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 관하여 -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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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중지추_囊中之錐라는 말이 떠오른다. 저자 강남순 교수는 감신대 초빙교수를 거쳐 2006년부터 미국의 신학교에서 교수로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에서 점점 더 유명해지는 것 같다. 2006년 우리나라의 감신대에서 억지스런 이유를 내세워 교수 임용이 되지 않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일이 화제가 되었다.

남편 교수 이유로 부인 재임용 탈락은 부당차별’(프레시안 2005.03.07.)

감신대가 버린 강남순, 미국 대학이 모셔간다’(뉴스앤조이 2006.10.18.)

3년간 감신대와 부당해고를 문제삼아 싸웠지만 감신대의 실체를 드러내 보인 것으로 만족하고 미국 신학교에 전임교수로 가면서 소모적인 논쟁을 그치기로 했다. 저자의 학문이 깊어진 면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 안타까운 사건들이 많아서 기고나 칼럼으로 점점 이분의 목소리가 많이 들리는 것 같다. 집필도 꾸준히 하신다. 이 책 <배움에 관하여> 뿐만 아니라 <용서에 대하여>, <정의를 위하여>3종 세트고 그 외에도 페미니즘, 젠더, 종교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내시는데 한국에 있지 않지만 한국 사회에 대한 정확하고 통찰력 있는 지적이 돋보인다. 방학마다 한국에 오시는 것 같은데 이번에도 12월 중순부터 강연이 있다고 어떤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글을 봤다. 이렇게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알려지는 주머니 속의 송곳을 뜻하는 말이 떠올랐다.

 

비판적 성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 사회는 학교 교육을 받을수록 사고력이 깊어지는 게 아니라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지는 상황이다. 요즘 학생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공교육, 사교육을 받고 있는데 그 엄청나게 많은 시간동안 하는 공부가 진정한 배움과 관계가 있는지 의문이다. 공부의 내용이 그러할 뿐 아니라 내신관리라는 명목으로 학교제도나 교사에 순응적인 태도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 이것도 갑갑한 상황이다.

 

다른 책이나 강연을 통해서 이분을 좀 더 만나고 싶다. 이 책 한권으로 비판적 성찰이 일상화되기는 어려우니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 읽고 들어보려고 한다.

98

제도적 구조 속에서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다양한 전통들이 어떻게 우리 자신의 교육철학을 배반하고 있는지에 대한 그 지독한 딜레마가 내 마음을 괴롭혔다. 막강한 제도와 전통에 대한 한두 개별인들의 비판적 문제 제기는 끈질긴 설득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설득 과정이 반드시 성공을 가져다주면서 변혁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 제도적 삶의 의미성과 무의미성의 경계에서, 의지와 무력감의 경계에서, 나는 뒤척이며 씨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랴.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하나일 뿐이다. '사소한 것'이 전혀 사소하지 않다는 것, 배재, 차별, 불의, 불공평에 대한 예민성을 지니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쓰고 말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하는 실천이고 운동이며,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일 뿐이다.

 

110

자살은 언제나 '이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걸일까'라는 의미 물음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그러한 의미 물음은 이 삶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의미 물음을 하는 인간이 충분히 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했을 때, 그리고 이 삶의 부조리, 절망감, 지독한 고독을 넘어설 기쁨이나 행복감을 전혀 느끼지 못할 깨 이 살아감은 더이상 견디기 어려운 짐으로 다가오고, 그 견디지 어려운 짐을 자살로서 내려놓고 싶어한다. 그래서 인간의 삶이란 다른 말로 하면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는 것, 끌어안을 수 없는 것을 끌어안는 것, 희망할 수 없는 것을 희망하는 것인지 모른다.

 

126

한 사람이 씨름하고 있는 물음들, 타자에게 건네는 질문들을 통해서 나는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내면세계의 내음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씨름하고 있는 물음들, 자신이나 이 세계에 던지는 질문들이 그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변화는 ''을 가져오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물음'을 묻는 이들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것, 그래서 배운다는 것은 '해답'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좋은 물음 묻기'를 배우는 것이라는 점,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며 늘 강조하는 것이다.

