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라는 강연에 대한 평이 아니라 그 강연을 풀이한 최장집의 책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 1 :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폴리테이아 펴냄)에 관한 서평이다.

최장집이 막스 베버를 해석하는 방식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이 글은 베버보다 최장집에게 초점을 맞춘다. 왜냐하면 한나 아렌트나 위르겐 하버마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베버의 이론이나 합리성 개념의 문제점과 한계를 이미 지적한 바 있고, 권력과 폭력을 구분하지 않는 정치관이 현실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왔으니 굳이 베버에 대한 비판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궁금한 건 한국 정치의 미래를 논하면서 최장집이 베버를 끌어들인 이유이다. 최장집이 최근 한국 사회에 베버라는 유령을 부활시킨 첫 번째 인물은 아니지만 "우리 현실에서 좀 더 시급하게 읽혔으면 하는 정치철학자"로 베버를 꼽은 이유는 아주 궁금하다. 최장집이 다른 사상가들을 빼고 굳이 베버를 먼저 얘기하는 건 그에게 기댈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이 따지고 싶은 건 베버의 이론 자체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베버를 논의하는 '맥락'과 최장집의 '판단'이다.

좋은 정치인이 필요하다?


▲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막스 베버 지음,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폴리테이아 펴냄). ⓒ폴리테이아
이 책에서 최장집이 주장하는 내용은 사뭇 상식적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좋은 정치인'이 필요 없다고 얘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부정적인 사람들조차도 좋은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얘기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최장집의 주장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오독(誤讀)'이다.

최장집이 단지 좋은 직업 정치인 몇 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라는 사람의 문제를 다루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치 시스템의 문제를 얘기한다. 좋은 정치인이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들을 제안하고 발전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 책의 중심 주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당의 동원 기구(머신)와 의회 정치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이런 오독을 온전히 독자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은 최장집이 "새로운 직업 정치가들이 (…) 직업 정치인으로서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와 관련해 더없이 중요하다"는 식의 얘기를 계속 흘리기 때문이다. 소명 의식을 가진 정치인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듯하지만 그 정치인의 범주는 정당 머신을 가진 정당 정치인이다. 정치인의 범주를 매우 좁게 보면서도 그냥 정치인이라 얘기하니 착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최장집은 민주주의와 정치인의 필요성도 같은 차원에서 다뤄 오해를 낳는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더디다'와 '좋은 정치인이 필요하다'가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을까? 물론 민주주의 하에서도 좋은 정치인은 필요하다. 하지만 좋은 정치인들이 시민을 대신하는 정치 체제를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최장집은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관료화된 강력한 국가가 그 사이에 위치함으로써 3자 관계의 구조를 갖기 때문"에 차이점을 가지지만 고대의 민주주의와 현대의 민주주의가 "지도자-대중의 관계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허나 민주주의는 지배 양식이 아니라 민중이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 형태이다. 말의 뜻 그대로 민중이 지배권을 가져야 민주주의라 불릴 수 있다. 제 아무리 좋은 정치 결과를 낳더라도 민중이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군주정이나 귀족정이라 불려야 한다.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 체제와 구분되는 건 민중이 정치인을 선택하는 만큼 그를 몰아낼 수도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있다. 시기심에 사로잡힌 시민들이 탁월한 정치 지도자를 쫓아낼 수도 있고 전쟁에 이긴 개선장군을 처형할 수도 있는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 있는 정치 체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정치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가 좋은 정부 형태라 불리는 것은 힘과 부를 독점한 소수의 사람들의 손에 정치 공동체의 운명을 맡기는 것보다 민중들이 정치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이런 공리(公理)를 무시한 채 정치를 설명하니 자꾸 헷갈린다.

최장집이 자주 인용하는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자신의 구상을 '폴리아키'라 불러 오독을 막는데, 최장집은 자기 구상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니 오독이 생긴다. 더구나 자기 얘기와 일치하지 않는 논의를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라고 부르니 오독은 더욱더 심해진다. 그러니 엉킨 매듭을 풀어야 하는 사람은 최장집인 것 같다.

한국 시민이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한다?

독자의 오독이 있다면 최장집의 오독도 존재한다. 최장집은 이렇게 얘기한다.

"오늘의 한국 상황에서 정치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런 경향이 사회에 널리 확산돼 있다는 점일 것이다. (…) 권력을 권위주의와 동일시하고 정치를 탐욕과 타락을 상징하는 인간 행위로 이해하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 경향은,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 체제로서 받아들이고 이를 잘 운영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부정적인 것'은 다르다.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 비판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의 정치 상황이 부정적이지 않은가? 투표할 수 있고 선거가 치러지니 부정적이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민주주의를 따진다면 프랑스 사상가 장-자크 루소의 말처럼 우리는 4년에 한번 투표하는 날에만 정치 공동체의 주인이 될 뿐이다.

정치와 경제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공공 영역이 사유화되는 한국의 정치는 매우 부정적이다. 개발의 속도전에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 한국의 현실은 매우 부정적이다. 인사 청문회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정치 상황은 충분히 부정적이다. 감시와 벌금으로 얼룩진 삶을 사는 시민운동가들에겐 지금의 정치가 꽤 부정적이다. 그리고 다른 통로로 자신의 의견을 얘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부정적이다. 이것은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아니다. 부정한 것을 부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자고 얘기하니 아Q의 정신 승리법이라도 쓰자는 것일까?

그리고 정녕 사람들이 권력을 부정적으로 '이해'할까? 오히려 사람들은 권력이 중요한 힘이자 자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정치인이고 권력이 아니라 부패이다. 정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정치인들이 부정하기 때문에 권력을 탐욕과 타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친 의심이나 열정이 아니라 합리적인 감시이다. 이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이것이 오독인지 의도된 계산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주장이 정치 엘리트의 활동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다.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대중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는 어려우니 엘리트들이 정치를 대신해야 한다는 식이다. "베버는 국가나 정당 같은 자율적 정치 조직이 인민 주권, 인민의 이니셔티브를 통해 운영되고 그로 인해 작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민주주의도 어디까지나 정치 엘리트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고, 인민은 엘리트를 선출하는 수동적 역할 이상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이고 극도로 절제된 이해를 발견하게 된다." 베버의 이런 주장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극도로 절제된 이해"라니 그 판단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결국 최장집의 핵심적인 주장은 이것인 듯하다. "베버에게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자신의 목적의식을 대중에게 호소하고, 대중이 그에 호응해서 그를 지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지도자-대중의 관계, 즉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이를 추종하는 대중의 열망 사이에서 발생하는 지배-정당성의 상호관계에 기초를 둔 통치 체제이다. 바꾸어 말하면 민주적 리더십이란 카리스마적 권위의 한 유형인 것이다." 이 이율배반적인 명제가 타당하려면 시민은 부정되어야 한다. 미국식 정치관과 소련식 정치관이 매우 다른 듯하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기반 위에 있다. 슘페터의 정치 공학과 레닌의 전위당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최장집은 "국가 기구의 관료화와 자본주의 시장 구조의 독점화가 가져오는 제약적 힘에 대응하면서 역동성을 만들어"내려면 정당 머신을 가진 지도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허나 베버가 지적했듯이, 관료제는 '수동적 민주주의'의 출현, 즉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평준화와 동시에 진행된다. 제 아무리 뛰어난 정치 지도자라 하더라도 지배당하는 사람들을 대변할지언정 그들의 역량을 끌어내지는 못한다.

관료제는 단지 권력을 독점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평준화한다. 최장집이 말하는 좋은 정치는 쇠창살 안에 갇힌 무기력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과정일 수 있다. 허나 그것이 진정 행복일까? 시민들이 누려야 할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을 정치인들이 계속 독점해야 할까? 참여는 사람들의 욕구를 실현하는 과정일 뿐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강화시키고 공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과정인데, 이런 과정을 밟으며 정치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늘어날 텐데 최장집 교수는 이런 과정을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정치학자의 현실 감각?

정치학자로서 최장집은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의 균형을 얼마나 잡고 있을까? 최장집은 2010년 9월 정치인 손학규의 후원회장을 맡았고 얼마 전에는 손학규후원회 대표 명의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종로를 버리고 부산에 한 몸 던져 지역주의를 깨뜨리려 했던 것처럼 손학규의 국민 통합을 위한 노력이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습니다"라는 지지의 인사말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장집은 손학규를 성공적인 정치인으로 만들려 하는 것일까?

손학규의 진심을 파악하기란 어렵지만 적어도 뉴라이트전국연합과 한나라당의 일원이었던 손학규의 신념 윤리를 높이 사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간의 행적을 보면 "사건의 전체 구조, 내지는 맥락에서 행위자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상상하고, 그가 원래 바라는 목표와 관련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판단력, 사려 깊음"을 의미하는 책임 윤리를 그에게 기대하기도 어려운 듯하다. 그런데도 왜 손학규일까?

