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인 큰 애가 보건 수업에서 '포경수술'에 대해 배웠다면서 들은 바를 전해주었다.

"포경수술을 해야 하는 이유는, 고추에 때가 끼기 때문에 해주지 않으면 이 다음에 결혼해서 아기 낳을 때 건강하지 못한 아기를 낳는대. 그래서 꼭 해야 하는데 초6이나 중1에 하는 것이 좋대. 우씨, 나는 엄마가 포경수술비 15만원 들이는 게 아까워 내 포경수술을 안 해주어 이 다음에 내 자손은 멸종하고 말거야."

아이의 투정을 듣고 놀랐다. 지난 해인가 성교육 강사 구성애씨가 우리 도시의 모 할인점에서 성교육 강의를 할 때 남자아이들 포경수술 할 필요 없음을 조목조목 설명하기에 안도했다. '이제 드디어 우리나라의 남자 아이들도 포경수술로부터는 확실히 해방되는구나' 생각했는데 일선학교에서는 아직도 포경수술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나 보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아직은 '포경수술 안 해도 된다'는 정보보다 비뇨기과 의사들에 의해 '하면 깨끗하고 좋다'는 정보가 더 많은 것 같다. 때문에 나는 비뇨기과 의사들에게 불만이 많다. 비뇨기과 의사들은 누구보다 확실히 알 것이다. 포경수술 할 필요가 없음을 말이다. 

언젠가 TV에서도 유명한 비뇨기과 의사가 나왔는데 아나운서가 포경수술에 대해 물으니, "아, 그건, 선택 사항입니다.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됩니다"라고 한다. 나는 그 대답을 들으면서 심히 안타까웠다. 다른 의사도 아니고 비뇨기과 의사라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아, 좋은 질문입니다. 아직도 포경수술을 꼭 해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데 그건 '왜곡된 정보'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98%)은 포경수술 안 해도 됩니다. 할 필요 없습니다. 의학적으로 꼭 해야 될 '진성포경'인 경우만 하면 됩니다."(진성포경: 포피가 뒤집어지지 않아 귀두를 노출할 수 없는 상태, 벗겨지지 않는 포피)

라고 했어야 정답 아닌가 말이다.

여담이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에서 포경수술(할례의식)을 찬성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 정도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게 참을 수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찬성하였다. 요즘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정은 어떤지 몰라도 만델라 대통령의 어린 시절엔 성인식을 치르면서 포경수술을 하였다고 한다. 마취도 없이…. 

만델라 대통령은 그 과정이 굉장히 아팠지만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고, 거뜬히 참아냈고, 당당하게 '사나이'가 되었다며 자부심이 강했다. 역으로 말하자면 포경수술은 만델라 대통령의 어린 시절처럼, 자연환경의 지배를 많이 받으며 어렵게 살던 시절에 자연으로부터 강인하게 살아남기 위한 (종교적) 심신수련의 일환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즉, 아파트에서 포시랍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현재 우리네 아이들에게 시킬 것이 아닌 것이다. 아니, 아님을 넘어 가혹하고 생생한 '폭력'이고 '인권 유린'이다.

나는 주변에 남자 아이를 둔 부모를 보면 한번쯤은 포경수술 할 필요 없는 이유에 대해 성교육 책에서 본 대로 설명하는데 다들 반응이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아마 몇 번의 내 기사를 본 분들도 어쩌면 그러지 않으셨을까. 해서 오늘은 확실한 증명서 한 장을 붙인다.(웃음)

 

 

 

[필독] 엄마가 알아야 하는 잘 못된 포경수술 상식 3가지
(출처: 구성애의 푸른 아우성)


첫째, 포경수술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렇지 않다. 세계 절대 다수의 남성들은 포경수술을 하지 않는다. 세계 포경수술의 대부분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종교적 이유로 행하여지며 이슬람교를 제외한 세계 포경수술 비율은 약 5%, 이슬람교를 포함하더라도 약 20% 정도이다. 

둘째, 포경수술은 선진국에서 많이 행해진다?

지금까지 대대적인 의학적 포경수술은 대부분 미국에서 행해진다고 알려졌으나 미국에서도 포경수술이 현저히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한때 미국의 영향으로 포경수술이 유행했던 캐나다, 영국, 호주 등의 영어문화권에서도 최근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포경수술이 성행인 나라는 필리핀과 우리나라다. 

셋째, 포경수술은 12살 전후에 해주는 것이 좋다?