 

137

''는 이미 만들어진 '고정된 존재 fixed being'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하는 '형성 중의 존재 becoming being'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정원'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가꾸고 키우는 작업을 끈기있게 하겠다는 각오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은, 모든 여타의 사적, 공적 관계망 속에서 소중한 밑거름이 된다고 나는 본다.

 

170

그 누구도 지금의 모습으로 절대화되어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비결정성'이 인간이 지닌 가능성이며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특히 데리다 수업을 할 때마다 절감한다.

 

233

예수는 인간 섹슈얼리티의 다양한 양태에 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무조건적 환대, 연민, 사랑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나와 다른 타자를 향한 혐오를 단호히 넘어서야 할 것이다. ...... 정작 예수는 혐오가 아닌 포용과 사랑을 가르쳤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282

소위 인문학적 소양이란 치열한 ''로부터 출발한다. 왜를 묻는다는 것은 비판적 사유와 분석을 필요로 한다. 현대 인문학의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질문은 해답보다 심오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문학적 사유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간결함과 명쾌함'이 아닌 '불확실성과 모호성'이다. 인문학적 사유는 이전의 익숙한 이해 세계를 뒤흔드는 내면적 불편함을 경험하게 한다.

 

290

많은 이들의 삶의 해답을 원한다. 그런데 '절대적 해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해답은 부정적이고 잠정적이며 특정한 정황 속에서만 작동될 뿐이다. 그래서 삶이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잠정적 답을 모샙하는 '여정'인 것이다. 어떤 종류의 해답을 찾고자 하든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 삶의 한가운데에서 치열하게 씨름하며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질문들'과 만나는 것이다. 자신만의 질문이 없을 때, 이 유행의 물결에서 만나는 사상가, 이론들은 오히려 '무엇인가 얻었다'는 환상만을 심어줄 뿐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를 남기지 못한다. 자신만의 물음, 질문이 없는 이가 자신에게 의미가 되는 해답부터 찾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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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 수용소 -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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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쉽게 손이 가지 않을 책이다.

수용소라니, 그것도 중국에 있는.

절대 반갑지 않을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책은 좋다고 권하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만나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첫 장의 이런 문구와 함께 권한다면 한결 부담없이 읽을 것 같다. 부담없이 안심하고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의 말대로 정말 재미있고 흥미롭기까지 하다.

 

p7

이 책은 일본과 전쟁을 벌이던 당시 중국 북부에 있던 민간인 포로수용소에서의 삶의 이야기다.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 책에는 끔찍하거나 무시무시한 내용은 없다. 우리가 수감된 위현(현재는 산둥) 수용소에는 육체적인 고문이나 굶주림, 정신적인 고통은 없었다. 뒤에 인용해놓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문장*이 암시하듯, 우리의 문제는 우리를 억류한 일본인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초래된 것들이 더 많았다. 따라서 아시아와 유럽에 있던 다른 포로수용소와 비교하면, 우리가 수용되었던 곳의 삶은 거의 일상에 가까웠다. 이 이야기가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 “아무리 성자 같은 사람도 식사다운 식사를 못하면 죄인처럼 행동할 것이다.”_베르톨트 브레히트, 『서푼짜리 오페라』

 

2차 대전 중 중국에 장기 체류하던 서양인들이 일시에 수용소로 보내지는 일이 일어났다. 19433월부터 19459월까지 약 2천 여 명의 미국,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적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산둥수용소에 수감된 것이었다. 원래는 중학교, 병원, 교회가 함께 있던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로 쓰였던 건물이었다고 한다. 수용소치고 억압과 고문이 없고 인간적인 환경이었다고는 하지만 기약이 없이 이처럼 수용된다는 것은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당시에는 2차 대전이 1945년에 끝날 지 아무도 몰랐고 따라서 이들의 신변도 어떻게 될 지 앞날을 보장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자그마한 괴로움이라도 기약이 없다는 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저자인 랭던 길키는 이 수용소에 수용된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시카고가 고향인 그는 미국의 대학 부속 예배당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둔 중상류층 전문직 가정에서 태어나 전쟁 전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고, 당시 20대로 북경에 살면서 근처 연경 대학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는 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동료들과 이곳 수용소로 옮겨진 후 그는 일기를 쓰면서 이 곳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상세히 기록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일기를 마무리 지었고 20년 쯤 뒤에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원본 출간년도는 1966년이다. 상세하고 성실한 기록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끝을 알 수 없는 수용소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먹고 자는 일 같은 자잘한 사건들을 통해 인간 본성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서구인들이라 대부분 가톨릭이나 개신교 등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데 평소 안락하던 상황에서 종교에 대해 했던 말과 행동과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많이 다르다. 앞서 인용한 브레히트의 대사처럼 자신의 생존의 문제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있을까. 상상 이상으로 욕심과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의 자연스런 모습, 그중에서도 종교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보며 저자는 인간의 본능에 긍정할 만한 것이 있는가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문명과 기술은 무엇을 근거로 발전하고 있는지, 도덕과 윤리는 무엇을 토대로 삼고 있는지 질문한다.

