"는 지은이의 지적은 우리 언론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하지 싶다.

책은, 대중은 왜 그런 전문가들의 조언에 쉽게 현혹되는지, 올바른 전문가 조언을 어떻게 가려낼지도 제시한다. 이를테면 인류의 조상은 샤먼 등 전문가의 조언에 따르는 편이 생존 확률이 높았기에 전문가의 조언에 따르도록 진화되었을 가능성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 등 더 잘 아는 사람에게 기대면서 체화한 '오즈의 마법사 효과' 등이 그렇다.

하지만 올바른 전문가 조언을 가려내는 방법으로는 누가 왜 그런 '연구'를 했는지 또는 명쾌하고 획기적이며 유익하다는 '연구 결과'를 의심하라는 충고를 하는 것으로 그친다. (책의 원제가 '오류(Wrong)'란 사실이 이런 한계를 짐작케 한다.) 그러니 전문가의 옥석을 가리는 '처방'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겐 미흡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또 읽는 데 걸리적거리는 번역의 몇몇 문제에도 불구하고 책은 유용하다. 적어도 우리 곁의 수많은 전문가들에게 맹목적으로 넘어가지 않기 위한 첫 걸음은 뗄 수 있으니까. 상반기 읽은 책 중 사회적 의의라는 측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책으로 꼽고 싶을 정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쿠오카 신이치의 글을 읽노라면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 유의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들고 있는 것이 소설책이었던가?

일인칭 서술, 곳곳마다 등장하는 유럽과 미국의 미술관이나 대학에 대한 구체적이다 못해 정밀하기까지 한 묘사, 그리고 대상과 주제에 깊이 배어있는 예술적 서정성은 웬만한 과학자나 과학저술가들의 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무엇이다. 흔히 근대 과학은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대상과의 거리 두기를 전제한다고 하지만, 저자는 고정된 시야를 거부한다.

<나무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에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그가 이 책에서 우리에게 제기하는 일관된 주제가 시야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저자는 파울 랑게르한스가 췌장 조직에서 훗날 그의 이름을 따서 '랑게르한스섬'이라 불리게 된 조직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시야에 대한 논의를 끌어들인다.


▲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국내에서 <10의 제곱수들(Powers of ten)>(민음사 펴냄)이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소개되었던 찰스와 레이 임스 부부의 실험적인 영화는 10의 n승이라는 크기의 위계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수준들(level)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영상은 화창한 날 잔디 위에 누워있는 남녀에서 처음 시작하지만, 이내 카메라가 하늘로 솟구치면서 마을, 도시, 대륙, 지구, 태양계까지 확장된다.

별들이 반짝이는 깊은 우주의 심연에까지 올라갔던 시야는 카메라가 줌인하면서 곤두박질쳐서 다시 잔디밭 위의 남녀에게로 돌아온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시야는 몸속으로 파고들어 장기, 조직, 세포 그리고 유전자의 분자 수준까지 내려간다. 저자만큼이나 감수성이 풍부했던 랑게르한스는 10-6 수준에서 현미경으로 검정깨처럼 췌장 조직에 산재하는 세포의 집합체를 발견해서 그것을 섬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기능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림프절의 일종일 것이라는 잘못된 추측을 했다. 랑게르한스섬이 인슐린을 생산해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당뇨병과 관련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는 50년이 걸렸다.

그런데 곧이어 후쿠오카는 임스 부부가 극적으로 보여준 시야에 사실은 트릭이 숨어있었다고 폭로한다. 임스의 영상은 해상도를 높여 대상을 확대하면 시야가 점차 어두워진다는 지극히 단순한 진실을 감추고 모든 수준에서 똑같이 밝고 정확한 시야가 가능한 것처럼 멋진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세포 조직을 40배로 관찰하다가 배율을 400배로 높이면 시야는 100분의 1로 줄어들고 밝기도 마찬가지로 줄어든다.

이것은 부분과 전체 사이의 본질적 긴장이다. 과학이든 예술이든 우리는 세상에 대한 시야를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양자 사이에서 끝없이 요동하지만 우리 역시 10의 제곱수들 속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이다. 랑게르한스섬은 미시적인 관찰을 통해 발견되었지만 그것이 당뇨병과 관련된 맥락은 그보다 훨씬 거시적인 관점을 요구한다. 그것은 "당뇨병이 기아 상태에 적응되어 있는 인간이란 생물이 갑자기 풍족한 생활을 누리면서 얻은 질병"이며 "부족과 결핍에 적응되어온 우리 생리 체계는 과잉 상태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물학자인 저자는 또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 전작인 <생물과 무생물 사이>(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이래 계속 우리에게 하려던 이야기, 즉 부분과 전체의 경계란 사실은 허구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두 장의 사진이 한 세트를 이루는 와타나베 고의 작품 <Border and Sight>는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을 양편에서 촬영한 것이다. 사진작가인 그는 이 양편의 시야를 얻기 위해 고작 몇 걸음만 옳기면 되었지만, 국경이라는 경계의 아이러니 때문에 엄청난 거리를 돌아서야 겨우 몇 미터 건너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대목도 우리가 부분에 얼마나 속박되어 있고 전체의 한 단편을 보기 위해 들여야 하는 수고로움이 애처로울 정도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는 이 이미지에서 생명 현상에 '부분'이랄 만한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함의를 이끌어낸다. 어떤 부분이 어떤 기능을 담당한다는 사고방식은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코의 이식 수술을 예로 든다. 우리가 코라고 부르는 돌기물은 후각 기능이 핵심이다. 그런데 코는 콧구멍 안의 후각 상피에 연결된 신경섬유와 결합되어 있고 여기에서 나오는 신호들은 뇌의 후각망울로 보내진다. 나아가 후각은 포식자를 인식하고 피하는 기능의 일부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근육과 뼈까지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외과 의사는 그 뿌리를 찾다가 결국 '몸 전체를 끄집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시야를 통해서 우리는 코가 공장에서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기능성 모듈이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의 수정란이 조금씩 모습을 바꾸고 분화해나가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부품과 부품의 경계면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세포의 명암 변화", 즉 그러데이션뿐이라는 것이다.