이것은 몇몇 비뇨기과 의사들의 의견으로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어 왔던 것. 즉, 세계적인 추세나 미국의 경우에도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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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 2009-12-23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구성애 포경수술 절대로 하지 마라 뉴버전 동영상 4분짜리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19039946&q=%C6%F7%B0%E6%BC%F6%BC%FA ;[새창에서 열기]



시사매거진 2580 남성수술의 실체 동영상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14&aid=0000058874& ;[새창에서 열기]


클릭하세요
 

한국방송 드라마 <미우나 고우나>가 종영을 며칠 앞두고 있다. 며칠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길게(?) 중독될 일 없기에 요즘 계속 보고 있다. 무엇보다 열심히 챙겨보는 이유는 다름 아닌 수아 할머니 최여사(김영옥분)가 언제 며느리(김해숙분)에게 ‘사과’하나 궁금해서이다.

내가 며느리라서, 가재는 게 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 드라마에 나오는 시어머니는 정말 보는 내 가슴마저 답답하게 한다. 시어머니를 대하는 오동지(김해숙분)를 보면 항상 참고 쩔쩔 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시어머니 앞에서는 할 말도 못하고 그저 예예하다가 정도가 심하면 한마디 대거리를 해보지만 본전 찾기는 언감생심이다.

어제는 보니, 온가족이 소파에 모여 앉아 얘기를 하는 장면인데 동지는 그냥 서 있었다. 동지가 그렇게 서 있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불편하지 않은지 유쾌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바퀴의자(휠체어)에 앉은 남편을 보좌한다는 명분 때문이라면 아들 백호가 해도 충분 할 것이다. 그렇거늘, 그냥 서있는 동지를 보니 딱했고 그 집에서 그녀의 위치가 그러함을 각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이드라마를 보면서 이 드라마 작가가 참 궁금했다.  작가는 왜 저런 시 어머니상을 그려주는 것일까.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아직도 며느리를 저런 식으로 대하는 시어머니들이 많기에 그냥 현실을 반영해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수아 할머니가 보여주는 며느리에 대한 인식이 타당하다 생각하기에 그렇게 그리는 것일까.

다른 사람에게는 다 잘하면서 유독 며느리만 마주치면 그 ‘파리한’ 표정이라니. 당신 아들이 좋아서 난리인데 시어머니인 자신이 왜 그리 미워하는지. 아들에게 못한다면 모를까. 보아하니 아들에게도 지극정성인데 매순간 꼬투리 못 잡아 안달인 표정이었다.

만약 현실에서도 아직 그런 시어머니가 있다면 정말 그런 시어머니를 둔 부부의 앞날이 걱정된다. 드라마는 드라마이니 결국은 갈등이 해소되고 행복한 결말을 맺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할머니 최여사가 동지에게 하는 행동은 며느리를 대하는 게 아니라 옛날 종을 부리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가만 보면 며느리 동지에겐 인격권이라는 게 전혀 없다. 그럼에도 식구들 누구도 항의하지 않는다. 할머니가 좀 유난하지만 다들 할머니니까 이해하는 분위기다. 

동지의 아들 백호마저도 남자라서 그런지 엄마가 당하는 심정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아마 며느리 동지의 마음은 ‘며느리’ 시청자들만 이해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이야 말로 드라마는 끝나도 문제는 남는다. 

드라마가 현실을 선도해야 될 의무는 없지만 가능하다면 바람직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도 드라마가 가진 존재의미가 아닐까. 드라마 다 끝나서 고부간 갈등 해소하지 말고 진작에 바람직한 고부관계를 좀 보여주고 끝나게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인다.

드라마야 끝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쟁쟁한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이니 만큼 이 드라마가 준 정서적 느낌은 시청자들의 무의식 속에 오래 각인돼 있을 것이다. 좋은 의미들이야 문제가 없지만 이드라마의 고부관계는 시대에 맞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기에 뒤끝이 개운하지 않다. 

하여간, 이제 와서 뭐라 한들 어쩔 수 없지만, 그저 한편의 드라마일 뿐이지만, 그래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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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봄이면 꼭 찾아먹는 것 중의 하나가 쑥떡이다. 

재래시장을 한 바퀴 휘돌다 보면 쑥떡 파는 아주머니를 만날 수가 있는데 봄엔 유독 그 쑥떡이 당겨 사먹게 된다. "제철음식이 제일"이라는 말에 견주지 않더라도 봄에는 왠지 쑥떡을 먹고 봄을 지내야 내 몸 어딘가에 다가올 여름을 대비할 면역이 생기는 듯 하다. 

