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 관하여 -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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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중지추_囊中之錐라는 말이 떠오른다. 저자 강남순 교수는 감신대 초빙교수를 거쳐 2006년부터 미국의 신학교에서 교수로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에서 점점 더 유명해지는 것 같다. 2006년 우리나라의 감신대에서 억지스런 이유를 내세워 교수 임용이 되지 않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일이 화제가 되었다.

남편 교수 이유로 부인 재임용 탈락은 부당차별’(프레시안 2005.03.07.)

감신대가 버린 강남순, 미국 대학이 모셔간다’(뉴스앤조이 2006.10.18.)

3년간 감신대와 부당해고를 문제삼아 싸웠지만 감신대의 실체를 드러내 보인 것으로 만족하고 미국 신학교에 전임교수로 가면서 소모적인 논쟁을 그치기로 했다. 저자의 학문이 깊어진 면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 안타까운 사건들이 많아서 기고나 칼럼으로 점점 이분의 목소리가 많이 들리는 것 같다. 집필도 꾸준히 하신다. 이 책 <배움에 관하여> 뿐만 아니라 <용서에 대하여>, <정의를 위하여>3종 세트고 그 외에도 페미니즘, 젠더, 종교 등 다양한 주제로 책을 내시는데 한국에 있지 않지만 한국 사회에 대한 정확하고 통찰력 있는 지적이 돋보인다. 방학마다 한국에 오시는 것 같은데 이번에도 12월 중순부터 강연이 있다고 어떤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글을 봤다. 이렇게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알려지는 주머니 속의 송곳을 뜻하는 말이 떠올랐다.

 

비판적 성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 사회는 학교 교육을 받을수록 사고력이 깊어지는 게 아니라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지는 상황이다. 요즘 학생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공교육, 사교육을 받고 있는데 그 엄청나게 많은 시간동안 하는 공부가 진정한 배움과 관계가 있는지 의문이다. 공부의 내용이 그러할 뿐 아니라 내신관리라는 명목으로 학교제도나 교사에 순응적인 태도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 이것도 갑갑한 상황이다.

 

다른 책이나 강연을 통해서 이분을 좀 더 만나고 싶다. 이 책 한권으로 비판적 성찰이 일상화되기는 어려우니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 읽고 들어보려고 한다.

98

제도적 구조 속에서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다양한 전통들이 어떻게 우리 자신의 교육철학을 배반하고 있는지에 대한 그 지독한 딜레마가 내 마음을 괴롭혔다. 막강한 제도와 전통에 대한 한두 개별인들의 비판적 문제 제기는 끈질긴 설득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설득 과정이 반드시 성공을 가져다주면서 변혁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 제도적 삶의 의미성과 무의미성의 경계에서, 의지와 무력감의 경계에서, 나는 뒤척이며 씨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랴.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하나일 뿐이다. '사소한 것'이 전혀 사소하지 않다는 것, 배재, 차별, 불의, 불공평에 대한 예민성을 지니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쓰고 말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하는 실천이고 운동이며,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일 뿐이다.

 

110

자살은 언제나 '이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걸일까'라는 의미 물음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그러한 의미 물음은 이 삶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의미 물음을 하는 인간이 충분히 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했을 때, 그리고 이 삶의 부조리, 절망감, 지독한 고독을 넘어설 기쁨이나 행복감을 전혀 느끼지 못할 깨 이 살아감은 더이상 견디기 어려운 짐으로 다가오고, 그 견디지 어려운 짐을 자살로서 내려놓고 싶어한다. 그래서 인간의 삶이란 다른 말로 하면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는 것, 끌어안을 수 없는 것을 끌어안는 것, 희망할 수 없는 것을 희망하는 것인지 모른다.

 

126

한 사람이 씨름하고 있는 물음들, 타자에게 건네는 질문들을 통해서 나는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내면세계의 내음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씨름하고 있는 물음들, 자신이나 이 세계에 던지는 질문들이 그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새로운 변화는 ''을 가져오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물음'을 묻는 이들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것, 그래서 배운다는 것은 '해답'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좋은 물음 묻기'를 배우는 것이라는 점,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며 늘 강조하는 것이다.

 

137

''는 이미 만들어진 '고정된 존재 fixed being'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하는 '형성 중의 존재 becoming being'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정원'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가꾸고 키우는 작업을 끈기있게 하겠다는 각오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은, 모든 여타의 사적, 공적 관계망 속에서 소중한 밑거름이 된다고 나는 본다.

 

170

그 누구도 지금의 모습으로 절대화되어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비결정성'이 인간이 지닌 가능성이며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특히 데리다 수업을 할 때마다 절감한다.

 

233

예수는 인간 섹슈얼리티의 다양한 양태에 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무조건적 환대, 연민, 사랑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나와 다른 타자를 향한 혐오를 단호히 넘어서야 할 것이다. ...... 정작 예수는 혐오가 아닌 포용과 사랑을 가르쳤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282

소위 인문학적 소양이란 치열한 ''로부터 출발한다. 왜를 묻는다는 것은 비판적 사유와 분석을 필요로 한다. 현대 인문학의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질문은 해답보다 심오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문학적 사유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간결함과 명쾌함'이 아닌 '불확실성과 모호성'이다. 인문학적 사유는 이전의 익숙한 이해 세계를 뒤흔드는 내면적 불편함을 경험하게 한다.

 

290

많은 이들의 삶의 해답을 원한다. 그런데 '절대적 해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해답은 부정적이고 잠정적이며 특정한 정황 속에서만 작동될 뿐이다. 그래서 삶이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잠정적 답을 모샙하는 '여정'인 것이다. 어떤 종류의 해답을 찾고자 하든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 삶의 한가운데에서 치열하게 씨름하며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질문들'과 만나는 것이다. 자신만의 질문이 없을 때, 이 유행의 물결에서 만나는 사상가, 이론들은 오히려 '무엇인가 얻었다'는 환상만을 심어줄 뿐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를 남기지 못한다. 자신만의 물음, 질문이 없는 이가 자신에게 의미가 되는 해답부터 찾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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