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대한민국 2 - 박노자 교수가 말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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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2> 3분의 1을 읽었을 즈음 나는 더 이상 책을 읽어나갈 수 없었다. 그냥 조금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을 거의 해부하다시피 해놓은 이 책의 다음 부분을 읽으려면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슴 아픈 현실과 역사, 내면 깊숙이 맺힌 한과 억울함을 날카롭고 예리한 어조로 말하되 감정적이지 않게, 이성적으로 들려주어 어떤 반박도 무력화시키는 저자는 그 이전의 책보다 더 전투적으로 다가왔다.

한국인이 아니면서 이토록 한국에 애정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우리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저자는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 역사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생각하고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직업상의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착잡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마음이 일기도 했다.

책을 읽을 때면 책갈피를 마련해 기억해야 할 만한 부분에 끼워두곤 했다. 그런데 이 책은 거의 대부분의 내용을 기억해야 하는 관계로 책장 사이로 어지럽게 튀어나온 갈피들이 사나워 보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책을 좋아한다. 기실 하나도 허투루 들을 수 없는 글만이 수록된 책, 그냥 스쳐지나가서는 안될 이야기들만이 빼곡하게 들어 찬 책을.

성형수술, 욕망의 노예화

"나의 진로를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의 내 외모에 대한 평가를 의식해서 성형을 한다는 것은, 성형이 단순히 ‘신체에 대한 결정권의 행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체발부를 종교적으로 인식하는 것도 ‘자유’라 볼 수 없겠지만 남의 눈을 생각해서 얼굴을 뜯어고친다는 것은 더욱 심한 ‘예속’을 의미하지 않는가. … ‘예뻐지고 싶다’는 말을 사회과학 적으로 해석한다면 서구 중심의 세계 체제와 지역적인 대리인들이 ‘표준’으로 삼는 신체 모델에 내 몸을 무조건 맞추려는 ‘체제에 순치된 욕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우리 사회는 젊고 예쁜 것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회다. 면접시는 물론이고 일상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의식화되어 있다. 사람마다 미의 기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바비 인형처럼 되지 못해 안달이다. 저자의 말처럼 그것은 암묵적으로 사회가 강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면접시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혹은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으로 외모를 바꾸려는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 이상 잡지책에서 성형외과 광고가 사라지는 날이 빨리 오지는 않을 것 같다.

시간강사와 알바생의 비애

"‘지식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소장 학자들이 교육 자본의 ‘먹이’가 되는 상황은 많은 이들에게서 희망을 빼앗기도 하고 지식·문화 사회로의 전환을 방해하기도 한다. 설령 세계적인 천재적 두뇌와 재능이 있다 해도 강의가 없는 방학 때 아이들의 비싼 양육비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창조적이며 세계적인 연구 결과를 내기 쉽겠는가." - 본문 중에서

"그 누구라도 이름만 부르는 사회에서 ‘타이틀’ 위주의 사회로 옮겨와 ‘교수님’으로 지칭될 때 심기가 불편해진다"는 저자는 우리나라의 박사 인구가 거의 10만 명에 달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보따리 장사’로 비유되는 시간 강사들의 처지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러 군데 보따리를 풀지 않아도 될 만큼 급여는 물론이고 연구비를 개인 자격으로 받을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이 생긴다면 ‘시간강사 시절을 학자적 훈련의 시기’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스민 저자의 이야기가 귓전을 맴돈다.

‘엿장수 마음대로 해고’가 불가능해야 교수가 강사를 머슴으로 부리는 추태가 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양심 있는 교수들의 각성과 강사에 대한 처우 개선은 언제쯤 관철될 수 있을 것인가. 대학원생과 강사의 착취는 이제 먼 나라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생애 처음 제 손으로 돈을 벌어보겠다고 신입생이 되어 아르바이트 시장에 나간 우리 젊은이들의 경우도 위의 경우와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시간당 겨우 2천원을 받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앞에 설 때면 왠지 얼굴이 붉어진다는 저자는 우리 사회에 겹겹이 쌓인 노동 착취의 현장을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상위자는 하위자의 인격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수직 관계 위주 사회의 인간적 존엄성 무시의 관행, 최저임금 이하의 월급으로 무력한 '알바'들을 등쳐먹는 업체가 흑자만 내면 '효율적 경영'이라는 신자유주의의 일그러진 '경제상식'" - 본문 중에서

또한 이 책은 과당 경쟁에 허덕이는 상업과 외국 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경박한 인종주의를 비롯하여 반전과 국가보안법에 대한 이야기, 병역 거부자들을 위한 대체 복무제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조명하고 있었다.