유전자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이 이중나선이라는 물리적 실체로 DNA를 발견한 이해 유전자는 분리 가능한 실체라는 생각이 퍼져있다, 그런데 유전자의 염기서열은 그것을 해석해서 또 다른 DNA를 복제하고, 단백질을 합성하는 효소나 세포소기관과 분리할 수 없다. DNA 혼자 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유전자이고 어디부터가 다른 메커니즘인지 명확히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가 세상을 나누어 볼 수밖에 없는 측면도 함께 제시한다. 그가 제시한 또 다른 이미지, 마하 밴드의 착시는 실제로는 경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경계면이 있는 것처럼 해석하려는 뇌의 경향성을 보여준다. 그는 진화 생물학적 설명까지 끌어들여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 불규칙한 배경 속에서 포식자의 모습을 찾아내려는 경향, 즉 관계없는 것들에 인과 관계를 부여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세상은 나누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역시 같은 딜레마를 양자물리학에서 추구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떠올리게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부분과 전체>라는 철학적 자서전의 한 장에 "현대 물리학에서 '이해'라는 개념"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볼프강 파울리, 오토 라포르테, 그리고 하이젠베르크가 '도대체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토론을 벌이던 중 그중 한 명이 "외관상으로 엉클어지고 혼란된 어떤 특수한 상황이 사실은 더 일반적인 것의 특수한 경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때, 우리 사고는 안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많은 것을 하나에 소급하는 것, 즉 환원을 이해했다는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공통된 것은 이해란 단순한 인지적 작용에 그치지 않고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한 측면이며 경계 나누기와 환원은 우리가 복잡하고 헝클어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무엇이라는 인식이다.

하이젠베르크가 이런 철학적 물음을 던지면서도 물리학자라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듯이, 후쿠오카 신이치는 자신이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라는 사실을 또렷이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이 하는 일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곳곳에 "과학자란", "과학자는 이러저러하게 본다" 등의 서술이 등장하며 과학자의 관점이 중요함을 넌지시 비추고,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를 지나치다고 느낄 만치 상세히 서술한다.

그는 사람들의 유형을 지도 의존형과 지도 무시형으로 나누면서 지도 의존형이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면 한 발짝도 가지 못하고 길을 잃고 만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은 지도에 의존해서 길을 찾으려는 집단에 속해 있음을 분명히 한다. 결국 부분과 전체의 긴장은 계속되는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얀 책 겉면 위로 김진송의 손이 빚은 목물(木物)들이 둥그렇게 배열된 앞표지의 경쾌함과는 달리 도입부가 딱딱하고 장황하게 읽혔다. 이른바 움직이는 목조 인형의 작동 원리를 직접 볼 수 없는 지면의 한계가 만든 지루함이려니 했는데, 거의 일관된 호흡이 책 막바지까지 유지된다.

지면마다 도판을 박고 단평이 딸린 2000년대 초·중반 그가 발표한 목수 일지와 비교할 수 없는 단행본 같았다. 목공을 매개로 현대 사회를 성찰한 산문집. 그런 책을 이전에 그가 낸 적이 없진 않다. 목공에 한정을 두지 않은 <인간과 사물의 기원>(열린책들 펴냄)은 장 그노스란 예명으로 냈다(책 소개에는 장 그노스와 김진송의 공동 저술인양 표기되어 있는데, 그 둘은 동일인이다).

"어깨에 박혀 있는 축 끝에는 손톱보다 작은 원반을 심어놓았다. 원반은 가운데 홈이 패어 있고 거기에 낚싯줄이 걸려있다. 그걸 당기면 술잔을 든 팔이 움직일 것이다. 낚싯줄은 노인의 머리를 움직이는 강선과 함께 몸통을 지나 의자를 거쳐 마룻바닥을 지나 다시 지하로 연결된다."

목물 <술 마시는 노인>의 작동 원리를 이해시키는 이런 해설은 물론 요긴하지만 연신 반복되며 지문을 채우고 있다. 자기 전공에의 몰입이 만든 이런 편중된 표현이 스스로도 신경 쓰였던지, 저자도 다음처럼 고백하고 인정한다. "설명을 들으면 간신히 억눌렀던 짜증이 한꺼번에 폭발할지도 모르겠다."


▲ <상상목공소>(김진송 지음, 톨 펴냄). ⓒ톨
<상상목공소>의 저자 김진송으로부터 멀리 1997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기획자를 기억하는 미술인도 있을 테지만, 책날개에 '현재는 목수 일을 하고 있다'는 신상을 밝힌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현실문화 펴냄)와 한 몸체로 연상하는 독자층이 제일 많을 게다. 성실하고 방대한 사료 조사의 결과물이자, 개화기 전후의 신문 도판을 성실히 찾아 당대적 현대성을 입증하려 든 그 책은 이후 인문학계에 쏟아진 '근대성 연구'의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다.

김진송이 주목받는 이유로, 병행하기 힘든 두 분야에서 각기 일가를 이룬 이력이 지목될 만한데, 전시 기획을 하고 책을 짓던 이가 노동력의 결과물을 수차례 전시하기에 이르렀고 그게 하필 목물이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순수 예술계에는 창작과 비평을 병행하는 경우가 드물어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세간에서 하대하는 직종인 목공을 인문학자가 겸하는 경우란 매우 희소하다.