그리고 그동안 노무현 정부를 비판해 왔음에도 뜬금없이 손학규와 노무현을 연장선상에 놓는 최장집의 말은 자신의 책임 윤리를 거스르지는 않더라도 신념 윤리를 상당 부분 훼손한 듯하다. (성공회대학교에서 비정규직 행정 직원들이 해고되었는데도 외부에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주장해온 지식인들이 침묵하고 있는 걸 보면 이런 윤리의 불균형은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A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문제인데 이를 B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한 A가 아니었으니 무조건 A를 고쳐야 한다고 고집하는 건 신념이 아니라 집착과 모순이다. 무엇이든 뚫을 수 있다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다는 방패를 동시에 팔려는 사람은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강력한 지도력과 민주주의를 모두 팔려는 최장집의 입장도 그런 모순에서 벗어나기 못하고 있다. 어느 한 쪽을 내려놓아야 입장이 분명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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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흠 2014-04-29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흥미로운 글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국가가 폭력의 독점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유엔의 계약을 따낸 민간 기업에 고용돼 비살상용 무기를 포함한 미래의 무기로 무장하고 전쟁을 벌이는 자발적 용병 조직을 만들어 내는 건 어떨까?" (앨빈 토플러·하이디 토플러의 <전쟁과 반전쟁>(1995년) 중)

"하룻밤 내에 배송할 일이 있을 때, 우체국 서비스를 이용합니까, 아니면 페덱스를 이용합니까? (…) 말하자면 우리 회사의 목적은 페덱스가 우체국을 대신해서 했던 것처럼, 우리가 국가 보안 기구의 일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517쪽)

이라크 전쟁을 벌인 부시 행정부의 주축 네오콘보다 더 오른쪽에 선 신정보수주의, 즉 티오콘의 '무장한 날개'를 자임하는 블랙워터의 창립자 에릭 프린스가 한 말이다. 신자유주의 민영화 논리의 연장선에 선 이 말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사실을 왜곡한다. 우체국에도 빠른 배송이 있으며, 또 페덱스가 민간인에게 걸핏하면 총질을 하지는 않는다.

"우리 정부는 이 전쟁을 아웃소싱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민간 군사 기업들에게는 어떤 책임감도 없다."(414)


▲ <블랙워터>(제러미 스카힐 지음, 박미경 옮김, 삼인 펴냄). ⓒ삼인
2003년 이라크의 팔루자에서 일어난 참살 사건에서 목숨을 잃은 블랙워터의 네 직원 가운데 한 명인 스콧 헬번스턴의 어머니가 한 이 말은 민간 군사 기업의 본질을 꿰뚫는 혜안을 보여준다. 스콧은 해군 특수부대를 전역한 뒤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전전하던 중 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이라크행을 택했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 블랙워터는 리젠시라는 쿠웨이트 업체와 손을 잡고 ESS의 용역 계약을 따냈다. ESS에 하청을 준 것은 KBR이었고, KBR은 미국 국방부의 외주 용역을 맡은 회사였다. 이 복잡한 하청 연쇄의 밑바닥에 있던 블랙워터는 150만 달러의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계약서의 '장갑 차량'이라는 문구에서 '장갑'이라는 단어 하나를 삭제했다.

게다가 원래 6명 단위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 규정을 무시한 채 4명만을 팔루자로 보냈고, 미군의 만행으로 폭발 일보직전이었던 팔루자 시내를 아무 대책 없이 관통하도록 지시했다. 블랙워터의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고 이라크에 진출한 수많은 민간 군사 기업의 활동에 이목을 집중시킨 계기가 된 사건의 배경에는 이런 내막이 있었다.

그런데 하고 많은 민간 군사 기업 중에 왜 하필 블랙워터일까? 1990년대 중·후반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그제큐티브아웃컴스와 MPRI 같은 기업이 1세대 민간 군사 기업이라면, 9·11 이후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급성장한 블랙워터는 2세대 민간 군사 기업의 대표 주자라 할 만하다. 냉전이 끝나고 군비가 축소되던 1990년대에 미국 보수 집단은 군산 복합체의 생존을 위한 비법을 내놓았다.

'군사 부문 혁명(RMA)'(이 책에서는 '군대 일의 혁명', '군대 업무의 혁명' 등으로 표기된다)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된 비법이란 첨단 기술 중심의 군대 혁신과 병력 감소를 메울 민간화·외주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소비에트권이 몰락한 상황에서 유일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으로서는 전 세계 군사비 지출의 50% 가까이를 차지하는 군사력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영화 <블랙 호크 다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미군이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반군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되고 사체 훼손까지 당하는 장면은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미국의 지배 세력에게 군사력 해외 파병은 많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런 상황에서 9·11 공격은 미국의 지배 세력과 블랙워터 모두에게 천금 같은 기회를 안겨주었다.

외국 군대가 대규모 파병에 소극적인 가운데 가뜩이나 줄어든 병력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두 곳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미국 정부로서는 블랙워터 같은 민간 군사 기업이 더없이 좋은 파트너였다. 아버지가 남긴 거액의 유산으로 자신의 세계관에 딱 맞는 회사를 창립한 에릭 프린스와 블랙워터 입장에서 보자면 9·11은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지은이 제러미 스카힐은 블랙워터나 민간 군사 기업에 관한 분명한 입장이나 도덕적인 비난을 삼가는 대신 '찜찜하다'는 말로 복잡한 평가를 대신한다. 그렇지만 팔루자 민간인 학살 전후 과정에서 블랙워터가 자의든 타의든 떠맡은 결정적인 역할과 블랙워터가 직접 벌인 나자프 전투에 대한 생생한 설명을 통해 독자 스스로 판단할 근거를 제시한다.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 산맥에서 발생한 블랙워터 61기 추락 사건을 치밀하게 추적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게다가 팔루자 참살 사건의 사망자들과 칠레 피노체트 군대 출신 '용병'들의 이야기를 통해 민간 군사 기업의 이면을 보여준다.

이라크 전쟁이 마무리되어 감에 따라 블랙워터는 새로운 수익 창출 공간을 찾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뉴올리언스에서 블랙워터가 미국 정부를 대신해 치안 유지 활동을 벌인 모습이나 수단 다르푸르를 비롯한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을 대신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프린스를 보면, 민간 군사 기업은 제3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력의 민간화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제2, 제3의 팔루자 참살 사건과 나자프 학살 사건이 더욱 거대한 규모로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한 가지. 블랙워터 같은 민간 군사 기업에 들어가는 방법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전장에서가 아니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특수부대 기술도 써먹고 일반 군대와 달리 엄청난 돈도 벌 수 있다는 통념과는 달리, 책에서 드러나는 현실의 민간 군사 기업 청부인들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미국이나 영국의 특수부대 출신이 아닌 이른바 '제3국인'(책에는 '제3제국')은 수당부터 차별을 받으며, 설사 칠레나 이라크 출신이 아닌 '엘리트' 청부인이라 할지라도 전쟁 용사의 영광과 명예는 그들의 것이 아니다. 팔루자 참살로 죽은 블랙워터의 네 명은 비용 절감을 위해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했을 뿐이다.

오클리나 레이밴 선글라스에 후줄근한 군복이 아닌 '뽀대 나는' 아웃도어룩으로 치장하고, 별 이유 없이 AK47을 난사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겉멋과 특혜를 빼면, '사나이의 로망, 용병'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프랑스 외인부대나 영국 구르카 용병의 전설적인 신화가 말기 제국주의의 허상이었던 것처럼, 글로벌 군사 아웃소싱 시대의 새로운 용병 역시 겉치레만 번지르르할 뿐이다.

첫 장부터 박진감 넘치는 서술로 독자를 사로잡는 <용병>(로버트 영 펠튼 지음, 윤길순 옮김, 교양인 펴냄) 같은 만듦새를 기대하고 이 책을 집어든 독자라면 적잖은 피로를 감수해야 한다. "쉽게 읽히는 책"이라는 출판사의 소개와 달리, 적지 않은 비문과 어색한 표현, 일관성 없는 표기와 오류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비문과 어색한 표현이야 스타일의 문제라고 넘어갈 수 있더라도 무성의한 편집과 일관성 없는 표기는 계속 앞뒤를 뒤적이게 만든다. 이를테면 44쪽의 "포커스 가정(Focus on the Family)"과 45쪽의 "포커스 패밀리(Focus on the Family)", 53쪽의 "포커스패밀리위원회", 121쪽의 "포커스 패밀리(Focus on Family)"가 같은 단체인지 눈치 채기란 쉽지 않다.

"수브" 차량이란 표현은 120쪽에 처음 나오는데, 136쪽에는 "SUV"라고 나와 독자의 짐작을 도와준다. 그리고 165쪽에서야 "수브(SUV)"라고 등장해 "험한 길에서도 주행이 용이하도록 만든 차량"이란 옮긴이 주로 정체가 드러난다. 블랙워터 같은 민간 군사 기업 직원들이 애용하는 쉐보레의 SUV '서버번(suburban)' 모델을 "서버 밴"(131쪽)이라고 친절하게 세 번이나 띄어 쓴 덕분에 애꿎은 독자만 골탕을 먹는다.