 

인간은 본능에 충실한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낀다. 나도 이렇게 착한 척을 하긴 하지만 나도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떨까, 자신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연고가 없는 지역에서 혼자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처럼 마치 새로운 인물로 태어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성품을 드러내며 살고 싶어 할까. 지금까지 때로는 약간 포장하기도 했던 내 역할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주제에서 다소 벗어나긴 했지만 내가 속한 곳에서 인정받고 보여주던 내 모습은 약한 포장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가톨릭인과 개신교인들의 양태가 지금 우리나라의 두 종교인들의 그것과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가톨릭인들은 겉과 속이 많이 다르지 않아 보이고 특히 수도자들은 공동생활이 몸에 배어서 그런지 크게 놀랄만한 것이 없었는데 개신교인들은 우리나라의 많은 개신교인들이 그렇듯 위선적이고 율법주의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북미 기독교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비슷한 모습으로 닮아가고 있다니 놀라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종교인들의 어떤 모습이 위선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나 자신의 위선적인 모습도 그렇게 발견할 수 있을까? 자신의 위선적인 행동은 어떻게 인지할 수 있을까?

그 외에도 많은 질문을 던져주는 책이다.

살면서 이 책에서 등장했던 어떤 사람과 같은 인품의 사람을 만난다면 또 생각이 날 것 같다.

 

p175

서구 사회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탐구자와 지식인으로 여긴 것은,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시대에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대 문화는 최근에 이루어진 과학 기술적 발견이 주는 경이로움에 취해 있었고, 이런 발전으로 가능해진 공간, 시간, 무게, 추위, , 병의 정복에 매료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회는 이런 업적을 가장 깊은 차원의 인간 문제의 해결로 오해했으며, ‘지적인간을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 바르게 사고하는 존재로 오해했다. 이런 이미지를 통해 현대 문명은 너무도 쉽게 인간의 완전함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인간은 합리성과 객관성을 바탕으로(인간은 과학자요 기술자로서 이런 가치들을 보여왔으므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게다가 전통적인 종교 신앙마저 쇠퇴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런 낙관적 이미지가 함축하는 미덕에 우리 미래의 소망을 걸 수 있다는 유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과학 기술이 인류의 진보를 이끌 수 있으려면, 인간은 정말로 선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기심으로 움직이는 인간은 악하고 비열한 편견과 열정에 사로잡히는 존재이며,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으면 쉽게 타인을 해하거나 죽일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은 결코 확고한 믿음을 가진 과학자가 아니다. 이런 존재의 손에 들린 과학적 무기는 인류에게 있어, 극단적으로 인류의 전멸은 아니라 할지라도 장애물을 의미할 수 있다. 인간을 이런 식으로 어둡게 조명해보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더 새롭고 깊은 불안인 듯 하다. .. 따라서 인간을 바르게 인식하면 과학기술이 스스로 진보한다는 믿음도 흔들리게 된다. ... 내가 수용소에서 경험한 바처럼, 이런 이상은 거짓된 꿈이었다.

 

p347

스미스필드는 지적인 사람이었음에도, 자신의 행위에서 모순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확신을 가진 어조로 말했다. “흡연은 분명히 죄이기 때문에 나는 내 카드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줄 수 없었어. 내가 오둘 수 없는 최라면, 그 죄에 대해 관여하지 않기라도 해야 하지. 그리고 담배를 판 일에 대해서는, 우리 애들이 우유를 원하니까 팔았을 뿐이야. 그 정도면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나?”