소수의 직장인에게 목공은 로망이다. 자신의 삶을 기계처럼 획일화시킨 제도권의 생리를 홀로 야유하듯, 구시대 기술로 퇴행하는 열정 때문이리라. 목공은 손맛이 밴 미련한 미학과 둔한 매력을 동시에 갖췄다. 더구나 고작 실용 가구 몇 점을 들이는 로망의 수준을 넘어, 인문학자가 전업 목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건 속세의 가치관이 간과하기 쉽지 않았을 게다. (저자가 이 책 뒷부분에 전혀 다른 문맥에서 썼지만) "때로 몸으로 얻은 독점적인 지식과 정보는 다른 사람과 쉽게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막강한 권위를 얻는다." 그가 주목받는 이유.

나는 김진송의 목물을 품평할 처지에 있지 못하다. 반들반들한 표면과 정교하게 세부를 깎아 세운 그의 대상들을 도판만으로 판독할 수도 없거니와, 목물 보는 안목을 훈련받지 않아서다. 더욱 결정적으로 나는 보통의 남성과는 달리 굉장한 기계치다. 때문에 글 볼 줄 아는 좁은 안목에 의존해, 책 속에 담긴 철학을 살필까 한다.

이런 저런 인터뷰를 따라가 보니 그가 움직이는 나무 인형 (그는 '움직 인형'이라는 조어로 부르더라!) 즉 오토마타에 착수한 시점은 2009년인 걸로 보인다. 때문에 2011년 출간한 이 책은 오토마타 중간 보고 격이 되려나. 어여쁜 가구 제작에서 움직이는 나무 인형에 이르기까지 그의 목공 이력도 진화 중이다.

그 때문인지, 목차를 통해 인문학자 출신 김진송은 최근 수년 사이 학계의 주목을 받은 진화생물학/진화심리학을 유심히 들여다 본 것처럼 보였다. 비록 <통섭>(최재천·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을 구시대적 계몽주의자 혹은 일방적 환원주의자로 단순화시키거나, 꽃잎이 암컷 동물의 생식기 모양을 닮은 걸 두고 진화의 산물로 풀이하는 데서 보듯, 과도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진화의 개념을 잘못 적용한 지문도 간간 보였지만.

단순한 소목에서 출발해 오토마타 제작으로 이어지는 상승 곡선을 진화의 증거로 보고 싶진 않다. 오히려 아직은 완결 단계가 아니지만, 목공을 매개 삼아 자기 철학의 깊이를 주는 과정과, 단순한 목물에조차 스토리텔링을 적용시켜야 한다는 작가의 깨달음으로부터 진화를 읽을 수 있었다.

창작의 노정을 통해 혹은 완성되는 대상을 통해 그 재현 대상에 대한 종래 편견을 버렸다는 고백이 자주 나오는 데 진부하게 비유하자면 유형의 목물 완성 과정이란, 그에게 목공의 노정이자 자신의 무형의 가치관을 새로 깎아 세우는 일이 되는 것이다. "반복은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아니면 인간에게 조건 지워진 물질을 구성하는 절대원칙일지도 모른다"는 각성의 영향 탓인지 뜯어보면 결국 같은 주장인 문장들이 너무 자주 지문 속에 반복되고 있으며, 유감스럽지만 그 점이 독서의 몰입을 방해한다. 직접 경험을 통해 독보적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그 깨달음과의 거리 두기에 실패하기 마련인데, 그도 같은 일이 겪는 걸까.

이야기 짓는 필자이자, 이미지 짜는 목수인 김진송은 상이한 두 분야에서 고유한 결핍들과 당면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 결핍들의 극복 장치를 상상력이라 털어놓는다. 그렇다면 그 극복 장치는 어떻게 획득될까? 책의 부제로 단 "상상력과 창의성은 어떻게 형성 되는가"에 이 책은 어떻게 답을 내놓고 있을까? 본문의 마지막 단락 '세 갈래 길'에서 수줍게 답이 제시되고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답에 대한 심증은 강한데 요령껏 답을 내놓진 못한다. 그의 답을 요약하면 몸의 경험, 머리의 지식, 자연의 본능. 이 세 요소가 인위적 서열에 얽매이지 않고, 이율배반적 균형을 이룬 채 공존한다면 상상력의 문이 열린다(고 나는 읽었다). 김진송은 이 부분에서 확신(경험과 본능으로)하는 듯했고, 언술로 표현(지식)하는 데엔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추정컨대 그가 당도한 해법은 목공의 조언을 구하러 온 이방인들에게 그가 늘 던지는 짧은 충고, "일단 그냥 해보세요"에 가까운 답일 터. 그 감각적 답변을 항간에서 그에게 씌운 인문학자의 얼굴로 답변하려니 장광설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다(책이 진정 설파하려는 핵심과 그것을 전달하는 장문의 해설 사이엔 괴리가 컸다). 모든 지문에서 그랬지만 유독 '세 갈래 길'에서 머리, 몸, 자연이 상호 교차하는 정중앙에 당도한 자의 수줍은 자부심과 설렘이 읽혔다.

관상학엔 주의조차 주지 않는 나지만, 사진에 투영된 김진송의 이목구비를 통해 완고하고 확신에 찬 캐릭터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가 향후 목공을 다룬 산문집을 몇 차례고 낼 거라 추측한다. 그때는 식자(識者)의 부담을 털고 단순명료하게 목수 철학을 정리하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영하의 <음식 인문학>(휴머니스트 펴냄), 이 책의 제목을 놓고 생각을 했다. 음식이 과연 우리나라에서 인문학이 된 적이 있는가? 그렇다고 할 수 있는 논문이나 책들이 분명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음식 문화란 것은 문학이나 철학과는 달리 인문학의 한 영역으로 분류하지는 않는 것이 보통의 통념이다.

