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사춘기 - 명진 스님의 수행이야기
명진 스님 지음 / 이솔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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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무서운 세상. 민주주의의 시계가 계속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이 시절에, 그나마 명진 스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인가. 불의를 행하는 위정자에겐 거침없이 죽비를 내리치고, 하루아침에 공권력에 의해 삶의 터전과 핏줄을 잃고, 또, 감옥 보내고 우는 억울한 사람들을 찾아서는 스님도 그들과 함께 울었다.

눈물 닦는 사진과 동영상을 유독 많이 찍힌 스님을 보노라면 혹자는 속세를 떠난 구도자가 왜 저리 눈물이 많은가 오해 할 수도 있겠으나 알고 보면 스님의 눈물은 다 지극한 사랑이자 위로임에랴. 이 눈물 많은 스님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한권의 책을 세상에 내 놓았다.

<스님은 사춘기>(이솔). 덕분에 목적 없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삶속에서 잠시 쉼표를 찍고 스님이 던지는 삶의 의미, 존재에 대한 화두에 물음표하나 던지며 쉬어 갈수 있게 되었다. 스님은 어이하여 출가를 하였던가.

모든 스님, 신부, 수녀님들에겐 식상한 질문이겠으나 중생은 그것이 또 가장 궁금한 질문임에랴. 명진 스님은 6살 어린나이에 ‘죽음’이라는 화두를 만났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를 통해.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죽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죽음은 내가 삶을 투철하게 성찰하도록 했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너무도 이른 나이에 죽음과 맞닥뜨렸다. 내가 처음 마주친 죽음의 대상은 불행하게도 어머니였다.>-본문 11쪽

뿐인가. 스님에게 죽음은 어머니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서로 의지했던 동생이 해군에 입대한지 불과 몇 달 만에 군함 전복사고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연이어 쉰이라는 이른 나이에 아버지마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스물 언저리 푸른 청춘에 피붙이 모두 떠나고 세상엔 스님 혼자만 달랑 남게 되었다.

‘죽음’이라는 화두를, 예기치 않은 시기라면 하나만 던져도 암흑이거늘 스님은 젊은 날에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세 개 씩이나 받았다. 그러니까 익히 보이던 스님의 눈물은 수행의 미진함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중생의 아픔을 가슴으로 알기에 흐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구나. 흐르되 걸림은 없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은 허공이다? 스님의 변을 들어보자.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본래 허공과 같이 텅 비어서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다. 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 한 물건을 마음이라고 하지만 마음이라는 게 어디 실체가 있는가. 내 마음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슬픔이나 기쁨, 욕심이나 자비심 같은 모든 감정은 허공같이 텅 비어 있는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용이다....... 

냉철하게 자기 자신을 살펴서 내 마음이 허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 마음이 허공같이 텅 비어 공적한 것임을 알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들이 하나의 작용일 뿐 실체가 없는 것임을 투철하게 깨달으면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대 자유를 얻게 된다. 내 마음이 바로 허공인 그 자리는 능히 모든 것이 자유자재한 자리이다.>-본문 256쪽

노스님들은 명진 행자가 무서워~

스님의 걸음하면 법정스님의 빠르고 거침없는 걸음걸이가 생각나는데 명진 스님은 의외였다. 지난해 봉은사에서 뵌 스님의 걸음걸이는 평소 말씀이 거침없는 것에 비해 사뿐사뿐 한발 한발 새색시같이 내 딛으셨다. 그것이 참 인상적이어서 봉은사 신도인 친구에게 말했더니 절은 더 하다고 하였다.

“절은 또 얼마나 정성스럽게 하시는 줄 아냐? 천천히 한배, 두 배... 시종여일하게 하신단다.”
“그렇게 해서 언제 하루에 천배를 다하신다니?”
“한 꺼 번이 아닌 아침 점심 저녁 중간 중간 나누어서 하시는 거지.”