 

p417

삶이란 일부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세상의 일부가 되지 못하면 삶은 끝나버린다. 반면에 세상에 다시 동참하게 되면 삶은 다시 시작된다.

 

p428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자들은 지성을 가진 기독교인이 증명 불가능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에 대해 종종 놀라워한다. 적어도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인본주의자들의 주된 신념인 인간의 선함, 그리고 거기에서 자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인 인간의 도덕성은 어떠한가? 사실 조금만 연구해보면 인간의 선함이나 도덕성은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다. 증명 불가능한 종교적 신념을 주장하는 것이 비이성적이라면, 반대되는 증거가 널려있는데도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는 인본주의자의 태도 또한 비합리적임에 분명하다.

 

p434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 유일한 소망은, 인간의 종교성이 수많은 우상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중심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이 서로 나누고,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도 정직하며, 공동체를 세울 만큼 충분히 합리적이고 도덕적이기 위해서는 이기심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반드시 인간은 의미와 안정성을 제공하고 자신의 충성과 헌신을 바칠 수 있는 영적 중심, 자신의 복지를 초월하는 영적 중심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가족, 나라, 전통, 인종, 교회 같은 중심은 물론 개인보다는 위대하지만 여전히 유한한 피조물일 뿐이다.

그래서 ... 하나님만이 진정한 영적 중심이 될 수 있다.

... 각 사람의 궁극적 관심은 이웃과의 싸움을 더 심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대신 이런 싸움에서 인간을 구해야 한다.

... 그렇기 때문이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처음으로 이기심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복지를 잊고 이웃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는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어떨지 알 수 있게 된다. 진정한 신앙인은 의미와 안정성의 중심을 자신의 생명에 두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 둔다.

... 이런 신앙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신앙은 내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고 자기 중심성을 포기하여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향한 이 자기 포기의 원리는 전통적으로 구원이라 불리는 것의 기반이기도 하다.

... 즉 구원은 내적인 평안이고 다른 사람과 건강하고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며 주위 세상과 이웃을 향한 창조적인 관심으로 정의될 수 있다.

... 이런 의미의 믿음은 흔히 사람들이 종교적 신념이라고 일컫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믿음이란 일련의 신조나 성경적 원리를 믿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경건의 규칙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것과, 앞에서 이야기했던 자아에 대한 염려에서 해방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생각과 입술로는 위대한 진리에 동의하고 행위로는 경건과 거룩의 규칙을 지키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관심의 중심은 자아의 육체적이거나 영적인 복지에 이기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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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 가장 나답게 사는 길은 무엇일까?, 개정판
파커 J. 파머 지음, 홍윤주 옮김 / 한문화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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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인생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를 기울여라.’

 

이 책은 인생을 보는 관점에 대해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 준다. 관점이 대폭 전환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같은 상투적인 문장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제목도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이다. 그동안 소명, 삶의 의미 등에 대해 생각하던 바와 많이 다르게 느껴졌는데 공감이 가는 게 많았다. 소명, 부르심 같은 건 익숙한 주제였으나 그것이 나의 외부에 있다고 생각했지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전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따라야 할 것을 밖에서 찾고 있었다. 소명의 참된 의미는 vocation이라는 단어에 숨어 있다고 한다. vocation의 어원은 voice 목소리다. 소명은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소명은 내가 들어야 할 내면의 소리라는 것이다.

 