현재와 과거를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한국과 세계 곳곳을 비교해 우리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명확하게 짚어주는 이 책은 쓸쓸하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할 우리 사회의 단면을 가감없이 드러내어주고 미래를 설계할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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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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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는 번역의 역사부터 출판계의 동향, 대학과 책 소비에 대한 이야기까지 번역과 책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나는 다만 번역의 세계가 궁금했을 뿐인데 덤으로 얻은 것이 훨씬 더 많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수확을 올린 농부의 마음이 아마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 돈을 내고 책을 사서 봐야한다'는 것이었다. 책은 화장품 같은 것과는 달리 소비되어 없어지는 게 아니니 빌려볼 수 있지만, 언제 어느 때 다시 그 책이 필요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늘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두어야 한다.

또한 문화후진국의 오명을 벗기 위해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이라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었다.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제작비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 저자는 물론이고 출판사는 얼마나 상처를 입을 것인지 생각만 해도 안쓰러운 일이다. 인문 출판의 경우에는 '돈을 벌자는 게 아니라 돈을 쓰는 행위'라 할 만큼 힘들다고 한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우리 언어 체계 속에 녹여내지 못하고 일본들이 노력해 한자어로 번역한 서양 문화를 손쉽게 빌려 쓰는 길을 걸었다'며 저자는 우리 번역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일본은 일찍이 번역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서양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 번역에 매진한 것에 비해 우리가 번역에 기울인 노력은 너무 미미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의 번역 문화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번역을 맡은 일부 교수들은 대학원생에게 번역을 하청 맡기고 대학원생들은 돌아가며 번역을 하고 검토도 마치지 않은 채 출판 편집자에게 넘겨지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편집자는 매끄럽지 않은 번역을 밤을 새워가며 매끄럽게 만들지만 1차적으로 제대로 되지 않은 번역을 아무리 매끄럽게 한들 독자들에게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될 것인가. 교수 연구 실적에 번역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교수들이 번역을 꺼리는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지식인으로서 마땅히 지양되어야 할 일이다.

번역자의 조건

아무나 번역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있어야 한다. 참다운 번역은 원작의 가치에 대한 이해에서 생겨난 존경과 감동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못한 번역은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의미 없는 노동일뿐이다. - 본문 중에서

해당 언어에 능숙하다고 해서 번역가의 자질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나 보다. 언어가 녹아있는 사회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없이는 오역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오역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면 해당 분야에 전문 지식을 쌓는 일은 불가피해 보인다. 또한 모국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윤기나 안정효 같은 소설가들이 번역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그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번역이란 결국 '문자의 옮김'이 아니라 '문화'를 번역하는 것이기에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척박한 번역 시장에서 살아남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일 년에 몇 권을 번역해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인가. 일 년에 많은 번역서를 만들어낸다고 하면 한 권에 기울어지는 노력에 의문이 갈 것이고 한권에만 매달리기에 그 대가는 너무 미미하고. 가장 좋은 것은 번역료가 높이 책정되어 책 한 권에 혼신의 힘을 기울일 수 있는 풍토가 마련되는 것이 아닐까.

책에 관한 한 과소비는 무죄

책을 통해 얻는 기쁨이 너무 달콤한 것이어서 노령이 겁나기는커녕 정년이 기다려진다고 말하는 일본 조치대학 교수 와타나베 쇼이치는 그의 저서 <지적 생활의 방법>에서 지적 생활을 위해서는 자기 돈을 주고 책을 조금씩 사들여 자기 주위에 책을 쌓아가는 것이 지적 생활의 첫걸음이라고 주장한다.