이라크의 연합국 임시 행정기구를 뜻하는 'CPA'는 "연합임시당국"(194쪽), "연합임시정부"(195쪽), "연합국 임시 행정 당국"(291쪽), "이라크 임시연합 군 당국"(444쪽), "임시연합당국"(444쪽) 등 제각각으로 표기되다가 뜬금없이 '금융감독원'(141쪽)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228쪽에 등장하는 "존 워너"와 "워터", 233쪽에 나오는 "워터 상원의원"과 "워너 상원의원"이 '존 워너'라는 동일 인물임은 웬만한 배경 지식이 없고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산디에고"(272쪽), "샌디에이고"(273쪽), "산티에고"(275쪽)는 모두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의 잘못된 표기이다. "무크타다 알-사드"(188쪽), "무크타다 알-사드르"(189쪽), "알-사드르"와 "알 사드르"와 "사드르"(모두 191쪽), "묵타파 알 사드르"(408쪽)가 다 같은 사람임을 알아채려면 풍부한 배경 지식이 있거나 문맥을 잘 살펴야 한다.

"팔루사"와 "팔주자" 사이에서 "팔루자"(모두 155쪽)를 찾아내면 반갑다가도, "암살 부대"(186쪽), "암살대(death squad)"(186쪽 각주), "죽음의 암살단(death squad)"(301쪽), "죽음의 군단"(399쪽), "죽음의 사단"(564쪽)이 모두 같은 집단을 가리키는 표현임을 알려면 고생 좀 해야 한다. "민간 군사 용역 산업의 1년 총가치"는 "1조 달러"(239쪽)가 아니라 1000억 달러이며, 이라크 침공 1년이 지난 시점에서, 글로벌 리스크 스트레티지의 용병 수는 90명에서 "1만 5000명"(237쪽)으로 증가한 게 아니라 1500명으로 증가했다.

당시 이라크에 진출한 민간 군사 기업들이 민간 군인으로 고용한 이라크인은 '15만 명'(237쪽)이 아니라 1만4000명이다. 미국 정부가 아무리 많은 이라크 인을 죽였어도 "수천만 명"(208쪽)이 아니라 수천 명이 죽었으며, 팔루자로 돌아온 민간인도 "수천만 명"(221쪽)이 아니라 수만 명이다. 이런 중요한 수치는 정확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을 왜곡할 뿐이다.

바그다드에서 콜롬비아로 가는 비행기 표는 "1000만 달러"나 "1200만 달러"(300쪽)가 아니라 1000만이나 1200만 '페소'이다. 비행기가 허공에서 "12킬로미터"를 추락해서 조종사가 "4.5킬로미터"(340쪽) 앞으로 튕겨나간 게 아니라 120미터 추락해서 45미터 앞으로 튕겨나간 것이다. 캘리포니아 위트니 산과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높은 산은 "441킬로미터"와 "760킬로미터"(344쪽)가 아니라 4418미터와 7620미터이다(14장에 등장하는 수치는 모두 유념해서 보아야 한다).

오역은 번역자가 피할 수 없는 천형이다. 그렇지만 에릭 프린스가 "자유주의 예술학교"에서 "자유주의 경제학"을 청강했다는 건 바로 다음 문장에서 이 대학이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프린스가 다닌 곳은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 경제학'을 설파하는 '학부 중심 교양대학(liberal arts school)'이다.

프린스의 보수적인 뿌리를 설명하는 대목이라 이런 오역은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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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세계 일주>(살림 펴냄)는 불랑딘 앙투안, 엘로디 르노 두 명의 프랑스 여성이 2년간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곳곳, 17개국을 여행한 기록이다. 흔치 않은 경험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서점에 나가보면 그런 정도의 경험을 가진 이들의 여행기는 드물지 않다. 아니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들이 경제학자와 물리학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또 17개국을 여행하면서 방문하고 만난 이들이 대학, 연구소, 기업, 산업 시설의 에너지 전문가들이라면 그녀들의 '세계 일주'는 여느 여행과는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여행의 낭만과 아련함 그리고 떠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기보다, 그녀들의 여행기를 읽는 내내 뭔가 긴장하게 만들 것만 같다.

실제로 그랬다. 이들의 여행기는 아프리카 앙골라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앙골라 앞바다에 떠있는 거대한 석유 시추 시설을 방문하면서 심해로부터 석유를 추출하는 기술에 대해서 놀라면서도 위압감을 표시한다. 이어서 그 방문을 계기로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석유 생산 정점(Peak Oil)'의 문제점, (2010년에 발생한 멕시코 만 사건과 같은) 심해 유전 채굴의 위험성과 천연가스 소각의 문제점에 대해서 설명한다.


▲ <에너지 세계 일주>(불랑딘 앙투안·엘로디 르노 지음, 변광배·김사랑 옮김, 살림 펴냄). ⓒ살림
서점의 여행기 코너에 꽂혀 예비 여행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눈 지그시 감고 음미할 만한 여행의 추억이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여행기가 낭만적 환상만을 쫓아다닌 길 위의 경험만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들 젊은 프랑스 여성들을 따라 전 세계가 직면해 있는 문제와 그 해결책을 찾으려는 여행에 동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떤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세계 일주'니 하는 낚시용 제목을 붙은 편집자의 의도가 어쨌든, 이 책이 서점의 여행기 코너에 놓일 것 같지는 않다. (그럴 요량이었다면 여행자와 여행지를 담는 멋진 사진이라도 몇 장 넣어두었을 일이다). 서평을 요청받아 이 책을 받아 들었을 때, 같은 회의 자리에 있었던 우리 연구소의 한 명은 책을 들춰 보더니만 한마디로 단정했다. "공학 책이구먼!" 그의 판정이 맞다면 이 책은 자연과학·공학 분야의 책으로 분류되어 서가에 진열될 것이 분명하고, 몇몇 오지랖 넓은 이공대생에게 발견될 때까지 뽀얀 먼지만을 뒤집고 쓰고 놓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이 그렇게 대접받는 것은 옳지 못하다. 비록 이 책이 에너지와 관련된 오만 가지 기술에 대해서 소개하는 따분한 백과사전과 같은 느낌을 주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선입견 없이 석유, 석탄과 같은 화석 에너지, 핵융합과 같은 핵에너지 그리고 태양광, 풍력, 조력 등과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 생산 기술을 두루 살펴보고, 에너지 소비를 효율화하고 절약할 수 있는 기술까지 포괄한다. 게다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최고의 전문가를 만나고 직접 현장을 찾아가서 살펴본 생생한 경험과 지식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비록 여행기로는 분류되지는 않겠지만, 여행기 방식으로 쓰인 글은 비교적 쉽게 읽힌다. 용기를 내서 도전해볼 일이다. 그리고 두 여성학자가 제기하는 도전적인 질문에 맞서 보는 것도 권한다.

1초에 수천억 원을 날리는 멍청한 짓?

백과사전과도 같은 이 책에서 꼭 읽어봐야 할 내용 하나를 살펴보자. 지난 3월 12일부터 계속 방사성 물질을 뿜어내고 있는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충격과 여파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 책의 제2주제인 '신비스러운 자원, 핵에너지 생산의 현재와 미래'를 넘어가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속한 장들은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될 것인데, 특히 핵융합 발전을 설명하는 부분은 현대 물리학 입문과 같은 초보적인 강의도 제시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이 부분의 마지막에는 별도로 용어 설명까지 붙어 있다. 그러나 주눅 들지 말자. 용기를 내어 책장을 넘겨낸다면 한 과학자의 시니컬하지만, 흥미로운 경고를 들을 수 있다. "이 (핵융합) 시스템이 언젠가 전력 공급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을 겁니다"(114쪽). 스물두 살에 이미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의 핵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는 천재 과학자 에드워드 모스의 가차 없는 평가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하자, 국내의 언론들은 일제히 핵융합 발전이 대안이라고 소개하기 시작했다. 핵분열을 이용하는 핵발전소와 같은 "폭발 위험 없는 핵융합 에너지가 미래"(<한국일보> 2011년 3월 30일자)라는 것이다. 게다가 핵융합에 필요한 연료인 수소는 바닷물에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어 고갈될 위험이 없고(물론, 또 다른 원료인 삼중수소는 이보다 귀하기는 하지만), 핵발전소와 다르게 핵융합을 통해서는 불활성 물질인 헬륨만 나오기 때문에 온실 기체인 이산화탄소나 방사능 폐기물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핵융합 에너지가 청정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라는 것이다. 에드워드 모스나 이들을 인터뷰하는 두 여성 학자들도 이점을 수긍한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이기에 저 천재 물리학자는 저토록 냉정한 평가를 내리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희망과 현실의 격차, 실현 가능한 기술에 도달하기에 요구되는 너무 긴 시간과 막대한 투자 규모 때문이다.