몇 년 전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아이를 대할 때의 태도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각자 자기 몫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성장하는 중의 완전하지 않은 모습을 보며 불안해하지 말자 다짐하기도 했었다. 말하기보다는 듣고, 외우고, 쫓아하며 조용히 보내야 하는 학교 생활이 아직도 이런 문화라는 사실에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읽을 때는 나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글쓰기와 상관없는 전공, 직업을 가졌었는데 이상하게도 최근에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내면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걸까. 처음에는 책 읽기를 즐기니까 자연스럽게 책에 대한 감상을 표현하고 싶은 정도였는데 왠일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더 관심이 생겼다. 글을 열심히 써 보면 어떨까하고. 확실한 건, 나는 타고난 재능은 없다. 수학이나 과학 같은 자연계열 공부가 더 좋았고 학창시절 자주 접해 본 자신의 생각을 쓰라...’는 종류의 질문에 머릿속이 하얘진 경험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지금은 왜 내면의 목소리가 자꾸 글을 쓰라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책을 즐기다가 문장이 머리에 넘치는걸까 하는 되도 않는 생각도 들었다.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도 조언을 해 주거나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아무도 ...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글쓰기에 관한 조언이지만 내면이 글쓰기를 하라 부르시는 이유를 찾는 것도 같은 것 같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서 써 보는 것.

 

잡아 곁에 두고 싶은 내용이 많아서 조금 옮겨 놓는다.

 

 

29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한 까닭에 소명의 의미에 대해 맨 먼저 배웠다. 신 앞에서 겸허하고 세상의 다양성을존중하며 정의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종교적 전통에서 자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내가 깨달은 소명의 개념은 왜곡된 것이었다. 소명이란 자신을 향해 외부에서부터 들려오는 도덕적인 요구의 목소리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뭔가 지금의 자기 모습보다 더 훌륭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느 상을 그리고 있었다. 소명에 대한 이런 태도는 자아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시작된다. 죄 많은 자아는 이라는 외부의 강제적 힘을 동원해 바로잡지 않는 한 늘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늘 내 인생을 잘 꾸려 가기에는 부족한 존재라는 느낌을 가졌다. 내게 기대되는 이상적인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차이 때문에 죄의식을 만들어 내면서 그 격차를 좁히기 위해 몸부림치느라 지쳐갔다.

 

30

소명은 나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라고 저쪽 바깥에서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소명은 본래 타고난 그 사람이 되어, 태어날 때 신이 주신 본연의 자아를 완성하라는 여기 내면에서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온다.

 

38

우리의 가장 깊은 소명은 그것이 우리가 되고자 하는어떤 이미지에 맞든 안 맞든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향해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기쁨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진정 우리가 갈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소명은 자아(self)와 봉사(service)를 하나로 결합한다. 프레더릭 뷰크너는 소명을 마음 깊은 곳에서의 기쁨과 세상의 절실한 요구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뷰크너의 정의는 소명이란 자아에서 시작하여 세상의 요구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현명하게도 소명의 시작 지점을 제대로 본 것이다. 소명의 시작은 세상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인간 자아의 본성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자아에게 신이 창조한 선물로 이 땅에 태어났음을 깨닫는 크나큰 기쁨을 안겨 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57

그리고 우리의 책임과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일단 나의 두려움을 인정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어떤 패턴을 알아낼 수 있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버클리나 조지타운 같은 대형 교유기관을 떠나 팬들 힐 같은 작은 곳, 사회적으로 지위도 낮고 잘 알려지지도 않은 곳을 전전했다. 하지만 나는 게처럼 옆걸음질 하고 있었다. 사실에 정면으로 부딪치기가 두려운 나머지 제도권 생활의 중심을 벗어나 변두리를 향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제도권 학교 밖으로 나갔다.

 

65

참자아를 주장하다가 받는 처벌이 아무리 호되다 해도, 참자아를 주장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내리는 처벌보다는 견디기 쉽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남이 주는 그 어떤 보상도 자기 스스로의 빛을 밝히며 살아가는 데서 얻어지는 보상만은 못하다.

 

66

참자아는 나를 가제로 인생의 생태계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도록 했고, 내가 평생 사랑싸움을 벌여온 교육기관과 적절한 관계를 찾도록 했다. 만약 내가 나의 참자아를 부인하고 두려움에 마비되어 내 자리에그냥 머물러 있었다면, 오늘날 나는 분명 관심 분야에 봉사하는 대신 방황하며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78

우리 모두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말은 한계와 능력 모두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능력을 깨닫는 것도 그렇지만 직접 자기 한계에 뛰어들어봄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본성을 더 많이 알 수 있다. 루스가, 그리고 인생이 내게 가르쳐 주려 했던 게 바로 이것인 것 같다. 한계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해고처럼 난처한 형태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당신도 나처럼 자기 한계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당혹스러움이 아니고서는 당신의 주의를 끌 수 없을 것이다.