아무튼 스님의 걸음걸이와 절하는 모습으로 유추해 볼 때는 스님의 행자생활도 지극히 새색시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했는데 웬걸. 스님은 행자세계의 문제아였다.(웃음) 스님의 파란만장한 수행담은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다른 스님들은 스스로 점잖아서도 못하고 무서워서도 못하는 질문을 명진 스님은 노스님들에게 거침없이 해댔다. 해인사 백련암 행자시절엔 일본어 배우라는 성철 스님의 말에 교학보다는 참선에 관심이 많던 스님은 일본어를 배워야 할 이유를 납득 못하였기에, 그냥 말도 없이 내뺐다.

‘남쪽에는 성철, 북쪽에는 전강’하던 그 시절에 성철 스님 눈에 단번에 들어 행자자리 꿰찼으면 일본어 아니라 더 한 것도 배우려 노력했으련만 스님은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그 후로도 쭉 운수납자로 떠돌았다. 물론 가는 곳 마다 사건(?)도 일으켰다.

안동 봉정사에서의 일화 한 토막. 간염과 영양실조에 걸린 지인스님에게 소머리를 삶아 먹이려다 주지스님과 신도회장이 항의하자 스님 왈,

“그럼 스님 머리를 삶을 까요?”

주지스님과 신도회장이 아연실색했음은 물론이고 말리지도 못하였다. 결과는, 지인스님이 기력을 회복했다고.

그런가 하면 용맹정진기간에 졸음을 깨우기 위해 당번이 될 경우 보통 노스님이 졸면 모른척하는 게 관례하면 스님은 반대로 하였다. 젊은 스님이 졸면 모른 척 눈감아 주고 대신 노스님이 졸면 죽비가 부러지게 내리 쳤단다.

행자시절하면 보통 행자의 설움이 말도 못하게 큰 것으로 전해지는데 명진 스님의 경우는 행자인 명진 스님 보다 은사스님들이 더 힘들어 보였다.(^^) 아무튼 이 한권의 책에는 어느새 환갑이 된 지난 60년 스님의 인생이 시시콜콜 다 있다. 군부독재에 맞서고 불교개혁에 앞장섰던 것에서부터 스님을 짝사랑한 어느 여인의 이야기까지.

타협하지 않고 언제든 자유인으로 당당히 돌아서는 스님의 당당함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행자시절부터 쭈욱 견지하고 있던 초지일관의 한 단면이었다. 후후~ 우좌간 스님은 그 순수한 야성을 잃지 마시길.

<불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끝없는 ‘물음’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종교이다. 냉철한 이성으로 자신을 살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탐욕과 어리석음이 허망한 것임을 깨달아 무한한 자유와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본문 262쪽

정말 그런 것 같다. 불교는 끝없는 물음을 통해 스스로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종교라기보다 ‘사상’이다. ‘자유’에 이르게 하는 사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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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이 있는 시대극을 좋아하는지라 이런 고전물이 극장에 걸리면 일단 본다.
<제인에어>. 명작동화류로 봐서 줄거리만 기억하는데 영화를 보고나니 원작이 궁금해졌다.
해서 급 주문했는데 1,2권이다. 브론테 자매는 너무 소녀적이어서 그냥 그렇거니 했는데
심리묘사가 탁월하고 그 시대에 그렇게 똑 부러지게 여성의 자아정체감을 드러낸 소설을 쓴 게 놀랍다.

샬럿 브론테의 가족들이 다 일찍 줄줄이 죽고 샬럿또한 그시절로서는 대단한 만혼일
서른 여덟에 결혼했으나 임신+ 여러병의 발병으로 결혼 9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 시절(1800년대)엔 다들 영양실조, 폐렴등으로 일찍 간 사람들이 많았다지만
글쎄 브론테 자매가 한 10년씩만 더 살았더라면 몇 작품 더  남겼을 것을....그들이 쓰지 못한 미지의
볼수 없는 소설들이 궁금하다. ^^
 
영화는 일부러 보다 못생긴 배우를 제인으로 선택했다는데 그것이 오히려 또 통렬했다.
다만 작업용 말은 죄다 로체스터가  내뱉던데 그것이 좀 걸려서
책으로 확인해 봐야 겠다.(아직 책을 다 읽지 않았음) 로체스터보다 그를 향한 제인의 독백이 훨씬
많을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영화는 멋있는 것은 로체스터 혼자 다 해먹어 조금 김샜다.