'책에 관한 한 과소비는 무죄'라고 말하는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백 권이 넘는 책을 구입했다고 한다. 저자는 무리를 해서라도 책은 사고 보는 사람에 속하고 책값만은 아끼지 않으려 한 까닭에 오 천권이 넘는 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집을 넓혀 이사할 수밖에 없는 남모를 이유가 계속 쌓여가는 책에 있다는 저자의 말은 책을 빌려보는 나 같은 사람에게 큰 울림을 안겨 주기도 했다.

대학이 자기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교육하고 있는 데 비해 출판사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출판사 사장은 대학 총장에 필적하는 중요성을 지녔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출판사가 떠맡은 사회적 책임이 대학 못지않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출판사의 역할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번역가를 꿈꾸는 젊은 인문학도들에게 부치는 글도 인상적이었는데, 후배들에게 꿈을 잃지 말라는 선배의 조언으로 따뜻함이 전해졌다. '번역 사업은 막연히 시장의 논리에만 맡겨두어서는 결단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저자의 말처럼 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했다.

<번역은 반역인가>를 통해 우리는 번역가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번역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이미 조금은 알고 있던 이야기에 살을 더할 수도 있을 것이고 처음 듣는 이야기는 한 장 한 장을 되넘겨 보게 만들 것이다. 이런 책들이 모여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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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내 운명 - 번역이 좋아 번역가로 살아가는 6人6色
이종인 외 지음 / 즐거운상상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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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서적을 읽다 보면 저자뿐 아니라 자연스레 번역을 맡은 이도 함께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 중에는 같은 이름이 자주 눈에 띠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들이 궁금했다. 책에 소개된 짧은 이력으로는 그들을 안다고 말할 수 없을 테니, 저자만큼이나 번역가의 역할은 중요하다. <번역은 내 운명>이란 책을 읽고 나니 번역을 '제 2의 창조'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다.

나는 한때는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다고 힐난했던 독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번역가들이 책 한 권을 번역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동안 얼마나 어린 생각에 머물렀는가 하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진다. 이 책의 공동저자인 강주헌, 권남희, 김춘미, 송병선, 이종인, 최정수 등 6인의 번역가가 들려주는 번역에 대한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정겹다.

번역은 쉬워야 한다! 내용은 어렵더라도 읽어 내려갈 수는 있어야 한다. … 전문 용어는 최대한 살리더라도 누구나 읽어 낼 수 있게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요약하면 어려운 책도 쉽게 번역하자는 것이다. 전공자들이야 원서를 읽으면 될 것이 아닌가. 책을 번역하는 목적, 더구나 출판의 목적은 '대중화'에 있으니까 말이다. - 본문 중에서

번역가 강주헌씨가 말하고 있는 '대중화'는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원서를 읽어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 사전을 옆에 두고 의미를 찾고, 또 생각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한 페이지 번역하다 하루가 다 가버릴 것 같다. 기실 번역가들이 없는 세상이란 상상하기가 힘들다.

<번역은 내 운명>에서 저자들은 자신이 번역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놓고 있다. 또 생각 외로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과 좋은 책임에도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한 책에 대한 안타까움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아까운 책'이라고 말할 만큼 좋은 책은 쉽게 만나지지 않는 법인데 이쯤에선 횡재한 기분도 든다.

송병선과 김춘미를 제외하면 다른 저자들은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한결같은 번역의 애로 사항은 번역료에 있었다. 낮게 책정된 원고료도 문제지만, 원고는 넘겼는데 제때 입금되지 않는 번역료에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말이었다.

출판 경기가 좋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 이해하지만 번역으로 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그들에게 출판사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가정 경제의 어려움으로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또는 일부 출판사에서는 악의적인 마음으로 번역료를 제때 지불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그것은 프리랜서 번역가에게는 큰 어려움일 것 같다. 다른 직업이 있어 번역료가 언제 입금되어도 상관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참 애 타는 경우가 아닌가.