 

79

미국인으로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적어도 내가 속한 인종과 성에서- 모든 한계를 일시적으로 인생에 닥친 유감스러운 일로만 간주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한계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미국인의 신화는 한계에 대한 끝없는 도전에 대한 것이다. 서부 개척시대를 열고, 빛의 속도를 넘어서며, 달에 사람을 착륙시키고, 현실 공간이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쓸모없는 것들로 가득하게 된 순간, 사이버 공간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불가능을 인정하지 않는다.

 

92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애굽기 3:14)’ 모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신은 도덕 규범이 아닌 본질적인 존재(isness)와 자아에 가까운 분이었던 것이다. 내가 믿는 바대로 우리가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면 우리가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 역시 똑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함으로써 신과 함께 산다. 본성이 아닌 것을 따르는 사람은 신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현실의 실체는 신계 속한 것이니, 거스르지 말고 그대로 존중하며 따를 일이다.

 

96

나는 더 이상 약점을 고치려고하지 않는다. 아무도 나와 함께 춤추고 싶어하지 않는 때는 솔로로 춤추는 법을 배운다. 왜냐하면 자칫 그것은 내 재능을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나와 춤추기를 거부하는 학생들에게 더 품위 있게 대응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 내 한계를 그들 탓으로 돌리는 대신 나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이다.

 

98

열림은 우리의 능력을 보여주고 닫힘은 우리의 한계를 보여 준다. 그것이 영적인 세계 속에서 정체성이라는 동전이 가진 양면인 것이다. 우리는 이 동전의 양면을 잘 살펴봄으로써 우리 정체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영적 여행의 길에서 자주 일어나듯이 우리는 역설의 심장부에 도달한다. 문이 닫힐 때면 나머지 세상이 열린다는 역설이다.

 

109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는 진실을 얘기해 주는 것이 중요한다. 만약 내가 바라는 생각을 얘기했다면 그녀의 마음을 감동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는 속임수 감지기가 그냥 작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예민하게 작동한다.

둘째, 우울증은 종교적이든 과학적이든 어떤 가치에서 나오는 도식적이고 단순한 대답 대신 우리 문화가 무시하는 신비를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신비는 사람 마음 속 깊은 경험 하나 하나를 둘러싸고 있다. 자기 마음의 어둠 또는 빛을 향해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는 신의 궁극적인 신비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하지만 우리 문화는 신비를 그저 설명해야 할 수수께끼나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바꾸어 놓으려 한다.

 

114

어떤 사람은 기운을 북돋울 양으로 이런 말을 했다.

날씨가 아주 좋네요. 밖에 나가서 맘껏 햇볕을 쬐며 아름다운 꽃이라도 보는 게 어때요? 분명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하지만 그런 조언은 나를 더 깊은 우울증으로 밀어 넣었다. 머리로는 나는 그 날 날씨가 눈부시게 좋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내 감각으로는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 단절을 느낄 때마다 더 싶은 절망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해준 사람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파커. 가르치는 일도 글 쓰는 일도 아주 잘 하잖아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구요. 당신이 했던 좋은 일들을 떠올려 보세요. 분명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그 충고 역시 나를 더 깊은 우울에 빠지게 했다. ‘좋은사람으로 비치는 외적인 내 모습과 당시 내가 믿고 있던 나의 나쁜모습 사이의 엄청난 격차만 절감할 뿐이었다.

 

116

누군가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소멸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이에게는 생명을 주는 일이다. 그 친구의 행동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이 발을 씻어 준다는 성경의 이야기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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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 - 시리아 내전에서 총 대신 책을 들었던 젊은 저항자들의 감동 실화
델핀 미누이 지음, 임영신 옮김 / 더숲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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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몇년 전부터 외신에서 보던 아랍의 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시리아 내전...

물리적으로 너무 먼 거리에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문화가 많이 달라서인지 거리감이 느껴져 큰 관심이 없는 기사였는데

지금 동시대에 이런 곳이 있다는게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책은 시리야의 다라야라는 도시에 있는 청년과

이스탄불에 와 있는 파리 출신 기자 사이에 SNS로 전해진 소식으로 이야기로 이어진다.