사실 음식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의식주라는 인간의 기본 욕구는 모두 인문학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 복식사나 건축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역사의 한 부분으로 대개는 호사가들의 호기심이나 변방의 한 부분에서 결실을 맺은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그것들이 너무 일상적인 것이어서 문화라는 측면에서는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해낸 물질적 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문화의 사전적 정의를 따르면 의식주야말로 문화의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사실 인류의 문화란 것이 모두 이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며, 정치나 경제, 윤리와 도덕까지도 부차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가 보통 문·사·철이라 부르는 인문학의 영역보다 좀 더 생활에 가깝고 일상적인 것이기에 대체로 의식하고 지내지 않기 때문에 인문학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 <음식 인문학>(주영하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그렇기에 자신의 논문을 모은 이 책에 "음식 인문학"을 붙인 주영하의 입장은 아주 분명한 것 같다. 먹는다는 것은 곧 인문학의 영역에서 깊이 사유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라는 뜻이 제목에서부터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주영하 자신을 놓고 보더라도 오랜 기간 동안 음식에 천착해 왔지만 학부의 전공은 역사학이고, 대학원의 전공은 인류학과 민속학인지라 인문학의 세 부분을 섭렵했다.

물론 이 세 가지 학문 영역 자체가 음식의 문화적 함의를 연구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도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의 원대한 목표는 "음식학"이라고 말한다. 단순한 인문학을 넘어서 자연과학과 다른 사회과학까지 음식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런 학문을 꿈꾸는 것이다. 음식으로 이 사회와 문화를 설명하고자 하는 은근한 욕심까지 내비치고 있다.

이 책이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쓴 책은 아니다. 1999년부터 2010년까지 여러 매체에 발표한 논문들을 모은 것이니 10여 년의 시간을 두고 저자가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주제들을 망라한 책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 권으로 묶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것은 '한국인과 한국인이 먹는 음식'과 관련된 주영하 교수의 시점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한국인의 음식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오늘날 한국인이 생산·소비하는 음식물은 결코 물질적 속성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20세기 100년을 거치면서 한반도에서 생산·소비되는 음식에는 사회 문화적 맥락이 담겨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 사회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시기 동안 음식과 관련된 기술적 혁신은 특정 음식을 전제 사회로 확산시킨다는 독일 민속학자 군터 비겔만의 주장은 여전히 타당하다.

결국 한국인과 한국인의 음식에 대한 사회 문화적 맥락을 파악하고자 함이 이 책의 전체를 가로지르는 줄기인 셈이다. 그래서 각론에서는 밥을 함께 먹는 '식구'의 의미를 파헤치기도 하고, 매운맛과 비빔밥의 유래를 추적하기도 하고, 근대 서양식 연회에 얽힌 뜻을 풀이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제사나 굿에서 올리는 음식을 현지 조사를 통해 구명하고자 노력한다. 이렇게 보면 역사와 민속과 지금 이 시점에 있어서의 한국 음식이 지닌 함의들을 추적해 가는 것이 저자의 가장 큰 관심사인 것이다. 저자는 음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음식은 인간에게 생물학적 기본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물질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음식을 함께 나누는 과정을 통해 사회 문화적 경험을 축적한다. 그래서 음식에는 한 사회가 지닌 문화적 경험이 누적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음식의 함의를 파헤치기 위해서 저자가 동원하는 수단은 실로 다양하다. 옛 문헌이나 잡지의 글에 대한 문헌적인 연구는 기본이고, 현지 조사, 고고학의 발굴 자료, 옛 그림에 대한 해석, 심지어는 소설의 분석을 통해서 한국인의 음식 문화가 무엇인가를 규명하고자 하는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 성과들을 이 논문으로 구현해 내었기에 사실은 다른 여러 각도의 고찰을 담은 논문집이면서도 한 주제를 향한 교양서로도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이 다양한 관점으로 우리 음식 문화의 함의들을 끄집어내고 있는 것은 경탄할 일이지만 책 전체를 읽다보면 아직 "음식 인문학"이나 "음식학"을 논의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는 여기에 실린 논문들의 주제가 산발적인 데에도 있지만, 이 책 이외의 관련 연구가 충분치 않아 결론을 이끌어내기에는 미흡하다는 인상 때문이다.

이를테면 쌀과 보리, 조와 같은 주곡과 감자나 고구마, 옥수수와 같은 탄수화물의 주요 식량원들이 어느 시기에 어떤 식으로 그 구성비가 변화하고, 그것이 사회 경제적으로는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학의 실증적인 연구 자체가 없는 것 같다.

