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 가장 나답게 사는 길은 무엇일까?, 개정판
파커 J. 파머 지음, 홍윤주 옮김 / 한문화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인생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를 기울여라.’

 

이 책은 인생을 보는 관점에 대해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 준다. 관점이 대폭 전환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같은 상투적인 문장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제목도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이다. 그동안 소명, 삶의 의미 등에 대해 생각하던 바와 많이 다르게 느껴졌는데 공감이 가는 게 많았다. 소명, 부르심 같은 건 익숙한 주제였으나 그것이 나의 외부에 있다고 생각했지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전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따라야 할 것을 밖에서 찾고 있었다. 소명의 참된 의미는 vocation이라는 단어에 숨어 있다고 한다. vocation의 어원은 voice 목소리다. 소명은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소명은 내가 들어야 할 내면의 소리라는 것이다.

 

몇 년 전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아이를 대할 때의 태도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각자 자기 몫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성장하는 중의 완전하지 않은 모습을 보며 불안해하지 말자 다짐하기도 했었다. 말하기보다는 듣고, 외우고, 쫓아하며 조용히 보내야 하는 학교 생활이 아직도 이런 문화라는 사실에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읽을 때는 나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글쓰기와 상관없는 전공, 직업을 가졌었는데 이상하게도 최근에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내면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걸까. 처음에는 책 읽기를 즐기니까 자연스럽게 책에 대한 감상을 표현하고 싶은 정도였는데 왠일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더 관심이 생겼다. 글을 열심히 써 보면 어떨까하고. 확실한 건, 나는 타고난 재능은 없다. 수학이나 과학 같은 자연계열 공부가 더 좋았고 학창시절 자주 접해 본 자신의 생각을 쓰라...’는 종류의 질문에 머릿속이 하얘진 경험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지금은 왜 내면의 목소리가 자꾸 글을 쓰라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책을 즐기다가 문장이 머리에 넘치는걸까 하는 되도 않는 생각도 들었다.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도 조언을 해 주거나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아무도 ...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글쓰기에 관한 조언이지만 내면이 글쓰기를 하라 부르시는 이유를 찾는 것도 같은 것 같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서 써 보는 것.

 

잡아 곁에 두고 싶은 내용이 많아서 조금 옮겨 놓는다.

 

 

29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한 까닭에 소명의 의미에 대해 맨 먼저 배웠다. 신 앞에서 겸허하고 세상의 다양성을존중하며 정의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종교적 전통에서 자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내가 깨달은 소명의 개념은 왜곡된 것이었다. 소명이란 자신을 향해 외부에서부터 들려오는 도덕적인 요구의 목소리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뭔가 지금의 자기 모습보다 더 훌륭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느 상을 그리고 있었다. 소명에 대한 이런 태도는 자아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시작된다. 죄 많은 자아는 이라는 외부의 강제적 힘을 동원해 바로잡지 않는 한 늘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늘 내 인생을 잘 꾸려 가기에는 부족한 존재라는 느낌을 가졌다. 내게 기대되는 이상적인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차이 때문에 죄의식을 만들어 내면서 그 격차를 좁히기 위해 몸부림치느라 지쳐갔다.

 

30

소명은 나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라고 저쪽 바깥에서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소명은 본래 타고난 그 사람이 되어, 태어날 때 신이 주신 본연의 자아를 완성하라는 여기 내면에서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온다.

 

38

우리의 가장 깊은 소명은 그것이 우리가 되고자 하는어떤 이미지에 맞든 안 맞든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향해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기쁨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진정 우리가 갈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소명은 자아(self)와 봉사(service)를 하나로 결합한다. 프레더릭 뷰크너는 소명을 마음 깊은 곳에서의 기쁨과 세상의 절실한 요구가 만나는 지점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뷰크너의 정의는 소명이란 자아에서 시작하여 세상의 요구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현명하게도 소명의 시작 지점을 제대로 본 것이다. 소명의 시작은 세상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인간 자아의 본성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자아에게 신이 창조한 선물로 이 땅에 태어났음을 깨닫는 크나큰 기쁨을 안겨 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57

그리고 우리의 책임과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일단 나의 두려움을 인정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어떤 패턴을 알아낼 수 있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버클리나 조지타운 같은 대형 교유기관을 떠나 팬들 힐 같은 작은 곳, 사회적으로 지위도 낮고 잘 알려지지도 않은 곳을 전전했다. 하지만 나는 게처럼 옆걸음질 하고 있었다. 사실에 정면으로 부딪치기가 두려운 나머지 제도권 생활의 중심을 벗어나 변두리를 향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제도권 학교 밖으로 나갔다.