우좌간, 섹쉬한 마차바퀴 굴러가고 두시간 내내 좋은 풍경보다가 극장문을 나오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

유시민이 졌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는 그동안 계속 승승장구 했다고 볼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날은 그도 한번 맞이 하는게 운명아닐는지. 부처님 말씀을 빌자면
'지금 좋다고 그것이 꼭 내일도 좋으란 법 없고 지금 나쁘다고 이 다음 마저 나쁘란 법 없다.' 
누가 뭐라든 밀린 잠이나 푹 주무시고 장고하시길. <국가란 무엇인가>책이나 사 봐야 겠다.

<시사인> 189호에  쌍용차 해고자들을 집단 심리상담한 꼭지에서 상담자인 정혜신씨가
인터뷰에서 후원계좌번호도 기사에 꼭 넣어달라하여 실렸던데, 나도 찍어 전해 본다.

농협: 301-0078-7959-41(쌍용차 해고자 후원)

그리고 주진우 기자 대박 맞으셨네. 대한민국 검찰을 이기다니. 크하하하~~~ 감축드립니다.^^
(알다시피 김경준 초등글씨의 메모는 '진짜'였고 그걸 공개한 주기자를 서울지검 검사 10명이 짜가 공개하였다며 6억원 손배소를 재기 했는데 '짜가' 아니라고 고법이 주기자의 손을 번쩍 .~~
진정 '기자의 도'를 걷고 있는 주진우 기자 만세..^^

 (아래는 펌글이다. )


유시민,노대통령 부담 벗고 은인 자중 연대모색하라.

대략 이념타령으로 놀고 있지만 본질은 지역주의다. 지역주의라고 말은 하지만 본질은 돈 주의다. 사실은 돈 하나 가지고 각 지역이 물고 뜯고 싸우는 거다. 까놓고 진실을 말하자는 거다. 뉘라서 부정할 것인가?

이번 보선의 의미는 첫째 영호남간의 지역주의가 강화되었다는 것, 둘째 비영남 지역에서 지역주의가 상당부분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등장은 영호남간의 첨예해진 지역주의를 약화시키자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명박에 의해 다시 영호남간의 지역대결이 첨예해졌고 유시민의 입지가 그만큼 좁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차피 수순대로 영남에서 한 번은 밀어봐야 했고, 이번에 밀어본 것은 잘한 거다. 총선 앞두고 응수타진 역할은 제대로 했다.

똥줄 탄 이명박이 PK 지키려고 김태호로 무리수 두는 바람에 수도권이 더욱 영남과 등을 돌리게 된 것이 이번에 유시민이 나서서 얻은 소득. 김태호 공천은 형님독식으로 가던 돈을 PK에게도 몇 푼 떼어준다는 암시.

이명박의 등장은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영남과 분리되었던 수도권이 다시 영남과 손을 잡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낙동강사업(4대강 좋아하네.)부터 형님예산에 동남권신공항 논쟁, 과학벨트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개는 영남독식으로 나타났다. 수도권은 뉴타운 헛물키고 이명박 당선시켜서 얻은 이익이 없다.

“대한민국의 모든 돈은 영남으로!”

이것이 이명박 정권의 본질이다. 이에 뉴타운 헛물 켠 수도권이 먼저 등을 돌리고 행정수도 시달린 충청과, 의료단지 뺏긴 강원이 잇달아 등을 돌려서 이제 영남은 고립되었고, 고립된 넘들은 원래 자기네들끼리 뭉치게 마련, 그 와중에 TK와 PK를 분열시켜 그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려 했던 유시민은 입지가 좁아진 것. 그러나 유시민 개인 입장에서는 이제 자연스럽게 민노당, 민주당과 연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홀가분해진 점도 있다. 그 점으로 위로를 삼아야겠고.

