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의 제야
고종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고종석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기자가 되고 싶었던 걸까. 지금쯤 어딘가에서 기자를 하고 있을지도, 언론고시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는 그 친구가 왜 고종석을 좋아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펼치자 이내 소설에 빠져 들었고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알 수 없는 노래가 절로 흘러나와 주위 사람들에게 '기분이 좋은가 보군' 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엘리아의 제야>에는 6편의 중단편들이 묶여있다. 대개는 표제작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같은데, 이번의 경우 맨 마지막에 실린 소설 <카렌>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워낙 로맨스를 좋아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봄이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비루한 외로움 같은 것이 촉매로 작용하여 더 눈부시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제목이 왜 '카렌'일까. 궁금했는데 소설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의미가 밝혀져 있었다. 여주인공 '화련'의 이름을 일본 한자음으로 읽으면 '카렌'이란다. 소설은 아주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초등학교 시절에 대구에서 전학 온 여학생에게 1등자리를 빼앗긴 소년이 있었다. 그러나 질투 보다는 그냥 그 여학생이 좋더라는 것이다. 전학 온 여학생은 몇 해가 흘러 다시 전학을 가버린다. 그리고는 존재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다 세월이 훌쩍 흘러 대학 졸업 6개월을 남겨두고 운명처럼 재회하게 된다.

마지막 학기 분석철학과 일본문학사 두 과목을 신청한 진우는 일본문학사 수업에서 화련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화련이 먼저 진우를 알아보고서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들은 그 옛날 특이하게도 연애계약서라는 것을 만들어서 누군가 마음이 변했다고 통고하면 깨끗하게 헤어질 것을 다짐하는 글을 써서 각자 보관했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계약을 흉내낸 것이었다.

그들은 매일 만나서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보통의 연인들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화련이 계약을 해지하자고 일방적으로 통고해온다. 진우는 느닷없는 이야기에 당황하지만 약속대로 계약서를 찢어버렸다. 애초에 이런 일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계약서까지 써 놓고는 배신감이 몰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상대가 누구인가 하고. 헤어지더라도 상대는 알아야했다.

뜻밖에도 상대는 자신이었다. 다시 만난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 결혼을 하자는 것이었다. 사귄 지 3개월이 되었지만 진우는 한 번도 화련의 손을 잡는다거나 입맞춤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랑한다면 마땅히 일어났을 법한 일들이 없었던 것이다. 진우는 순수했다. 아니 순진해서 그런 것들은 머리 속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진우의 마음을 알 길 없는 화련은 관계를 좀 더 진전시키거나 정리하고 싶었다. 언제까지 마음을 알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었기에. 진우와 만나는 시간들이 너무 행복했지만 언제나 불안하고 두려웠다. 일생을 결정할 1분이 흐른 후 진우는 결혼에 승낙하게 되고 그들은 결혼하게 된다.

애초에 결혼식 날짜를 잡은 것보다 훨씬 일찍 결혼하게 되었다. 이유는 속도 위반이었다. 아이를 낳고 결혼식을 올리고 싶지 않아서 더욱 빨리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속전속결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화련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진우를 좋아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의 존재가 궁금했다. 마음만 먹으면 진우를 찾을 수도 있었을텐데 진우의 마음도 모른 채 먼저 그를 찾아 나설 용기는 나지 않았다.

화련은 집안 형편으로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상업학교에 진학해 일찍 사회에 나가야했고 그런 이유로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야간에는 영어와 일본어를 배우는 등 되는 대로 삶을 살지 않았다. 타성처럼 일하지 않았다. 돈을 조금 모은 후에는 대학입시를 위해 새벽반과 야간반 수업을 들으며 대학에 들어갔다. 기실 인생은 개척하는 자의 몫인가 보다. 열심히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사랑도 찾아왔다. 그것도 화련이 그토록 잊지 못했던 진우라는 사랑이. 그들의 만남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결혼 후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는 진우의 모습은 꽃보다 아름다웠다. 첫사랑과 결혼해서 딸을 넷이나 낳고 과거를 회상하는 진우의 모습이 그저 좋았다. 남편은 프리랜서 기자로 아내는 프리랜서 번역가로 직장이라는 끈에 묶이고 싶지 않은 성격까지 꼭 빼닮은 부부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살 것 같다.

저자의 문체는 우유처럼 부드럽고, 간결했다. 그래서 속도감 있게 읽히고 거부감 없이 독자들의 가슴 속에 스며들 것이다. 그의 소설에는 누이가 많이 등장한다. 끈끈한 가족애를 생각하게도 되고, 교수 사회의 일면도 보게 되었다. 가족이라는 틀에 매인 우리의 모습과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의 모습도 함께 조명하고 있다.

소설가의 역할이란 게 바로 그런 게 아니겠는가. 정신적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역할. 해설을 맡은 김병익의 말처럼 '인문주의자에서 소설가로서의 운명을 이루어낸' 저자를 새로운 소설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