제사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체험적인 현지 조사가 행해지고, <주자가례>, <소학>과 이덕무의 <사소절> 같은 문헌의 내용들이 식사 예절과 제사에 끼친 영향을 고찰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성리학이 한반도를 지배하기 이전인 고려의 불교식 연회나 제사에 대한 고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리학의 철학이 생활 관습에 영향을 미친다면, 고려와 조선 1000년간 성리학이 지배하기 전의 세태에서도 사상사적인 맥락 분석이 더해져야 한다. 굿의 음식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무교적인 생각이 음식에서 어떻게 구현되었으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연구도 상세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역사학에서도 전체의 주곡 생산과 인구의 변화, 경작 면적의 변천, 조세 제도와 행정이 백성들과 지배층의 음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와 같은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음식 인문학의 장래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아울러 기후의 변화나 종자의 변이, 그리고 영양 성분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들도 상세하게 연구되어야만 실제 주영하 교수가 꿈꾸는 "음식학"이란 학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모든 과제가 주영하 교수의 손에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다른 인문학자의 시선이 음식을 도외시하는 한 학제 간의 협력이 이루어질 방법은 없을 것이며, "음식학"은커녕 "음식 인문학" 자체도 성립되기 힘들 것이다. 현재 상황을 보건대 한국의 인문학자들의 이런 세세한 의식주에 관한 관심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역사학은 최근 들어 미시사에 대한 관심이 그나마 고조되어 가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철학이나 사상 쪽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을 읽으면서 많은 이야기보따리를 끌러 놓기만 하고 아직 제대로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개척자가 처한 곤경이다. 화두는 던질 수 있을지언정 모든 것을 혼자서 마무리 지을 수는 없다. 상황이 여의치 못함은 애석한 일이지만, 그래도 뜻이 맞는 인문학자들이 모여서 여기 이 책이 던진 화두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한국의 인문학이 저 멀리 현실과 떨어진 고담준론에서 벗어나 우리 '한국', '한국인', '한국 문화'에 조금 더 살갑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여기고, 백성은 밥을 하늘로 여긴다"고 했거늘 음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을 논의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게이가 '객관적 혐오감'을 준다?

2010년 10월 어느 토요일 저녁, 김 아무개 씨의 가족은 TV 연속극을 보고 있었다. SBS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장면. 게이 커플 태섭(송창의)과 경수(이상우)가 택시 안에서 사랑싸움을 벌였다. 경수가 말한다. "그러니까 진하게 키스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 말을 들은 택시 기사가 윽박지른다. "재수 없어, 당장 내려!" 참으라는 태섭과 격노하는 경수. 결국에 둘은 택시 문을 박차고 나온다.

이 장면을 이해하지 못한 김 씨의 아버지. "저 둘이 게이 커플이야." 하는 딸의 설명에 잠시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잠시 후 택시 기사와 똑같은 어조로 말한다. "TV 꺼! 저딴 걸 왜 해 주는 거야!"


ⓒSBS

지난 31일 한때 트위터를 평정한(?) 표현이 있었다. '객관적 혐오감'. "내 여러 주관적인 혐오감은 객관적인 혐오감 앞에서 그저 비루한 것일 뿐", "역사에 두고두고 까일 문구", "혐오감도 객관적일 수 있다니", "호모포비아의 카프카적 표현" 등. 이 말은 이날 헌법재판소가 군형법 제 92조("계간 기타 추행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에 합헌 결정을 내리면서 나왔다.

"계간에 이르지 않은 동성애 성행위 등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성적 만족 행위…."

군내 강제 추행은 처벌 받아야 마땅하지만 이 조항은 그 대상을 동성애자로 한정해 '계간(鷄姦)' 즉 닭들의 성교라 낮춰 부르며 차별했기 때문에 논쟁거리가 돼 왔다. 조항이 합헌 판결을 받은데 대한 공분과는 별개로 '객관적 혐오감'이라는 표현이 이런저런 패러디로 회자된 것은, 그것이 헌재를 비롯한 한국의 제도권 및 주류 사회가 갖는 동성애에 대한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난해 강제 추행 혐의로 고소됐다가 20일 무죄 판결을 받은 개그맨 김기수 씨도 "무죄 판결보다 동성애자란 '딱지'를 뗐다는 사실이 더 기쁘다"고 진술했다. 한국에서는 '강제 추행자'보다 '동성애자'가 더 버거운 굴레인 것이다.

2. 최첨단 문화를 선도하는 게이?

"괜찮다 싶으면 여자 친구가 있고, 완벽하다 싶으면 남자 친구가 있다."
"'패션 리더' 게이, '트렌드 세터'로 부상…."

한데 한국에서 게이는 1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위의 통신사 광고 카피와 기사 제목을 보자. 김기수는 "동성애자란 말을 듣게 되자 운영하던 쇼핑몰에서 판매한 옷에 대해 선입관이 생겨 쇼핑몰도 폐쇄했다"는데, 어디서는 '완벽'한 '패션 리더'고 '트렌드 세터'란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다른 한 편에서는 대단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구들이다.

특히 '돌체 앤 가바나'의 도미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 콤비, (현재는 해고당했지만) '크리스찬 디올'의 존 갈리아노 등 해외 유명 디자이너들이 대다수 게이이며 공공연히 게이 코드들을 패션과 실생활에서 드러낸다는 사실 때문인지, 게이는 하이패션(최첨단의 유행)의 동의어처럼 여겨지고 있다.

다섯 명의 매력 게이남들이 촌스럽고 퀴퀴한 이성애자 남성을 180도로 변신시켜주는 미국 케이블 채널 '브라보'의 <퀴어 아이 포 더 스트레이트 가이(Queer Eye For the Straight Guy)>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어떤가. 게이가 패션은 물론 라이프스타일에서도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bravotv.com

패션 잡지, CF,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화려하고 세련되게 비쳐지는 게이들의 모습은 문화 분야에서 구매력이 높은 20~30대 여성의 소구 대상이 됐다. 이런 경향을 낳은 대표 격으로 <섹스 앤 더 시티>가 꼽힌다. 주인공들의 패션과 삶이 욕망의 대상이 되면서, 그들 주변의 스탠포드나 앤소니 같은 잘 나가는 '게이 친구'에 대한 판타지도 널리 퍼져나간 것이다.