'번역'의 최대 딜레마와 고충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의 머리는 완벽하지가 않아 하나의 언어를 자주 쓰고 그 언어체계에 길이 들어버리면 다른 언어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다. 외국어에 치중하면 우리말이 울고, 우리말에 중점을 두면 외국어가 운다. 그러나 어쨌건 번역가는 외국어로 된 글을 제대로 읽어내어 우리말로 흠 없이 옮겨야 한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결과물을 우리나라 독자들이 읽은 후 원저자가 의도한 대로 이해해야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진다. - 본문 중에서

이러한 사정으로 최정수씨는 "외국어와 우리말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심정으로 일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는 "해당언어와 우리말에 대한 지식과 끊임없는 공부는 물론 치밀한 자료 조사 능력과 꼼꼼함, 성실성은 기본으로 요구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자신을 위해, 좋은 문장을 위해 어떤 식으로 재투자를 하느냐'는 물음에 "신문 꼼꼼히 읽기나 좋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대사가 아름다운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최정수씨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또 권남희씨는 "더러 독서를 위한 독서를 하고 싶으나 번역가라는 직업을 가진 이후로 모든 문장을 해체하며 읽는 버릇이 생겼다"며 "일어나면 해야 할 번역이 책상 앞에 가득 쌓여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번역은 내 운명>은 이처럼 번역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처음에는 번역의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호기심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책을 통해 번역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면 책은 그 임무를 무사히 마친 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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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 2006-05-20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저도 이 책 읽었는데, 리뷰가 부드럽고도 씹는 맛이 있네요.

연잎차 2006-05-20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심님 감사합니다^^ 우리나라의 번역 환경이 좋아지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행복한 봄날 되세요!
 
녹천에는 똥이 많다
이창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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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일이 벌어진다. 머릿속에서만 일어나기도 하고 실제로 벌어지기도 하는 일들. 책장에 꽂혀있는 <녹천에는 똥이 많다>란 책을 무심코 다시 펼쳐 들게 되었다. 몇 해 전과 비교해보니 그때보다 더 깊은 울림과 감동으로 그 여운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이 책에는 5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는데 우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모두 다 걸출한 작품들이었다.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일들을 간접 경험하게 된다. 80년대를 관통하는 이 소설은 그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온 사람들은 물론이고 살아보지 않은 세대들에게도 가슴 깊이 무언가를 안겨 줄 것이다. 곧 아픈 역사의 커다란 소용돌이에서 어찌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삶의 편린들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들려줄 것이다.

3개의 단편 : <진짜 사나이> <용천뱅이> <운명에 관하여>

첫 번째 단편 '진짜 사나이'에는 시위를 하다 알게 된 장병만씨에 대한 회상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저자는 일용 노무자로 일하는 장병만 씨를 통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헤어날 수 없는 가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시위하는 무리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장병만씨는 사회정의를 위해서 큰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에 생계도 돌보지 않고 그 일에 열심이다 보니 가정은 파경을 맞게 되었다.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장병만씨를 보게 되는 것도 온몸을 쇠사슬로 묶은 채 시위를 벌이고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는 농성장을 떠날 줄 몰랐던 것이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처절한 몸부림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통해 소설을 쓰는 화자는 어떤 상념에 젖게 되었을까.

두 번째 단편 '용천뱅이'는 경계인에 대한 이야기다. 화자의 아버지는 북에서 내려왔고 평생 고향을 잊지 못한다. 남쪽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은 언제나 허무하다. 이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북으로도 갈 수없는 가엾은 아버지는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라도 어느 한 쪽에 귀속되고 싶은 마음에 간첩을 자처하게 된다.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은 아버지의 눈물로 그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민족의 분단은 반세기가 지나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에 아로 새겨져 그 후손들에게도 그 아픔을 생생하게 전해줄 수밖에 없다.

