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천에는 똥이 많다
이창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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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일이 벌어진다. 머릿속에서만 일어나기도 하고 실제로 벌어지기도 하는 일들. 책장에 꽂혀있는 <녹천에는 똥이 많다>란 책을 무심코 다시 펼쳐 들게 되었다. 몇 해 전과 비교해보니 그때보다 더 깊은 울림과 감동으로 그 여운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이 책에는 5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는데 우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모두 다 걸출한 작품들이었다.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일들을 간접 경험하게 된다. 80년대를 관통하는 이 소설은 그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온 사람들은 물론이고 살아보지 않은 세대들에게도 가슴 깊이 무언가를 안겨 줄 것이다. 곧 아픈 역사의 커다란 소용돌이에서 어찌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의 삶의 편린들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들려줄 것이다.

3개의 단편 : <진짜 사나이> <용천뱅이> <운명에 관하여>

첫 번째 단편 '진짜 사나이'에는 시위를 하다 알게 된 장병만씨에 대한 회상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저자는 일용 노무자로 일하는 장병만 씨를 통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헤어날 수 없는 가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시위하는 무리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장병만씨는 사회정의를 위해서 큰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에 생계도 돌보지 않고 그 일에 열심이다 보니 가정은 파경을 맞게 되었다.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장병만씨를 보게 되는 것도 온몸을 쇠사슬로 묶은 채 시위를 벌이고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는 농성장을 떠날 줄 몰랐던 것이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처절한 몸부림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통해 소설을 쓰는 화자는 어떤 상념에 젖게 되었을까.

두 번째 단편 '용천뱅이'는 경계인에 대한 이야기다. 화자의 아버지는 북에서 내려왔고 평생 고향을 잊지 못한다. 남쪽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은 언제나 허무하다. 이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북으로도 갈 수없는 가엾은 아버지는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라도 어느 한 쪽에 귀속되고 싶은 마음에 간첩을 자처하게 된다.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은 아버지의 눈물로 그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민족의 분단은 반세기가 지나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에 아로 새겨져 그 후손들에게도 그 아픔을 생생하게 전해줄 수밖에 없다.

세 번째 단편 '운명에 관하여'는 고아 소년의 성장기다. 소년은 세상의 슬픔을 너무 이른 나이에 다 알아버린다. 소년은 일어서려고 노력하지만 그 때마다 세상이 주는 가혹하리만큼의 쓴맛을 경험하게 될 뿐이다. 어느 날 고아원 시절 친구의 소개로 부잣집 영감의 잃어버린 아들 행세를 위해 그를 만나러 갔다가 자신이 진짜 그의 아들임을 알게 되는 운명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운이 없게도 그 충격으로 영감은 그날 밤 세상을 등지게 되고 그의 많은 재산은 그와는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에겐 생전에 얼굴도 알지 못했던 아버지를 찾고 어머니가 전쟁 중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평생을 살아갈 재산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엇갈린 운명에 관한 이야기는 좀 작위적이라는 생각도 들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작품이었다.

2개의 중편 : <녹천에는 똥이 많다> <하늘등>

네 번째 중편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배 다른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다. 선생님인 아버지는 배운 게 없는 어머니와 유교적 관습에 의해 결혼하게 되었다. 그 결혼이 행복할 리 없었고, 아버지는 동료 여교사와 사랑에 빠져 아들을 낳게 되고 그런 연유로 학교에서 쫓겨난다. 그 후 동료 여교사는 아들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떠나고 가엾은 어머니는 두 아들을 키우게 된다.

어머니는 능력 없는 남편 대신 생계를 위해서 노점상으로 근근이 살림을 꾸려간다. 둘째 아들은 바른 말만 하는 아이라 어머니를 난감하게 만들 때가 많았고, 큰 아들은 동생이 못마땅할 때가 많았다. 손님들도 언제나 동생은 어미가 버리고 간 불쌍한 아이라며 그 아이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나이가 들어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주인공은 그 후 십 년이 넘도록 동생의 소식을 모르고 살아가다가 갑작스레 동생이 찾아오면서 사건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형은 학교에서 급사로 일하면서 야간대학에 다녀 급기야 기술 교사가 된 억척같은 사람이다. 동생은 무언가 사회를 바꿔보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아내는 그런 둘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며 주인공을 자괴감에 빠지게 만든다. '똥이 많은 녹천역'은 아마도 타락한 세상에 대한 역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서 저자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다섯 번째 중편 '하늘등'의 주인공 신혜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탄광촌 다방에 취업했다가 경찰에 신고 되어 고문을 받고 풀려난다. 신혜는 이른바 운동권 대학생이긴 했지만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어머니의 꿈과 맞바꿀 정도로 가치가 있는 일인지 끊임없이 회의하는 학생으로 그려진다. 단지 다음 학기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형사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고 심한 고문을 가한다. 슬픈 탄광촌의 단면, 운동권 대학생, 가난, 혼자 자식을 키우는 힘겨운 어머니의 이야기가 '하늘등' 전반에 걸쳐 흐르고 있다.

다섯 편의 중단편은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가령 소설에 등장하는 멜라니 샤프카의 'The Saddest Thing'은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매우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슬픈 노래처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아픔을 지니고 있다.

독자들은 소설을 통해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 환기하게 될 것이다. 또한 사회적 약자라서 당할 수밖에 없는 설움, 기를 쓰고 노력해 안정된 삶의 테두리 안에 들어섰으나 고뇌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 현실과 개인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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