유시민은 당분간 정치 손 떼고 보폭 줄이면 총선, 대선 앞두고 손학규가 삽질해서 다시 몸값 올라갈 것. 손학규는 이인제처럼 너무 일찍 나무에 올라간 형세가 된 것. 그 나무 누가 흔들어도 꼭 흔든다. 유시민은 노무현 적자 대표성 등에 업고 홀로 참여당을 이끌어야 하는 부담이 없어졌으니, 이제 행보가 자유로운 거다. 적자, 장자보다는 차자가 더 큰 일을 하는게 역사의 법칙이기도 하고.

개인 의견으로는 당분간 야심을 숨기고 은인자중하며 민노당과 연대하거나, 먼거리에서 박지원과 손잡고 손학규를 견제하는게 맞을듯. 박지원이 유시민에게 민주당 들어오라고 하는 것은 진심. 손학규가 민주당 대표노릇을 잘 하면 괜찮지만 틀림없이 삽질할 거고. 그 삽질은 보나마나 공천에서 나타날 거고. 그렇다면 이번 보선으로 입지가 불리해진 사람은 박지원. 박지원도 대권 야심이 있다면 뭔가 수를 내야 하는 상황. 지금은 버려진 유시민을 주워가는 사람이 대박맞는 거.

김태호는 원래 이명박이 정운찬 다음으로 미는 대선후보라서 거물급이었고, 인물대결로 가니 동네 아저씨 이봉수로는 버거웠다. 손학규, 최문순도 인물에서 이긴 것이고. 장유-창원간 도로문제로 장유사람이 김태호를 찍었다는데 이명박이 김태호를 보냈다는 것은 역시 지역에 돈을 주겠다는 신호이니 돈 보고 찍은 거.

결론은 돈이다. 돈을 영남이 독식하니 김대중 대통령이 수도권을 업고 영남 대 비영남 구도로 전선을 만든 것.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영남일부와 호남을 이어서 지역주의를 완화시켰다. 거기에 행정수도로 충청까지 끌어들이자 역효과로 수도권 대 지방이라는 곤란한 대결구도가 생겨버렸다. 이에 수도권이 뉴타운 환상을 쫓아 영남에 붙어버린 것이 이명박 등장이다.

문제는 쪽수다. 호남, 충청, 강원, 제주 다 합쳐도 1천 3백만 영남인구를 당해낼 수 없다. 그러므로 대선을 바란다면 어떻게든 영남 일부를 빼와야 하는데, 그러자니 수도권 일부가 다시 영남과 손잡는 현상이 생겨난 것이 최근의 전개다. 그런데 이명박이 거듭된 삽질로 ‘대한민국의 모든 돈은 영남으로’ 노선을 추구하는 바람에 수도권이 다시 영남과 손을 끊어 영남고립화로 가게 된 것이다.

이정도면 유시민이 영남에서 할만큼은 했고,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TK, PK 분리전략은 당분간 유보하고, 영남고립화 전략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대세다. 문제는 손학규다. 본질은 공천이다. 정동영이 열린우리당 말아먹은 것도 공천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다음 총선은 손학규가 공천한다는 건데, 이 인간은 지금까지 보여준 대로면 희망이 없다.

수준이 딱 정동영급이다. 결국 손학규가 총선에서 공천을 잘하느냐 잘못하느냐에 대사가 달려있으며 손학규가 공천을 잘 하면 짱먹는 거고, 잘못하면 새 되는 거다. 그런데 보통은 나무에 기어올라가더니 나무 흔들려서 새 된다.

공천만 잘 한다면 누가 되어도 상관없다. 공천만 합리적으로 된다면 손학규 대통령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이해찬, 김정길, 문재인, 문성근, 한명숙, 명계남, 이재정, 천호선 등 참여정부에서 상당히 힘을 썻던 장관급 인재 30명 이상이 지금 야인이 되어 울고 있는데, 이들을 배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민주당과 어떻게 딜을 할 것이냐다. 어떻게든 구심점을 만들어서 협상을 해야 하는 것이며, 막연한 통합론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말은 통합이라고 하지만 들어보면 ‘너만 빼고!’다. 인물은 빼고 표만 가져가자는 통합론이다.