한편, 이보다 앞서 일본에서 전해진 게이들의 성애를 다루는 만화 '야오이물'은 '아이돌 팬 픽션(아이돌 멤버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문화와 결합되면서 '꽃미남 게이 판타지'를 자극했다. 이러한 BL(Boy's love) 취향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하위문화로 자리 잡는 한편, 요시나가 후미 원작의 영화 <앤티크>나 그룹 '샤이니'의 드레스 코드 등을 통해 대중문화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종합하자면 일부에서 '게이 문화'는 따라잡고 싶으며 열광할 만한, '팔리는' 코드로 안착했다. 패션계나 광고계에서 '셀러브리티'로 여겨지는 게이들도 등장했다. 한 블로거의 말처럼 "게이 클래스는 수적으로는 마이너리티이지만 사회적 위상으로 볼 때 메이저리그 급"이 된 것일까? 제도적으로는 여전히 인권의 사각 지대에 있을지 몰라도, 문화적으로는 섬세하고 화려한 패션 리더로 거듭나면서 평범한 이성애자 남성들을 '호구'로 만드는 존재일까?

이러한 경향성에 대해 판단은 제각각이지만 많은 게이들은 "그것은 게이 문화라기보다 게이 판타지에 가깝다"고 선을 긋는다. 미술 작업을 하는 오용석(37)는 "국내에서 양산된 '게이 컬처'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라면서 "게이가 모든 이성애자 남성을 좋아할 거라는 환상, 게이들은 모두 예쁘고 아름다울 것이라는 환상 등 각자를 위한 '게이 환상'이라는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3. '게이 컬처'가 무엇입니까?

전파된 모습은 변모했지만 서구에서 탄생한 '게이 컬처' 자체가 실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원류는 게이라는 단어가 탄생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즈음부터 남성 동성애자와 그 그룹, 문화를 일컫는 일반적인 형용사이자 명사가 된 '게이'는 독특한 하위문화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의 바(bar) 문화, '캠프'(노동자 계급 게이 남성의 미적 취향이나 행동) 스타일로 변형시킨 오페라, 트루먼 카포티의 문학부터 재스퍼 존스의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게이 컬처'가 축적됐다.

지금도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갖고 있는 통념이지만, 1950~60년대만 해도 동성애는 일종의 정신병이며 치료를 통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질병이란 견해가 의학계에서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동성애는 제도적으로도 불법이었다. 당시 뉴욕 경찰은 센트럴파크를 비롯한 시내 곳곳에서 게이인 양 행세하며 게이에게 접근, 상대방이 응하면 바로 호송차에 태워 취조실로 데려갔다.

문화적으로도 획일주의가 득세한 가운데, 동성애자는 국가 안전에 위협을 가하는 매국노로 지목돼 억압을 받았다. 일부 게이 예술가만이 은밀한 방법을 통해 자신의 감수성을 표현한 시기였다. 이를 '벽장 속 예술'이라고 부른다. 플로랑스 타마뉴의 <동성애의 역사>(이마고 펴냄)를 보면, 당시에 동성애는 사진가 마이너 화이트 등 일부 동성애자 예술가를 통해서 '우회적으로' 표현됐다.

이렇게 억압된 분위기는 억압받는 자들의 저항성을 부각시킨다. "20세기 중반의 미국에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운명은 흑인으로 사는 것과 게이로 사는 것이라고 하는데, 둘 중에서도 게이 쪽이 치명적이었다"라는 극작가 엘리엇 타이버의 증언에 따른다면 게이 문화가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성 해방 움직임과 히피 문화가 요동치면서 게이 컬처는 더 뚜렷한 윤곽선을 갖고 전면에 등장한다. 데이비드 보위가 화려한 옷차림과 화장, 무대 위와 밖을 넘나드는 요란한 퍼포먼스로 '퀴어(Queer, 성 소수자에 대한 총칭.)'의 발판을 넓혔으며, 게이 영화인들도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1950년대 창간되었던 다수의 게이 잡지들이 이런 문화를 조명하고 따라갔다.

그 정점은 1969년 6월 27일의 '스톤월 봉기'다. 이날 밤 경찰은 그리니치빌리지 내의 한 게이 바인 '스톤월 인'을 급습한다. 그동안 도망가거나 동성애자가 아닌 척 하기 바빴던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이날 모두 한자리에 모여 맥주병과 벽돌을 들고 경찰과 대치했다. 이틀에 걸친 이 싸움은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게이 컬처'를 포함한 동성애자들의 문화는 좀 더 운동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벽장에서 나오다'라는 뜻의 '커밍아웃'이 자랑스러운 명령어가 됐다.


ⓒbroadwayworld.com

'게이 컬처'는 이처럼 문화 예술계 혹은 게이들의 일상 속에만 갇힌 것이 아니라 세상에 돌을 던지고 왜곡된 통념을 바로잡는 데 기여했다. 1989년 덴마크에서 시작해 특별법 제정 혹은 부부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립을 거쳐, 1990년대 유럽 각국에서 동성애자 결혼이 인정받게 된 것이 그 대표적 성과다. 여기서 '운동'과 '문화(예술)'는 역할을 나누어 따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진 힘으로 움직였다.

이와 동전의 앞뒷면처럼 동시에 나타나는 경향이 위에서 언급한 상업화다. 명품 광고에서 SM(사도-마조히즘) 성향을 띤 게이·레즈비언 코드가 등장하고, 패션이나 음악계의 일부 인기 게이들의 캐릭터를 내세운 '핑크 마케팅'이 활발해졌다. 드라마에서 이성애자들의 흥밋거리를 위해 창조된 게이 캐릭터가 나오고 할리우드 '게이 영화' 속 게이는 가족주의를 흔드는 일 없이 관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4. 한국에는 게이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즉 2011년 한국의 게이 컬처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 지금까지 언급한 풍경들에 대해 공간·시대적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글자 그대로 '퀴어' 즉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 게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글자 그대로 없었다는 게 아니라 주류 사회로부터, 대중 매체로부터, 도시의 공적인 공간으로부터 존재를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텅 빈 터미널의 화장실이나 옥상, 종로의 파고다극장과 충무로의 극동극장 등에서 눈을 피해 '크루징'(cruising, 특정한 거리나 공공장소, 업소에서 데이트 상대를 찾아다니는 일)을 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알기 시작했다.