전쟁으로 마을이 봉쇄되고 마치 거대한 관 같은 곳에서 시한부로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책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 이야기를 읽어도 잘 상상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읽었던 소설을 읽고 무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도 읽는다.

날마다 퍼붓는 폭탄 사이에서 '성공하는 ...' 이라니... 이 책으로 강연도 하고 토론도 했단다.

 

p131

귀퉁이가 접히고, 긁히고, 색이 바랜 이 책은 손에서 손으로 꾸준하게 전달되었다. 읽히고 또 읽히면서 하나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특히 더 많은 사상자가 있었던 2016년 겨울. 이제 5년째로 접어드는 전쟁이 언젠가는 끝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주는 요소가 이 책에는 들어 있었다. 책의 내용에 빠져들면서, 전쟁을 일시적 차원의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고, 잔혹한 폭격과 늘 마주하는 죽음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이는 포위가 이토록 오래 지속될지 예상하지 못했던 병사들의 조바심을 극복하는 일이기도 했다.

 

'... 잔혹한 폭격과 늘 마주하는 죽음에서 떨어지는 ...'

늘 마주하는 죽음에서 떨어지는 것이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가게 해 주는 것이 책이었다니..

 

책이 가진 생명력을 생각해 본다.

나무를 베어서 잉크를 풀어 글자를 찍는다.

나무의 생명력이 종이로 옮겨간 걸까.

나무는 땅에서 자랐으니,

땅이 가진 생명력이 나무에게로 그리고 책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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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제목은 인간을 지구상의 생물 분류로 일컫는 이름이다.

찾아봤더니 인간의 학명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제목처럼 인간을 생물의 한 종으로 보고 독특하게도 사피엔스가

어떻게 문명을 이루고 살게 되었는지 거시적으로 역사적 맥락을 훝는다.

사피엔스 이외에도 다른 유인원 종이 있었는데 어떻게 사피엔스만 살아남게 되었는지,

어떻게 5대륙에 걸쳐 살게 되었는지,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의 결과로 지금의 현대 사회가 있게 된 배경 등을 설명한다.

인간을 생물의 한 종으로서 사피엔스라고 부르는 것처럼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든가 창조와 설계를 운운하는 창조론의 명백한 대척점에 있다.

대척점의 입지가 얼마나 확고하고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진다.

종교와 신화 등 인간 사회를 떠밭치고 있는 가공의 세계와 그 작동 원리도 파헤쳐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 종 출현 이후의 역사적 흐름은 납득할 수 있고 재미있지만

다양한 생물 종과 인간 종의 출현을 설명하는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허술한 대목이 많다.

그러니까 시작 부분을 설명하는데 알 수 없다든가 우연의 산물이 너무 많아서

이 부분은 의지적으로 믿고 넘어가야 할 것처럼 보인다.

마치 신에의한 창조를 믿듯이 이 부분도 믿어야 넘어갈 수 있다.

 

마지막의 결론도 인상적이었다.

(에필로그 중) ... 인간의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의 목표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예나 지금이나 불만족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우리의 기술은 카누에서 갤리선과 증기선을 거쳐 우주 왕복선으로 발전해왔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 어느때보다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지만 이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생각이 거의 없다. ..... 그 결과 우리의 친구인 동물들과 주위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오로지 자신의 안락함과 즐거움 이외에는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결국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얼핏보면 인류와 지구 생물의 처음은 밝힌 듯한데 끝은 알 수 없다고 맺는다.

종교가 아닌 이상 처음과 끝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게 당연하다. 

이게 정말이면, 우연의 산물과 알 수 없는 인지혁명과 같은 급작스런 발전의 결과로

인간과 문명이 출현했고 미래는 알 수 없는 게 맞다면,

인생이 많이 허무하게 느껴질 것 같다.

무에서 왔다가 무에서 가는 것인가. 허무주의다.

정의, 사랑, 희생, 가치...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본능적으로 안락하고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는

인간에게 고유한 형이상학적 가치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적으로 자극이 되고 재미있는 내용들은 많이 있었지만

허무함을 칭송하는 것 같은 허탈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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