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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는 순간 - 정명희 산문집
정명희 지음 / 서쪽나무 / 2018년 5월
평점 :
매 순간 행복을 느끼며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눈 깜짝 할 사이 10년이라는 시간이,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 찰나의 순간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 소중한 시간을 헛되지 않게 보내려면 우리는 늘 성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아름다운 음악과 감동적인 영화 한 편도 인생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최고는 독서가 아닐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난 10년간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
결혼 이후의 삶은 이전이랑 무척 다르다. 누군가 알려주었더라면 그리 쉽게 아이를 낳지 못했을 것이다. 결혼 초기에는 처음 해보는 육아로 눈코 뜰 새가 없었고, 이제 십년 차 쯤 되니 한숨 돌릴 만하다. 퇴근이 없는 가사노동도 이제는 눈감고도 밥을 하고, 국이든 반찬이든 스피디하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뒷 베란다에는 며칠 전 사놓은 한 접의 마늘이 껍질을 벗겨달라고 아우성이고, 거실에는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건조된 빨래들이 서랍 속으로 고이 모셔달라고 외쳐댄다. 남편과 아이들이 나간 후에도 전업주부의 일은 끝이 없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고 이제 슬슬 책읽기에 재미를 붙여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눈에 들어온 책이 있었다.
<당신이라는 순간>(정명희, 서쪽나무)은 저자가 <오마이뉴스>에 썼던 글들을 수정 보완해 책으로 나온 것이다. 이 책은 고정관념 비틀어보기, 책이 주는 행복 하나, 영화처럼, 일상의 소소함, 책이 주는 행복 둘 이렇게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눠져 있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은 '그때 정말 나한테 삐삐 안쳤나?'와 '사랑하는 사람아'와 '내 아버지의 로맨스'다.
'그때 정말 나한테 삐삐 안쳤나?'는 저자가 결혼에 골인하게 된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풀어간다. 25번째 맞선 본 남자와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나 생각하고 있는데 상대 쪽에서 도통 연락이 없자 잘못 온 삐삐번호를 상대방이 보낸 것으로 오해해서 편지 쓸 용기를 갖게 되고, 그 편지로 인해 한 번 더 만나서 결혼하게 되는 영화 같은 이야기.
그런데 알고 보니 절대 삐삐 안쳤다는 남편 분. 어찌 인연은 오해로 시작했을지언정 해피엔딩이면 되는 거다. 기사로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 배꼽이 빠지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책으로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선본 다음 날 정말 내한테 삐삐 안쳤나?"
"안 쳤다 안 카나?"
"정말이가?"
"그래."
"솔직히 말해봐라. 치다가 용기가 없어서 대충 번호 누르다 말았제?"
"환장을 하겠네. 정말 안 쳤다. 똑같은 말 다시 더 묻지 말라고 했을 끼인데."
"그라면 왜 내 편지 한 통 받고 얼씨구나 결혼하자 켓노?"
"안 그래도 억울해 죽겠구마는. 어리하이 해가지고 늙은 여우의 꾐에 빠져서… 그때 편지만 안 받았어도. 마아, 내 인생 돌리도∼돌려 달라고오!" - 본문 183쪽
'사랑하는 사람아'는 저자가 어린 시절 처음으로 극장에 간 경험을 풀어놓은 글인데, 그후 극장이라는 공간이 좋아졌다고 한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에 처음 접한 영화라니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시골학생이 도시로 나와 만난 신세계. 돌아가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하다. 그 영화가 사춘기 소녀들에게 적합한 영화는 아니었겠지만, 어린 조카 꼬맹이까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니 세대를 초월하는 슬픈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었나 보다.
합당한 돈을 지불하고 어두컴컴한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극장 안에는 의자들이 빽빽하니 놓여있었고 무지 넓었다. 넒은 것에 비해 사람은 별로 없었다. 관람하기 좋은 자리에 착석을 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니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극장이라는 공간에 있는 내 자신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본문 109쪽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사돈처녀와 나는 서로의 퉁퉁 부은 눈을 바라보며 수줍게 웃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겠거니 했던 꼬맹이의 눈도 퉁퉁 부어있었다. - 본문 111쪽
'내 아버지의 로맨스'는 어찌 보면 저자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이야기임에도 제 3자가 이야기하듯 덤덤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저자의 아버지는 객지로 돈 벌러 가서 9년 만에 돌아왔는데, 알고 보니 막 이룬 새살림을 뒤로한 채 조강지처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남편이 없는 동안 시부모 봉양에 4남매를 키우는 삶이 얼마나 팍팍하고 고달팠을지 엄마가 되어 보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루지 못해 회한이 된 아버지도 딱하고, 그런 남편을 버리지 않은 어머니의 삶도 한스러웠다.
그렇게 돌아온 아버지는 한동안 고향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은 저녁이 어둡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아 다시 가버렸나 싶어 엄마가 불안한 마음으로 신작로를 따라 찾으러 나서니 아버지는 마음은 진부에 가 있고 몸만 터덜터덜 돌아오고 있었다. - 본문 167쪽
아버지 살아생전 술잔을 손에 들고 당신이 직접 감동 없이 되풀이해서 충청도 출신 아낙을 언급할 때는 지겹기만 할 뿐 그 속에 어떤 '회한' 같은 것이 들어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쯤에 나름의 로맨스에 작별을 고하고 조강지처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 본문 168쪽
어떤 글은 객관적이고 관념적이고 지적이다. 그 모든 글이 다 좋지만 나는 감동을 주는 글이 좋다. 어떤 글을 읽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동시에 코끝이 시큰해지는 경험을 한 이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한 편의 글을 읽고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을 흘릴 수 있다면, 그것은 소중한 경험이다.
나는 그런 글이 좋다. 시사주간지에 실린 영화평을 보더라도 두 명의 에세이스트가 있는데 한 명은 그런 감동을 주기에 늘 챙겨보게 된다. 오늘은 또 어떤 글로 나에게 감동을 줄까하는 기대와 함께 말이다. <당신이라는 순간>도 나에게 그런 감동을 전해주었다. 웃다가 울다가 감정의 기복이 참 심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좋은 책을 읽고 그 경험을 나누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내가 봐서 좋은 글은 남이 봐도 좋을 가능성이 높다, 한번 검열을 거친 셈이라고 할까. 그런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 감히 말해 본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경험을 나누고 매 순간 행복을 느끼며 살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사는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소설가 김연수는 <청춘의 문장들>에서 '이 모든 순간은 곧 사라질 텐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했다. 기실 그렇다. 이 모든 순간은 곧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순간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