물론 TV 고발 르포 프로그램이나 선정적인 잡지에는 이런 장소가 부정적으로 오르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런 보도가 더 많은 게이들에게 노출되면서, 오히려 더 많은 수의 게이가 '모이는' 효과를 냈다. 1980년대에는 지하철 종로3가역 근처 낙원동 일대에 4~50개에 게이바가 자리를 잡았고, 이곳에서 자생적인 게이 문화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젊은 게이들이 '터널', '스파르타쿠스' 등 이태원 게이 클럽에 모여 들면서 종로와는 또 다른 커뮤니티 문화를 형성했다.

이때부터 바깥으로 내는 목소리도 커졌다. 게이 인권 운동 단체 '친구사이'도 1993년 '초동회'를 거쳐 이듬해 결성됐다. 동성애자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대학교 '마음 001', 연세대학교의 '컴투게더' 등 주요 대학에서 성 소수자 모임이 발족됐고 서동진 씨, 이정우 씨 등이 '게이 활동가'로 등장했다. 또 PC 통신 시대로 접어들면서 더 많은 게이들이 벽장 밖으로 나왔다.

좀 더 가까운 기억을 더듬어 보자. 2000년에는 배우 홍석천 씨의 커밍아웃이라는 '대 사건'이 있었다. 이듬해엔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 씨가 등장했다. 2011년 현재 극장과 영화제에서 <친구사이?>, <후회하지 않아>, <종로의 기적> 등 게이 영화인의 작품을 대중적으로 만날 수 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은어, 패션, 취향 등 광범위하게 '게이 컬처'가 형성됐지만 그들 스스로 낸 목소리가 바깥에 제대로 전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존재감을 부각시켜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드라마나 영화에 게이가 고개를 내미는 횟수가 늘기는 해도 성적 정체성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가족을 불행하게 만드는 '우울한' 캐릭터 혹은 여성스럽기 때문에 오해를 받는 개그 캐릭터에 그쳤다.

5. 지금 여기의 게이들이 말하는 게이 컬처

1과 2에서, 한국 사회에서 게이를 보는 극단적인 두 가지 시선 '혐오감'과 '판타지'를 얘기했다. 그 극단에서 던지는 질문에 실제 게이들은 뭐라고 답할까.

먼저 혐오감에서는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동성애는 청소년들이 모방하거나 학습할 우려가 있으므로 대중문화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요?" 한 게이가 답한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지 마세요. (…) 동성애자들이 더 크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뿐이지 갑자기 그 숫자가 많아진 것은 절대 아닙니다."

반대로 이런 질문도 있다. "게이들은 전부 패션 감각이 뛰어난 것 같아요". 따르는 답변, "일반인들이 게이의 패션 감각을 높이 사는 이유는 성 정체성이 벽으로 작용하지 않는 패션계에서 차별 없이 능력을 펼친 게이들의 노력이 빛을 본 결과입니다. 솔직히 저 같은 경우에는 패션에 별로 관심도 없고 감각도 꽝이랍니다."

이상은 지난 2월 발간된 <게이 컬처 홀릭>(씨네21북스 펴냄)의 '이성애자 상담실' 코너에서 나온 질문과 답변이다. 게이가 아닌 이들이 실제 할 법한 질문들에 대해 솔직히 들려주고 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버디>라는 성 소수자 문화 잡지가 정식 서점을 통해 유통되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한국에서 게이들이 직접 자신의 문화를 안내한 책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2009년 당시 친구사이의 문화팀장이었던 김성진 씨가 책을 내자는 제안을 했고, 편집위원회가 구성됐다. 수개월에 걸친 편집 과정에서 여러 게이들의 목소리가 모아졌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게이 문화 안내서가 나온 것이다.


▲ <게이 컬처 홀릭>(게이 컬처 홀릭 편집위원회 지음, 씨네21북스 펴냄). ⓒ씨네21북스
메인이라 할 수 있는 1부에서는 영화 감독 이송희일, <에스콰이어> 패션 디렉터 심정희, <씨네 21> 기자 김도훈 등의 필진들이 게이 영화, 패션, 음악 등 분야를 하나씩 맡아 그 속을 자세히 보여준다. 2부에서는 한국에서 게이로 살아가는 이들의 평범한 모습을 그렸다. 3부, 4부에는 성 소수자 관련 법 규정부터 관련 도서 목록까지 실용적인 정보가 실려 있다.

책은 게이 커뮤니티 내외의 게이들은 물론 "게이들의 시크한 감수성이 궁금한 이성애자"들 모두에게 열려 있다. 따라서 상당히 발랄한 만듦새다. '기갈(성깔을 부리거나 끼를 떠는 일,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 끼 등을 일컬음)'이니 '식성(성적 호감을 느끼는 스타일)'이니 하는 은어들의 실체도 '언니'들이 몸소 가르쳐준다.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는 현실 제도, 장애인 게이나 외국인 게이 등 이중 소수자 문제 등 가볍지만은 않은 부분도 놓치지 않는다. 또 '에이즈', '비정상' 같은 부정적인 키워드와 함께 나열되는 언론 보도 등 주류의 시선도 고발한다.

김성진 씨는 "처음에는 (인권 현실 등) 무거운 면을 다뤄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지만 점점 밝은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 갔다"면서도 "이 책을 읽어 보면 (게이들이 모두 패션 리더고 잘 나갈 것이라는) '환상'도 깨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6. 너와 나, 우리가 바로 게이!