이론적 수준의 구상에서 핵융합 에너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지만, 실제로 이것을 실현하려는 기술은 초보적인 수준이다. 스스로 낙관적인 입장에 속한다고 밝히고 있는, 프랑스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연구원 크리스토프 드보넬은 "핵융합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전기를 생산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고백한다(107쪽). 그는 한국이 참여하여 국제적으로 연구하는 '자기 밀폐 핵융합' 방식에 비해서 10년 쯤 앞설 것으로 여기는 '관성 밀폐 핵융합' 방식에 매달리고 있다.

그런데 그와 전 세계 동료들이 자신들의 방식에서 이룩한 성과라는 것이 일반인의 상식에 비춰 봤을 때 너무 소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1기가와트의 전기를 핵융합을 통해서 얻으려면 1초에 10개의 압력 용기에 레이저를 쏘아야 할 것으로 계산되지만, 현재로서는 하루에 1개 정도만을 쏠 수 있는 기술 수준이라는 것이다. 즉 하루에 86만4000번의 레이저 조사를 해야 하는데 지금은 하루에 1번에 머물고 있다는 것.

한국이 참여하고 있는 국제 열핵융합 실험로(ITER, International Thermonuclear Experimental Reactor) 프로젝트가 채택하고 있는 '자기 밀폐 핵융합' 방식은 더욱 안쓰럽다. 미국 MIT에서 연구하는 프랑스 과학자 앙투안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핵융합로인 알케이터(Alcator)를 자랑하며, 그 안에서 형성되는 플라스마의 압력이 "1초만 유지되면 핵융합의 과학적 손익 분기점"을 넘어설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두 여성 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여기서 1초는 연구자에게는 한 세기에 해당하는 시간"이며, 실제 기록은 "수천 분의 1초에 불과"한 상황이다. 그런 알케이터 핵융합로를 1년간 가동시키는 비용은 300억 달러가 필요하며, 그들의 연구가 (운이 정말로 좋아서) 산업에 적용될 수 있으려면 아마도 30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111쪽).

2006~7년경에 이루어진 인터뷰이니 이제 그 실현 시기가 한 5년쯤 앞당겨졌을까? 이 책에서 두 여성 학자는 다음과 같이 자문한다. "인류는 무한한 에너지원에 이르고자 하는 희망에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117쪽) 핵융합 에너지가 영원히 쫓아가지 못하는 신기루가 아니길.

우리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2007년 4월 어느 날, 국회에 '국제 열핵융합 실험로(ITER) 협정' 비준안이 통과되었다. 2006년에 합의된 ITER 프로젝트는 유럽연합(EU)를 비롯하여 일본, 러시아, 중국, 한국, 미국, 인도가 참여하여 프랑스 카다라쉬 지역에 10년간 100억 유로를 투자하여 핵융합로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첫 번째 실험은 2016년에 시작될 예정인데, 목표는 무려 '15분간'을 가동시켜 투입된 에너지의 열 배를 생산하는 것이다. 국회를 통과한 비준안에는 이런 계획이 담겨져 있었다. 한국 정부는 우리 과학자들이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차세대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의 기술을 평가받아 한국도 ITRER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핵융합이라는 미래 에너지 기술에 관한 권리를 선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비준안을 통과시키면서 한국 정부가 부담하게 될 예산은 1조5000억 원이다. 또 이를 포함하여 수립된 국가 핵융합 에너지개발 기본 계획에 투자할 예산은 2035년까지 모두 4조7000억 원이다. 한해 약 1400억 원 정도가 투자되는 기초연구비의 8%가 단일 프로젝트에 투자되는 셈이었다. 이쯤이면 '돈 먹는 하마'니 하는 비판이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한 환경운동가는 '제2의 황우석 사태'라며, 이 비준안 통과를 저지해야 한다며 힘없는 진보 정당, 민주노동당에서 담당 정책을 맡고 있던 내게 여러 차례 전화를 했었다.

그러나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민주노동당 의원 10명마저도 기권을 해버렸으니 더 할 말이 뭐가 있나. 계획대로 막대한 예산이 투자되기 시작했고, 이제는 정말 성공해야 할 일만 남은 셈이다. 어마어마한 그 예산을 재생 가능 에너지나 에너지 효율화 기술에 투자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탄식, 심지어 분노까지도 생생히 살아 있으니 말이다. 꼭 성공해야만 하는 것이다.

희소식이 있다. 2010년 11월 한국의 국가핵융합연구소(NFRI)는 KSTAR를 가동하여 목표로 하는 상태(H-mode)로 무려 '7초'간 운행했다고 밝혔다. 나아가 올해 안으로 '10초'간 운행한다는 야심찬 목표를 제시하며 기염을 토하고 있다. 어느덧 2020년으로 완공 목표가 미루어진 ITER에서 우리의 기술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니, 제발 '10초' 운행 실험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사이에 지구 대기 중의 온실 기체 농도가 400ppm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사실은 잠시 잊도록 하자. 1400억 원을 들여 '3초'를 더 연장할 수 있다지 않은가.

이것은 왜 여행기가 아니란 말인가!

사실 이 책이 도착하는 날 우리 연구소의 연구원이 보여준 반응이 좀 충격적이었다. 대학 시절 문학을 전공하다가 환경 운동에 투신하여 오랫동안 기후 이슈를 다루고 있으며, 대학원에서 기후 정책을 전공하는 그가 보여준 '이과-문과'의 완고한 구분선이 그랬다. 비록 기술 백과사전과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읽어 낼 수 있을 책을 "공학 책"이라고 단언해 밀쳐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워낙 짧은 순간의 반응을 두고 하는 과잉 해석일 수도 있지만.

사실 수많은 기술들이 연구되고 선택되며, 사회에 도입되고 운영되는 것은 사회적인 과정이다. 단순히 기술적 우월성만으로 기술이 자동적으로 선택되지 않다는 것은 (적어도 과학기술학 연구에서는) 상식에 가깝다. 더 나아가 기술과 사회는 서로를 형성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 책은 대안적인 에너지 기술 혹은 에너지 기술의 대안(두 가지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훌륭한 일이다!) 안에 사회적 요소들이 어떻게 녹아들고 있으며, 또 그것이 그 대안들을 어떻게 틀지어 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프랑스 계몽주의 정신이 투철한 것으로 보이는 두 여성 학자들의 주된 초점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그 실마리를 찾아내서 읽는 일은 반가운 일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두 프랑스 여성 학자들이 에너지 세계 일주를 마무리 지은 곳은 브라질이었다.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브라질은 바이오 에탄올의 생산 종주국이다. 여러 부침이 있기는 하지만, 사탕수수를 이용하여 에탄올을 만들어서 자국의 에너지 독립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나 바이오 에탄올이 세계 식량 위기를 부채질 하고 있다는 사실 등의 문제점에 대해서 두 여성 학자들은 외면하지 않는다. 윤리적으로 민감한 이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나름의 가치 판단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문제를 외면하거나 숨기지 않는다.

게다가 나의 관심을 이끄는 관찰도 보여준다. 브라질 정부는 2004년에 '바이오디젤 생산 및 사용을 위한 국가 신생 프로그램(PNPB)'을 시작하면서, 2008년에 경유에 바이오디젤을 2% 혼합하며 2013년까지는 5%를 혼합하는 것을 목표로 제시했다. 그리고 정부는 2008년에 목표를 초과 달성했으며 2013년의 목표를 상향 조정했다. 그러나 "이런 수치만으로는 PNPB에 내포된 사회적 야심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다".

두 여성학자가 주목한 것은 PNPB가 바이오디젤 생산자가 원료의 일부분을 소규모 가족농에게 구매하면 세금을 면제하는 방식을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왜? 브라질 대통령 룰라가 강조했듯이 "바이오디젤은 노르데스테(브라질 북동부 지방)가 가난을 떨쳐 버리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375쪽). 제시되고 있는 구매 조건을 통해서 가난한 가족농의 경제를 지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브라질에서 바이오디젤이 '사회적 연료'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단다. 빈곤을 줄이기 위한 '사회적 연료'! 멋지지 않은가? 게다가 '문과와 이과'의 장벽을 가볍게 뛰어넘고.