 

그런데 이 쑥떡을 충청도에서는 쑥떡에다 '개'자를 넣어 '쑥개떡'이라 부르고, 모양도 직사각형이 아닌 호떡 모양으로 둥글게 빚는 것을 보았다. 몇년 전 친정인 충청도로 나들이를 다녀온 친구의 집엘 놀러갔다가 이 쑥개떡을 먹게 되었다. 

처음엔 쑥개떡을 준대도 그 중간의 글자 때문에 지래 맛없겠거니 생각하고 관심 없어했는데 자꾸 권하는 바람에 먹었다가 '띠잉, 이기 뭐꼬?' 한 입에 반했다. 쑥떡은 뭐니뭐니 해도 고소한 콩고물을 진하게 묻혀먹는 것이 제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콩고물 없이 참기름만 살짝 발라먹어도 맛있음을 그 충청도 '쑥개떡'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되었다.

해서 '쑥개떡'을 안 그 이후부터는 봄에 그 친구를 만나게 되면 친구 어머니의 안부보다 올해는 쑥개떡을 하셨는지 어쨌는지를 더 궁금해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올해는 쑥개떡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아무튼 한 봉지씩 사먹던 쑥떡을 올해는 직접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어머니께서 쑥을 보내주었는데 쑥국을 끓여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라 쑥국 두어번 끓여먹고 남는 것은 삶아서 쌀 한 되와 함께 방앗간에 가져다주니 양이 너무 적어서 못해주겠다고 하였다.

 

"다른 집 거랑 합해서 해주면 안돼요?"

"그건 안 돼요. 그러지 말고 오늘 가져온 것만큼 만 더 뜯어 와요.  쌀도 한 되 더 가져오고. 요새 쑥 천지잖아요."

 

'쑥 천지?'

아닌 게 아니라, 인근 밭둑길에 나가보니 사방이 쑥이었다. 햇볕에 노출된 쑥은 이미 훌쩍 자라 시어보였으나 그늘이나 마른잡초 덤불 속에서 자라고 있는 쑥들은 연했다. 손으로 몇 줌 뜯어보니 손에 쑥물이 배여 안 되겠기에 집에 와서 칼과 봉지를 들고 다시 나가 확실하게 뜯었다.   

아주 '최대한 많이 뜯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뜯다가 왔는데 삶으니 '홀쪽'했다. 그래도 방앗간 아저씨가 필요하단 양 만큼은 될 것 같았다. 해서 이젠 쑥떡 해먹을 일만 남았다. 삶은 쑥은 일단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내가 가고 싶은 날 방앗간에 가져가면 된다.

'냉동실' 하니까 생각나는 데 이렇게 봄에 쑥을 뜯어서 삶아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낙엽 지는 가을에 또 한 차례 해먹으면 그게 또 그렇게 별미일 수가 없다나. 아무튼, 이 봄이 가기 전에 이번에 뜯은 쑥으로 쑥떡을 해서, 늘 먹던 식으로 콩고물을 묻혀서도 먹고, 그냥 고물 없이 '쑥개떡' 식으로도 먹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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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4-2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군침 돌아요.
얼마전 문우가 쑥설기를 해와서 나눠먹었는데 참 맛나더군요.
제가 백설기를 좋아하니까 더 그랬던지 몰라도요..
색도 향도 좋지요. 쑥개떡 다 되면 사진 보여주세요^^

폭설 2008-04-29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되면 보여 드릴께요.^^ 우좌간 이봄에 쑥떡 많이 사드셔요.^^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유채꽃 하면 제주도고, 유채꽃을 풍성하게 원 없이 보려면 제주도를 가야 하지 않았나 싶은데. 요샌 전국 어디서나 유채꽃을 볼 수 있다. 그나마 이제 제주도가 우위를 지키고 있는 것은 시간적으로 좀 일찍 유채꽃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뿐 아닐까 싶다.

내가 사는 동네에도 언제부터인가 봄이면 유채꽃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전의 유채꽃은 동네 공터 채전 밭이나, 길가에서 조금씩 보이곤 하던 수많은 봄 꽃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해마다 봄이면 우리 동네에서도 유채꽃은 꽃 중의 꽃으로 한차례 떠들썩하니 물결친다.