책을 통해서 게이 컬처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지만 그 '특성'이라 할 만한 것이 한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다.


▲ 현재까지 널리 사랑받는 게이 아이콘 주디 갈런드, 그녀가 출연한 <오즈의 마법사>(1939) ⓒnaver.com
공동 작업이니만큼 특성보다는 다양성이 더 강조됐다. 물론 사랑의 역경을 이겨내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는 목청 좋은 '디바'나, 박복한 운명의 여성들에게 보이는 어쩔 수 없는 애정은 많은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하지만 클럽에서 흔드는 것에 대한 호불호도 각자 다르고, 어떤 음악에 주로 몸을 맡기는가도 제각각 취향이다.

편집위원회의 전재우 씨는 "(게이 문화가) 가벼워 보인다, 난삽해 보인다고들 하는데 한 꺼풀 벗기면 그렇지 않다"면서 "시끄럽고 재밌고 웃긴다는 부분엔 동의하지만 '방탕하다', '가볍다' 이런 평가는 사실 다른 커뮤니티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는 특성 아닌가. 게이 커뮤니티가 더 심하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성진 씨는 "104명에게 설문 조사를 해봤더니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통적인 취향이나 코드를 끄집어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게이 문화에서) 특징적으로 '이거다'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다"고 말했다. 게이들의 취미와 친구 관계 등을 묻는 이 설문에서, '가장 즐겨 하는 운동'을 물었을 때 축구를 꼽은 게이가 없었다는 것 정도만이 눈에 띈다.

이 책의 서문에서도 "동성애자들에게 '성적 지향'을 제외한다면 이성애자들과 구분될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라고 쓰여 있다. 필자 중 한 명인 심정희 패션 디렉터는 "'패션계에서 게이들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걸 이야깃거리 삼다니….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 같은 글은 아무도 쓰지 않잖아?"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게이 컬처는 그저 성적 지향이 다른 남성의 '문화들의 묶음'일까? 그렇지 않다. 이 성적 지향의 '다름'이야말로 게이 컬처를 독특하게 하는 결정적 차이점이다. 엘리엇 타이버는 자전적 저서 <테이킹 우드스톡>에서 "우리의 성적 취향이 맘에 안 든다는 이유로 사회가 우리를 억압할 경우, 섹스는 혁명적인 행위가 되고, 많은 이들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가 된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게이들을 차별하는 상황에서 이런 타이버의 지적은 유효하다. 책의 한 꼭지를 맡은 편집위원회의 이종걸 씨는 "성 소수자에게는 성적 지향이 자신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런 이들에게는 자신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이를 긍정하면서 생기는 '연대 의식', '형제애'가 있다"고 말했다.


▲ <테이킹 우드스탁>(엘리엇 타이버·톰 몬테 지음, 성문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그는 게이 커뮤니티·게이 컬처의 특징에 대해 "잘못된 억압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정신, 차별에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평등의 정신"일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자신의 문제나 욕망에 대한 감수성뿐만 아니라 인권에 대한 감수성 역시 높아"지고, "이를 통해 사회의 잘못된 고리를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이 씨는 덧붙였다.

그렇다고 게이 컬처를 운동적 측면에서만 파악하면 이 단어의 또 다른 뜻인 '명랑하고 즐거운' 부분을 놓칠 거라고 편집위원회는 조언한다. 쉽게 접근하라는 의미에서 책의 디자인과 편집에도 공을 기울였다.

영화 <인 앤 아웃>에서 주인공 하워드가 게이들의 송가인 빌리지 피플의 '마초 맨'을 들으며 일어나는 장면에서 함께 웃고, 영화 <친구사이?>의 오프닝과 엔딩의 립싱크 영상처럼 '뽕끼' 넘치는 발랄한 장면을 즐길 수 있다면 이들의 목표, '친절한 게이 문화 안내'는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많은 이들이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게이 커플을 너무 희화화시키지도, 어둡게 그리지도 않으면서 성 소수자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드라마 보고 내 아들 게이 됐다, 책임 져라!"라는 호모포비아가 고개를 드는 아픔도 있지만 대중매체가 게이들의 실제 목소리에 귀 기울일수록 그들의 인권은 개선되는 효과가 있다.

영화감독 김조광수 씨는 지난 21일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마이 게이 라이프')에서 "(어머니가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데까지) 긴 시간을 혼자 감당해야 했고 그 때문에 고통이 크셨다. 그때 엄마 주변에 엄마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엄마는 혼자였다"고 말했다.

이런 고민을 하는 관계 속에 <게이 컬처 홀릭>이 놓여있다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징검다리가 되지 않을까. 편집위원회는 이 작업을 통해 동성애에 대한 몰이해가 조금이라도 없어진다면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뭘 이 정도 갖고, 이제 시작일 뿐이다." 사적인 자리에서 만난 친구사이 회원인 게이 남성은 <게이 컬처 홀릭>의 발간 감회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함께 읽기

<게이 컬처 홀릭>(게이 컬처 홀릭 편집위원회 지음, 씨네21북스 펴냄)
<테이킹 우드스탁>(엘리엇 타이버 지음, 성문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성적 다양성, 두렵거나 혹은 모르거나>(바네사 베어드 지음, 김고연주 옮김, 이후 펴냄)
<동성애의 역사>(플로랑스 타마뉴 지음, 이상빈 옮김, 이마고 펴냄)
<문화정치 문화전쟁>(돈 미첼 지음, 류제헌 외 옮김, 살림 펴냄)
<5리터 - 피의 역사 혹은 피의 개인사>(빌 헤이스 지음,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