세 번째 단편 '운명에 관하여'는 고아 소년의 성장기다. 소년은 세상의 슬픔을 너무 이른 나이에 다 알아버린다. 소년은 일어서려고 노력하지만 그 때마다 세상이 주는 가혹하리만큼의 쓴맛을 경험하게 될 뿐이다. 어느 날 고아원 시절 친구의 소개로 부잣집 영감의 잃어버린 아들 행세를 위해 그를 만나러 갔다가 자신이 진짜 그의 아들임을 알게 되는 운명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운이 없게도 그 충격으로 영감은 그날 밤 세상을 등지게 되고 그의 많은 재산은 그와는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에겐 생전에 얼굴도 알지 못했던 아버지를 찾고 어머니가 전쟁 중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평생을 살아갈 재산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엇갈린 운명에 관한 이야기는 좀 작위적이라는 생각도 들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작품이었다.

2개의 중편 : <녹천에는 똥이 많다> <하늘등>

네 번째 중편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배 다른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다. 선생님인 아버지는 배운 게 없는 어머니와 유교적 관습에 의해 결혼하게 되었다. 그 결혼이 행복할 리 없었고, 아버지는 동료 여교사와 사랑에 빠져 아들을 낳게 되고 그런 연유로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 후 동료 여교사는 아들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떠나고 가엾은 어머니는 두 아들을 키우게 된다.

어머니는 능력 없는 남편 대신 생계를 위해서 노점상으로 근근이 살림을 꾸려간다. 둘째 아들은 바른 말만 하는 아이라 어머니를 난감하게 만들 때가 많았고, 큰 아들은 동생이 못마땅할 때가 많았다. 손님들도 언제나 동생은 어미가 버리고 간 불쌍한 아이라며 그 아이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나이가 들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주인공은 그 후 십 년이 넘도록 동생의 소식을 모르고 살아가다가 갑작스레 동생이 찾아오면서 사건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형은 학교에서 급사로 일하면서 야간대학에 다녀 급기야 기술 교사가 된 억척같은 사람이다. 동생은 무언가 사회를 바꿔보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아내는 그런 둘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며 주인공을 자괴감에 빠지게 만든다. '똥이 많은 녹천역'은 아마도 타락한 세상에 대한 역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서 저자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다섯 번째 중편 '하늘등'의 주인공 신혜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탄광촌 다방에 취업했다가 경찰에 신고 되어 고문을 받고 풀려난다. 신혜는 이른바 운동권 대학생이긴 했지만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어머니의 꿈과 맞바꿀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일인지 끊임없이 회의하는 학생으로 그려진다. 단지 다음 학기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형사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고 심한 고문을 가한다. 슬픈 탄광촌의 단면, 운동권 대학생, 가난, 혼자 자식을 키우는 힘겨운 어머니의 이야기가 '하늘등' 전반에 걸쳐 흐르고 있다.

다섯 편의 중단편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가령 소설에 등장하는 멜라니 샤프카의 'The Saddest Thing'은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매우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슬픈 노래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아픔을 지니고 있다.

독자들은 소설을 통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 환기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회적 약자라서 당할 수밖에 없는 설움, 기를 쓰고 노력해 안정된 삶의 테두리 안에 들어섰으나 고뇌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 현실과 개인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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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의 제야
고종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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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기자가 되고 싶었던 걸까. 지금쯤 어딘가에서 기자를 하고 있을지도, 언론고시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는 그 친구가 왜 고종석을 좋아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펼치자 이내 소설에 빠져 들었고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알 수 없는 노래가 절로 흘러나와 주위 사람들에게 '기분이 좋은가 보군' 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엘리아의 제야>에는 6편의 중단편들이 묶여있다. 대개는 표제작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같은데, 이번의 경우 맨 마지막에 실린 소설 <카렌>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워낙 로맨스를 좋아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봄이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비루한 외로움 같은 것이 촉매로 작용하여 더 눈부시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제목이 왜 '카렌'일까. 궁금했는데 소설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의미가 밝혀져 있었다. 여주인공 '화련'의 이름을 일본 한자음으로 읽으면 '카렌'이란다. 소설은 아주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초등학교 시절에 대구에서 전학 온 여학생에게 1등자리를 빼앗긴 소년이 있었다. 그러나 질투 보다는 그냥 그 여학생이 좋더라는 것이다. 전학 온 여학생은 몇 해가 흘러 다시 전학을 가버린다. 그리고는 존재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다 세월이 훌쩍 흘러 대학 졸업 6개월을 남겨두고 운명처럼 재회하게 된다.