앞서 언급한 여러 매력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짚고 갈 일이 있다. 필자 중에 한 명이 물리학 박사이면서도 스스로 버거워 할 정도로 폭넓은 기술 분야를 꽤 깊숙이 추적하고 있기 때문에, 책의 여러 곳에서 대단히 전문적인 용어가 많이 나온다(특히, 상자로 소개한 내용들!). 그 때문에 역자 후기에 스스로 고백했듯이 불문학을 전공한 번역자들에게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적절한 번역어 선택에 아쉬움을 숨길 수는 없다. 나의 제한된 지식 범위에서만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태양열'과 '태양광'을 잘 구분하지 못한 번역어 선택은 혼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제14장 제목('태양열 에너지는 너무 비싸다?')이 그렇다. 태양열을 통해서 발전을 할 수 있기는 하지만(제13장 일광욕에서 잘 소개하고 있다), 제14장에서 주로 소개한 것은 태양광 전지(solar cell)를 이용한 발전이었다. 그렇다면 번역어는 태양열이기보다는 태양광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열'과 '빛'의 차이를 세심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또 기존에 자리 잡은 번역어를 선택하지 않아 혼동을 주는 경우도 있다. '수동적 주택(패스브 하우스)', '환경 지문(생태 발자국)', '열·전력 발전소(열병합 발전소)', '냉각 융합(상온 핵융합)'이 눈에 보였다. 이런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번역자들의 노고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사실 내가 몸담고 있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도 작년에 <착한 에너지 기행>(이매진 펴냄)이라는 책을 하나 냈다. 두 프랑스 여성 학자들과 비슷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여행과 에너지(및 기후) 문제를 엮어서 좀 더 친숙하게 독자들에게 다가서 보자는 전략. 이 책만큼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측면을 강조하지는 않았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판매 실적을 보였다.

그러나 결코 우리 책도 서점의 여행기 코너에 배치되지는 않았다. 세상의 이런 저런 범주, 칸막이를 넘어서고 뒤섞는다는 것은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 책 <에너지 세계 일주>가 과연 어느 코너에 자리 잡게 되고, 또 어떤 독자들이 읽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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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노동으로 깊게 주름진 노인의 일상적인 두어 마디에서 문득 시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짧은 그 순간에 새삼스럽게 다가서는 삶의 면면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언어의 매개 없이 온몸으로 직접 세계와 대면하는 데서 오는 인식의 투명함이라든지, 오랜 시간 가슴 속에 품어왔던 서러운 눈물과 땀방울의 염도와 같은 것, 혹은 세상을 느슨하게 놓아두면서도 자신의 방식으로 따뜻하게 품어내는 넉넉함 등. 생경한 지식이나 조잡한 기교 따위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깊이와 내력이 이 속에 묻혀 있다.

그네들의 몇 마디가 시의 자리로 성큼 이월할 수 있는 까닭은 이러한 내공이 개입하기 때문일 터이다. 공선옥의 장편 소설 <꽃 같은 시절>(창비 펴냄)의 가장 커다란 미덕이라면 이러한 지점을 효과적으로 살려내었다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대략적으로 내용을 살피고 난 후, 그 미덕의 근거를 파악해 나가는 방식으로 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1. <꽃 같은 시절>의 대략적 내용과 리얼리티


▲ <꽃 같은 시절>(공선옥 지음, 창비 펴냄). ⓒ창비
자, 여기 젊은이들은 떠나가 버리고 노인네들만 남은 마을이 있다. 평생 농사나 지으며 순박하게 삶을 이어오던 그네들이 데모에 나섰다. 새롭게 들어선 '순양석재'가 법적인 절차도 무시한 채 돌 깨는 작업을 시작하자, 그로 인한 피해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첨엔 쿵쿵 허는 소리가 나길래 다시 인공이 되얐는가, 혔는디 그것이 아니고 독공장에서 독 깨는 소리여. 독 깨는 소리가 어뜨케나 큰지 인공 때 대포소리 같애. 그 소리에 놀래서 어미 뱃속에서 소새끼가 죽고 염생이가 죽고 갱아지가 죽고 닭이 알을 안 낳고 천지사방이 문지투성이라 깻잎삭 한나를 못 묵어. 그란디도 나랏님들은 '돈을 벌어야' 쓴다고 독공장 돌리는 것을 안 막어. 그렁게 디모를 헌 거여."(254쪽)

데모하는 노인들을 경찰이 고압적으로 다그치지만, 그네들이 데모에 나선 까닭이나 시종 원하는 바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그저 "조용히 살다 죽고 잡다"는 것(66쪽). 칠팔십에 이르러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의 이 소박한 바람이 어째서 이처럼 냉혹하게 짓밟혀야 하는가.

기실, 소설에서 그려내고 있는, 공권력이 자본의 편을 들고 나서는 장면은 현실 세계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바다. 예컨대 나는 2009년 5월 어느 날 용산 철거민촌 현장에서 이를 똑똑히 확인했다. 용역 업체 깡패들은 험악한 기세로 누차 시비를 걸어오는 한편, 문화 행사 참가자의 얼굴을 유유히 사진으로 채증하고 있었다(그 사진이 어디로 건네질 것인지 여부는 상식 수준의 판단에 맡기겠다).

거꾸로 문화제를 진행하는 측에서 충돌 상황을 사진으로 찍노라면 용역 깡패로부터 초상권 운운하는 고함 소리와 함께 사진기를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다. <꽃 같은 시절>에 등장하는 '깡시인'의 모델 송경동 시인은 격한 몸싸움에 휘말리기도 했다. 골목 입구에 서 있던 전경들은 철거민 측이 용역 업체 깡패들에게 맞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용역 업체 깡패들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 이르러 개입하는 방식으로 출현했다.

용역 업체를 구조적으로 비호했던 검찰, 경찰의 비정상적 행태야 여러 경로로 지적된 바 있으며, 그네들이 남발한 무수한 소환과 기소는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어째서 이처럼 냉혹하게'라는 물음이 오히려 어수룩하게 다가올 정도로 우리는 철저하게 일그러진 세계에 살고 있으며, <꽃 같은 시절>은 이러한 현실을 실감나게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선에서 넘어가고자 한다.

2. 어쩌다 내 자식이 저렇게 변했나, 울고만 싶은 노인들

<꽃 같은 시절>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작가가 이러한 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자, 등장하는 노인들의 사유 방식을 먼저 살펴보자. 그네들은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복주 엄마'를 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기양 돈으로 해결을 볼라고 해갖고 우리가 복주 어매를 위원장으로 올려분 거여."(178쪽)

기실 젊은 세대에 해당하는 자식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났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부모들이 적당한 보상금으로 타협하기를 원하는 모양새를 보인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판단이 뿌리 내리고 있는데다가, 돈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데 깊숙하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엄마, 고춧가루가 다 떨어졌네? 고춧가루 좀 보내줘. 사먹는 건 도대체 믿을 수가 없어. 왜 아무 말 안해, 엄마? 아유, 돈 보낼게에."
(…)
"아이, 자식한테 묵을 것 보냄서 어느 부모가 돈 욕심을 낸다냐. 그런 방정맞은 입초실랑은 놀리지를 말어라."
했더니,
"엄마, 좀더 솔직해지면 안돼? 돈이 좀 적다, 라고 한달지, 뭐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억장이 무너져서, 당최 아무 소리도 안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쩌다 내 자식이 저렇게 변했나, 울고만 싶었다. (232쪽)

노인들은 자식 세대가 내보이는 의식 세계로부터 멀찍하게 떨어져 있다. 예컨대 '복주 엄마'네 식구가 이사 오자 아랫집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살갑게 대하며 음식을 갖다 주곤 했다. '해정'이 이사를 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는 동네에 사람이 들어왔으니 인사 정도는 터야 사람 사는 동네라 헐 수 있지 않겠느냐, 허는 것"이 이네들의 상식이다(84쪽).

즉 나와 너의 경계가 선명하게 나뉘어졌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라는 단위를 전제하고 그 안에서 나와 너를 하나로 이어가는 공동체 의식이 그네들 사유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군청 앞에서 밥을 나누어 먹는 장면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그네들과 닮아가며 비로소 하나로 자리 잡아간 '복주 엄마', 즉 '영희'의 진술이다.

"첨엔 그랬어요.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만날 악만 쓰고. 점심을 날마다 사먹을 수도 없고 노인들이 도시락 챙기기도 그래서 군민의 쉼터에서 해먹었는데 무슨 피크닉하는 줄 알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맛있겠다며 밥 좀 달라고 오죠. 그러면 특히 할머니들이 어서 오시라고 하고 밥을 퍼주죠. 그런데 노인들이 왜 군청 앞에서 밥을 해먹고 있는지 묻지도 않고 밥만 먹고 가버려요. 나는 첨엔 그것도 화가 났어요. 근데, 이젠 제가 그래요.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오라고 하죠. 그래서 그 사람이 와서 맛있다고, 잘 먹고 간다고 하면 그렇게 고맙고 좋을 수가 없어요. 내가 뭐라고 해도 할머니들이 그냥 웃기만 하는 것이 첨엔 답답했죠. 근데 자꾸 반복되다보니까, 제가 그분들을 닮아가요. 근데, 그분들처럼 하니까 맘이 좋더라고요. 그냥 좋아요." (183~4쪽)

지금은 서로 대치해서 팽팽하게 맞선 관계일지라도, 좁은 지역 안에서의 문제인 까닭에, 그 관계는 만남의 다른 조합 속에서 일순 허물어질 수도 있다. 가령 시위대를 감시하는 '강 형사'이지만, 그 어머니가 젊어 어려웠던 시절 '공님'에게 크게 신세진 바 있고, '공님'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으니 어쩌면 어색한 장면에 직면함직도 하다. 그 어색한 순간에 맞닥뜨려 '공님'이 '강 형사'를 마음속으로 끌어안는 방식에서도 공동체 의식은 유효하게 작동한다.