 

 


  
유채꽃 밭
 
유채

한 대학(영남대)은 지역민들을 위하여 학교 주변의 아주 넓은 빈 땅에 유채꽃밭을 만들었는데 얼마나 넓은지 해마다 장관을 이룬다. 때문에 인근 지역민인 우리들은 그 밭에서 유채꽃물결이 출렁이면 다들 한 번씩 들러 사진 찍고, 꽃 사이로 난 길을 가로지른 후에라야 제대로 된 상춘을 한 기분에 빠져든다.

지난 주말 우리가족도 예외 없이 그 유채 꽃밭을 찾았다. 바람이 좀 불어서인지 벌들이 왱왱거리지 않아 아주 편안하게 유채꽃밭을 거닐었다. 자세히 보니 이미 진 꽃자리마다 가는 유채씨앗 주머니가 생겨나 있었고 아직 열매는 극히 작아 보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주머니에서 유채씨앗은 점점 커지고 단단해지나 보았다. 제주도에서는 이 유채 씨로 기름을 짜먹는다고 하던데 나는 유채기름을 한 번도 본적이 없어 그 맛이 어떤지 궁금하다. 

 

 


  
사진으로 보기보다 훨씬 넓어...
 
유채꽃

인터넷에서 보니 유채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기름을 짜먹을 수 있는 것과 냄새가 나고 맛이 없어 식용기름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니 더더욱 그 냄새들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이 유채는 꽃만 명물이 아니라 가축사료나 유기농비료, 화장품, 그리고 자동차 기름으로도 사용된다고 하니 놀랍다. 

그렇다면 내가 본 우리 동네 유채꽃밭 유채의 종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가만 생각하니, 항상 유채꽃이 만장같이 출렁일 때, 가서 사진 찍고 한차례 놀다온 다음부터는 유채꽃밭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사람들이 더 이상 오지 않을 때 유채꽃은 어떤 기분일까.

 

 


  
청일점으로 서있는 것도 해 볼만...
 
유채꽃

우리 동네 유채꽃도 사람들이 눈요기를 다한 다음 또 다른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사료도, 화장품도, 자동차 기름도 못되고 그냥 그대로 갈아엎어(?)져 버리는 것일까. 갑자기 그게 궁금해졌다. 그래서 올해는 꽃이 지고 난 다음의 유채를 보러 필히 한번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의 저 가득 찬 충만으로 볼 때는 언제까지 노랗게 ‘젊음’을 유지할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조금 있으면 저 꽃이 다 지고 초록의 씨앗주머니만 남게 되겠지. 상상이 안 간다. 그러나 질 날은 반드시 오겠고 올해는 그 지는 자리를 한번 보고 싶다. 꼭 보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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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9일은 4·19혁명일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결혼기념일이었다. 특히나 올해 사일구는 그 결혼이 만 10년 되는 날이었다. 10년 전 4월, 4월에 결혼하기로 하고서 네 번의 일요일 중 거침없이 19일을 택한 것은 그날이 '4.19혁명일'이었기 때문이었다. 

30여년 전 이날엔 민주주의를 위해 젊은 넋들이 꽃 같은 자기 목숨을 버리기 까지 했는데, 겨우 두 사람의 마음 합치는 것을 힘겨워 한다면 '말이 안 되지'하며 사일구의 역사성에 기대 보기로 했다. 지나고 보니 그렇게 의미를 두어서 그런지 몰라도 확실히 '4·19 효과'는 있는(?) 것 같다. 궁금하면 내년 '사일구'에 결혼들 해보시라. 

하여간 그때나 지금이나 결혼기념일이 '사일구'인 것은 생각만 해도 그냥 기분이 좋다. 소소하게는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릴 일이 없어서 좋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 중에는 4·19가 무슨 날인지조차 모르는 학생들도 많다는데 적어도 내 아이들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이다.

아무튼, 남들의 혼자 살줄 알았다는 직감을 부수고 결혼을 했고 무탈하게 10년씩이나 살게 되어 이래저래 감사하고 감회롭다. 5,6년도 아니고 8,9년도 아닌 10년이라는 햇수에 느낌이 더 새롭다. 산이 있다면 일단 큰 산 하나는 넘은 기분이다. 물론 앞으로도 나름 큰 산들이 버티고 있겠지만 일단, 아이들을 웬만큼 키웠다는 것이 안심되고 수지맞는 장사를 한 것 같다.