손학규가 이해찬더러 민주당 들어와고 간청을 하지만 손학규어 번역기를 돌려보면 ‘이해찬을 말려죽이려 해도 들어와야 죽이지!’ 이렇게 나온다.

까놓고 진실을 말하자는 거다. 정치의 대강은 지역주의고, 지역주의 본질은 돈이다. 정치판 내부적으로는 공천권이다. 입으로는 통합이니 분열이니 말하지만 본질은 공천권이다. 공천보장을 전제로 협상을 하든 전투를 하든 지지든 볶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 거짓말을 한다. 막연히 통합을 주장할 뿐, 본질인 공천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 한다. 왜? 거짓말장이니까 그렇지. '유시민 들어와라' 이런 말은 곧잘 해도 '총선에서 유시민계 의석 20석 보장' 이런 말은 절대 안 한다.

남은 문제는 충북 옥천 출신의 육영수 고리로 충청에 연고가 있다는 박근혜다. 행정수도 등에서 박근혜가 충청지키기를 잘 했기 때문에, 고립된 영남은 다음 대선에서 어떻게든 충청과 손잡으려고 할 것인데, 과연 이해찬 없는 판에 안희정이 혼자서 충청을 지킬 수 있느냐다. 손학규가 달려들어서 분탕질 쳐버리면 안희정 물먹어서 박근혜 한테 충청을 헌납하는 상황이 된다. 결론적으로 이제부터는 손학규가 공천뻘짓 안 하도록 견제와 감시를 잘 해야 한다는 거다.

정통성, 명분 벗어던지고 홀가분해졌으니 이제 야심 숨기고 자유롭게 연대를 모색하는게 맞다. 변화의 흐름에 맞추어 유연하게 대응한다는 것이 우리의 장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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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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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영화에 대한 기억이 좋아서 읽게 되었는데  

영화는 책을 충실하게 따랐고나. 

(책의, 100여년 전 풍경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탁월하게 재현해 낸 

영화의 미술, 의상 담당자들의 노고에 다시금 경의를~~~ )

 

영화가 있었기에 책을 읽는 내내 영상이 떠올라 읽고 봄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그런 충만을 느꼈다. 

 

특히,  

영화에서는 마지막 한 장면일 뿐이었지만(영화의 마지막도 물론 뇌리에 오래 남는...) 

책의 마지막 34장은 아처 뉴랜드에 대한 심리묘사가 탁월하고도 탁월하였다.

.... 그 저린 마음의 허허로움은 내 모세혈관에도 전이되어 꺼이꺼이...... 

10여장이 넘도록 세세히, 담담히 아처의 마음을 설명해 주어서  

그나마 이 책과 이별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가 놓친것이 있다면 인생의 꽃이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얻기 어렵고 가망없는 것이어서,  

복권에서 1등을 뽑지 못한 것처럼 놓쳤다고 절망스럽지도 않았다.  

....... 

그녀는 그가 놓친 것 전부를 한데 뭉뚱그린 환상이 되었다. 희미하고 미약했으나,  

그 환상 때문에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어 본 적이 없었다. ... 

결혼에서의 일탈은 추악한 욕정과의 투쟁이 될 뿐이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러이 여기는 한편으로 슬퍼했다.  

어쨌거나 흘러간 옛날이 좋았다." 

 

영화에서 '메이'가 위노나 인것이 별로 였는데 책을 보니 저자와 닮아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키 차이가 너무 나서  영화 찍는 내내 힘들었다던데 

보는 나도 힘들었음^^ 올렌스 부인도 미쉘 파이퍼가 아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물론  

연기는 잘 하였음) 

원작이 워낙 좋으니 최근의 <제인 에어>처럼  내 평생에 이 책이 한번더  영화로 되는것을

보고싶다. ^^  생각만 해도 체온 급상승~ 

 

이디스 워튼, 저자의 이름을 나의 해마에 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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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가을 사진이다. 초록이 형형해서 봄이라해도 속아넘어 가지 않을까 싶은데....ㅎㅎ
세상에 수많은 좋은 집들이 있지만 난 저 토굴이 가장 멋있었다.
수행자가 살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느낌이 든다. 함께한 지인과 저 토굴을 한참 올려다 보면서
한동에 한분씩 사시는 걸까, 아니면 두분씩? 하며 궁금해 했다.