강 형사가 부끄러워하며 밭가 나무 뒤로 돌아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담배는 몸에 해롭다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고,
"집이 오마니한테도 담배 한나 주소."
하고 말았다. 나무 뒤에서 담배를 피우며 먼 하늘을 쳐다보고 섰는 것이 영락없이 서울 왕십리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아들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도 저러고 건물 귀퉁이 같은 데 돌아서서 담배를 피우겠거니 싶어서 마음이 짠해졌다. (229쪽)

맞은편에 대치하여 맞서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짠한 마음'을 품어 안는 노인네들의 인식 구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이는 <꽃 같은 시절>의 문학적 의미를 따져 묻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작가와 변별되는 공선옥의 특징이 여기서 돋을새김 되며, 우리가 잊고 있는 전통의 한 가지 맥락을 다시 확인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3. <꽃 같은 시절>이 근대 이후의 세계로 미끄러져 나갈 가능성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생겨 먹었을까.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답변이 가능할 텐데, 근대에 돌입해서는 "모든 것의 전제로서 개인을 설정해 놓고, 사회를 개인의 의사에 따라 구성하거나 해체할 수 있는 집합체와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즉 각각의 개별자(個別子, individual)들이 모여서 사회 계약설에 근거하여 만들어 나간 합체(合體, assemblage)를 사회라고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개별자의 욕망이 해방되고 충족되는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갈 수밖에 없다. "다른 개별자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라면 한 개별자의 실현을 위하여 "모든 생각과 행동이 허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개별자―합체 세계관')

하지만 우리네 전통 사상에서는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인식해 왔다. 예컨대 성리학에서는 우선 통체(統體, whole)로서 태극(太極) 개념을 설정하면서부터 논의가 시작된다. "태극은 천지만물이 생성 전개되는 원리인 동시에 현상으로 드러난 천지만물의 총체이다." 그리고 "개체는 전체인 태극에서 성분(成分)을 본분(本分)으로 부여받아 직분(職分)으로 실천하는 분적(分的) 존재이다."

따라서 이때의 개체는 통체의 분신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부분자(部分子, positioner)라고 부를 수 있겠다. 사회에 관한 인식은 이러한 철학적 사유 위에서 펼쳐졌다. "사회는 통체로서 전제되지만 개체가 통체의 분신이기 때문에 통체와 개체는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개체가 남녀노소나 존비귀천 등에 따라 각각으로 구분되는 것은 통체에게 부여받은 분수(分數)가 다르기 때문이다." ('통체―부분자 세계관')

두 개의 세계관을 비교하여 어느 하나가 우위에 놓인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나름의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단점을 꼬집어 말하자면, '개별자―합체 세계관'이 먼저 발생한 서구는 "다른 문화권을 침략하고 정복하여 개별자적 욕망 충족에" 몰두해 왔다. 그들의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는 관점을 열등한 타자로 규정하는 한편, 인간 바깥의 모든 자연에 대해서는 개발의 대상으로 설정해 버렸던 것이다.

한편, '통체―부분자 세계관'이 형성된 동아시아에서는 서구의 자유, 평등, 해방 등의 개념이 생겨나기 어려웠다. "성리학에서 자유는 관계의 이탈을, 해방은 관계의 무력화를 뜻할 수도 있었다." 그런 까닭에 두 개의 세계관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 잡기가 요청되는데, '통체―부분자 세계관'의 '통체'를 천황이라든가 김일성, 박정희 따위로 대체해서는 파시즘으로 기울어지기 십상이고, 근대 너머로 나아가기 위하여 '개별자―합체 세계관'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사회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동원된 노예의 삶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다. 후자의 위험성은 일제의 신체제(新體制), 박정희의 병영 국가 등을 통하여 충분히 경험한 바 있다. 그러니 개체들의 총합을 넘어서는 세계에 대한 경외감을 회복하되, 자유·평등·해방 등 근대의 긍정적인 유산을 이월시키는 방향에서 '근대 이후'를 모색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할 성싶다.

공선옥의 <꽃 같은 시절>은 이러한 가능성을 어느 정도 내장하고 있다. 이론을 통해 사상을 뚜렷하게 가다듬은 것으로 파악되지는 않으나, 현재 농촌의 리얼리티를 충실하게 따라잡아 복원함으로써 그러한 지점 위에 올라선 것이다. 자, 보라. <꽃 같은 시절>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공동체 의식 위에 발을 딛고서 야만적이고 타락한 자본주의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자유·평등·해방으로 치닫고 있지 않은가.

'꽃 같은 시절'은 바로 이 자리에서 펼쳐지고 있다. "못살겄다고 악을 써도 암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고 암도 들어주는 디가 없으면 가서 악을 쓰는 것이 디모여. 디모를 다 해보고, 경찰서를 가보고 이 오맹순이가 말년에 꽃시절을 보내고 오네, 시방."(254~5쪽) 요즘 지독한 자기 연민, 욕망, 좌절 속에서 한국 작가들이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가운데, 공선옥은 건강한 민중(노인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나름의 탈출구를 제시하고 있다. <꽃 같은 시절>의 의미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4. '홀로어멈'에서 <꽃 같은 시절>에 이르는 길

사실 나는 <꽃 같은 시절>을 읽으면서 작가가 1999년 가을 <창작과비평>에 발표했던 '홀로어멈'을 떠올렸더랬다. '홀로어멈'은 세 아이를 이끌고 촌으로 내려온 남편 없는 여인의 좌충우돌기다. 이 여인은 고단한 현실에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만큼 결기가 있으며, 논리적으로 행동할 만큼 지식도 있다.

그렇지만 타지 사람으로서 마을 공동체 속으로 편입해 들어가기가 너무도 어렵기만 하다. 주인 없는 감나무인 줄만 알고 감을 한 부대 땄다가 문제가 되자 "대뜸 자루 하나에 얼마냐"라고 물어서 곤경에 처하는가 하면, 산사태로 교통이 두절되자 군청에 전화 걸었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우리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살았소"라고 질책 받는 식이다. 이 자의식 강한 여성이 어떻게 공동체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갈 수 있을까. '홀로어멈' 이후 공선옥의 행로가 내심 궁금했던 까닭은 이러한 물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꽃 같은 시절>에도 '홀로어멈'에 나타났던 여성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여전히 살아있고, 행정심판위원회의 문제점을 지적할 정도의 논리력 또한 갖춘 것으로 드러난다('영희'). 그런데 그러한 자의식, 논리는 공동체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 있다. 이는 작가의 시선이 민중(노인들)에 맞춰져서, 그들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지로까지 나아갔기에 가능해진 결과이리라.

기실 소설의 여성주의 요소는 할머니들의 지난한 삶 속에서 펼쳐지고 있으며, 논리도 공동체의 일상을 깨뜨리는 외부 세력을 향해 벼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위치를 가늠케 하는 '영희'나 '해정'은 할머니들을 닮아가는 양상으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홀로어멈'에서 <꽃 같은 시절>에 이르는 동안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넓고 깊게 구축하기 위해 개별자의 울타리를 차츰차츰 허물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성싶다. 독자인 나로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이 반갑고, 고마웠다.

문학으로써 세계를 조금이라도 움직이고자 하는 작가는 그 자신의 자리 역시 조금씩이나마 바꿔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꽃 같은 시절>을 들고 나온 공선옥은 그 길을 보여주고 있다.

3절의 직접 인용은 최봉영의 <본과 보기 문화 이론>(지식산업사 펴냄)의 제6장 '문화권의 중심 본보기와 세계관의 유형'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개별자―합체 세계관', '통체―부분자 세계관'에 관한 분류 또한 여기에 기대고 있음을 부기합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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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체르노빌 핵 발전소 폭발 사고 뒤 주춤했던 핵 발전소 건설 사업이 지구 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 변화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온실 기체 규제와 유가 상승 등의 영향으로 슬슬 되살아났다.

2004년 그 여파로 유럽에서 핵에너지에 대한 논란이 일기 시작했을 때 원자력 산업계에 구원투수로 등판한 사람이 가이아 이론으로 유명한 제임스 러브록이었다. 3년 전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가이아의 복수>(이한음 옮김, 세종서적 펴냄)에도 요약돼 있지만 러브록은 그때 "온난화가 워낙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어 대처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며 원자력만이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대안"이라고 설파했다. 업계 이해와 무관해 보이는 권위 있는 생태학자 러브록의 지지는 핵 발전소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기업 감시(corporatewatch.org)' 창립 회원인 반세계화 운동가 크리스 크림쇼는 <스핀 닥터, 민주주의를 전복하는 기업 권력의 언론 플레이>(노승영 옮김, 시대의창 펴냄)에서 "러브록의 견해는 의심할 여지없이 정직한 것이겠지만, 그가 미디어에 한껏 노출될 수 있었던 것은 틀림없이 원자력 산업계의 홍보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스핀 닥터>(크리스 크림쇼 지음, 노승영 옮김, 시대의창 펴냄). ⓒ시대의창
러브록은 원자력 산업계의 위장 단체인 '핵에너지 지지자들(Supporters of Nuclear Energy·SONE)'의 후원자였다. 이 단체 설립자는 신자유주의의 기수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의 언론비서관 출신 버나드 잉엄이었다. 잉엄은 대형 홍보 회사 힐 앤드 놀턴의 이사이자 핵연료공사의 유급 로비스트였으며, 풍력 발전에 반대하는 운동 단체 컨트리 가디언의 부회장으로도 활약할 만큼 환경 단체에 적대적인 인물이었다.