 

65

참자아를 주장하다가 받는 처벌이 아무리 호되다 해도, 참자아를 주장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내리는 처벌보다는 견디기 쉽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남이 주는 그 어떤 보상도 자기 스스로의 빛을 밝히며 살아가는 데서 얻어지는 보상만은 못하다.

 

66

참자아는 나를 가제로 인생의 생태계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도록 했고, 내가 평생 사랑싸움을 벌여온 교육기관과 적절한 관계를 찾도록 했다. 만약 내가 나의 참자아를 부인하고 두려움에 마비되어 내 자리에그냥 머물러 있었다면, 오늘날 나는 분명 관심 분야에 봉사하는 대신 방황하며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78

우리 모두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말은 한계와 능력 모두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능력을 깨닫는 것도 그렇지만 직접 자기 한계에 뛰어들어봄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본성을 더 많이 알 수 있다. 루스가, 그리고 인생이 내게 가르쳐 주려 했던 게 바로 이것인 것 같다. 한계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해고처럼 난처한 형태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당신도 나처럼 자기 한계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당혹스러움이 아니고서는 당신의 주의를 끌 수 없을 것이다.

 

79

미국인으로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적어도 내가 속한 인종과 성에서- 모든 한계를 일시적으로 인생에 닥친 유감스러운 일로만 간주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한계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미국인의 신화는 한계에 대한 끝없는 도전에 대한 것이다. 서부 개척시대를 열고, 빛의 속도를 넘어서며, 달에 사람을 착륙시키고, 현실 공간이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쓸모없는 것들로 가득하게 된 순간, 사이버 공간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불가능을 인정하지 않는다.

 

92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애굽기 3:14)’ 모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신은 도덕 규범이 아닌 본질적인 존재(isness)와 자아에 가까운 분이었던 것이다. 내가 믿는 바대로 우리가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면 우리가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 역시 똑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함으로써 신과 함께 산다. 본성이 아닌 것을 따르는 사람은 신을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현실의 실체는 신계 속한 것이니, 거스르지 말고 그대로 존중하며 따를 일이다.

 

96

나는 더 이상 약점을 고치려고하지 않는다. 아무도 나와 함께 춤추고 싶어하지 않는 때는 솔로로 춤추는 법을 배운다. 왜냐하면 자칫 그것은 내 재능을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나와 춤추기를 거부하는 학생들에게 더 품위 있게 대응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 내 한계를 그들 탓으로 돌리는 대신 나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이다.

 

98

열림은 우리의 능력을 보여주고 닫힘은 우리의 한계를 보여 준다. 그것이 영적인 세계 속에서 정체성이라는 동전이 가진 양면인 것이다. 우리는 이 동전의 양면을 잘 살펴봄으로써 우리 정체성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영적 여행의 길에서 자주 일어나듯이 우리는 역설의 심장부에 도달한다. 문이 닫힐 때면 나머지 세상이 열린다는 역설이다.

 

109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는 진실을 얘기해 주는 것이 중요한다. 만약 내가 바라는 생각을 얘기했다면 그녀의 마음을 감동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는 속임수 감지기가 그냥 작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예민하게 작동한다.

둘째, 우울증은 종교적이든 과학적이든 어떤 가치에서 나오는 도식적이고 단순한 대답 대신 우리 문화가 무시하는 신비를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신비는 사람 마음 속 깊은 경험 하나 하나를 둘러싸고 있다. 자기 마음의 어둠 또는 빛을 향해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는 신의 궁극적인 신비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하지만 우리 문화는 신비를 그저 설명해야 할 수수께끼나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바꾸어 놓으려 한다.

 

114

어떤 사람은 기운을 북돋울 양으로 이런 말을 했다.

날씨가 아주 좋네요. 밖에 나가서 맘껏 햇볕을 쬐며 아름다운 꽃이라도 보는 게 어때요? 분명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하지만 그런 조언은 나를 더 깊은 우울증으로 밀어 넣었다. 머리로는 나는 그 날 날씨가 눈부시게 좋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내 감각으로는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 단절을 느낄 때마다 더 싶은 절망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해준 사람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파커. 가르치는 일도 글 쓰는 일도 아주 잘 하잖아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구요. 당신이 했던 좋은 일들을 떠올려 보세요. 분명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그 충고 역시 나를 더 깊은 우울에 빠지게 했다. ‘좋은사람으로 비치는 외적인 내 모습과 당시 내가 믿고 있던 나의 나쁜모습 사이의 엄청난 격차만 절감할 뿐이었다.

 

116

누군가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소멸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이에게는 생명을 주는 일이다. 그 친구의 행동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이 발을 씻어 준다는 성경의 이야기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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