그나저나, 정말이지 지나고 보니 세월이 유수 같다는 옛사람 말이 실감난다. 결혼이 5, 6년으로 흘러가고 있을 때는 언제 10년이 되나 했는데 이렇게 결혼 10년을 맞고 보니 지난 3650일이 한 10초로 축약되어서 느껴진다. 10초가 무에냐? 찰나처럼 느껴진다. 혹은 마치 그런 과거가 없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친정엄마는 여든이 되었을 때 말하기를, 지난 세월이 '한순간' 같다고 하였었다. '엊그제'같다고도 하였었다. 결혼 20, 30년 된 사람들에게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정말이지 엄마가 느꼈던 그 '한순간'을 나도 느꼈다.

하여간, 앞으로 10년 또한 화살처럼 빠르게 흐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빠르게 흐르는 만큼 그 순간들이 지루하지도 않을 것 같다. 애들도 크고 어느 정도 자유로우니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지난 10년을 살면서 나름의 지혜가 생겼을 것이기에 앞으로 10년은 이 지혜의 양식을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헐어 쓰면 될 테니 유비무환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기념일에 발견한 새로운 취미

그런데, 결혼 10년 되던 지난 사일구에는 웬일인지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갔다. 결혼 자축은 저녁을 밖에서 먹는 것으로 일치감치 합의 봤는데 그래서 그랬나, 시간이 너무 안 갔다. 오전 내내 집에서 뭉개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인근 대학가 농구장에 가서 규칙무시하고 무조건 넣기만 하면 되는 농구를 하였다. 

농구를 하다가 좀 쉬면서 보니 스쿼시 벽이 눈에 띄었다. 눈에 띄기만 한 게 아니라 그 무심한 벽에 순간, 느낌이 확 왔다. 테니스는 같이 해야 되는 것이 부담이라 당기지 않았는데 스쿼시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갑자기 매력으로 다가왔다.

뭔가 늘 한 가지에 미칠 것을 발견해야 사는 맛이 나는데, '영화' 약발이 떨어져가 뭔가 새로운 것이 필요했으나 찾지 못하였는데, 스쿼시 벽을 보자 '심봤다'는 기분이었다. 당장 테니스채를 사러가자 하니 남편과 아이들은 '배드민턴이나 재대로 치고 그 다음에 스쿼시를 하든지'하였다.

3:1이라 그것도 좋은 생각이라 하며 한발 물러섰으나 내 마음을 이미 스쿼시가 점령하고 있었다. 스쿼시가 점령하고 있었기에 우겨서 스쿼시가 더 폼 난다 하기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어 그냥 배드민턴에 한 표 더 주는 척했다.

아무튼, 농구를 하고 '스쿼시'라는 올해의 '산삼'을 발견하고 집에 와서 조금 쉰 후 치즈오븐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다. 둘째가 다 못 먹겠다고 해서 얼씨구나 반절을 대신 먹어주고, 가누기 힘든 몸으로 밖으로 나오니, 열 번째 맞는 결혼기념일의 하루가 서쪽 하늘을 물들이며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부록: 결혼생활의 지혜

1. 부부는 항상 함께 해야 된다는 생각을 버리자. 따로 놀고 싶을 땐 따로 놀면서, 서로를 '응원'이 안 되면 '묵인'해 주자.

2. 따로 놀다보면 같이 놀 일도 생기고, 따로 놀면서 발견한 재미들은 어느 순간부터 함께 즐기게 된다.

3. 나이 차이가 나더라도 말은 같이 놓든가, 같이 높이든가, 좌우지간 높이를 '통일'하자.

4. 상대에게 자기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강요하지 말자. 도리? 도리 다 하려다 중간에 나가  떨어진다. 항시 명심하기를 우리가 잘 살아주는 것이 효도의 처음이라 생각하고 부모님에게는 필요이상의 기대를 주지말자. 자식만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되는 게 아니라 부모도 자식으로부터 (정신적으로)독립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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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8-04-24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설님, 결혼 1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어머님의 "한 순간"이라는 말씀이 마음에 짜~안합니다.
앞으로 결혼 20주년, 30주년....금혼식....
세월이 갈수록 더더욱 많이 감사하고 행복하세요!^^

폭설 2008-04-27 18:1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책 대박나세요~~~~

hnine 2008-04-25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 10주년이라서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축하드리고, 마지막 부록, 전부 공감입니다 ^^

폭설 2008-04-27 18:19   좋아요 0 | URL
님의 결혼 10주년도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10년 또한 행복하게
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