이처럼 업계 이해와 무관해 보이는 유력 '제3자' 지원 세력 또는 지지자와 위장 단체를 내세워 주요 현안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장기간에 걸쳐 바꿔놓음으로써 그 현안들을 업계의 수지맞는 주요 사업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 이것이 오늘날 업계 및 권력과 밀착한 거대 홍보 산업의 '이슈 관리' 또는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크림쇼는 얘기한다.

러브록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청정에너지 원자력' 광고에 등장한 꽤나 권위 있는 제3자들과 훈훈한 이름의 위장 단체들이 텔레비전이나 지하철 광고판 등에 종종 등장하는 것을 우리도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일본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핵 발전 사업은 한국에서도 앞길이 창창한 듯했다. 나중에야 그 실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계약 규모와 이행 방식, 실익 여부마저도 의심을 사게 됐지만, 수백억 달러에 달한다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의 핵 발전소 건설 계약에 대통령이 직접 뛰어들었다는 얘기가 엄청난 영웅담처럼 회자됐다.

더불어 이른바 '원자력 르네상스'에 대한 기대도 한껏 부풀었다. 한국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일본 원자력 산업계가 서둘러 베트남과 핵 발전소 건설 계약을 맺었다는 그럴싸한 무용담도 떠돌았고, 그 뒤엔 웨스팅하우스, 제너럴일렉트릭 등 미국 원자력 사업체들이 버티고 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러시아도 중국과 인도 등 신흥 경제 대국의 수천 억 달러 규모 핵 발전소 건설 사업 경쟁에 뛰어들었다는 따위의, 언론들이 유포한 통쾌 무비의 흥미진진한 세계 원자력 전쟁 삼국지는 이명박 정권의 핵 발전 드라이브 '성공'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 뒤에는 어떤 '이슈 관리'가 포진하고 있을지. 재생 가능 에너지 분야 광고에는 단 한 푼도 쓴 적 없다는 전력 업체들이 수백 억 원의 광고비를 '무공해 청정에너지 원자력' 이미지 창출에 쏟아 부은 것도 핵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고 정지를 부추겼다.

2004년 1월 9일 가장 권위 있다는 학술지 <사이언스>에 양식 연어에 들어 있는 폴리염화비페닐(PCB), 다이옥신, 살충제로 쓰이는 톡사펜, 디엘드린 등의 독성 화학 물질들 양이 자연산 연어보다 많고 미국 환경보호국 권장 기준치를 초과한다는 내용의 논문이 실렸다. '인체에 암을 유발할 수 있다'는 증거가 발견됐다는 그 논문은 일거에 세계 3위의 연어 양식·생산지인 스코틀랜드 연어 산업을 위기에 빠뜨렸다. 그러나 그 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곧 거짓말 지어내기와 물 타기가 시작됐다. 영국과 미국 연어 업계를 대표해 로비 그룹 스코티시 퀄리티 새먼(SQS)이 앞장을 섰다. 논문 발표 직후 "양식 연어 섭취가 암 발생 늘린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던 스코틀랜드 2대 유력지 중 하나인 <스코츠먼>은 바로 그 다음날 기사에선 "어류의 화학물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제목을 달았다.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파리에 입성하기까지 단기간에 식인귀에서 황제 폐하로 시시각각 그의 이미지를 변조해낸 당시 프랑스 유력지처럼, 그 신문 제목은 매일 극적으로 변해갔다.

"미국 식품 전문가, 연어는 안전하다고 밝혀", "환경 단체에서 연어 연구에 자금 지원", "연어를 위협하는 보고서에 결함과 편향 있다"로 바뀌어 가더니 마침내 '과학자들, 어류가 안전하지 않다는 주장은 사실과 반대"로 귀착됐다. 그리하여 5개월 만인 그해 6월 양식 연어는 맛 좋고 영양 풍부한 안전 식품으로 되돌아갔다.

<야만의 주식회사 G8을 말하다(Argumnents Against G8)>라는 책을 엮어내기도 한 '스핀워치(spinwatch.org) 공동 설립자 스트래스클라이드 대학 교수(사회학) 데이비드 밀러에 따르면, 이 반전을 위해 SQS는 먼저 데이터를 무시하고 안전 기준을 지나치게 낮춰 잡았다거나 미국 환경보호국 위험 모델을 잘못 적용했다는 따위의 근거도 없는 '방법론적 오류'를 문제 삼고 나섰다.

그리고 정부를 압박해 식품표준국 국장을 반격의 최전선에 내세웠다. 그 다음 논문을 작성한 올버니 뉴욕주립대학 보건환경연구소를 지원한 '퓨 자선 기금'을 겨냥했다. 그들은 퓨 자선 기금을 "공격적이고 반기업적인 미국 환경 단체"로 매도했고 <뉴욕타임스>와 <옵서버> 등이 그들의 보도 자료를 받아 이 비 정파 자선 단체를 "호주머니 두둑하고 공격적으로 정치적 주장을 펼치는 기관"으로 몰아갔다. SQS 곁에는 미국연어협회(SOTA),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양식업인식증진협회(SPAA) 등이 있었고 그들은 이런 본질을 빗겨간 헐뜯기로 논문의 순수성을 의심하게 하고 흠집을 내 사건을 축소하고 더는 이슈화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지난 4·27 재·보궐 선거에서도 우리는 그런 수법의 고전적인 사례들을 날것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불법 전화 부대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되고 중앙 공무원이 선거에 직접 개입한 비리들이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무시하거나 상대방의 사소한 잘못을 부풀려 맞불을 놓고 물 타기를 해서 초점을 흐리고 이슈화를 가로막는 데 앞장선 유력 언론들.

연어 문제가 진행되는 동안 전 세계 유명 언론들이 받아 적은 수많은 논평을 쏟아낸 과학자들 중 한 명인 찰스 산테르. 언론은 그를 퍼듀 대학 식품영양학과 겸임교수이자 PCB 검출 전문가로 소개했을 뿐, 그가 미국연어협회 유급 컨설턴트라는 사실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생태 환경 분야의 고전, 테오 콜본의 <도둑 맞은 미래>(권복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가 출간되자 이에 대적했던 미국곡물보호연합, 미국플라스틱협회가 배포한 소속 전문가 명부에도 이름이 올라 있었다. PCB가 암을 일으킨다는 게 근거 없다고 주장한 스티븐 세이프, 필립 구젤리언 등 많은 반환경·친기업 포럼 과학 전문가들도 거기에 들어 있다. 산테르와 함께 이들이 과학 자문역을 맡고 있는 미국과학보건협회에는 네슬레, 맥도날드, 코카콜라, 몬샌토, 엑손모빌, 화이자 같은 대기업들이 후원금을 내고 있다.

양식 연어가 안전하다는 글을 <스코츠먼>에 실은 고든 벨과 더글러스 타커는 스코틀랜드 스털링 대학 연구소 재직자들인데 스털링 대학 연구는 자연환경연구위원회(NERC)의 LINK양식업계획에서 연구비를 받았고 그 비용의 50%는 양식 업계가 직접 지원했다. 양식업인식증진협회가 동원한 풀뿌리 시민단체 '퍼스트 달러'의 설립자 린 브런트는 협회 설립자 겸 부회장이고 함께 동원된 홍보 회사 그린스피리트 스트래티지의 직원이며, 세계 최대의 초국적 어류 양식 회사인 팬피시 캐나다의 사내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다. 따라서 제3자로 활용한 퍼스트 달러도 풀뿌리를 가장한 업계 위장 단체다. 업계는 또 'www.pcbfarmedsalmon.com'와 같은 가짜 웹사이트를 여러 개 만들어 연어와 PCB에 관한 허구를 퍼뜨렸는데, 예컨대 이런 식이다.

"PCB와 유사 화합물은 환경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숨 쉬는 공기에도, 마시는 물에도, 먹는 음식에도 들어 있다. (…) 이것들을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별 것 아니다, 이런 정도로는 이제까지도 무사했고 앞으로도 무사할 것이니 안심해도 된다는 얘기다. 후쿠시마 사고 뒤 사고 핵 발전소 주변은 물론 한반도 전역에서도 검출된 요오드와 세슘 등 방사능 물질이 원래 자연 속에도 들어 있는 것이고 안전 기준치를 밑도는 것이어서 걱정할 것 없다고 일본 정부는 계속 거짓말을 했고, 한국 정부는 거기에다 편서풍까지 불 것이니 더욱 안심해도 된다는 거짓말을 보탰다.