(성모상 느낌의  부처님 상이 생각보다 작았다. 꽃공양은 공양후 되 가져가도 된다고 함이 인상적이었다.)

스님이 적멸하시고 벌써 1년이 되었고나. 스님 돌아간 그 날짜에 이웃나라는 지진해일로
초토화 되고 ..... 세상은 정말이지 자꾸만 뭔가 큰 것들이 일어날듯한 기세이다.
며칠전 현기영의 <누란>을 정독해야 할 일이 있어 찬찬히 읽다가 '원자력'얘기에 뜨끔했다.

예전 읽었을때는 기억도 나지 않는 그냥 스치는 문장들 중의 한부분일  뿐이었는데
작금의 시절이 이렇고 보니 소설가의 혜안이 묵시록처럼, 계시록처럼 다가왔다.
정말이지 이런식으로 천재는 천재대로  인재는 인재대로 끊임없이 사고를 친다면
인류의 인구 3분의 1이 줄어드는 날이 올수도 있을 것이다.

그쯤돼야 인류는 겨우 정신을 차릴수도....
지진해일이야 참혹해도 지나고 나면 그걸로 끝이고 힘을 합쳐 재건을 하면 되는 거지만.
방사능이 왠말이냐.
피폭의 아픔을 가진 나라가 자의에 의해 또 피폭의 위기를 맞았으니
그 심정이 어떨까.

일본은 그래도 우리는 안전합네 어쩌네, 하는 전문가연하는 사람들이
떠드는 것을 보면 숨이 막힌다. '원전 수거물 센터' 어쩌고 하던 핵쓰레기장 광고도
새삼 끔찍하다.

원시로 돌아갈수야 없지만 일본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하여 우리도 독일처럼 원자력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방사능에 화들짝 놀라, 그러면 이런 세상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생각하노라니 그래도 인간성을 회복하고 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자연'과 '예술'이
최고의 위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붓다의 말씀도.

본래무일물. 생성 소멸, 생성 소멸.... 그 무한 반복이여.

다만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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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리의 만돌린
루이스 드 베르니에 지음, 임경아 옮김 / 루비박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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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서너번 보기가 쉽지 않은데  <코렐리의 만돌린>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 케팔로니아 섬의 자연이 한목했던것 같다. 

소설은 어떨까.......무척 궁금했는데 소설 역시 따뜻하다.  유머가 있고 잔잔하다. 

그리고 접경지역을 사는 사람들의 신산이, 

흔들리는 땅(지진)위에서도 뿌리내리고 살아야 하는 이들의 삶의 역사가 눈물겹다.  

 

하여 의사선생이 케팔로니아의 역사를 쓰려한다는 소설의 설정이 참으로 지당하게 

다가온다. 이 땅의 역사를 어떻게 쓸것인가. 의사는 종이를 구기고 또 구긴다. 

그런데 그 구김이 절망이 아니라  넘 웃긴다.ㅋㅋ 그속에는 낭만과 여유,그리고 그럴수 없이 써내겠다는 '돌팔의'의 야심이 있다.^^ 의사도 '짜가'로 하는데 역사가는 몬할소냐. 

짜가를 면하고 싶어도 그시대에 어디서 뭘 배우나. 독학한것만으로도 그동네 제일가는  

선생일세~~ 

 

아무튼, 영화와 소설, 거의 같은 분위기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영화를 다시보니 

한장면 한장면이 다 새롭다.  

펠라기아와 안토니오의 해후가 조금 다를뿐. ㅋㅋ  

영화가 펠라기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한 채 끝났다면 소설은 좀 코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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