마지막 학기 분석철학과 일본문학사 두 과목을 신청한 진우는 일본문학사 수업에서 화련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화련이 먼저 진우를 알아보고서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들은 그 옛날 특이하게도 연애계약서라는 것을 만들어서 누군가 마음이 변했다고 통고하면 깨끗하게 헤어질 것을 다짐하는 글을 써서 각자 보관했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계약을 흉내낸 것이었다.

그들은 매일 만나서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보통의 연인들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화련이 계약을 해지하자고 일방적으로 통고해온다. 진우는 느닷없는 이야기에 당황하지만 약속대로 계약서를 찢어버렸다. 애초에 이런 일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계약서까지 써 놓고는 배신감이 몰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상대가 누구인가 하고. 헤어지더라도 상대는 알아야했다.

뜻밖에도 상대는 자신이었다. 다시 만난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 결혼을 하자는 것이었다. 사귄 지 3개월이 되었지만 진우는 한 번도 화련의 손을 잡는다거나 입맞춤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랑한다면 마땅히 일어났을 법한 일들이 없었던 것이다. 진우는 순수했다. 아니 순진해서 그런 것들은 머리 속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진우의 마음을 알 길 없는 화련은 관계를 좀 더 진전시키거나 정리하고 싶었다. 언제까지 마음을 알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었기에. 진우와 만나는 시간들이 너무 행복했지만 언제나 불안하고 두려웠다. 일생을 결정할 1분이 흐른 후 진우는 결혼에 승낙하게 되고 그들은 결혼하게 된다.

애초에 결혼식 날짜를 잡은 것보다 훨씬 일찍 결혼하게 되었다. 이유는 속도 위반이었다. 아이를 낳고 결혼식을 올리고 싶지 않아서 더욱 빨리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속전속결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화련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진우를 좋아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의 존재가 궁금했다. 마음만 먹으면 진우를 찾을 수도 있었을텐데 진우의 마음도 모른 채 먼저 그를 찾아 나설 용기는 나지 않았다.

화련은 집안 형편으로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상업학교에 진학해 일찍 사회에 나가야했고 그런 이유로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야간에는 영어와 일본어를 배우는 등 되는 대로 삶을 살지 않았다. 타성처럼 일하지 않았다. 돈을 조금 모은 후에는 대학입시를 위해 새벽반과 야간반 수업을 들으며 대학에 들어갔다. 기실 인생은 개척하는 자의 몫인가 보다. 열심히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사랑도 찾아왔다. 그것도 화련이 그토록 잊지 못했던 진우라는 사랑이. 그들의 만남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결혼 후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는 진우의 모습은 꽃보다 아름다웠다. 첫사랑과 결혼해서 딸을 넷이나 낳고 과거를 회상하는 진우의 모습이 그저 좋았다. 남편은 프리랜서 기자로 아내는 프리랜서 번역가로 직장이라는 끈에 묶이고 싶지 않은 성격까지 꼭 빼닮은 부부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살 것 같다.

저자의 문체는 우유처럼 부드럽고, 간결했다. 그래서 속도감 있게 읽히고 거부감 없이 독자들의 가슴 속에 스며들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누이가 많이 등장한다. 끈끈한 가족애를 생각하게도 되고, 교수 사회의 일면도 보게 되었다. 가족이라는 틀에 매인 우리의 모습과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의 모습도 함께 조명하고 있다.

소설가의 역할이란 게 바로 그런 게 아니겠는가. 정신적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역할. 해설을 맡은 김병익의 말처럼 '인문주의자에서 소설가로서의 운명을 이루어낸' 저자를 새로운 소설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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