어쨌든 권위 있는 학술지 논문이 장기적으로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건강한 삶을 위협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한 스코틀랜드 양식 연어는 공공 보건보다는 기업과 지역경제 요구를 우선한 업계와 홍보 업체와 정부 기관과 언론과 과학자들의 십자포화 지원 속에 제대로 사실 규명도 없이 5개월 만에 훌륭한 안전 식품으로 복귀했다. 선두 주자 SQS의 거짓 정보 퍼뜨리기 캠페인을 떠받쳐준 크롬 컨설팅에겐 국제 홍보 협회가 주는 국제 홍보상까지 주어졌다.

기업이나 권력이 기득권을 보호·확장하기 위해 주로 언론 매체를 동원해 자행하는 이런 정보 조작이 '스핀(spin)'이다.

책 제목의 <스핀 닥터>는 이 스핀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언론·홍보 비서관이나 담당자를 가리킨다. 책의 원제 "Thinker, Faker, Spinner, Spy-Corporate PR and the Assault on Democracy"에는 스핀 닥터라는 말이 없지만 이 책 기획자들은 스핀 닥터, 특히 기업의 스핀 닥터가 하는 역할에 주목했다.

그것은 기획자들이 얘기하는 이 책의 출간 목적-"우리는 권력 집단이 지각과 믿음, 궁극적으로는 행동을 조작하는 정보 조작에 뼛속 깊숙이 중독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 모두가 피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할 것이다"-을 달성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키워드다. 부연하자면, 기획자들은 부도덕하고 비참하고 지리멸렬한 지금 세상을 해체하고 제대로 된 세상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경제적 민주주의도 이룩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기업 권력을 격퇴하고 정부 기관과 공공 서비스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기업의 영향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류 언론들은 이런 일에 관심이 없다. 감시하고 고발해야 할 대상과 공생하는 그들에겐 그게 곧 자신들에 대한 감시와 고발이 될 테니까.

그 싸움은 "쉽진 않지만 가능하다"고 본다. 그들은 이 싸움의 핵심을 '사상 투쟁'이라 부른다. 기업 권력의 첨병이자 신자유주의 혁명을 가능케 한 홍보 산업, 즉 책 제목에 들어 있는 모사꾼, 사기꾼, 스핀 담당자, 스파이(기업 권력이 시민단체를 분쇄하기 위해 침투시킨 스파이)들이 권력과 자원을 독차지하려는 사회적 투쟁에 동원한 사고·사상을, 이번엔 거꾸로 그들과 신자유주의 혁명을 분쇄하기 위해 동원하는 것. 방법은 먼저 그들의 정체와 속임수, 날조, 정보 조작을 인식하고, 그 다음엔 폭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들의 비리를 폭로했으면 그것을 불법화하고 근절하기 위한 실천적 행동에 나서야 한다.

<스핀 닥터>는 바로 그걸 위해 만든 책이다. 데이비드 밀러와 같은 대학 동료 교수 윌리엄 디난 등이 이 싸움을 구체화한 첫 작업이 2004년에 만든 기업 홍보와 정보 조작 감시 비영리 웹사이트 스핀워치였다. 그해 11월 그들은 글래스고에서 '기업 정보 조작 학술 대회'를 열었고 그때 참여한 활동가들의 발제문을 묶은 것이 이 책이다. 스핀워치가 낸 첫 책이다.

'제3의 길'이라는 말의 유행과 더불어 한때 시대의 총아가 됐던 영국의 전 총리 토니 블레어의 영국 노동당이 그 이름과는 달리 노동자가 아니라 거대 기업을 위한 정당으로 어떻게 탈바꿈했는지, 그리고 신노동당의 기수 블레어가 왜 '조지 부시의 푸들'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는지를 추적해 들어가면 거기에도 역시 기업과 홍보, 거기에 동원되거나 그것을 이용한 정치권력과 전문가들이 도사리고 있다.

1980년대 대처의 보수당 우파 정부는 이른바 '영국병'을 노동당 등 좌파 세력 탓으로 돌리면서, 역시 영국 좌파 세력이 미국 자본의 이익과 미군 기지의 안전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고 본 미국 레이건 공화당 보수 정권과 공모해 노골적인 좌파 전복 작전을 감행한다. 신자유주의 전쟁과 '보수주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영국 정보기관 MI6와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깊숙이 개입해 제임스 골드스미스, 루퍼트 머독, 조지 갤럽, 대니얼 벨, 앤서니 기든스, 어빙 크리스톨, 필립 보빗, 이언 하그리브스, 찰스 윅 등의 유명한 신자유주의자들과 냉전주의자들, '계승자 세대를 위한 영미 프로젝트(BAP)' 등 범 대서양주의 이데올로그들을 엮어 대처주의를 옹호하는 영국·미국 우익 네트워크 곧 반좌파 연대를 결성한다. 그때 핵심 역할을 한 영국 싱크탱크가 데모스와 메저닌인데 최대 후원사 셸과 코카콜라, 영국핵연료공사, 모건 스탠리, 마이크로소프트, <파이낸셜 타임스>와 <이코노미스트>를 소유한 미디어 그룹 피어슨, 홍보회사 힐 앤 놀턴과 버슨 마스텔러, 해리티지 재단, 포드 재단, 록펠러 재단, 카네기 재단 등이 거기에 연결돼 있다.

독일에서 시작된 노동 시장 규제 완화, 대학 교육 유상화, 세금과 복지 프로그램 축소, 사회보장제도의 민영화 등 한국 보수 언론들이 뻔질나게 선전해온 신자유주의적 개혁 시도, 그것을 추동하고 있는 시민단체 '신사회적 시장경제', '시민대회' 등에도 경제사회연구소 따위의 싱크탱크나 컨설팅회사, 베텔스만 재단, 민간 은행과 보험 회사에 엄청난 이익을 안겨줄 연금제도 민영화를 지지하는 독일연금연구소 등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 등의 신문과 텔레비전이 거기에 가담한다.

브뤼셀에 있는 유럽위원회와 유럽이사회, 유럽의회 복도에는 수만 명의 기업 로비스트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유럽 정책 입안 및 집행자들과 라운드테이블에 함께 앉기도 하는 그들은 '로비크라시'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유럽의 정책 전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변호사 김용철이 폭로한, 굳이 대행사나 로비스트를 동원할 필요조차 없는 직접적 매수 행위가 판치는 대한민국과 달리 그래도 유럽에는 죽여 없애야 할 민주주의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기후 변화로 인한 재앙을 경고하는 '북극 기후 영향 평가단' 주장에 오류가 있다고 딴죽을 건, 진보적 신문으로 알려진 <가디언>의 과학 담당 편집장이자 기후 변화 전문 기자 팀 래드퍼드가 인용한 반대 보고서는 초당파 비정부단체를 표방하는 '국제 정책 네트워크' 작품이다. 하지만 래드퍼드는 중립적으로 보이는 그럴싸한 이름의 그 네트워크가 기후 변화를 믿지 않는 전문가들의 집결지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으며, 그 재정 후원자가 기후 변화를 억제하기 위한 국제적 움직임이 본격화할 경우 가장 큰 손해를 보게 될 가능성이 농후한 거대 석유 업체 엑손이라는 사실도 밝히지 않았다.

엑손은 화학 업계의 위장 단체 '아프리카 말라리아 퇴치 연합'도 후원하고 있다. 인도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대중들이 "우리도 신기술, 특히 생명공학 기술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며 유전자 변형 곡물과 살충제 사용을 부르짖게 만들고, 거기에 반대하는 생태·환경 운동가들을 오히려 "치명적인 생태 제국주의자들"이라 매도하게 만든 거대 홍보 대행사 버슨 마스텔러 뒤에는 몬샌토와 다우 등 초국적 생명공학 산업체들이 버티고 있다.

그들은 유전자 변형 산업을 지지하는 것이 영국 과학과 경제를 지지하고 살리는 것이라는 등식을 만들었다. 황우석의 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하는 것이 한국 과학과 경제를 지지하고 살리는 것이라고 했던 미친 애국 열풍 뒤에는 누가 버티고 있었을까. 그들을 대행한 스핀 닥터는 누구였나. 중남미 준 군사 패거리들을 매수해 현지 공장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죽이는 야만을 자행하면서도 착취자가 아니라 구세주로 군림하는 코카콜라, 엄청난 돈벌이에 방해가 되는 무기 거래 반대 시민단체를 감시하고 파괴하기 위해 스파이들을 침투시키는 군수 업체들, 이를 측면 지원하는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들, 타국 경제 개혁과 선거에 개입해 영미식 신자유주의 아류 체제들을 양산해온 CIA의 역할을 대체해가고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원조기금 NED'.

<스핀 닥터>의 추적은 구체적이고 다양하면서도 얄팍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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